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구원
- 감독
- 알렉스 켄드릭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알렉스 켄드릭, 켄 비벨, 케빈 도운스, 벤 데이비스, T.C. 스탤링스, 제사 듀가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다음 소희 >(2023)의 서사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정의감 넘치며 할 말 똑 부러지게 하던 소희(김시은)가 점진적으로 빛을 잃어가다 결국은 자살로 사라지는 전반부와, 이미 소진된 상태에서 직장에 복귀한 형사 유진(배두나)이 소희가 죽게 된 진실을 쫓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소희는 열아홉 살 특성화고 애완동물관리과 졸업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고, 유진은 어머니의 오랜 병간호 이후 복직한 경찰이다.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은 둘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자기 삶에 남겨두는 현명한 이들이다. 춤이 그렇다. 둘이 직접 만나는 순간은 실습 나간 콜센터 회사에서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후 힘들어하던 소희가 퇴근 후 댄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가 유일하다. 소희는 말없이 함께 춤추던 옛 동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신입이어서 전혀 교류가 없었던 유진은 소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유진이 콜센터와 학교에서의 극심한 압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유진이 소희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희와 유진의 서사는 일종의 반복형식을 갖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전반부는 피해 당사자의 시점으로 끌어나가고, 후반부는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폭력과 착취의 교육/노동 구조를 파악하려는 유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서사구조는 윤리적 형식을 갖는다. 윤리적인 것이란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하며 그 사건이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함께 ‘책임’지려는 태도다. 여기서 책임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과 설명-가능성(accountability)이다. 응답-가능성은 어떤 피해가 일어났을 때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응답하기 위해선 먼저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소희는 콜센터에 취직한 후 학생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성실하게 직장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콜센터는 소희를 비롯한 직원들을 사람이 아닌 숫자로 환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콜 수, 방어율, 성과 그래프 등으로 기입된다. 그들의 감정은 회사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따라서만 표현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해지방어팀’이라는 조직은 폭언을 구조화한다. 인터넷 해지를 하고자 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하지 못하도록 수십 번씩 전화를 돌리고 고객들이 화가 치밀게 만든다. 콜센터 직원들은 그 폭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정노동으로 인해 노동환경은 열악해진다. 이 열악한 일은 본청의 관리를 받으면서도 본청이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하청회사에 맡겨진다. 회사는 노동자를 쉽게 대체가능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심지어 이들은 학생과 노동자라는 이중적 구속에 놓인 실습생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 소희가 속해 있는 두 개의 조직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위계적이고 착취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본청, 하청, 본부장, 팀장, 직원/실습생 그리고 교육부, 지역 교육청, 교감, 교사, 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모두가 단일한 기준의 숫자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의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며,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실습생뿐 아니라 팀장, 교사들도 피해자를 자처한다. 소희가 담임 선생님에게 여러 번에 걸쳐 콜센터의 부당함과 맡겨진 일의 부적절함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만 담임은 자신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핑계 삼아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의 입을 막는다. 심지어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면 취업률에 문제가 생겨 반과 학교가 지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소희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소희는 부모님에게도 말해보지만 그들 역시 들을 수 없는 조건에 있다.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부모님은 삶에 지쳐있고 많이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고, 더 나아가 소진된 이들은 가능성이 다한 상황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전 팀장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통해 바꿔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무산된다. 소희가 논리적으로 따지며 항의하고, 회사가 원하는 서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며 행동으로 저항하고, 진심을 토로해보고, 눈물도 흘리고, 소동을 부리고, 심지어 자해를 해도 어른들 누구도 듣지 않으며, 파국의 상황을 멈추지 않는다. 학교와 직장이 피해자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응답할 수도 없다. 실제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어른들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할 여지가 없다고, 그러기엔 세상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고 주장한다. 버티던 소희가 끝내 무너진 것은 전 팀장이 내부고발을 하며 자살을 했을 때보다, 그 자신이 회사가 원하는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매뉴얼로만 읽는 것을 넘어서 내면화하기로 결심했을 때였을 것이다. 괴로워하던 소희는 동료와 비교하고 경쟁시키며 방어율을 높이는 새로운 팀장이 전하는 동기부여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스스로 자신을 수단 삼아 회사가 정해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소희는 아들이 죽어 해지를 하려하는 고객조차도 성과를 위한 숫자로 대하게 된다. 단순히 감정을 관리하고 매뉴얼을 수행하는 데에서 심층적 차원에서 회사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감정노동을 하며 스스로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희가 성과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했을 때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인격의 일부와 거래해 받을 대가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설명-가능성의 책임은 이러한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구조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그것에 책임이 있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떤 역학 속에서 맺어져 있는지 질문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을 위해선 타자뿐 아니라, ‘나’ 역시도 설명해야 한다.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런 피해가 일어난 구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어느 위치에서 그 피해를 듣고 있는지 등을 포함한다. 유진은 모두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들도 손해를 봤다고 억울해 할 때 소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유진은 댄스 스튜디오에서 소희와 마주쳤지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 낸다. 처음에는 단순 자살로 처리하려던 유진은 두 번째 만남에선 첫 번째처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착취적인 실습생 고용구조를 파헤친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많지 않다. 전반부는 주로 핸드헬드로 진행되는데 소희가 빛을 잃고 무너져갈수록 카메라는 점점 더 많이 흔들린다. 영화는 종종 소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특히 전반부의 마지막 씬에서 소희의 클로즈업 얼굴은 빛, 물, 눈과 같은 자연적인 것과 교차편집 된다. 가게에서 맥주를 먹다 문틈 사이로 다가오는 빛이 차가운 맨발에 닿았을 때, 저수지 앞에서 물을 응시하는 뒷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바라볼 때, 소희의 얼굴은 자연적인 것들과 교차된다. 눈 내리는 장면은 소희가 유진을 처음 봤던 댄스 스튜디오에서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동일한 구도로 반복된다. 그때 소희는 힘든 일이 있었지만, 까만 밤에 흩날리는 눈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받는다. 위를 올려다보는 소희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로 잡힌 흩날리는 눈의 쇼트가 교차된다. 아름다운 것은 한번은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소희는 저수지 앞에서 응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위를 바라보지만, 소희에게 내려온 답은 ‘견디고 참아라.’ ‘피해주거나 손해 끼치지 마라’ ‘나도 힘들다’이다. 위에서 층층이 책임져야할 어른들과 단위들은 그 위가 문제라고 말한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소희는 사라져 간다. 소희가 저수지로 들어가는 전반부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프레임에서 소희는 프레임의 아래쪽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카메라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소희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응답하지 않았던 우리(사회)를 응시한다. 프레임 밖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 카메라는, 스페이스-오프에 또 다른 ‘다음 소희’가 사라지고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하기를 요청한다. 소희에게 다가와 주었던 빛은 실습을 나가며 소희가 잃었던, 사회가 대가로 내주기를 강요했던 빛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 빛은 유진이 소희가 마지막에 앉아있던 가게의 간이 테이블을 찾았을 때, 다시 한 번 다가와 응답과 설명을 요청한다. 그리고 소희의 휴대폰에 유일하게 남겨진 혼자서 춤을 추고 잘 해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는 동영상으로 시처럼 응축된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종종 호러 장르를 경유해 여자들의 세계를 다뤘다. 이 영화들은 가족, 아파트 단지, 학교, 종교단체 같은 특정 여성 공동체 내부의 관계나 감정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으면서 신인 여성 배우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998년에서 2009년까지 5편을 제작한 < 여고괴담 >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이며 < 장화, 홍련 >(2003)과 < 4인용 식탁 >(2003)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 다룰 김미정 감독의 첫 장편 < 궁녀 >(2007) 역시 그러한 경향 속에서 나온 영화다. <궁녀>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살해당한 한 궁녀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서사, 궁 안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호러 코드, 가부장제 하에서 생존하려는 여성들의 쟁투와 과잉된 모성표현의 멜로드라마 정서가 섞인 흥미로운 장르영화다. 이 영화가 제목으로 삼고 있는 ‘궁녀’는 대중문화에서 왕과의 성적 관계를 통한 여성의 신분상승 서사로, 그리고 때로는 성차별적 신분제 사회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출중한 능력과 지력을 갖춘 직업인의 성장서사로 그려져 왔다. ‘궁녀’라는 소재는 요리, 봉제, 의료처럼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직업인으로 다룰 수 있기에 현대 대중문화 콘텐츠로 각색하기에 적절할 뿐 아니라 이성 간 그리고 동성 간의 역동적 관계를 모두 다루기에도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현대적 각색을 거친다 해도 ‘궁’이라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소재는 늘 시대를 벗어나려는 힘과 시대에 의해 좌절되는 상반되는 힘을 서사화하며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한계를 전경화 한다. 영화 <궁녀> 역시 2000년대 사극 장르에서 여성 서사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적 한계를 돌파함과 동시에 체제의 전환 없이는 벗어나기 힘든 그 한계 내에 재포획 되는 양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 한계를 재조정하고 재설정하는 상상력에 따라 ‘궁녀’라는 공동체는 매번 다르게 그려진다. 양반도 아니고 기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여성의 역사를 현대에 상상하고 각색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젊은 여성의 적극적인 성적 욕망의 표현과 여성 동성애 등 섹슈얼리티의 표현에 있어 시대에 도전한 영화로 평가받으면서도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를 통해서만 궁을 벗어날 수 있는 여성들을 보여준 < 내시 >(신상옥, 1968)가 1960년대의 상상력이라면, 최근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정지인, 송연화, 2021-2022)은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발산하고 인정받기를 열망하는 한편 안전하게 소시민적인 일상을 유지하길 원하는 상반된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 2020년대의 것이다. 영화 <궁녀>는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적 상상일 뿐 아니라 200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역량이기도 하다. 영화 <궁녀>에서 궁녀들의 공동체는 꽉 닫힌 사회다. 표면적으로는 왕이라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고 내명부의 지배를 받지만 궁녀들은 자기들만의 규율과 비밀을 갖고 움직인다. 공동체의 비밀은 ‘자매애적 연대’ 같은 여성들 간의 끈끈한 결속과 감정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생존을 위해 동료를 무자비하게 희생시키기도 한다. 억압적 체제에 속한 공동체에서는 연대와 우정의 감정을 갖게 될지라도 체제 자체를 벗어나거나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그것이 지속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궁녀들의 사회가 보여준다. 이 공동체의 존재조건인 지배적 체제의 힘은 그들의 세계를 새로운 변화나 이질적인 것이 틈입할 수 없는, 꽉 닫힌 세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다고 궁녀들이 왕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궁녀>는 어떻게 궁궐의 여자들이 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왕과 봉건적 체제를 배신하고 일사분란하게 비밀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궁녀>가 그 시대 장르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 배신을 파격적으로 전면화하는 오프닝씬에 압축되어 있다. 한밤 외진 숲의 어둠에 파묻혀 형태도 잘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그리고 곧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홀로 출산을 하고 잠시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만 곧 죽게 내버린다. 보통 장르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이후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어 서사를 진행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기대를 통쾌하게 배신한다. 자신의 목숨과 직업 모두를 지켜내고 궁녀로 살아가기 위해 아이를 낳고 죽인 여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 천령(박진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씬에 멀쩡히 등장해 의녀로 활약하는 천령은 ‘정절’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왕족을 배신하고서도 죽지 않고 잘 살아남은 (기록되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과정에서 천령의 스승 의녀는 천령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나눠주고 비밀을 지켜준다. 그러나 모두 천령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의녀인 천령은 목매달아 죽은 채로 발견된 궁녀 월령(서영희)의 시체를 검안하고 그의 출산 사실을 밝혀내며 죽음에 얽힌 진실을 추적한다. 천령은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리자 잔인하게 그녀를 내쳐버린 대비의 처조카 이형익(김남진)을 의심한다. 천령은 월령이 자신과 비슷한 억울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타락한 남자들의 부도덕함과 불공정에 대항하며 금기시된 욕망을 표출했던 동료 궁녀들을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감찰상궁(김성령)과 월령이 일했던 희빈전 심상궁(김미경)은 천령의 탐색을 방해하며 월령의 죽음을 자살로 덮으려 한다. 혼란스럽게도 피해자 중 한명으로서 가부장제와 신분제에 대항해 진실을 밝혀내려는 탐정 의녀 천령의 정의로운 수사극처럼 보였던 영화는 중반 이후 죽은 월령으로 추정되는 혼령이 개입해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들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월령의 사건을 계기로 왕을 비롯한 남자들의 체제에 대항하려던 천령은 월령이 같은 궁녀들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의를 찾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천령은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선택한다. 모성이라는 이름하에 월령이 빙의한 것처럼 보이는 희빈(윤세아)은 궁녀들에게 비밀서약을 강제하고 천령도 그에 동조한다. 궁녀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질투하면서도 같은 궁녀였던 희빈이 아들이 원자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한다. 그렇게 표면적인 ‘여성들의 연대와 결속’은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 모순에 도달한다. 궁녀들이 서로 갈등하고 자기 결정과 욕망을 금기시하게 된 원인은 왕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이다. 그러나 월령의 혼령은 왕을 죽이거나 그의 몸을 찬탈하지 않고 자신이 속했던 여성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한다. 대담한 오프닝 씬처럼 천령이 현대적 상상력을 통해 과거를 다시 써내려간 캐릭터라면, 어두운 그림자로만 묘사되는 혼령은 특정 인물의 귀신이라기보다는 천령도 벗어나기 힘든 시대적 한계 그 자체를 재현한다. 무력하게 침묵을 선택하고 궁의 문을 나오는 천령의 모습은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기댄 ‘여성 결속’이 또한 얼마나 퇴행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