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황제
- 감독
- 선우완, 장선우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한여송, 김수겸, 이승희, 신정아, 이봉규, 정승환, 이경훈, 이형석, 곽건, 최일, 조민화, 황치영, 추봉, 오수미, 안용남, 나한일, 강석란, 박상조, 김길호, 나기수, 국정환, 박재홍, 조항룡, 맹상훈, 김화란, 정은숙, 정성모, 이희성, 전유성, 이춘연, 임상호, 박광수, 조재홍, 이석구, 장효선, 김정훈, 신광필, 이덕신, 박예숙, 손전, 김형진, 김명곤, 이영호
필자는 공공 복합문화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문화 장르를 편견없이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타 장르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된다. 이러한 영화적 선입견은 사업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조짐이 보이더니, 규모와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으레 ‘이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할 일이다.’, ‘영상자료원이 하고 있지 않냐?’, ‘여기는 부산이 아니다.’ 등의 정책 논리와 결합된다. 어떻게든 한고비 넘기고 나면, ‘크게 벌이지 말고 재밌는 영화 몇 편 골라서 상영해라’, ‘정치적 내용을 피해라’, ‘관객은 많이 들어올 수 있겠냐’ 등의 직접적인 압력으로 구체화된다. 이쯤 되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란 타 전시 주제와의 연계 상영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 상영과 같은 구색 맞추기 이벤트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미술 영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저마다의 연구, 수집과 교육 행사 그리고 작품지원 프로그램까지 운영되고 있지만, 영화는 유독 공공의 영역보다는 멀티플렉스 형태의 민간 소비 영역에 과도하게 치우쳐져 있다. 국공립문화기관에서조차도 영화에 대한 공적 운영과 지원은 특정 기관의 역할로만 축소하면서 산업과 문화예술을 분리하는 이원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곳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하며 일해오고 있는 필자가 제도적 문제를 지적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예술장르로서의 영화가 지닌 불균형과 그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때마다 늘 장벽이자 한계로 작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예술운동 흐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영화들을 수집하고 기록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기록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전시나 상영의 형태로라도 기념하는 것이다. 본 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고전’이라는 의미가 ‘오래되었음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미학적 성취’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결국 필자에게 있어서 ‘고전’은 현재 나의 관심이 작동되게끔 하는 일종의 근원이자, 과거의 기록들을 갱신하고 확장해나감으로써 정전이 아닌, 언제나 재구축이 가능한 살아있는 계보들로 존재한다. 기록 이전의 기록 필자가 지금 직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아시아 문화예술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었다. 당시의 우리 팀은 아시아 문화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예술 흐름을 주제별로 나누고 각 주제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시각화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필자는 그 안에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맡았고, 현재 미술 안에서 ‘무빙이미지’로 묶이는 두 영역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어떻게 출발하고 조우하게 되었는지를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과 자료들을 찾아 조사했다. 특히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예술 안에서 영화의 유산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작업이었다, 상업영화 제작방식과는 다른 개인작업 또는 문화운동의 일환 또는 콜렉티브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험영화는 하나의 자료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자료에서 파생되는 정보들은 매우 다양했다.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크게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나누어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실험영화 자료들을 모으는 일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어렵고 더딘 작업이었다. 현재는 독립영화의 범주 안에서 실험영화, 실험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영화 담론의 대부분은 상업영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실험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했고, 수집 이후 보존과 전시로 이어지는 다른 아카이빙 프로젝트와 달리 배급 시스템 보급까지 계획하면서 실험영화 초창기인 70년대 전후와 그 이후의 작품들로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또한 그럼으로써 관련 작업을 하고자 하는 창작자와 이용자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공공 상영과 배급 모델을 구상했었다. 각 나라마다 고전영화 베스트 안에는 그 나라의 아방가르드(혹은 언더그라운드) 전통을 계승한 작품들이 섞여 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부터 미국의 실험영화까지 그 맥을 같이 하며 그 안에서 1인 영화제작 시스템인 자주(自主)영화, 퍼포먼스, 음악 등과 결합한 인터미디어(Inter-media), 자국의 전통적인 언더그라운드, 비디오아트와 결합한 매체실험 등 다양한 분파들을 통해 하나의 일본 실험영화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실험이든지 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어렵다. 실험은 기존 영화의 미학적 탈구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전후의 맥락,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에서 비틀림이 시작된다. 예술에서의 실험은 이러한 맥락적 탐구가 필요하며, 그 안에 실험의 미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학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파악해가면서 실험영화의 계보를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당시의 비틀린 영화, 비틀린 경향의 발견을 가져다준 영화, 즉 상업적 고전영화가 아닌, 마치 플럭서스처럼 커다란 한국실험예술운동의 맥락에서 출연한 영화적 실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우선 한국에서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를 기점으로 영화의 미학적 연구를 시도했던 동인회의 멤버와 자료들를 모으는 데서 출발했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시네포엠’과 실험미술을 지칭하며 다양한 매체실험을 시도한 ‘제4집단’, 1970년대 ‘영상연구회’와 ‘카이두 클럽’, 독일과 프랑스문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영화연구회’와 ‘씨네클럽’,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실험영화연구소(전신 ’뉴이미지그룹‘)’를 중심으로 활동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동인회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의 수집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는 대부분 개인소장이었고 필자의 소속기관은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감독들의 신뢰가 전적으로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카이두클럽의 한옥희 감독이 영화제 집행위원이었을 당시 프로그래머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임창재 감독의 연출부로 잠시나마 있었던 인연으로 한국 실험영화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감독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수집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실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실제 실험영화의 고전과도 같은 작품들의 원본 필름을 직접 내 손으로 가지고 오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임창재 감독에게는 실험영화연구소에서 활동 당시 제작한 < 오그 >(1994), < 오버 미 >(1996)부터 < 눈물 >(1998), < 아쿠아 레퀴엠 >(1999)의 16mm 필름 원본과 콘티, 당시의 활동자료 그리고 이후의 디지털 작품들을 받았다. 특히 필자가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였던 <뉴미디어 영상미학>의 저자이자 실험영화연구소 대표였던 권병순(필명 권중운)의 사진 몇 장이 섞여 있던 활동자료를 보면서 한국영화사 기록에 여전히 담기지 못한 역사들이 너무 많고, 그 안에서 실험영화 기술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공동지도교수였던 최민 교수님이 “권병순이 지금 살아있다면 네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을거다”고 아쉬워했던 기억과 함께 아카이빙 작업에서 사진 몇 장, 메모 한 줄이 담긴 기록이 또 다른 기록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 공존했다. 임창재 감독에게 건네받은 자료들이 아카이빙 과정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한옥희 감독의 자료들은 아카이빙 이후의 동력과도 같았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받기 전까지 ‘카이두 클럽’의 작품을 본 것은, 한옥희 감독이 보여준 < 구멍 >(1973)의 디지털 파일과 초기 독립영화들을 담은 DVD ‘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Vol.1 70-80년대’에 수록된 < 색동 >(1976) 두 편이었다. 감독님께 <구멍>을 포함한 < 중복 >(1974), < 2분 40초 >(1975), < 무제 77-A >(1977)의 16mm 필름 원본을 받았고 이듬해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필자에게 한국 고전영화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무제 77-A>라고 말할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처럼 16mm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세상을 향해 장전할 태세를 갖춘 한 여성은 인파가 모여있는 시내 한복판에 자신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암실로 들어가 그 필름들을 몸에 휘감으며 행복해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엔 갈기갈기 오려버린다. 엔딩크래딧에 한옥희 감독이 직접 등장하며 가위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치는 짧고도 강렬한 순간은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왜 이 필름이 여태까지 감독의 방 안에 있었을까. 이 귀한 필름들을 통해 전해오는 울림은 이것을 또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가 무거운 과제로 동시에 다가왔다. 13개 주제의 아시아 예술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예술담론을 생산해내는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우리팀의 포부는 안타깝게도 기관의 개관과 함께 수장이 바뀌면서 중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로 묶여 간헐적으로나마 현재까지 수집이 이어지고 있다. 한옥희(카이두 클럽)의 <무제 77-A> 스틸이미지 기록 이후의 기록 필자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 영화 프로그래밍 업무를 주로 맡게 되었다. 관객이 찾지 않는 프로그램만 기획한다는 잦은 지적으로 소심해졌을 당시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마이너한 것과 전투적인 것은 다르다”는 말을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말은 필자가 하고 싶지만 망설였던 몇 가지 기획을 실행할 동력을 실어주었다. 과거의 작품들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기술되면 ‘고전’이라 불리게 된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더라도 가치 있는 작품은 모던 클래식, 즉 ‘현대 고전’이 되기도 한다. 2019년 한국영화100주년에 앞서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필자도 조그맣게나마 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한국영화는 세기의 걸작을 배출하고, 국내영화의 높은 관객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검열 내지는 삭제당해야만 했던 작품들을 나열해보고 싶었고, 어찌보면 이 작품들이야말로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에 도전적 작품으로 살아남은 혹은 사라진 영화들을 소환하여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나쁜영화 100년>을 기획해보고자 했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에 타협한 영화들을 그 시대의 ‘착한’ 영화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불러모으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야말로 ‘나쁜’ 영화들이다. 모은영, 신은실 평론가가 함께 기획하고 인디포럼과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광주독립영화관과 광주극장이 협력한 이 행사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행사에 초대된 감독들도 ‘나쁜’ 영화 감독들로 소개되는 역설적 상황을 기꺼이 만끽했다. 특히 100주년 기념 모든 행사를 고사하면서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는 얼굴을 비친 장선우 감독의 깜짝 등장은 영화제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나쁜영화 한두 편을 고른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고심 끝에 < 서울예수 >(1986), < 나쁜영화 >(1997), 그리고 < 거짓말 >(2000) 세 편을 선정하였다. 개막작 역시 매우 중요했는데, 우리다운 행사에 포문을 열어줄 수 상징적인 작품이 필요했고, 신은실 평론가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제안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미 기록된 것들에 빈틈을 메꾸고 정보들을 두텁게 만드는 작업은 필자가 보람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다. 아카이빙 작업에 전적으로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상영이나 전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취득하는 정보와 자료들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의 30주년을 기념한 <내가 뉴스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전시를 위해 필요했던 그동안의 노뉴단의 영상들과 비디오 표지들, 그리고 얄라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운성 평론가와 기획한 <여럿 그리고 하나-얄라셩에서 서울영화집단까지>를 준비하면서 만나볼 수 있었던 김홍준, 박광수, 문원립 감독의 구술자료부터 당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활동자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안적 영화문화의 중요한 기록들이다. 비록 더디긴 하지만 이 자료들은 현재 정리작업 중이며, 완성될 즈음에는 출판물을 비롯하여 풍성한 기념행사와 함께 한국 독립영화 연구에 지속적인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 노동자뉴스제작단 30주년 기념전시 포스터 이미지 , <우> 얄라셩 40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 메인페이지 이미지 수집된 작품과 자료들을 정리하는 후속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의미있는 소식들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디지털화한 후 해외영화제와 미술관 등에 조금씩 소개하면서 국내외 평론가, 연구자, 큐레이터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 ‘아카이브’ 섹션에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초청되었고, 당시에 아시아 실험영화의 고전들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필자는 한국 작품으로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와 한옥희의 <구멍>을 대표작으로 선정하여 상영했다. 이미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김구림 작가의 작품도 주목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옥희와 카이두 클럽의 이름은 작품 공개와 함께 관심이 집중됐다. 이후 같은 해 토론토국제영화제 ‘파장’ 섹션에 또 다른 작품 <2분 40초>가 초청되었고. 캐나다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후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바르샤바현대미술관, 독일 HKW 등의 주요한 미술관과 영화제를 넘나들며 한국영화 회고전, 세계여성예술가 특별전 등에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해외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약 5년 사이에 일어난 이와 같은 변화는 카이두 클럽의 활동과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가지는 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봉준호, 박찬욱이 이룬 성과의 동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계보와 동력을 찾고 있다. 개인들마다 ‘고전’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결국 필자에게 있어 고전이란 ‘고전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선구적 작업이다. 수집된 자료들은 정리를 마치고 나면 완성된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닌 수시로 살을 붙여가면서 어느 순간 자료들끼리 자연스러운 지형도가 그려지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미술사 안에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자료수집과 비평, 전시들을 통해 정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대중적인 것을 대중화하고, 비제도적인 것들을 제도화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영화도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혼종 장르로 변모해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미술과의 접점이 가까운 이때, 좀 더 다양한 실험적, 운동적 영화의 역사들이 경계를 넘어 상호 접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필자 역시 한국 실험영화와 실험미술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R(문성근)과 J(강수연), 둘은 끊임없이 서울 시내를 배회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이듬해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올림픽 이후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탄압받는 공안 정국은 계속되었고, 여당은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깜짝 발표한다. ‘민주투사’ 김영삼이 평생을 싸워온 그들과 손잡은 것이었고, 결국 그는 1993년 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기보다 인위적인 결단에 의해, 즉 정치적 야합으로 인해 한국의 ‘이념의 시대’는 몰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문화의 시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의 시대’로 들어섰다(「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1990년대 초반 한국 소비문화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로 자가용이다. 1992년 자동차 대수가 500만 대를 돌파하며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 산업은 정경유착의 산물이었고, 할부 판매 그리고 이와 결합한 광고라는 ‘판촉’(마케팅을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술은 은행과 언론에도 호황을 안겨주었다. 1991년 4월 시인 유하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이듬해 4월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내놓은 것은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와 한국식 자본주의를 예단한 것이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0대가 부상한 것도 바로 이때다. TV의 트렌디 드라마와 그 스타들이 출연하는 광고는 대중문화를 소비문화에 밀착시키며, 우리의 일상 깊숙이 소비라는 감각을 안착시켰다. 현대 한국 사회의 자본 중심적 가치관과 그 양상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화계도 변화의 기로에서 요동쳤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지만, 외화 직배로 상징되는 글로벌 기업의 시장 진입은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1989년 110편, 1990년 111편, 1991년 121편, 1992년 96편 제작된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 들어 60편대로 제작편수가 줄었고, 한국영화의 상영 비중 역시 1990년 28.7%에서 1993년 15.4%로 준 이후 1990년대 내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보여준 흥행 파워는 시장 개방의 결과를 명백히 보여줬다. 상영 외화 중 직배의 비중은 15% 내외였지만, 동원 관객 수로 치면 50%를 훨씬 넘겼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이 합자한 비디오 회사 CIC가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뒤이어 대기업들이 판권 경쟁에 뛰어들며 형성된 비디오 시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관 흥행 외에도 수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유화 조치로 생겨난 영화사들의 제작 기반이 되어준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다수의 프로덕션이 비디오용 에로티시즘영화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1990년대 초 영화기획사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기획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의 변화가 가져온 순기능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대통령 연례보고에 할리우드영화 <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 >(스티븐 스필버그, 1993)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자동차 150만 대의 판매 수익과 맞먹는다는 보고가 올라가면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케이블TV 프로그램이라는 창구 효과(window effect)를 기대한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흥행업’으로 비하 받던 충무로 영화산업은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지방 흥행업자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던 방식에서, 조사기획을 거치고 대기업의 결제 라인을 통해 자금이 집행되는 제작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이 흐름과 맞물린 것이 바로 ‘기획영화’라고 기록되는 제작 방식이다.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시작은, 1992년 신씨네의 기획으로 익영영화사가 지방배급업자와 삼성으로부터 제작비를 투자받아 만든 < 결혼이야기 >(김의석)다. 영화는 서울에서만 5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산업’적 모델을 만들었다. 현대 한국영화의 특질을 특유의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로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영화가 출발점일 것이다. 산업으로서의 성장이 길을 넓히면서, 한국영화의 미학도 확장되어갔다. 1990년대를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직전인 1980년대 말 ‘코리안 뉴웨이브’의 작가주의 감독군과 ‘장산곶매’ 등 독립영화 진영의 장편 극영화 활동이 있었고, 특히 장선우 는 이후 작가주의 감독들의 미적 터전을 마련하며 홍상수 , 이창동 등의 작업을 예고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작업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의 작가주의 영화를 연결한 가장 핵심적인 흐름이었다. 장선우 감독 도발적 화두와 거침없는 실험, 가장 논쟁적인 감독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선우는 19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진학해 1976년 시위 주도의 여파로 방위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최선전에서 활동했다. 영화판으로 발을 옮긴 것은, 1980년 복학 후 민주화운동에 합류했다가 6개월간의 징역을 살고 나서였다. 이효인 교수와 한 인터뷰(「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에 따르면, 합법적이고 생활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었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영화예술로 표현해야 한다는 판단 역시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1980년 11월 이장호 의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관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장선우는 이장호 감독의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1)의 각본(크레디트: 장민승 )과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후,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며 영화평과 시나리오를 썼다. 이장호 연출부의 조감독이던 선우완 과 같이 < 서울황제(원제: 서울예수) >(1986)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검열의 수모 끝에 극장 개봉에도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둘은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작가와 PD로 호흡을 맞추며 영화 복귀를 준비했다. 장선우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 성공시대 >(1988)다. 자본주의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그의 이름을 충무로에 각인했다. 그가 비평적으로 주목받는 지점은 영화적 화두와 미학적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영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우묵배미의 사랑 >(1990)과 하일지의 소설을 영화화한 < 경마장 가는 길 >(1991)에서는, 사회에 대해 직접 발언하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환했다. 전자는 서울 근교 하층 계급의 삶을 해학과 연민 어린 시선을 통해 보여주며 ‘묘사의 진실성’을 화두로 삼았고, 후자는 지식인 계층의 허약한 내면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포착하며 ‘주관적 객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 화엄경 >(1993)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았고,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씻김>을 거쳐, 1996년 최윤의 원작을 영화화한 < 꽃잎 >을 내놓으며 광주항쟁을 대중예술 매체인 영화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하던 1990년대 중반, 이 영화는 비평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며, 충무로의 상업영화를 통해 처음 광주를 환기시켰다는 작품의 가치를 배가했다. 한편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94년 성을 전면에 내세운 장정일 원작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로 흥행과 화제의 중심에 선 후, 1997년에는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문제작 < 나쁜 영화 >를 디지털 질감으로 선보였다. 세기말에는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 거짓말 >(1999)을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오래된 논쟁거리인 창작물의 표현 수위 문제를 부각했다. 당시 장정일의 소설은 음란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장선우의 영화는 무혐의 처분과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성냥팔이 소녀」를 모티프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을 연출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차가운 평가를 받았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지식인 남자 R의 비루한 현실 영화는 공항을 나서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R( 문성근 )이 돌아왔다는 ‘누군가’(실은 감독의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5년 만에 돌아온 R은 파리에서 동거한 J( 강수연 )와 재회한다. 하지만 J는 한국과 프랑스는 다르다는 석연찮은 말로 R과 섹스하기를 거부하고, 화가 난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다. R은 오랜만에 아내( 김보연 )와 자식들을 만나지만 이미 이혼을 통보한 탓에 전혀 반갑지 않다. R은 오로지 J와 섹스하기만 갈망한다.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나 다방과 식당을 전전하며 관계를 요구하지만, 여관행은 번번이 거부당한다. 한편 대구의 집에 내려가면 아내는 이혼을 거부한다. R은 자신이 써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J가 자신이 써준 글로 문학비평가로 데뷔한 사실을 알고, 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며 그를 떠나려고까지 하자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R은 좀처럼 J를 떠나지 못하고, 되레 한국을 떠나 같이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J는 끝내 R을 거부한다. 영화의 중심 인물은 지식인 남자 R이다. 그는 프랑스라는 1세계와 한국이라는 3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인데, 특히 3세계에 처한 그의 비루한 현실은 대구의 가난한 고향집을 통해 그려진다. R은 J를 만날 때마다 프랑스를 떠올리며 “우리 모처럼 산책이나 할까”라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걷는 건 산책이 아니라 노동일 뿐이라고 대꾸한다. R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 동거한 서울의 J 혹은 그녀와의 섹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J는 계속 R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그는 (한동안 회자된 대사인)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며 지식인의 허세를 노출한다. 그는 그녀를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섹스를 거부한다. R의 추궁에 J가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하자 그의 비참함과 지질함은 극에 달한다. R은 J에게, 결혼할 남자에게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동거한 이야기를 했느냐며 “그런 소릴 하면 너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그 사람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고통 때문에 바람을 피우게 되고 끝내는 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R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말이기도 한데,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 사유로 나를 키워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지만, 실은 아내의 혼전 남자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가 R의 글을 문예지에 내서 당선되었다고 사실을 털어놓은 후, 그의 요구는 애걸과 협박 사이에서 후자로 무게를 옮긴다. 급기야 R은 J에게, 자신의 글로 문학박사가 되고 문학평론가가 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재판을 걸겠다는 것이다. 결국 섹스는 하게 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둘의 지난한 만남은 계속된다. J가 R이 아닌 결혼할 남자를 택하겠다고 말하자, 이제 그는 J에게 한국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3,0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둘은 또 관계를 가지지만 결국 J는 R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 곳을 잃은 R이 시외버스를 타고 우유를 마시려 하다, 시골 아낙들이 있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우유를 흘리는 장면이다. 장선우가 “일종의 경련처럼 찾아온 깨달음”이라고 표현한 이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가장 불가해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도대체 R은 불현듯 무엇을 깨닫고 메모하는 것일까. R(문성근)과 그의 아내(김보연) 카메라와 합일하는 남자 R 이 영화는 완결된 이야기를 목표로 하지 않고, R과 J, 두 남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영화의 초반부 R이 J에게 대전까지 같이 가자고 할 때, 둘의 대사와 풍경을 잡는 숏들을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언이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은 이제 차가 많아지고 올림픽대로가 생기는 등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는 J의 말과 함께 보이는 자동차 광고판이 그것이다. 또 십자가 가득한 서울 도심의 야경을 보여주는 숏 다음에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는 R의 대사가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의 목적대로 곧바로 둘의 관계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줄곧 자동차 안, 다방과 여관방의 R과 J를 포착하며, 지식인 남녀의 내면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의 지적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의 창출보다 현실의 표면을 기록하는 것”에 치중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분명 이후 홍상수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R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나)의 내레이션으로 열고 닫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R이다. 장선우 역시 포착했듯, 하일지의 원작 소설은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3인칭을 탈피해 나라는 존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R이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합치는 방식으로 감독이 목적한 ‘주관적 객관성’을 실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주관적인 관찰자를 벗어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R이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R의 주관적 시점으로 마중 나온 환영 인파가 보이지만, 카메라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전환해 R을 잡는 식이다. 또 R을 포착하던 카메라가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R의 주관적 시점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R이 지나가는 사람이나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카메라 역시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다. R이 다방에서 껌을 사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껌 파는 여성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의 주관적 시점으로도 활용된다. 또 J와 만난 다방 장면에서, R을 비추던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다방의 어항을 비추다가 다시 돌아오면 카메라의 숏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다음 숏이 J를 향한 그의 시점 숏이라는 점에서 숏의 논리는 한층 복잡해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1인칭 화자가 날짜를 혼동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시간은 순전히 R의 주관적 감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카메라와 R의 주관적 시점이 합쳐지는 숏 운용은,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감독의 태도를 지지하는 동시에 시간의 모호성을 탁월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1990년대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 ‘코리안 뉴웨이브’ 작업은 1990년대에도 진가를 발휘했다. 장선우의 영화는 물론이고, 박광수 의 <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정지영 의 < 하얀전쟁 >(1992), <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4), 이명세 의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1990), < 첫사랑 >(1993) 등이 작가주의 미학과 대중적 감각 사이의 균형점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임권택 은 < 서편제 >(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1996년과 1997년은 2000년대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 이창동이 각각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 악어 > (1997), < 초록물고기 >(1997)로 데뷔한 해다. 특히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연출부에 참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이창동은, 소설가 출신다운 이야기꾼으로서의 내공에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결합하며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신중한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허평론’입니다. 평론보다는 리뷰 작업이나 피처 기사 쓰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이 시장에서는 저를 평론가라고 부릅니다. 평론가라고 부를 때 저에 대한 시장 가치가 발생하는 까닭이죠. 그에 대한 불만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돈도 벌고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것은 팔 수 있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는 말이 있죠. 누가 했느냐고요? < 성공시대 >(1988)의 김판촉( 안성기 ) 씨가 한 얘기입니다. <성공시대>는 장선우 감독의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입니다. 장선우 감독은 <성공시대>에 2년 앞서 < 서울예수 >(1986)를 선우완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했죠. 하지만 기독교계의 반발로 제목이 < 서울황제 >로 강제적으로 바뀌고 검열로 극장 상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등 비운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인 폭압이 ‘아무렇게’ 자행됐던 ‘암울했던’ 시대였죠. 암울했던 시대를 아무렇게 다룬 태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선우 감독이 다시 한번 사회 풍자를 시도한 작품이 <성공시대>입니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건 김판촉 씨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절대권력은 ‘돈’입니다. 돈이 독재자로 군림하는 시대, 김판촉 씨는 만 원 지폐의 세종대왕 자리에 자신의 얼굴을 대신 ‘뽀샵’ 처리하고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손을 들어 돈을 향한 절대 충성을 맹세합니다. 콧수염만 기르지 않았지 1:9 가르마를 고수하고 슈트를 제복처럼 두른 김판촉 씨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히틀러입니다. 대중을 현혹하는 언사도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취업 면접날 아무거나 팔아보라는 면접위원들의 요구에 주먹을 쥐어 술이 있다고 속이고 돈을 받은 후 빈손을 펴며 ‘당신은 제게 ‘상술’을 사셨습니다’ 아재 개그 눙치는 솜씨가 과연 돈의 히틀러다운 면모입니다. 여전히 돈의 장기 독재 시대, 빅 브러더 개념이 돈으로 발현한 현재에도 <성공시대>의 예리한 풍자는 유효합니다. 그럴진대 정확히 30년 전인 당시 장선우의 ‘꼴통’ 기질 다분한 비판 정신에 매료된 시인 김지하는 김판촉 씨의 상징성에 주목해 ‘판촉’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소비 욕구를 극단적으로 부추기는 극 중 극단적인 물질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면서 ‘판촉’을 앞세운 제목이 이 영화를 알리는 극단적인 마케팅 용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장선우 감독을 대신해 이 영화의 제목을 ‘성공시대’로 지었습니다. 확실히 영화 제목으로 ‘판촉’보다는 ‘성공시대’가 더 냉소적이면서 좀 더 반어적이라 더욱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극 중 ‘성공시대’는 성소비( 이혜영 ) 씨가 운영하는 술집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성공시대는 김판촉 씨가 근무하는 회사의 라이벌 기업 중역들이 자주 드나드는 바(bar)입니다. 김판촉 씨는 성소비 씨에게 접근, 애인으로 삼고 라이벌 기업의 내부 정보를 캐내 자사 신상품 개발에 이용합니다. “사랑도 팔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거야” 자본주의적 사랑론을 설파하는 김판촉 씨에게는 그래서 성소비 씨의 존재가 일회적입니다. 결국, 김판촉 씨의 회사가 라이벌 기업을 누르는 순간, 성소비 씨의 이용 가치는 사라지는 거죠. 김판촉 씨가 돈의 DNA로 움직이는 돈의 황제라면, 성소비 씨는 성호르몬을 풍겨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성의 여왕벌입니다. 버림받은 성소비 씨는 김판촉 씨와 대척점에 있는 기업의 젊은 중역에게 접근, 김판촉 씨가 몰락하는 데 미끄럼틀 역할을 하죠. 물질적 가치가 우선인 자본주의 시대에서 ‘상술’의 가치를 잃은 김판촉 씨는 서울 본사에서 저 먼 강원도의 보잘것없는 보급소 영업소장으로 미끄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공시대>는 물질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를 간파하여 초스피드로 성공한 김판촉 씨가 부메랑처럼 돌아온 소비사회의 욕망 파편을 맞아 몰락을 예고하는 작품인 셈이죠. 1980년대 중후반 당시의 살풍경한 한국 사회를 풍자로 꿰뚫어 단면 조감하는 <성공시대>는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선도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성공시대>의 메시지가 지금에도 가치를 유지하는 건 돈을 절대권력으로 삼은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신자유주의로 변태하여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발광하는 까닭입니다. 장선우 감독 본인 또한, 100억 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의 흥행 실패 이후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는 연출 활동을 접고 제주도에서 두문불출하는 중입니다. 그런 배경일랑 상관없이 저 ‘허평론’은 지금 이 지면에서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를 주제로 한 글을 써 원고료를 벌며 “모든 것은 팔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김판촉 씨의 철학을 맞춤한 자본주의적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일회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사용 가치가 그리 오래 남지 않은 또 한 명의 김판촉 씨일 터. 오랜만에 <성공시대>를 보며 제 처지를 뒤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반성, 돈에만 함몰하여 영혼을 팔아서 어찌할 거냐는 자각.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 <성공시대>는 2018년인 지금에도 전달하는 메시지가 뚜렷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성공시대>는 장선우 감독의 또 하나의 문제작이자 걸작입니다. <성공시대>(장선우, 1988) 영화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