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남자
- 감독
- 서원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김승현, 변서은, 한소연, 안민영, 김상일, 백준현, 신정만, 곽동현, 주혜민, 홍이주, 배정현, 최서원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때로는 기록영상의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작은 물건이나 단서 하나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탐문을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가량이 흐를 때까지는 건조하고 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소한 정보들 뒤에 있던 거대한 맥락이 폭발하듯이 드러난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지금까지의 플롯들이 복기되고 재정의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순차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작은 부분정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하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구조의 이야기는 기록영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를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미군 기록영상에서 시작한다. #1. 불친절한 세 개의 영상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서 ‘제이드 민사처병원’ 필터를 체크하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영상이 뜬다. (편의상 앞으로 각 영상을 알파벳 부호로 지칭하겠다) ● <A> , DEDICATION OF X CORPS CIVILIAN HOSPITAL, KOREA; [ETC.] ● <B> , BUILDING OF NEW KOREAN HOSPITAL, HYUN-NI, KOREA; [ETC.] ● <C> , ARMED FORCES ASSISTANCE KOREA, IP SONG NI, SOUTH KOREA 여기에는 건설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1층 벽돌 건물의 건설에 관한 미군의 원조 관련 장면이 포함돼 있다. 병원(Hospital)이라기보다는 의원이나 진료소(dispensa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영상의 제목, 그리고 해당 장면의 슬레이트 정보와 화면 속 표지판 등 문자 정보를 간추리면 1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A> , 세 곳의 서로 다른 원조 현장이 촬영됐는데, 그 마지막 순서가 제이드 민사처병원(Jade Civilian Hospital)의 민간 이양식 광경이다. “미 제10군단과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협조로 제4통신대대가 건립했다”라는 내용의 1953년 6월 3일자 준공표지판이 찍혔다. <B> , 1954년 3월 18일에(제목에 따르면) ‘현리에서 새 병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제4통신대대장 모리스 중령이 한국인 병원장 ‘Dr. Kim’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만으로는 어느 병원인지 알 수 없다. <C> , ‘입송리’의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 후원 현장 세 곳 [1] 을 담았다. 그중 세 번째 시퀀스가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고 있는 제이드 병원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찍은 두 번째 시퀀스에는 <영상 B> 에서 제이드 병원 시퀀스에 등장했던 모리스 중령이 나온다. 세 영상의 화면과 파편 정보는 서로 같은 듯 달라서 뭔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촬영 소대는 카메라의 시선을 좁혀 ‘원조라는 행위와 원조의 유형’만을 담았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당연한 정보들은 슬레이트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로써 누락된 전체적인 맥락은 이제 단서 수집과 추리의 몫이다. 일단, 순수하게 영상들의 쇼트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이 세 영상이 같은 장소의 같은 병원 건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A>와 <C>에서 보이는 ‘준공표지판’과 ‘병원팻말’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A>와 <B>에 나오는 건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가 담긴 <C>를 통해 <A>가 병원의 앞을, <B>가 병원의 뒤뜰을 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안내팻말 (왼쪽: <A>, 오른쪽: <C>) 준공표지판 (왼쪽: <A>, 오른쪽: <C>) 천막의 위치에 의해 공사 장소가 병원의 뒤쪽임을 알 수 있음 (모두 <C>) 그러니까 1953년 6월 3일, 미 제10군단 민사처는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과 협조하여 예하 제4통신대대를 통해 이 병원, ‘Jade Civilian Hospital’ 건물을 짓고 민간에 이양했다(<A>). 이듬해 3월, AFAK 프로젝트의 형태로 병원 뒤뜰에 공사 원조가 있었고(<C>), 그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4통신대대장이 직접 병원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했다(<B>). 마지막으로, 10군단 민사처가 관리 주체임을 명확히 밝힌 안내표지판(<A>, <C>)에 의해, 이 병원은 ‘민사처병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정리됐다는 착각 이제 이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추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C>는 제목에서 ‘IPSONG-NI(입석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입석리국민학교 건설 현장에 대한 첫 시퀀스에만 해당하는 무성의한 작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B>의 제목은 ‘HYUN-NI(현리)의 병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라면 전쟁 중후반기 미 제10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도 발견했다. OEC(유엔군사령부 경제조정관실)의 강원도 의료 시설 현황 보고서(이하 「OEC 보고서」라 칭하겠다)에는 ‘인제-제이드 병원(장로교 선교회)’이라는 항목 아래 제이드 병원이 ‘Sang Nam, Maechon, Naepyong and Kirin’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기린면에 있었다 는 증거를 잡았다. 이 이름이 붙은 병원이 여러 군데 있었던 이유는 ‘제이드’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이드 병원을 이양받은 민간 조직이 장로교 선교회였다는 정보도 덤으로 확인된다. 하나 더, <B>의 인터뷰 장면에 등장했던 ‘Dr. Kim’이 누구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의 푸티지를 활용하여 제작됐던 미국 TV 시리즈 The Big Picture 의 한 에피소드,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에 이 푸티지가 실린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2] 여기서 장면에 덧씌워진 내레이션에 그의 본명이 나오는데, 미국인의 발음으로 ‘김방모’, ‘김봉모’와 유사하게 들릴 뿐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OEC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Dr. Kim Bong Mu, director, grad. from Nippon University, Japan(일본대를 졸업한 병원장 김봉무 박사)’라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3. 기록문서의 발견, 그리고 힘겨운 재구성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이런 컬렉션에서 최대한 정확한 맥락을 캐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ional Archives의 원조사업 관련 문건에서 영상 속의 원조사업 관련 정보를 찾는 것이다. 특히 AFAK 프로젝트는 열람이 가능한 문서만 해도 3개 문서군에 흩어져 있는 수백 건 이상의, 어림잡아 50만 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OCR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파일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최대한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그래도 AFAK 프로젝트 보고서는 UNCACK 관련 문서에 비해 정보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식별된 장소나 건물명으로 찾는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는 영상에 AFAK 프로젝트 안내지, 그중에서도 프로젝트 번호가 찍힌 경우다. 다행히 <C>에는 프로젝트 번호 ‘9219’가 영상에 찍혔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제이드 민사처병원과 관련한 3건의 AFAK 프로젝트 보고 문건을 찾았다. 그리고 대혼란에 빠졌다. 모두 동일하게 장소가 ‘Chaun-ni’라고 적힌 것이다. AFAK 안내지(<C>)에 프로젝트 번호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AFAK #921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6. AFAK #9221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3. AFAK #923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18. (*이상, 각 보고문서의 첫 쪽 일부 모습임) 아무리 전에 그럴 듯한 결론이 나 있더라도, 이 증거는 반박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슬레이트 어디에도 장소 명이 구체적으로 적힌 곳은 없다. 오히려 National Archives의 관리용 제목이나 「OEC 보고서」에 ‘Inje-Jade’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AFAK 문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민간 이양식 때 병실 사진을 찍었으나 보고 시점(8월 13일, 14일)에 사용할 수 없어 추후 제출하겠다”라는 문구가 있어 <A>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다. <B>, <C>의 병원 뒷편에서 하던 공사는 증축 또는 구획변경을 통해 수술실과 의료용품 공간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용품 공간에는 침구 보관 및 회의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이 병원에는 같은 시기에 다른 소규모 AFAK 프로젝트 두 건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대략 1954년 2월 중순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 승인받았으며 3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됐다. 미 제45공병단이 일부 자재를 공급한 시기는 4월. <B>, <C>는 아직 자재도 오지 않은 공사 초기의 장면이다. 보고서의 제출자가 ‘제57통신지원중대’인 이유는4월 29일자로 제4통신대대로부터 이 후원 프로젝트를 이관받았기 때문이고, 이때 재고대장 등이 빠진 불완전한 상태로 서류가 넘어왔다는 메모도 있다. 이제 다시 따져봐야 한다. ‘Chaun-ni’는 어디일까? 강원도 지역에서 미군, 미국인이 이렇게 표기할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추려졌다. ● 홍천군 내면 자운리 ●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홍천 일대의 기록에 언급되는 군 조직은 보통 미 제9군단이므로 10군단이 설립한 병원의 장소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인제군’과의 접점은 없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명분을 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은 원래 인제군에 속해 있다가 1954년 10월에 제정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4] 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으로 편입됐다. 본래 인제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었으므로 미군의 입장에서 그 인근은 대략 ‘인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영상과 문서가 생산된 시점은 개편 전이었으므로 실제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았다. 내면 자운리가 10군단 관련 지역, 그리고 「OEC 보고서」에서 언급한 제이드 병원들의 분포 지역과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인제군이 아니었던 두촌면 자은리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4. 마지막 반전, 드와이트 멀스배리 선교사의 흔적에 닿다 그런데 ‘제이드’는 무슨 의미로 쓰인 이름이었을까? 혹시 병원을 이양받아 운영했던 장로교 선교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드디어 ‘드와이트 멀스배리(Dwight R. Malsbary)’, 한국 활동명 ‘마두원’인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관심 범위에 들어왔다. 그는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한국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고 저명한 제자를 배출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교회, 신학교, 병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같은 교단 내 교파 갈등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그가 강원도 사역에 전념했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의 선교활동 자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논문은 거의 없고, 그의 삶을 다룬 서적은 있으나 고증에 충실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2025년 3월에 그를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 [5] 중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두 분이 앞의 책과 다른 여러 문헌을 종합하고 견해를 더해 발표한 것을 촬영한 영상, 그리고 홍천 출신의 강정식 시인이 《홍천신문》에 기고한 여러 글이 사실상 전부이다. 이 소스들은 앞에 언급한 서적 등 참고 문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구술에 의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멀스배리 선교사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을 중심으로 사역활동을 했으며, ‘미군의 요청으로 제이드 병원 을 운영했다 [6]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로 내용과 견해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다. 6.25 전쟁 이후 멀스배리 선교사는 홍천군 두촌면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무려 26개에 달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44번 국도를 따라 속초까지 [7] 주변의 산골짜기에 분포돼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44번 국도와 미 제10군단 및 멀스배리 선교사의 상관관계 (* 내면 자운리는 우하단에 떨어져 있음) 이런 맥락에서 ‘미 제10군단의 요청으로 군단이 운영하던 제이드 병원을 맡아 관리하게 됐다’라는 주장 [8] 도 개연성이 있다. 그와 관련됐던 병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홍천군 홍천읍(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속초의 세 군데가 언급되고 있으며, 두촌면 자은리의 제이드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의사 부족 등의 문제로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9] 실제로 미 제10군단 본부였던 인제군 관대리, 멀스배리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병원들의 위치, 「OEC 보고서」가 언급하는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등을 보면 실제로 44번 국도에 인접하거나 부근에 있는 반면에, 인제군 내면 자운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라면 ‘Chaun-ni’는 ‘두촌면의 자은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위치 논란’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의 자료전쟁의 승자는 처음에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두촌면 자은리다. #5. 가장 나중에 밝혀진 ‘Jade’의 의미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던 ‘Jade’라는 명칭의 의미. 혹시라도 이에 따라 또 무슨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미군의 호출부호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다. [10] 최소한 지금까지 경험한 전문(telegram)에서 그런 종류의 부호를 본 적은 없다. 부대라는 것은 이미 부대명 약어로 충분히 구분되고, 대외비를 송수신한다고 해도 어차피 전문에 적힌 APO(Army Post Office)만으로 각 시기의 부대 정보가 대략 노출된다. 그보다 1950년대라면 필요한 경우에 어떤 기계나 알고리듬 [11] 에 의해 전문 전체를 암호화하여 송신하던 시대 아니었나? 이를테면 그 유명한 독일의 에니그마(Enigma)라든지, 태평양전쟁기에 미군이 일본의 암호체계(또는 기계)에 붙인 코드네임인 퍼플, 레드, 제이드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제이드’는 지금의 맥락과 무관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호출부호라는 것은 항공 관제탑이나 선박 구분에 쓰이는 것 아닌가. 영상 <A>, <B>, <C>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약 없이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이 물음은 어느 순간에 허무하게 풀렸다. 답은 제이드 병원 원조 건설사업을 진행했던 제4통신대대의 부대사(史)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이 컬렉션의 거의 모든 영상이 통신대 소속의 사진 및 영화 촬영 소대에 의해 촬영됐다고 해도, 통신대의 본 임무는 통신선로를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제4통신대대는 미 제10군단 본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해당 지역, 이를테면 함흥-원산, 인천-김포 등의 영역 내에서 본부와 각 부대를 이어 구축했던 통신망의 다이어그램을 문서에 남겨 놓았다. 통신망 다이어그램은 각 노드, 즉 망이 모이고 분산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 또는 그곳의 통신장비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놓고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놓은 그림이다. 본부가 어디로 옮겨 가든 제4통신대대의 통신망에서 늘 통신선이 집중되는 주 노드에는 ‘JAD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추정컨대, ‘JADE’는 미 제10군단 본부에 설치되는 통신시설 또는 그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부호일 것이다. 즉, ‘JADE’는 다른 노드에서 본부에 연락을 취할 때 호출명으로 사용됐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신 호출명 ‘제이드’는 그 자체로 군단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이드 병원’의 정체는 10군단 민사처가 설립, 운영하던 모든 병원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신 노드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로 영상 속의 AFAK 안내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프로젝트 번호 아래 후원 부대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R&M OPN Co. 4th SIG BN CORPS” - 즉, 군단직속 제4통신대대 무선 및 교신(Radio & Message) 작전 중대. 에필로그. 짧은 기록영상 세 개에 이렇게 골몰할 일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마치 필름 현상 과정을 거쳐 잠상(latent image)이 드러나듯이 보다 다층적이고 구체적인 정황을 읽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강원도에서는 두 가지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에 와서 사상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전쟁 한복판에 있던 미군, 그리고 그들이 전시 후방 안정화 및 전후 주둔지 스킨십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골몰했던 민사 활동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를 ‘평양 마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랑한 나라 한국에서 1929년부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계속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사연이 있다. 미군과 선교사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속초까지 전쟁이든 선교든 각자의 일을 했다. 미 10군단은 서서히 본토로 귀환했고, 선교사는 외로운 사역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두촌면에서 홍천읍으로 가던 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 [12] 2025년, 한국의 한 아키비스트는 제이드 병원 영상을 보고 1950년대의 44번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오랫동안 가려졌던 사연에 접근한다. 흔한 영화 줄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이를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44번 국도에서 만나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흥행은 어렵겠지만. * <A>, <B>, <C>의 VOD와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은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승구, 「말스베리 선교사와 김홍전 박사」,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 Youtube 영상 2. 이종전, 「마두원의 해방 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 같은 세미나 / Youtube 영상 3. 강정식 시인, ⟪홍천신문⟫의 여러 기고글 4. “20. Kangwon-Do”,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 469, Entry P 321, Box 34, National Archives. p. 70.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AUS014_81_00C0311) 5. “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Project Completion Reports, FY 55: July 1954”, Project Files, 1954 - 1963,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National Archives. p. 118, 123, 126.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04_103) 6.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Nov.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13.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9) 7.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Aug. -Sep.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27.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7) *** [1] 두 번째 장소는 최소한의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중 어느 곳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2] 정영신(2021), 「미군의 대한원조 영상 속에서 재건되는 전후 주체: The Big Picture 시리즈의 ‘미군대한원조’와 ‘한국과 당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41, pp. 117-159. [3] 타이핑된 문서가 고품질의 OCR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면 AI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 OCR 프로세싱의 결과를 토대로 AI가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PDF는 의외로 구조적인 포맷이 아니므로 현재 AX(AI 전환)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AI를 위한 기존 문서의 전처리 및 구조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4] 6.25 전쟁의 결과 경기도와 강원도의 38선 이북 일부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됐는데, 이를 ‘수복지구’라고 한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는 전후 수복지구를 감안한 행정구역의 조정 사항이 포함됐다. [5]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6] 선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미국 내한 선교사들의 ‘트라이앵글 선교’, 즉 선교지역에 기지를 세운 후 이를 거점으로 교회-학교-병원을 함께 키워 연계하는 선교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멀스배리 선교사도 해방 후에 부산, 강원 등지에서 끊임없이 교회, 학교, 병원을 건립하는 등 철저히 한국 내 전통적인 선교전략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7] 이종전, 앞의 세미나; (글쓴이 추가) 발표 자료에 해당 교회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44번 국도는 6.25 전쟁 후반기 미군의 거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보급로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를 따라 군집한 촌락이 주 선교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다. [8] 멀스배리 선교사는 이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고, 그의 강원도 선교 범위가 홍천과 인제 일대의 미 제10군단 작전 지역을 따라 형성됐으므로 지역 거주민들을 대변하여 미군의 각종 원조사업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전 교수(앞의 세미나)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함. [9] 면허 의료진의 부족 및 민간 이양 후의 재정문제로 병원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폐쇄됐다는 등의 상황은 「OEC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됐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중에는 위 세미나 및 회고글에서 말하는 병원 중 홍천면 병원이 없고 대신 내평, 상남 등 다른 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두촌면 자은리 병원, 범위를 넓히면 속초 병원까지만 제이드 병원이고 다른 곳은 제이드 병원과 무관한 선교사 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10] 이승구, 앞의 세미나; 발표에 참고했던 서적 중 김광섭, 전민수 공저, 『마두원 선교사: 한국음악의 아버지, 강원도 선교의 아버지』(영창서원, 2019)가 출처인 듯하다. [11] 이 의미로 흔히 쓰이는 알고리즘(algorism)은 수학의 계산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 해결의 흐름 및 절차를 뜻하는 경우에는 비록 알고리즘이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알고리듬(algorithm)이 맞는 표현이다. [12] 이승구, 앞의 세미나에서 앞의 책 인용.
1964~1985년 사이, 특히 6~7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을 한답시고,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은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Indigenous People)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Waimiri-Atroari) 사람들을 내쫓고 2천 명 이상 학살했다. 심지어 그들은 축제 중에 헬기에서 대량 투하되는 네이팜탄으로 죽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1950~60년대에 펼친 문자 해독 교육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역사적 순간에 문해 교육과 민중의 정치적 의식화 사이에 긴밀한 끈을 묶는”일이 문해 교육이라며, 이 운동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계속 문해 운동을 이어가던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교육 중에 작성한 글과 그림,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브로 간직했다. 아나 바스(Ana Vaz)는 1964년에서 1985년 사이의 아카이브 자료 3천여 점을 디지털 캡처하여, 선주민들이 부재하는 브라질의 현재 풍경과 포개어 프레임에 담는다. 아나 바스의 전작 <산을 자세히 응시하라, Olhe bem as montanhas>(2018)는 EXiS(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20년에 나온 신작 <왜?>는, 식민지에 도착한 선박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모종의 악기 소리, 땅 표면을 질질 끌다 못해 파헤치려 하고 하늘 언저리까지 샅샅이 훑는 듯한 노이즈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삽입곡의 제목은 <근원적인 밤, A Noite Original>(2004), 브라질 구체음악을 대표하는 길례르미 바스(Guilherme Vaz)가 작곡했다. 2018년 타계한 길례르미 바스는 아나 바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68년 리우데자네이루현대미술관에 실험예술 분과를 창설하고 1970년대 초반 독일 쾰른 피드백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길례르미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 요셉 보이스 등이 포진한 당대 유럽 전위예술의 식민성에 이론과 실천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여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지의 조로-팡간제(Zoró-Panganjej), 가비오-이콜렘(Gaviao-Ykolem), 아라라스(Araras) 등 여러 선주민 공동체와 시각 예술 작품과 음악을 공동 창작하고, 악기를 함께 만들었다. 또, 길례르미 바스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와 줄리오 브레사네(Julio Bressane) 등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 운동과 이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협업하여 그들이 연출한 영화 음악 여러 편을 작곡했다. <왜?>의 카메라는 식민 역사를 기념하는 모더니즘 조형물과 군사 독재 개발주의의 상징인 마천루가 즐비한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길례르미의 스코어와 함께 브라질의 도시와 숲, 강 기슭을 떠돈다. 카메라의 눈과 소리가 동행하는 여정 속에서, 선주민들을 학살한 군부의 개발 독재 시기와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 대상에서 선주민을 배제하고 열대우림 파괴를 밀어붙이는 현재가 함께 거하는 시공이 섬광처럼 계시된다. 이 ‘풍경’들은 길례르미의 음악,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그리고 쓴 도큐먼트, 그들이 주인공인 사진 이미지들과 마찰하며 지층 속에 머금고 있던 “어떤 세계의 비밀(즉, 그 대수롭지 않거나 영광스런 외양 뒤에서 그 법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을 폭로하는 간극과 충돌의 힘” (『이미지의 운명』,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을 융기한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얼핏 보아서는 ‘비(非)장소’나 ‘반(反)장소’로 불릴 법한 고속도로 주변의 모노크롬 풍경이 특정한 역사 경험을 품은 ‘장소’로 단박에 탈바꿈한다. 아나 바스의 첫 작품 <사크리스 풀소, Sacris Pulso> (2007)서부터 길례르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어떻게 일컬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하다 ‘즈려밟기’는 어떨까 싶었다. <사크리스 풀소>는 십 대 때 영화와 철학을 공부하러 호주로 이주했다 브라질로 돌아온 아나 바스가 수도 브라질리아 땅을 다시 밟고, 부모와 재회하는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세르지우 바지(Sérgio Bazi)와 줄레이카 포르투(Zuleica Porto)가 연출한 16mm필름 단편 <브라질리아리우스, Brasiliários>(1986) 일부를 인용하는데,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쓴 1962년과 1974년 브라질리아 방문기 서사, 길례르미의 사운드가 이 푸티지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겹쳐진다. 그리하여 구축되는 브라질리아의 과거와 현재는 유령도시의 그것과 닮아있고, 영화는 수도 브라질리아 자체가 SF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 바스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길례르미 카레라(Guillherme Carrera) 같은 평자들은 “SF 다큐멘터리”로 일컫기도 했다. Brasília amidst ruins: The sci-fi documentary of Adirley Queirós and Ana Vaz(2018)라는 글에서 카레라는, 바스가 브라질 역사와 사회의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SF”를 도구로 쓴다고 주장한다. 카레라가 바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인용한 Archaeologies of the Future(2005)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미래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우리 자신의 현재 경험을 낯설게 재구성하”는 장르가 SF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카레라는, 탈식민을 위한 토착문화운동이었던 브라질 트로피컬리즘에 정통한 연구자 로버트 스탬(Robert Stam)과 엘라 쇼햇(Ella Shohat)의 논의[Unthinking Eurocentrism: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1994)]에 기대 “식민지, 신식민, 탈식민 국가의 구조적 단점이, 식민화 과정과 불평등한 분열이 만드는 '소수자’ 서사를 되레 SF로 다룰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호세 리살(José Rizal)이 민족 공동체를 상상하며 쓴 필리핀의 첫 근대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라야 마틴(Raya Martin)이 인용하며, 현대 필리핀의 모순을 집약한 광산 지역에서 식민종주국 스페인으로 순간이동하는 커플을 다룬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2011)를 떠오르게도 하는 언설이다. 한편 아나 바스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모더니즘•트로피컬리즘 등의 백가쟁명 속에서 “새로운 영화(시네마 노부)”를 주창한 글라우버 로샤(Glauber Rocha)의 <지구의 나이, A Idade da Terra>(1980)에 경의를 표하는 단편 <돌의 나이, A Idade da Pedra>(2013)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데 <돌의 나이>에서 바스는 브라질의 영화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와 동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진보와 혁명을 꿈꾸던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1965)과 「꿈의 미학」(1971) 선언에서 펼친 "가난의 미학"이 실제로는 선험적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 고정된 성역할 및 인종 재현에 기댄 예술을 창조했다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바스는 차라리 ‘사물’이 시간과 공간을 대체하여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없는 SF를 ‘발명’할 수 있기에, “다른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계시”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고 서원한다. 이 작품은 아프로퓨처리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이주와 난민의 역사를 사변 서사(SF)로 재구축하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다공성 계곡>에 등장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돌의 나이> 속 ‘돌(pedra)’과 친연성이 크다.) 여러 평자들은, 아나 바스의 작품들이 실은 시네마노부 운동의 국가 및 젠더적 대표성보다는 북미의 애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나 수 프리드리히(Su Friedrich)의 작업, 즉 1970 년대 아방가르드 페미니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목적론적 서사를 부수려 시도하는” 영화들과 가깝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 마야 데렌(Maya Deren)이 실사 이미지와 사운드를 겹치면서 현실과 분리된 영화적 세계와 집단적 역사 감각을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분석한다. 2020년 사사로운 리스트에 아나 바스의 <왜?>와 더불어 꼽은 <방파제, Quebramar>(2019)를 연출한 크리스 리라(Cris Lyra)도 브라질 여성 감독이다.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후계자라 불리는 리라는 <방파제>에서 젊은 레즈비언들이 새해를 맞으러 떠나는 길을 동행한다.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과하며 성 정체성 논의와 그로 인한 개인적 체험, 브라질 사회의 긴장은 새로운 시공의 서사로 재구축된다. 또, <방파제>는 짧은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의 몸과 목소리로 브라질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진동시킨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비전형적 여성성을 탐구하는 리라의 차기작 <내 말을 들어줘, Ouça>는 팬데믹 시대 퀴어 여성들의 편지에 기반한 러브스토리라 한다. (<방파제>와 <왜?>는 모두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Mubi 한국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성영화의 선두주자인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이 제작 중인 신작 <초코바르, Chocobar>는 2009년에 살해된 선주민 활동가 하비에르 초코바르에 관한 비디오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수집해 재편집하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한데 아나 바스는, 비디오나 필름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종이에 선주민들이 그리고 쓴 드로잉 몇 점을 ‘풍경’ 이미지, 소리와 충돌시킨 몽타주만으로 큰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글과 그림은 자신을 학살하고 쫓아낸 국가의 총과 칼•전투기 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네이팜 때문에 폭사한 아마존의 물고기들, 열대우림을 베어내는 자본의 거대한 전기톱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낱낱이 증언한다. 현실 풍경과 겹쳐지되, 투시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선주민들의 드로잉이 재창출하는 땅의 그림(말 그대로의 ‘지도’)은, 작금의 ‘풍경’ 속에 잊힌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다시 일깨운다. 역사 기억을 저장하고 새로운 예술 표현을 찾는 ‘매체’로 “쇠락한 기술적 지지체”를 ‘재창안’할 수 있다는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논의와 만나는 최근 사례가 <왜?>라고 필자가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국 작품, 김민정 감독이 16mm 필름과 디지털을 ‘재집합’하여 제주 4.3을 다시 호명하는 <레드 필터가 철회됩니다>(2020)도 또 다른 “매체 재창안”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선주민들의 이차원 평면 글•그림과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한 실사 이미지를 결합하며 매체의 역사를 더불어 기억하는 아나 바스는, 디오라마나 파노라마같은 삼차원 측면 감각이 식민과 개발을 위한 지도와 조감도ㆍ설계도에서 연원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필리핀 출신 남성 감독 미코 레베레자(Miko Revereza)의 근작들은 사물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의 이동을 형상화하면서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현실 지도의 국경을 넘나들고, 마티 디옵(Mati Diop)이나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같은 디아스포라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서사와 사운드의 운용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원근법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반면, 대만 작가 수유신(Su Yu Hsin)의 <잠자는 물II, water sleep II Akaike river under Xizang Road>(2019), 국내에서 주목받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정여름 연출) 등 지도를 작성하는 원리인 수직원근법과 게임의 3차원적 가상ㆍ증강현실 기법, GPS를 이용한 이미지를 적극 수집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묘파하려는 시도들도 근간에 여럿 있었다. “왜?”로 번역되는 이 영화의 제목 “Apiyemiyekî?”는, 1960년 이후 선주민 문해 교육을 담당한 활동가 에기디오(Egydio)가 아카이브에 보존 중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남긴 단말마 같은 글귀(“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왜 죽였지? 왜?”)에서 따왔다. 에기디오 교수는 <왜?>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인터뷰이이다. 그가 아카이빙한 글과 그림들은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선주민 학살 진실 규명 소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에기디오와의 협업 과정을 운전 중에 감독과 전화통화로 확인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닦은 BR-174 고속도로 위로 흩어져 간다. 이 사변적 (논)픽션은 어떤 ‘풍경’ 속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증명하고야 만다. 영화의 카메라와 사운드 트랙이 브라질의 땅과 숲, 하늘과 물에 잠겨 있는 그들을 애타게 찾아 헤맬 때, 사진적 감각에 섞여드는 자연의 음향이 화룡점정할 때,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자취를 입은 아마존의 격랑이 이윽고 색을 얻을 때, 결코 잊힐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관객에게도 찾아온다. 영화 말미, 브리질리아로 귀환한 카메라는 분노가 내뿜는 바람에 실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카메라의 운동은, 우리가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맞서 저항할 미래의 동력이 되어줄 터다. 그래서 아나 바스의 <왜?>는 멕시코 선주민들의 역사와 운동을 ‘재집합’하는 ‘로스 인그라비도스 집단'(Colectivo Los ingrávidos)의 영화들과도 닮았다.
‘우미관’(1912~1982)은 70년 남짓이라는 긴 시간 서울의 종로 관철동에 위치하면서 도시 문화사의 한 축을 설명하는 키워드이자 어떤 장소성의 표식으로 기능해 왔다. 예컨대, 김두한(1918~1972)을 ‘영웅 협객’으로 그려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부작(1990~1992)이나 TV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에서 1930년대의 우미관은 종로 주먹의 요람과 같은 장소로 등장한다. 실제로 우미관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주먹패가 있었고, 종로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내선(內鮮)’ 간 치열한 주먹 다툼도 있었다. 김두한이 해방 후 국회의원이 되어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영웅 협객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써나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김두한’ 혹은 ‘김두한의 우미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동안 대중문화에서 우미관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협객의 무대’로 표상, 전유되어 왔다. 열여덟의 나이로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고 싸움 실력 하나로 일본인도 무릎 꿇게 했다는 협객 김두한. 일본인 자본가들이나 주먹 패거리로부터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하려는 종로 주먹들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 이러한 재현이 우미관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우미관을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말 우미관은 김두한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의 성지였을까. 아니, 어쩌다가 우미관은 종로 협객들의 공간이 된 것일까. 어쩌면 이런 식의 기억하기는 극장이 ‘관객(만)의 공간’이며 ‘관람 행위’가 기대되는 공간이라는 상식, 즉 ‘극장=관람 공간=관객의 공간’이라는 상식을 넘어서는 극장 경험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있던, 그래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실천이 근대의 패션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뿐만이 아니라, 부랑자, 불량소년, 걸인 등 도시 문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위 주체들에게 극장이라는 장소의 경험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기록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은 작가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 집필 전인 1916년 여름, 그는 잠시 경성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무정』의 일본어판 번역자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인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는 작품 속 영채의 유서를 근거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6월 말부터 7월 사이라고 추정했는데, 어쩌면 소설 속 다음의 대목은 이광수가 경성에 머물면서 체험한 종로 밤풍경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밤은 서늘하다. 종로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기다란 칼을 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중략)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1 야시(夜市)가 열리는 종로의 소음들 속에서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를 가려들으며 우미관의 ‘대활극’을 연상하는 『무정』주인공 이형식을 그 여름의 이광수 자신이라고 했을 때, 그 ‘대활극’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매일신보 광고를 살펴보면, 1916년 6월 말 우미관의 주요 상영 프로그램은 23일부터 개봉된 ‘세계적 모험 탐정 대활극’ 연속영화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뉴욕의 탐정소설가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유럽 고대 왕국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치는 영화 <명금>은 미국 유니버셜사가 총 22편 44권으로 제작한 연속영화로서, 1910년대 후반 미국발 활동사진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우미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장식한 흥행작이었다. 우미관은 1916년 개봉 이래 <명금>을 여러 차례 재상영했고, ‘명금 대회(名金大會)’라는 이름의 상영 행사를 열어 많은 관객들을 유인했다. 한국 근대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1933)에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전동 골목 아이들이 우미관에서 본 영화를 흉내 내며 ‘명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 <명금>에 나오는 인물—‘기지꾸레’, ‘싸치오 백작’, ‘후레데리꾸 백작,’ ‘로로’—이 되어 골목길을 누빈다.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사상의 월야』(1941)에서도 주인공 송빈이 우미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다. 우미관의 2층 좌석에서 송빈과 함께 영화를 본 일행은 누가 ‘기지꾸레’이고 누가 ‘후레데리꾸 백작’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명금>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우미관에서 이 영화의 해설을 진행했던 서상호에게도 <명금>은 변사 인생을 대표하는 흥행작이었다. 스물여덟에 경성고등연예관에서 변사 생활을 시작한 서상호는 우미관에서 생애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우미관은 김덕경, 우정식, 최병룡, 최종대 등을 견습 변사로 두고 영화 해설의 묘미를 선사했는데, 그중에도 서상호는 우미관의 ‘달러 박스’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우미관과 제2 대정관 사이를 오가며 몸값을 높였고, 단성사가 개관하자 극장주 몰래 변사, 악사, 종업원 등을 빼돌려 단성사로 옮겨버렸다. 이런 그였으나, 우미관에서 다시 ‘명금 대회’를 열었을 때에는 언제 배신했던가 싶게 우미관으로 돌아와 <명금>을 해설했다. 방탕한 생활과 아편 중독으로 생계가 기울고 결국 극장주도 관객도 꺼리는 변사가 되어 버렸지만, ‘우미관의 변사’로서 서상호를 빛나게 해주는 영화가 <명금>이었다. * 서상호의 변사 인생처럼, 우미관의 시대도 점차 기울어갔다. 북촌 조선인 상설관 중 단성사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이래, 우미관은 상영되는 영화보다도 극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함께 악명을 높여갔다.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필름취체규칙(1926)을 제정하고 영화 검열을 본격화하는 때를 즈음해 도시의 소년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식민 당국은 영화가 미칠 악영향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근거로 검열을 정당화하며, 영화를 보고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든가 범죄 수법 등을 학습하여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든가 하는 범죄자가 양산되는 것, 그리고 영화에 재현된 퇴폐적이고 음란하며 불량한 풍속이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인 사회의 엘리트들 역시 영화가 모방 범죄를 야기하고 ‘미풍양속’을 위협하는 악한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년범죄를 영화의 ‘모방범죄’로 치부하는 사회 담론들은 영화가 ‘불량소년’을 제조하는 마술적인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듯 논했다. 종로의 영화상설관을 근거지로 절도 행각을 벌인 ‘불량소년단’의 검거 기사들은 제목부터 이 사건들이 범죄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의 ‘모방범죄’라고 암시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했다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을 흉내 낸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모방한 범죄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도 소년들이 돈을 훔쳐 극장 구경을 가려 했다는 진술만으로도 범죄 동기가 영화, 특히 이들이 좋아하는 활극영화에서 비롯된 듯 보도되곤 했다. 어떤 범죄의 원인이 ‘활동사진 중독’ 때문이라거나, 범죄의 발생 장소나 과정이 영화상설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영화와 극장의 유해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일 정도다. 영화의 필름을 검열하는 것은 총독부 도서과에서 이루어지는 출판경찰의 업무였지만, 영화가 실제 상영되는 흥행장 및 흥행 행위에 관한 단속은 관할 경찰서 소속 풍속경찰의 업무였다. 풍속경찰은 임검(臨檢)을 명목으로 관련 영업장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입장권 없이 극장에 들어가려는 자를 단속하는 것부터 상영 행위가 검열 기준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판정하는 것, 극장의 위생 상태와 관객의 음란폐풍 행위를 감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임검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매우 포괄적이었다. 말하자면, 극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임검 업무였다. 우미관과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불량소년들이 임검으로 대표되는 풍속경찰의 시야 안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우미관의 불량소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패거리의 ‘불량’은 식민지 경찰과의 긴장과 대치 관계를 통해 식민지인의 ‘불온’을 구성한 중층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종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경성이 근대 도시로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들의 근거지였던 우미관과 그 주변이 상대적으로 종족적이면서도 계층화된 공간으로 게토화될 때,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의 불량스러움은 종족적 혹은 계급적 불온성을 잠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1938년도 경성 주요 극장의 관객 구성을 살펴보면, 2 우미관의 조선인 관객 대 일본인 관객의 비율은 9:1이다. 같은 시기 단성사가 8:2, 명치좌가 5:5의 비율을 보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미관은 확실히 조선인 관객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극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우미관 역시 이미 북촌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를 병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관객 중 조선인이 9할을 차지하는 종족 비율을 극장 프로그램에서 기인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미관을 줄곧 ‘3류관’의 위치에 머물게 했던 낙후한 설비와 비위생적인 환경, 저렴한 입장료가 오히려 조선인 관객에게 문턱을 낮추었다고 할 수 있다. 불결하고 불량한 극장의 분위기에 눌려 혹여 불량패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는 일본인 관객이 굳이 우미관을 찾아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김두한이 종로에서 싸움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1930년대를 지나며 바야흐로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 뒷골목의 불량하고 퇴폐적이며 자극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걸인과 부랑자, 불량소년, 하층계급 노동자들에게는 안온한 공간이 된다. 공중화장실의 악취와 근처 우동집의 간장 달이는 냄새, 상경한 사람들이 묵는 싸구려 여관과 여인숙 특유의 음습함과 소음들. 이미 낡고 오래되어 어떤 ‘향수’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왕년의 유명 변사 서상호가 자살하고, 김두한 패거리의 주먹질은 더욱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식민지적 이원성(식민자 일본인의 공간/피식민자 조선인의 공간)이 극장 문화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지, 그 장소성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준다. 1) 이광수,『무정』,김철 편집, 문학과지성사, 2005, 116쪽 2) 「서울 관객 구별」,『삼천리』,1938년 5월호, 25쪽. 상단사진 1. 우미관의 흥행작 영화 <명금(The Broken Coin)>의 두 배우 출처: 송완식 역 『(사진소설대활극)명금』 경성: 영창서관, 192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영화를 모방한 가두 소년범죄」,《조선일보》,1935년 3월 6일 자, 2면. 이 역시 활동사진을 본뜬 소년의 탐정극 실연 일막 [一幕] ―4일 오후 한시 경에 시외 하왕십리 426번지 배추 행상하는 김사남(金四男, 14)은 배추 수레를 끌고 시내 관철동 우미관 앞을 지나는데 돌연 소년 한 명이 길을 막아서서 김사남의 호주머니에서 현금 60전이 든 지갑을 뺏어 가지고 도망하였으나 김사남은 곧 그 뒤를 추격하려 했더니 다른 소년 한 명이 또 나타나서 붙잡고 방해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종로서원 [鐘路署員] 이 보고 악 [惡] 소년 한 명은 현장에서, 한 명은 전차에서 뛰어오른 것을 쫓아가서 모두 붙잡았는데, 그들은 시내 돈의동 127번지 오량산(吳梁山, 29)과 초음정 14번지 김태산(金泰山, 14)으로서 우미관 부근에 근거를 둔 소년부랑패의 일당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엄중 취조중이다. 2. 일송생(一松生), 「극장풍경」,『영화시대』,1935년 10월호, 59~61쪽. (부분 발췌) 늦은 가을서부터 밤거리의 추워진 공기를 호흡하는 축만시(丑滿時)의 낭객(浪客)―. 텅 빈 종로 거리에 네온사인의 냉광(冷光)을 물리치는 듯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날라 온다. 오장육부 속속들이 사무치는 그 구수한 냄새야말로 진미(珍味)의 송곳 끝이 혓바닥을 콕콕 쏘아 한없는 침을 흘리게 한다. 얼큰히 취한 자는 ‘한 잔 더’의 미련으로 발이 안 떨어질 것이오, 맹맥한 노동자의 창자는 이 냄새에 십년은 감수하리라. 이 진미한 냄새. 밤거리의 낭객을 도취시키는 이 ‘구수한 냄새’의 출처는? 우미관 앞. 네 바퀴 달린 ‘오뎅(おでん)’ 장소에서이다. 원래 종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가 오래여서 비록 전신과 후신의 혈통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미관하면 모르는 이가 없고 또 따라서 연상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니 1. 우미관 쌈패. 2. 우미관 조무래기 관상. 3. 우미관 문전의 ‘오뎅’ 장수 등이다. 근자에 와서는 경찰 당국의 경계로 경성 북촌 유일의 우미관 쌈패의 존재가 적이 미약해진 셈이고 또 네 바퀴 오뎅 장수보다도 그 앞은 카페를 위시하여 오뎅집, 바-, 만둣집 등등 동경(東京) 약초 [浅草, 아사쿠사] 풍경을 연상케 한다. 3. 이태준,『사상의 월야』,《매일신보》, 1941년 3월 4일~7월 5일 연재. (발췌는 1941년 5월 3일자, 4면.) 구경이란 말에 은주는 먼저 나서며 앞을 섰다. 배다리로 나와 광교 큰길을 건너 샛길로 관철동에 들어서니 벌써 군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슨 곡조인지는 몰라도 잰 걸음을 걷는데 신이 나게 맞는다. 가까이 가보니 전등을 구슬 꿰듯 해 여러 줄을 늘이었고, 이층 노대(露臺)에서는 눈이 불거진 사람, 볼이 불룩한 사람, 배가 내민 사람들이 새로 닦은 놋그릇 같은 악기를 메고, 들고, 흥겨운 몸짓을 하며 불고 있다. 그 노대 밑에는 큰 간판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첫머리엔 ‘명금 대회(名金大會)’라 쓰여 있었고, 달리는 말 위에서 소나무로 뛰어오르는 그림, 큰 다리 위에서 그 밑으로 달아나는 기차로 내려 뛰는 그림, 천여만여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자동자전거를 탄 채 건너뛰는 그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 찼다. 윤수 아저씨는 2층표를 샀다. 은주는 자주 와보는 데인 듯 2층길이 어수선한데도 익숙하게 곬을 찾아 먼저 뛰어가 앞줄에 자리를 맡았다. 은주가 먼저 앉고, 윤수 아저씨가 앉고, 그 담에 송빈이가 앉았다. 앉아서 보니 청년회관 대강당은 어림도 없게 넓고 그런 아래웃층이 별로 남는 자리가 없다. 이윽고 밖에서 나던 군악소리가 무대 뒤에서 나더니 그 군악에 맞춰 변사가 나타났다. 변사가 무대 한가운데 머물러 관중을 향해 예를 하자 군악소리는 뚝 끊쳤다. “오늘 저녁에도 이 우미관을 사랑하사 이처럼 다수 왕림…….” 어쩌고 한참이나,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상연하겠으니 그때도 많이 와달라는 말까지 늘어놓고야 다시 군악에 발을 맞춰 들어갔다. 이내 불이 꺼지며 사진이 나타나는데 모두가 서양사람들이다. 송빈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은주와 윤수 아저씨는 어느 게 ‘기지꾸레’니 어느 게 ‘후레디리꾸 백작’이니 하고, 알아맞히며 지껄였다. 영사막 옆에서는 아까의 변사가 다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어떤 일정한 장단이 나게 떠들어댔으나, 송빈이는 한마디도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 재미있어, 하는 은주를 가끔 어스름한 속에서 엿보았다. 4. 이주홍, 「소년행」,《동아일보》, 1967년 12월 27일자, 6면. 저뭄이 깃들어오는 밤이면 영하 17, 8도의 매운바람을 가르면서 소년은 일과대로 종로를 향해 걸어갔다. 외투나 장갑이 있었다면 누가 투정을 할 것이랴.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의 살을 싸고 있는 것은 얇은 면 사지의 교복과 면 샤쓰, 그리고 물감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고 있는 까만 새 모자에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튀어나와 있는 떨어진 양말과 운동화뿐이었다. 화신상회 건너편의 야시(夜市)를 누비고 나가 소년은 수표다리 못미처에 있는 영화관의 우미관 앞에서 서성대는 습관이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의 <명금>과 <동도> 그림 간판의 뼁끼는 전등불에 번쩍거리고 있었고, 발코니에서 신나게 뿡빠거려대는 악대 소리는 시골 소년의 가슴을 용수에 넣어 흔들 듯 흥분시켰다. 5전짜리 우동장사의 외는 소리, 왜간장 다리는 냄새와 코크스 타는 냄새를 간지럽도록 맡으면서 소년은 조심조심 매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표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손님의 턱밑에 내밀고 애원하는 것은 보인단(普仁丹)이나 영신환(靈神丸)인 것이었다. 지금 아이들만 한 간(肝)이 있었더라도 버스 안 승객들의 무릎 위에 갖은 미사여구로 엮은 삐라를 척척 나눠놓고서 한바탕 반(半)압력의 열띤 애국연설로 연필을 사달라 보챌 수가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도록 암띠고 겁쟁이인 소년은 겨우 한마디로 익힌 대사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고학생이올시다. 동정하시는 맘으로 약 한 첩만 갈아주십쇼”였다. 그러나 하룻밤에 세 첩의 약만 팔아도 두 때의 밥은 살 수 있는 것이었어도, 노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해서 소금으로 반찬 해 먹는 4전짜리 팥밥 한 그릇, 아니면 세 때 네 때를 내리 달아 굶고 늘어져 있어야 하는 얼음장의 냉돌이었다. “배워야 산다.” 단 하나 끝까지 소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3.1 봉기 직후로 삼천리 전역에 불 지른 민족의 대구호,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행로는 촉도난(蜀道難). 세월이 꿈이 순을 잘라먹었음일까. 이것도 저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그때만큼이나 추운 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효자동의 갈돕회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던 외로운 소년의 뒷모습을 회상해 보면서, 서글피 오십년 뒤의 그 소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