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운명(농민편 2부)
- 감독
- 정건조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김영숙, 최대현, 리순정, 김철, 리광국, 조성신, 김동선, 리정천, 리경희, 리혜성, 려용구, 김영일, 김혜경, 김정운, 김영일, 김순호, 신영니, 로인숙, 조우재, 김영식, 김성수, 김인환, 리영호, 리윤수, 림호남, 박성욱, 김경애, 석성재, 리광선, 리인숙, 강신옥, 안현철, 최정순, 김철복, 림정심, 민길연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다음 소희 >(2023)의 서사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정의감 넘치며 할 말 똑 부러지게 하던 소희(김시은)가 점진적으로 빛을 잃어가다 결국은 자살로 사라지는 전반부와, 이미 소진된 상태에서 직장에 복귀한 형사 유진(배두나)이 소희가 죽게 된 진실을 쫓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소희는 열아홉 살 특성화고 애완동물관리과 졸업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고, 유진은 어머니의 오랜 병간호 이후 복직한 경찰이다.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은 둘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자기 삶에 남겨두는 현명한 이들이다. 춤이 그렇다. 둘이 직접 만나는 순간은 실습 나간 콜센터 회사에서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후 힘들어하던 소희가 퇴근 후 댄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가 유일하다. 소희는 말없이 함께 춤추던 옛 동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신입이어서 전혀 교류가 없었던 유진은 소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유진이 콜센터와 학교에서의 극심한 압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유진이 소희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희와 유진의 서사는 일종의 반복형식을 갖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전반부는 피해 당사자의 시점으로 끌어나가고, 후반부는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폭력과 착취의 교육/노동 구조를 파악하려는 유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서사구조는 윤리적 형식을 갖는다. 윤리적인 것이란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하며 그 사건이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함께 ‘책임’지려는 태도다. 여기서 책임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과 설명-가능성(accountability)이다. 응답-가능성은 어떤 피해가 일어났을 때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응답하기 위해선 먼저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소희는 콜센터에 취직한 후 학생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성실하게 직장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콜센터는 소희를 비롯한 직원들을 사람이 아닌 숫자로 환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콜 수, 방어율, 성과 그래프 등으로 기입된다. 그들의 감정은 회사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따라서만 표현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해지방어팀’이라는 조직은 폭언을 구조화한다. 인터넷 해지를 하고자 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하지 못하도록 수십 번씩 전화를 돌리고 고객들이 화가 치밀게 만든다. 콜센터 직원들은 그 폭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정노동으로 인해 노동환경은 열악해진다. 이 열악한 일은 본청의 관리를 받으면서도 본청이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하청회사에 맡겨진다. 회사는 노동자를 쉽게 대체가능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심지어 이들은 학생과 노동자라는 이중적 구속에 놓인 실습생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 소희가 속해 있는 두 개의 조직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위계적이고 착취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본청, 하청, 본부장, 팀장, 직원/실습생 그리고 교육부, 지역 교육청, 교감, 교사, 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모두가 단일한 기준의 숫자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의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며,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실습생뿐 아니라 팀장, 교사들도 피해자를 자처한다. 소희가 담임 선생님에게 여러 번에 걸쳐 콜센터의 부당함과 맡겨진 일의 부적절함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만 담임은 자신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핑계 삼아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의 입을 막는다. 심지어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면 취업률에 문제가 생겨 반과 학교가 지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소희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소희는 부모님에게도 말해보지만 그들 역시 들을 수 없는 조건에 있다.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부모님은 삶에 지쳐있고 많이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고, 더 나아가 소진된 이들은 가능성이 다한 상황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전 팀장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통해 바꿔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무산된다. 소희가 논리적으로 따지며 항의하고, 회사가 원하는 서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며 행동으로 저항하고, 진심을 토로해보고, 눈물도 흘리고, 소동을 부리고, 심지어 자해를 해도 어른들 누구도 듣지 않으며, 파국의 상황을 멈추지 않는다. 학교와 직장이 피해자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응답할 수도 없다. 실제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어른들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할 여지가 없다고, 그러기엔 세상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고 주장한다. 버티던 소희가 끝내 무너진 것은 전 팀장이 내부고발을 하며 자살을 했을 때보다, 그 자신이 회사가 원하는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매뉴얼로만 읽는 것을 넘어서 내면화하기로 결심했을 때였을 것이다. 괴로워하던 소희는 동료와 비교하고 경쟁시키며 방어율을 높이는 새로운 팀장이 전하는 동기부여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스스로 자신을 수단 삼아 회사가 정해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소희는 아들이 죽어 해지를 하려하는 고객조차도 성과를 위한 숫자로 대하게 된다. 단순히 감정을 관리하고 매뉴얼을 수행하는 데에서 심층적 차원에서 회사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감정노동을 하며 스스로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희가 성과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했을 때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인격의 일부와 거래해 받을 대가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설명-가능성의 책임은 이러한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구조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그것에 책임이 있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떤 역학 속에서 맺어져 있는지 질문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을 위해선 타자뿐 아니라, ‘나’ 역시도 설명해야 한다.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런 피해가 일어난 구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어느 위치에서 그 피해를 듣고 있는지 등을 포함한다. 유진은 모두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들도 손해를 봤다고 억울해 할 때 소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유진은 댄스 스튜디오에서 소희와 마주쳤지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 낸다. 처음에는 단순 자살로 처리하려던 유진은 두 번째 만남에선 첫 번째처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착취적인 실습생 고용구조를 파헤친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많지 않다. 전반부는 주로 핸드헬드로 진행되는데 소희가 빛을 잃고 무너져갈수록 카메라는 점점 더 많이 흔들린다. 영화는 종종 소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특히 전반부의 마지막 씬에서 소희의 클로즈업 얼굴은 빛, 물, 눈과 같은 자연적인 것과 교차편집 된다. 가게에서 맥주를 먹다 문틈 사이로 다가오는 빛이 차가운 맨발에 닿았을 때, 저수지 앞에서 물을 응시하는 뒷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바라볼 때, 소희의 얼굴은 자연적인 것들과 교차된다. 눈 내리는 장면은 소희가 유진을 처음 봤던 댄스 스튜디오에서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동일한 구도로 반복된다. 그때 소희는 힘든 일이 있었지만, 까만 밤에 흩날리는 눈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받는다. 위를 올려다보는 소희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로 잡힌 흩날리는 눈의 쇼트가 교차된다. 아름다운 것은 한번은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소희는 저수지 앞에서 응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위를 바라보지만, 소희에게 내려온 답은 ‘견디고 참아라.’ ‘피해주거나 손해 끼치지 마라’ ‘나도 힘들다’이다. 위에서 층층이 책임져야할 어른들과 단위들은 그 위가 문제라고 말한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소희는 사라져 간다. 소희가 저수지로 들어가는 전반부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프레임에서 소희는 프레임의 아래쪽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카메라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소희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응답하지 않았던 우리(사회)를 응시한다. 프레임 밖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 카메라는, 스페이스-오프에 또 다른 ‘다음 소희’가 사라지고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하기를 요청한다. 소희에게 다가와 주었던 빛은 실습을 나가며 소희가 잃었던, 사회가 대가로 내주기를 강요했던 빛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 빛은 유진이 소희가 마지막에 앉아있던 가게의 간이 테이블을 찾았을 때, 다시 한 번 다가와 응답과 설명을 요청한다. 그리고 소희의 휴대폰에 유일하게 남겨진 혼자서 춤을 추고 잘 해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는 동영상으로 시처럼 응축된다.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
1980년대 한국영화를 지배했던 코드는 에로티시즘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강박적인 풍속 통제 아래 억압되었던 문화적 표현 양식은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 외연이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남녀 간의 성애(性愛)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극장용 성인영화의 등장은 변화된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는 흐름이었다. 유신체제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등장으로 급속히 위축된 정치적 자유는 문화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한 벡터로 표출되었는데, 새로운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대항적 영화문화가 하나의 경향이라면, ‘권력이 허용한 금기’를 위반하는 것으로 자유를 대리 충족했던 경향은 제도권 영화계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존재했었다. 물론, 1980년대의 한국영화가 다른 여타의 문제보다 에로티시즘에 천착하게 된 것은 시장에서 활로를 찾지 못했던 당시의 영화산업계의 요구가 정책적으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와 함께 TV 보급률이 증가하면서 1970년대의 한국영화(방화)의 시장성은 크게 줄어들었고,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VCR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대중화됨에 따라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인할 상업 극영화만의 시장 전략이 간절하게 필요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 아래서 볼 때, 이후 ‘에로영화’라는 장르적 범주로 묶이게 되는 일련의 영화들이 유신체제의 종말과 함께 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행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의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잡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에로티시즘을 전면화한 1980년대의 한국영화를 예비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미국식 소비문화를 매개로 확산된 섹스 담론과 도시적 감각으로 채색된 청년세대의 ‘성모랄’을 영상언어로 번역한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유신체제의 풍속 검열 아래서도 예술성을 표방하며 표현의 임계점을 확장해나가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아래는 1974년 이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랐던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정리한 것인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에로티시즘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의 영화산업을 지탱해온 중요한 흥행 자산이었던 것이다. 1974년 : <별들의 고향>(이장호) (1위, 46만) 1975년 :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위, 36만) 1976년 : <여자들만 사는 거리>(김호선) (1위, 8만 7천) 1977년 : <겨울여자>(김호선) (1위, 58만) 1978년 : <내가 버린 여자>(정소영) (1위, 37만), <O양의 아파트>(변장호) (2위, 28만) 1979년 :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위, 30만), <내가 버린 남자>(정소영) (2위, 24만),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3위, 21만) 19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성노동 시장으로 내몰린 동시대의 여성의 삶을 소재로 삼아 시대적 부조리와 성윤리를 이야기했다면, 1980년대의 성애영화는 소재와 시기의 제한을 넘어 높은 수위의 노출과 정사 장면을 통해 사랑과 성적 욕망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1981년에 개봉하여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는 사회적 규범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티시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대중에게 공개된 영화의 표현 수위 또한 이전 세대의 영화들과 달리 매우 높았는데, 당대의 검열 자료를 통해 볼 때 이는 제작주체와 민간위원회, 그리고 정책 당국의 조율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인다. 우선, 영화제작사는 영화법에 따라 영화 제작에 앞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에 제작 신고를 하게 된다. 이때 제작자측은 ‘작의’(작품의 의도)와 ‘줄거리’를 포함한 제작신고서를 시나리오 5부와 함께 문공부에 제출하여 시나리오 검열을 받는다.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제작사인 우진필름(대표이사 정진우)은 1981년 7월 16일자로 제작신고를 하는데, 그에 앞서 영화자율정화위원회에서 해당 영화에 대한 사전 검토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자율정화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이하 제협)는 7월 15일자로 문공부 장관에게 해당 영화가 제작신청에 있어 문제의 소지가 없다는 뜻의 심의서를 제출한다. 이후 문공부에서는 시나리오 검열에 착수하게 되는데, 실질적인 검열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83년 이후의 검열 자료에서 영화진흥공사가 ‘영화 대본 검토 보고’를 문공부에 올렸고, 해당 서류의 형식 또한 동일한 것으로 보아 1981년에도 동일 기관에서 대본 검열을 진행한 듯하다. 이후, 7월 25일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심의의견서가 문공부로 제출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8월 4일, 검열에 대한 기안지가 작성된다. 아래는 시나리오 검열 결과이다. 유의사항 : 다음과 같은 문제점 등에 유의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을 제작하시기 바랍니다. 가. 과다노출, 정사 또는 강간 장면을 순화 또는 삭제할 것 (예: 씬 15, 32, 38, 49, 65, 119, 135 등) 나. 다음과 같은 대사를 순화 또는 삭제할 것. 씬 25: “고자” 씬 27, 29 : “사리마다” 씬 56, 57, 108: “…고기 덩어리” (검열문서 #9) (그림1)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는 풍속상 문제가 될 만한 장면에 대한 삭제 요구와 전반적인 제작 방향성에 대한 의견이 제시된다. 1980년 2월 시나리오 사전심의제가 폐지되고 점차 영화 제작의 자율성이 높아짐에 따라 시나리오 검열은 특정 장면에 규제와 금지보다는 사전 조율을 위한 단계로서의 성격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작허가가 떨어진 8월 8일로부터 2달가량이 지난 10월 5일, 제작사는 상영을 위한 실사 검열을 신청하는데, 실사 검열은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가 주체가 되어 이루어졌다. 제작사인 우진필름은 10월 5일, 영화 필름 1부, 대본 5부와 함께 영화검열신청서를 문공부에 제출하는데, 필름의 경우 문공부에서 공윤으로 이송되어 9명의 검열관이 배석한 가운데 실사 검열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윤의 심의 의견이 어떻게 수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9명의 심사위원들이 모두 각자의 의견을 제시한 후, 이를 토대로 ‘검열 종합 의견서’를 작성하고 이를 문공부에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실사 검열 이후, 영화검열 종합의견서 1부와 검열담당관들의 심의의견서 9부, 그리고 영화검열대본 1부가 문공부로 올라간다. 그런데 심의의견서에 나타난 검열담당관들의 견해가 대부분 검열 종합의견서의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검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구두로 교환한 뒤, 이를 사후적으로 각자의 심의의견서에 반영한 듯하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검열 종합의견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화면삭제) 1) S#13의 정사 장면 중 유두 부분 삭제 2) S#21 유두 부분 삭제 3) S# 최영감 하제 나체부분 삭제 4) S#124 정사 장면 중 나체 및 유두부분 삭제 (화면단축) 1) S# 132 강간장면 단축 (검열문서, #19) (그림 2) 영화검열 종합의견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많은 노출 신에도 불구하고 화면삭제 4곳, 화면단축 1곳으로 비교적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하게 된다. 이는 영화에서 상당히 공을 들인 영상미가 예술적 성취로 인정받아 심의과정에 반영된 듯하다. 검열을 신청한 영화는 모두 6벌(12권 분량)이었는데, 검열 합격증을 교부받고 1벌 당 11.95m(분) 가량의 분량이 삭제된다. 6벌의 필름에 대한 삭제 작업은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제작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검열 작업의 일정에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빗발치는 개봉 독촉” 1) 에 10월 24일에 개봉하였는데, 공개를 앞두고 개봉예정 신문광고가 지속적으로 나간 것으로 보아 제작사측에서는 빠른 공개를 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에 대한 검열 작업은 10월 8일에 1벌, 10월 17일에 3벌, 10월 19일에 1벌이 이루어졌고, 개봉 후인 10월 29일에 남은 1벌을 마쳐 필름 검열이 모두 끝이 났다. 특정 신체 부위의 노출과 정사 장면 문제를 둘러싼 검열의 과정은 정부의 일방적 규제와 금지보다는 정부와 민간 사이의 조율과 협상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이전 시대와 매우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 특기할만한 점은 영화가 개봉되었던 10월 24일에 예고편 영화에 대한 검열신청이 이루어지는데, 1권 12벌에 해당하는 필름이 신청된다. 예고편의 경우는 우선 검열을 위한 대본이 제출되고 곧 이어 실사검열이 이루어진다. 예고편 검열은 10월 26일에 완료되어 연소자관람가능 등급으로 허가증이 교부된다. 예고편의 제한사항은 화면삭제 1개처인데, 삭제된 장면은 예고편의 첫 신(scene)에 해당하는 것으로 “남녀의 완전 나신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는 예고편이 ‘연소자관람가’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서 본편 검열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3) 필름통관 추천 요청 검열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국가가 영화 필름이 유통되는 과정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관리했다는 점이다. 1983년 3월 2일, 도호 영화사는 해당 영화에 대한 수입을 추진하기 위해 실사용 프린트를 우진필름에 요청하는데, 이를 위해 제작사는 해당 필름이 수출계약을 위한 실사용 프린트임을 서약한 다음 문공부에 필름통관 추천을 요청한다. 또한 상영허가 기간(최초 검열완료일로부터 1년 6개월)이 종료되는 1983년 4월 9일에는 해당 필름에 대한 상영기한 연장 신청이 이루어지는데, 당국에서는 필름이 화질과 녹음 상태가 불량하여 상영기간 연장을 거부한다. 결국 제작사는 1983년 10월 17일 복사본을 제작하기 위해 복사 허가신청서를 제출하고, 영화진흥공사는 해당 영화에 대한 서류를 검토한 후 이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후 복사판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은 실사 검열이라기보다 기존의 검열 기준을 적용하여 필름을 잘라내는 행정상의 과정으로 보인다. 복사편수는 총 4편이었는데, 필름 절삭 작업이 진행되는 시점은 1983년 10월 29일, 12월 10일, 1984년 1월 20일, 3월 4일로 시간적 편차를 두고 있다. 이는 행정상의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제작사가 4편의 복제판에 대한 검열을 미리 신청한 뒤 상영 시점을 고려하여 제작자측에서 작업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제기된 에로티시즘이 예술성과 결부되어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검열의 과정을 거쳤다면, 1984년에 개봉한 <무릎과 무릎 사이>(이장호, 1984)는 성애에 대한 묘사 수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일으킨 사례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화는 1984년 5월 31일 문공부에 제작신청서를 제출하고, 당일로 영화진흥공사로부터 대본검열 합격 승인을 받는다. 작품내용에 대한 심의의견은 “1. 성묘사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퇴폐적이거나 음란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는 평가와 “2. 다소 차원이 높은 섹스물이라 하더라도 공서양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영화진흥공사는 6월 2일자로 문공부에 대본검열에 대한 심의서를 보내고, 6월 7일에는 제협 산하 영화자율정화위원회가 위법성 여부를 가늠하는 심의서를 제출한다. 심의서에는 “사회윤리를 저해하지 않도록하고 격조 높은 작품”을 제작하기를 주문하면서 “아버지의 가정부 강간과 가정부 애인의 여주인공 강간 등 인물설정”을 수정할 것을 권고한다. 감독은 대본 검열 심의의견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작성한다. (그림 4)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5) 심의서 (그림 6)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 (그림 7) 감독의 서약서 1984년 7월 24일에는 예고편 상영을 위한 검열을 신청하는데, 이는 실사 검열보다 대략 1달 보름가량 앞선 시점이었다. 즉,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예고편 검열을 신청한 셈인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경우 실사 검열이 종료된 후 이를 재편집하여 예고편을 제작했다면, <무릎과 무릎 사이>는 본편이 완성되기 전에 예고편을 미리 제작하여 검열을 신청한 경우였다. 제작사측은 1권 12벌의 분량의 예고편 검열을 위해 대본 1부를 제출하는데, 대본 검열 차원에서 수정할 것을 지시 받고 반려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통해 검열이 이루어진 예고편 대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연필로 표시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S#1. 무릎 사이로 루즈를 바르는 자영” (장면 삭제), “S#4. 무릎과 무릎 사이, 여성의 두 번째 본능, 무릎에 놀라운 비밀” (대사 삭제), “S#5. 여인의 무릎은 관능의 샘”(자막 삭제)과 같이 장면, 대사, 자막 부분에서 각각 수정 권고 사항을 표시해둔 것이다. 이후, “청소년 덕성함양에 저촉되지 않도록 재편집하여 검열신청”하기를 요청받은 제작사는 8월 2일, 영화를 재편집하여 검열에 합격하게 된다. (그림 8) <무릎과 무릎사이> 예고편 검열대본 그런데 8월 28일, 제작사측에서는 1권 3벌의 분량으로 새로운 버전의 예고편을 제작하게 되는데, 해당 버전 또한 장면 삭제 및 재편집을 요구하는 심의의견과 함께 반려된다. 9월 4일 재편집본으로 검열을 실시한 결과, 영화는 화면 2개처, 대사 2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합격 판정을 받게 된다. 이전 버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새로운 버전의 예고편은 여성의 가슴을 직접 노출하는 것과 같이 높은 수위의 장면과 대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 검열을 둘러싼 이슈 자체를 홍보 효과로 전유하려는 기획으로 보인다. 소위 ‘개봉관’ 극장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버전의 예고편을 제작했다하더라도, ‘연소자관람가’ 판정을 위한 암묵적 기준이 있음에도 이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은 기획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의 선정성과 검열에 대한 논란은 본편 검열에서 반복된다. 9월 13일 제작사인 태흥영화사는 대본 검열 당시 지적받았던 수정 사항을 반영했음을 알리는 ‘수정대비표’와 함께 상영허가를 위한 실사 검열을 신청한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영화의 최초 분량이 140분이었다는 점이다. 이후에 검열을 마치고 실질적으로 상영 허가된 필름의 길이가 97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부분이 삭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법이 개정되기 전이었던 만큼, 실사 검열의 과정은 1981년의 경우와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제협의 확인서와 함께 관련 서류가 문공부에 제출되고 필름 검열은 공연윤리위원회(공윤)에서 이루어졌다. 검열이 이루어진 시점은 9월 17일이었고, 제한 사항을 포함한 심의결과보고서가 공윤에서 문공부로 제출된 시점은 9월 19일이었다. 검열종합의견서에 기록된 제한사항은 모두 화면단축 3곳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S#48. 정사 장면 중 율동부분 화면 단축 2. S#75. 무릎 사이의 플롯 및 남자 둔부 화면단축 3. S#98. 어린이 얼굴 확대부분 화면 단축 (그림9) <무릎과 무릎 사이> 영화 검열 종합의견서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검열을 통과한 다음날인 9월 20일, 제작사는 상영허가(검열합격증)를 받았음에도, 이후 “자진 삭제”의 형식으로 공윤과 협의하여 많은 분량을 스스로(?) 삭제했다는 사실이다. 9월 18일에 이루어진 실사 검열 자료를 통해 보면, 이우용을 제외한 다른 검열관들은 모두 검열종합의견서에 적시된 부분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우용은 적시된 부분과 함께 S#104의 장면에 대해서도 화면을 단축할 것을 요청한다. 기안지 작성자가 모두 이우용이라는 점에서 그는 공윤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문공부 관료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진삭제”라는 형식도 의문이 가지만 그 내용에 S#104의 화면단축도 포함되어 있어 심의의견이 문공부의 기준에 맞춰 사후적으로 재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21일 검열심의를 마쳤으면서도 또 다시 재검토를 받기도 했” 2) 다는ᅠ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검열 과정에서 공윤의 의견과 정책 당국자의 의견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10) <무릎과 무릎 사이> 자진삭제 현황(공윤과 제작사 협의 결정) 영화는 결국 “씬 30. 좌석버스 안에서 승객남자가 여자의 음부 쪽으로 손을 집어넣는 장면, 씬 47. 대극장에서 남자관객이 여자의 음부쪽으로 손을 깊이 집어넣는 장면, 씬 48.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얼굴을 대는 장면, 씬 104. 봉고차 안에서 여자의 오르가즘에 도달시키기 위한 남자손의 율동장면”을 포함하여 총 22.30m(분)이 삭제되어 개봉하게 되었다. 검열 과정에서 정책당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이 정부의 일방적인 통제의 형식이 아니라 시장 주체들과의 조율과 협상의 과정이었다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검열과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1) 《동아일보》, 1981.10.21. 7면 광고. 2)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 외설 시비”, 《경향신문》, 1984.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