경성 외곽의 극장들(도화관, 영보극장, 신부좌)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