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이순재, 김남일, 강민호, 전영선, 김기주, 진봉진, 김영인, 조용수, 유장현, 유영국, 이일웅, 조춘, 최융부, 최석, 이종만, 고설봉, 조학자, 이강조, 박동룡, 최삼, 한명환, 유종근, 라정옥, 지계순, 이영호, 최성규, 심상현, 김월성, 최형근, 이석구, 마도식, 지용남, 로버트 넬슨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배우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배우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재능과 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재 는 무슨 역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맡든 믿을 수 있는 배우로 통한다. 대학시절인 1956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작품에 출연하면서 무대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연기자를 겸했고 1966년 < 초연 >이란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영화배우의 길도 함께 걸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는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을 별로 하지 않는데다 남들 눈에 두드러져 보일만한 호사를 즐기는 경우도 드물다. 배우에게라면 의례 따라 다닐 것 같은 스캔들도 없다. 겸손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이미지인 셈이다. 이순재 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주위 어른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도에 그친다. 그가 네 살되던 해에 조부모가 살고 있던 서울로 와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조부는 서울에서 소규모 부동산업을 하며 생활했고 부친 이용남(작고)은 고향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난민들 속에 섞여 서울로 왔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사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현동에서 성장한 이순재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이때까지도 역시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쓰라린 상처와 가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현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다급한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화는 크게 다가왔다. 이념의 대립이 어떤 형태로 폭발할 수 있는 가를 절감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UN)의 파견과 함께 들어온 미국식 문화와 가치관,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꿈을 키우는 창구였다. 특히 미국영화는 법과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하는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위안과 꿈, 희망을 찾았다. 현실이 거칠었던만큼 영화는 더욱 간절하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았다. 스무살 전후 청년 시절의 이순재 역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과였다.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와 종로 통의 단성사, 우미관, 을지로의 국도극장, 충무로의 수도극장(현재는 스카라극장)은 당시 사정으로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문화센터나 다름없었다. 시간 나는 대로, 극장 표를 살만한 형편이 되는대로 그는 극장을 들락거렸다. 주로 외국영화들을 섭렵했다. 영화를 보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포토플레이''(Photoplay) ''모던 스크린''(Modern Screen), 일본에서 발행되던 ''키네마 준포''(키네마旬報)나 ''에이가노도모''(映畵의友)) 같은 영화잡지들을 구해 보면서 풀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 내역, 아카데미 영화상의 수상기록 등 잡다한 상식이 늘어갔고 그 덕분에 이순재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화박사''로 통할 정도였다. 영화매니아 청년이 호기심을 넘어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영화덕분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영화 < 햄릿 >(1948)은 영화 이상으로 다가왔다. 철학과 지도교수의 권유로 본 것이지만 가동의 충격은 강렬했다. 삼선교 건너 돈암동 동도극장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될 때는 첫 회에 들어가 4번을 연속해서 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어두워 져서야 극장 밖으로 나왔고 점심도 거른 채 였지만 <햄릿>의 감동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이순재 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인배우들 조차 변변하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젊은 배우 지망생의 처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로지 젊은 열정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만이 보상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순수한 예술을 지킨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1958년 입대한 그는 3년동안 대북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받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군인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연극계와 가깝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61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다. 새로 생긴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를 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연기자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1967년에는 동양방송(TBC)이 개국했다. 방송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는 대부분 연극무대 출신들이 맡았다. 지금은 무대와 방송, 영화 분야의 연기가 서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이나 차별적 인식이 없지만 1960년대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화배우들은 텔레비전 연기를 비정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텔레비전 연기자들이 대부분 무대 배우 출신들이라 연기 패턴에도 연극적 과장이 섞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극배우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텔레비전 연기자들은 정통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60년대를 넘기면서는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연간 150여편을 넘나들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작품 편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새로운 연기자의 발굴이 절실한 문제였지만 방송 연기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순재 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 초연 >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한수 접는 시선으로 연극이나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대하려 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새로운 연기자를 구해야 하는 영화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많은 없는 일이었다. 이낙훈 , 김성원 , 전운 , 김성옥 , 오현경 , 김동훈 같은 연기자들이 연극과 방송 쪽에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화계에서도 이순재 의 성실함은 여전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영화계 스타는 신성일 , 엄앵란 을 비롯하여 김지미 ,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남궁원 ,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 신영균 등 모두가 내로라 하는 거물급들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들은 몇 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케줄이 엉킬 때는 여러 곳의 촬영 일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연급 배우가 시간에 맞추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나 스탭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도 이순재는 시나리오를 읽고 대사를 다듬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습관처럼 삼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표시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성실함과 연기 감각은 영화계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8), < 일식 >(1968) , < 피도 눈물도 없다 >(1969), < 분례기 >(1971), < 토지 >(1974) < 집념 >(1976) < 광염 소나타 >(1979)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력 있는 이른바 ''성격파 배우''로 주목받았다. 1999년의 <허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200여편이다. 그 중에서 한의로 명성을 날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집념>에서 그는 주인공 허준 역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연 캐릭터였다. 많은 경우 조연급 연기자들은 영화의 간판 역할을 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흐름을 받쳐주며 특색있는 포인트 역할을 한다. 이순재 역시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인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독특하게 소화 해냈다. 지금 이순재 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으며 현역 배우로서의 위엄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역이나 <허준>에서 한의의 도를 지켜나가는 유의태, 조선시대 상인들의 사업 철학을 들여다본 <상도>의 거상 박주명 등의 역할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우들이다. 한때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고, 노년의 열정을 연기에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변함없는 무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성실한 일관성으로 평생을 배우로 살고 있는 사람, 무대나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재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5년 10월 10일 함북 회령 출생 1958년 3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극활동 시작 1966년 정진우 감독의 < 초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사단법인 중랑문화원원장,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수상 경력> 1976 < 집념 >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남우상 < 어머니 > 대종상 남우특별상 1982 <풍운> 한국방송대상 2002 문화훈장 보관장, MBC '명예의 전당' <주요 작품> 초연 , 막차로 온 손님들 , 탈출 , 서북청년단 , 어머니 , 집념 등 200여 편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고교시절 배구선수였었다는 그는 운동은 한낮 여기에 불과했을 뿐, 당시 그가 내심 희구했었던 것은 아마도 연극 연출가나 영화감독도 아닌 연극 배우나 영화 배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한때 충무로 일원에서 몇몇 영화감독들이나 스탭들을 지목해 운운할 때 '응! 아무개 그 사람 본래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어.' 라고 심심찮게 객담의 화두에 올려 이러쿵저러쿵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고영남 감독이 아닌 진석모(고영남 감독의 본명) 고교졸업생은 뜻한 바 있어 고향 충청북도 충주군 수안보에서 무성영화 변사의 구성진 나레이션처럼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부푼 마음으로 상경했던 것이었다. 당시 신상옥 , 유현목 , 김기영 등으로 이어지는 기라성 같은 대 선배 감독 군, 다음세대들이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각기 전문학과를 수학했던 것처럼 고영남 감독 역시 상기 학교 연극 영화과에 등록했단다. 그는 이 학교에서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마련해준 연극계의 원로 이광래 교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필자도 종종 뵌 적이 있는 그분을 바싹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음에도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예술가연한 학자였음이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풍부한 젊음의 감성과 번뜩이는 예지로 이광래 교수로부터 희곡론, 연출론 등을 깨우친 고영남 감독은 당시 요즈음 대학로와 같은 연극의 메카 명동에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선배들의 후원으로 입단하기 어려웠던 권위 있는 연극단체 '신협'에 비교적 쉽게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깊이 천착하기도 전에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명동과 인접했었던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가 불쑥 찾아와 다음작품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던 그에게 함께 영화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종용해 온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기꺼이 응했다. 그때 제작되고 있던 영화는 외국의 저명한 소설을 번안한 멜로드라마 ' 육체의 길 ' 이었다. 당시 충무로에서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조긍하 감독의 야심적이었는데 장안은 물론 전국의 최루파 관객을 울음바다로 몰아 넣었던 이 작품의 라스트 시퀀스 촬영분은 눈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이었던 명우, 김승호 가 방황과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걸인이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그런데 촬영팀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함박눈은 끝내 내려주지 않았다. 촬영팀은 하는 수없이 눈을 만들어 뿌리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전 스탭들이 모두 동원돼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정한 포지션이 없었던 고영남 도 친구와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어두워지자, 스탭들은 모두 식당과 술집으로 흩어졌고, 고영남만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외모와는 달리 충청도 시골출신답게 성실한 모습으로 홀로 작업하고 있던 그의 모습은 곧 조긍하감독의 눈에 띄게 되고, 즉시 즉시 연출부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는다. 그렇게 제작 완료된 ' 육체의 길 '은 대히트를 하게 되고, 비록 연출부 신출내기로 입문했지만 고영남 의 어깨는 으쓱해졌다. 그 후 그는 권영순 감독에게서 이광수 선생의 '흙'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의 '표류도' 등 문예작품의 조감독으로 수련을 거듭한다. 그리고 당시, 편집작업을 돕고 있던 김기덕 감독을 만나게 되고, 그의 데뷔작 ' 오인의 해병 ' 출세작 ' 맨발의 청춘 '등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수업의 야심을 쌓아 간다. 그 즈음 영화계 배급구조와 흥행판권은 각 지방 업자에 의해 장악되었고 영화제작은 이들의 제작자본에 의존해 제작되던 시기였다. 이 무렵, 고영남 감독은 현 서울극장 대표이며 전국 극장연합회 회장인 곽정환 씨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당시 ' 주유천하 '라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곽사장은 현재의 위치와 성공을 예고라도 하듯 놀라운 추진력으로 충무로를 종횡무진했다. 고영남 감독은 곧 그의 눈에 뜨였고, 곽사장은 그에게 파격적인 너무나도 파격적인 임무를 맡긴다. 그에게 대뜸 영화 ' 잃어버린 태양 '을 연출 의뢰한 것이다. 고영남 감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온 정열을 쏟아 자신의 데뷔작을 연출했다. ' 잃어버린 태양 '은 결국 크게 히트했고, 이에 고무된 곽사장과 고영남 감독은 즉시 요즈음 조폭 영화처럼 유행했던 액션 멜로 ' 명동 44번지 '를 제작 연출했고 이 영화는 그해 흥행 1위를 쉽게 탈환해버린다. 이를 계기로 곽사장과 고영남감독은 당시 한국일보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작 ' 잃은 자와 찾은자 ' 강제구 소령의 전기영화 ' 소령, 강제구 ' 등 잇달아 히트작을 양산해낸다. 이때부터 충무로에서 그의 인기와 주가는 초고속 수직 상승했고 이러한 돌발현상은 그에게 미래의 부푼 희망과 감당할 수 없는 질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충무로 전역 모든 제작자들은 고영남 감독을 연호 했고, 그에게 다투어 메가폰과 거액의 개런티를 맡기었으며, 그는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겉잡을 수없이 거품인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 되어갔던 것이다. 그가 연출한 108편이라는 엄청난 편수는 대부분 이 시기에 작업한 것이다. 그의 술회에 의하면 그것은 연출이 아니라 작업개념이었다는 것이었다. 영화제작자이기 전에 장사꾼이었던 그들의 무절제한 욕심과 고영남 감독의 자신에 대한 통제능력부재가 그를 그렇게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소용돌이에 밀려 지칠 대로 지친 채 1970년대 중반이라는 하구, 어느 둔치에 난파선처럼 표류한다. 그리고 쓰여진 그곳에서 멀리 구비쳐 오는 탁류의 범람을 응시하며 전신을 질타해오는 자괴감에 눈을 지긋이 감는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고영남 감독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의와 방황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통음한다. 마치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처럼,,,,,, 그는 다시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긴 오수에 빠져든다. 그때 그의 지친 어깨를 두들기는 손이 있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영혼이었다. 그의 대표작 ' 설국 ' 고영남 감독,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황폐한 그의 가슴에 ''이즈''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는 짧은 영탄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고향산야를 돌아보았다. 거기, 멀리 산자락에서 마치 하얀 베일과 같은 소나기가 겹겹이 몰려오고 있었다. 황순원 의 ' 소나기 ' 한국 단편 문학의 백미인 이 작품과 필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전기였다. 고영남 감독과 필자는 나란히 유년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엔 개울물과 징검다리와 쪽빛하늘, 갈밭, 들판을 나르는 학과 뚝길이 있었고, 멀리서 소나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년이,,,,,, 이 두 작품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고영남 감독은 긴 슬럼프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활기찬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도약한다. 이후 그는 ' 꽃신 ', ' 빙점 ', ' 외인들 ', ' 영원한 관계 ', ' 코리아 커넥션 '등 종전과는 다른 장르를 섭렵한다. 그러나 그에게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와 보람을 준 작품은 역시 '소나기'였다. 당시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출품에 시도되었고, TV에서도 해마다 방영이 되어, 오히려 안방극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에도 EBS방영 이후 네티즌 사이에 '소나기를 사랑하는 모임'이 생겨날 정도였다. 또한 한국 문학 해외 소개차원으로 아리랑TV로 해외에 방영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지금 노년의 뜰에 서서 아직도 주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의욕과 향수에 가슴 설레고 있다. 마치 개울가에서 조약돌을 주무르며 소녀를 기다리는 작품 속의 소년처럼,,,,,, 아마도 그것은 그의 자연 친화적인 영상에 대한 영원한 노스탤지어 일 것이다.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35년 2월 22일 충북 수안보 출생 1964년 < 잃어버린 태양 >으로 데뷔 <주요 경력> 1980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1988 영화진흥위원회 자문위원 1993 아트시네마 대표 이사 1995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2001 아시아디지털대학 연극영화과 교수 <작품 연보> 1964 잃어버린 태양 / 명동44번지 1965 마지막 정열 / 이세상 끝까지 1966 잃은자와 찾은자 / 소령 강재구 1967 탈선 / 바람 1968 안개낀 초원 / 빙우 1969 결사대작전 / 태양은 늙지 않는다 1970 위험한 관계 / 훼리호를 타라 1971 탈출 / 서북청년단 1972 꽃신 / 비목 1973 독수리전선 / 공수특공대작전 1974 청춘의 문 / 사랑의 나그네 1975 죽어서 말하는 여인 1977 설국 / 십대의 영광 1978 소나기 1979 수제자 1980 빙점81 1981 외인들 / 여자의 방 1982 광염소나타 1983 위험한 향기 1984 영원한 관계 1985 생머리 19살 1986 내가 마지막 본 흥남 1987 밤이 무너질 때 1988 미리마리 우리 두리 1989 제2의 성 1990 매춘2 1991 코리언 커넥션 1992 나의 아내를 슬프게 하는 것들 1993 그림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