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최무룡, 김지미, 김승호, 이예춘, 김희갑, 장동휘, 김동원, 황정순, 한미나, 박노식, 김석훈, 최남현, 김칠성, 유춘, 서월영, 김만, 임해림, 백송, 노경희, 이빈화, 강미애, 이민, 주선태, 최성호, 양훈, 장혁, 박세룡, 강성양, 경윤수, 조항, 남춘역, 임운학, 함국절, 송범,주리 무용단, 미팔군실바스타쇼단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2023년 12월, 한국영상자료원은 3년여에 걸쳐 정리한 대규모 컬렉션을 공개했다.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와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이 그것. 정리부터 공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에는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었지만, 컬렉션 자체가 거대한 한국영화사를 관통하는 자료들로 채워진 까닭도 있었다. 故 김학성 촬영감독 (1913~1982)이 생전에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기, 한국전쟁기 그리고 전후 시기에 그가 경험하고 마주한 한국영화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와중에 끝끝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자료 역시 존재해, 정리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부터 그의 아들 김충남 씨의 이름으로 기증된 자료들이다 보니, 자료의 원 주인을 직접 만나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자료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단서가 될 만한 어떤 것이든 찾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료 중에는 이 일련의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사진 속 인물들의 의상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모두 같은 날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마다 카메라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영화 촬영 현장인 듯한데, 대체 무슨 영화였을까? 간혹 기증된 사진 중에는 기증자가 사진 뒷면에 관련 정보를 적어두는 경우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 사진들에는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해야 할 일은 사진 속 인물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교집합을 찾는 일이다. 위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식별 가능한 인물들은 하이라이트 쳐진 인물들, 즉 컬렉션의 주인공인 김학성과 배우 서월영 , 최은희 , 주증녀 , 감독이자 편집 기사로도 활동했던 양주남 그리고 많은 영화에서 김학성과 함께 작업한 조명감독 고해진 정도였다(사진 오른쪽 하단 김학성 기준 반시계 방향 순). 그렇다면 이것으로 사진과 관련된 영화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정도 단서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김학성, 서월영, 최은희, 주증녀, 양주남, 고해진의 교집합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 하나. ① 이 영화는 촬영은 되었으나 공개되지 못했거나 어쩌면 완성조차 되지 못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사진이 촬영된 시점을 추정해 보는 것도 좋겠다. 배우 최은희가 스크린에 데뷔한 것이 1947년 신경균 감독이 연출한 < 새로운 맹서 >(김학성 촬영)이니, 이 사진은 적어도 1947년 이후에 찍혔을 것이다. <새로운 맹서>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김학성과 최은희가 함께 있는 현장인 점에서, 이 사진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헤어진 1953년 이전에 촬영되었을 것이다. 즉 ② 이 영화는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된 작품 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 추적할 만한 단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되었으나 미완성된 혹은 미공개된 작품,’ ‘최은희·서월영·주증녀 출연, 김학성 촬영, 고해진 조명, 양주남 참여(역할 미상)’라는 것 말고는 영화의 구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만한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을 공개한 2023년 12월, 이 사진들은 ‘작품 미상 촬영 현장’으로 분류돼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이 사진의 정체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2025년 공개를 목표로 정리 중인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가제, 영화사 연구자 배수경 조사 및 연구)”에서였다. 이 역시 방대한 규모의 컬렉션이 될 예정으로, 각종 문헌과 사진, 박물 자료를 합쳐 3천여 점의 자료가 모여 있다. 그중 사진 자료만도 1,800여 점에 달한다(이는 복본을 포함한 수량으로, 컬렉션 공개 시 조정될 수 있다). 참여 연구자의 조사·연구가 끝난 결과물을 검토하던 중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갑자기 눈에 걸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의 앞면 (좌)과 뒷면 (우)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서 ‘미상 작품 촬영 현장’으로 분류했던 사진의 하나와 꼭 같은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사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聖血 (성혈) 은 永遠 (영원) 히 빛나리 撮影 (촬영) 스탚과 口防部 (국방부의 오기로 보임) 映畫課 (영화과) * *은 식별 불가 / 괄호 안의 내용은 인용자 주 정일성은 < 가거라 슬픔이여 >(조긍하, 1957)를 통해 정식 촬영기사로 이름을 올리기 전에 김학성 문하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으니, 그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러할 만하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때가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을 촬영할 때였으니, 아마도 이 사진은 스승인 김학성을 통해 받은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여하튼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에서 두 개의 주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영화의 정체가 ③ <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라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과 ④ 국방부 영화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 이제 남은 일은 위의 ③과 ④의 가설을 입증하는 일이다.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한국영화를 집대성한 편람이나 총서, 신문·잡지 등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 소장된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_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표지는 김학성 촬영감독이 개인적으로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주인공 서준이 가족들과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다 이튿날 새벽, 전쟁 발발 소식에 군대에 복귀하고 악전고투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콘티 앞부분에서는 스태프 명단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 이 연출하고 김학성이 촬영을, 고해진이 조명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녹음, 미술, 음악, 편집, 배역 등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콘티는 제작진이 모두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본된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위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홍 감독의 얼굴이 새삼 확인된다. 단체 사진에서 소매 배색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김학성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김홍 감독이다. 한편 온라인 고서점에서 개인적으로 입수한 동일본의 촬영 콘티 표지에는 “崔銀姬 瑛. 役(최은희 영. 역-인용자 주)”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배우 최은희가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1 이로써 위의 일련의 사진들이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라는 ③의 가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김학성 콘티 (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와 최은희 콘티 (우, 개인 소장) 영화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제작 정보를 좀 더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 뒷면에 적힌 정보를 신뢰할 경우, 이 영화는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된 작품일 것이다. “신뢰할 경우”라 말한 이유는 사진 뒷면의 메모가 사후에 적힌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회고’와 같아서 완벽하게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 정보를 신뢰하기로 하고 좀 더 추적에 나서보자. 이것이 군 영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일 먼저 국군홍보관리소가 1992년에 발간한 『군영화 40년사』(“ 연감총서 컬렉션 ” 참조)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1950년 국방부 촬영대 발족부터 1992년 현재까지 군의 영화 제작 역사를 정리한 책으로, 군 영화 제작에 참여한 여러 영화인의 회고록과 군 영화 목록, 촬영 현장 사진 등이 수록돼 있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던 중, 위의 사진들과 유사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군영화 40년사』 화보 면 화보 면 아랫단 오른쪽 사진에서 최은희(2열 우2)와 양주남(2열 우1)의 의상이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과 동일한 것이 확인된다. 책에는 이 사진에 대해 “‘聖血(성혈)’ 로케 현장의 촬영대원들과 최은희 씨”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를 줄여 <성혈>로 일컬은 것이지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영화 40년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이뿐이었다. 연도별 군 제작 목록에서도 더 이상 영화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가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이 있다는 추정은 든든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추정은 위의 ②번 가설, 영화 제작연도(1947~1953년 사이)를 보다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국방부 영화과의 정식 명칭은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휴전협정 체결 후 서울 환도와 함께 1953년 8월, 정부 기구 및 국방부가 개편되면서 기존의 ‘군사영화촬영소’에서 변경된 명칭이다. *주2 영화의 서사가 한국전쟁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의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점, 그리고 1953년 8월에 명칭을 변경한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제작에 관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추정컨대 1953년에 촬영된 작품일 것이다. 공적 기록이 부재하는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추적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는다. 일단락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에 대해 추적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이 영화에 관계한 정도는 여전히 밝혀야 할 숙제이며, 촬영 콘티의 스태프 명단에 적혀 있는 “각본 협영문예부”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 여지가 있어 보인다. 참고 자료와 시간적 제약, 한국영화사 연구에 대한 개인의 미진함을 탓하며, 남겨진 과제들을 후속 연구를 통해 보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본다. * 미완성/미공개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김홍, 1953년 촬영 추정)에 대한 정보를 아는 분은 언제든 제보 바랍니다. *** 주1. 이 촬영 콘티는 배우 최은희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판본의 「CAST」 면에는 주인공 서준의 여동생 서영 역에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 있다. 서영은 최은희가 맡은 배역으로 추정된다. 한편 촬영 콘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배역 중 최은희, 주증녀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는 서영과 유경옥으로, 주증녀는 서준의 약혼녀인 유경옥 역을 연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 서월영이 맡은 캐릭터와 양주남이 담당한 역할은 촬영 콘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2. 국군홍보관리소, 『군영화 40년사』, 1992, 10쪽; 12쪽; 15쪽.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정훈국 촬영대’는 1952년 1월, ‘군사영화촬영소’로 승격 발족했다. 이는 1953년 8월에 이르러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국방부 정훈국 군영화촬영소(1955년) →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1963년) → 국군홍보관리소로 잠정 통합(1979년) → 국군홍보관리소 정식 창설(1981년) → 국방홍보원(2000년)으로 변경되었다.
[사진]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 현장에서 최은희와 신상옥 속눈썹이 긴 열여덟 살의 가출 최은희는 1926년 11월 20일 1 경기도 광주읍 초월면 묵고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영환은 구한말의 군인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서울로 이사한 후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수줍음을 탄 그녀의 본명은 경순(慶順)이다. 속눈썹이 길고 눈이 큰 편인 그녀는 말이 없는 대신 고집이 세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식의 공부를 위해 도시로 보낼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지가 서울로 바뀌어 수구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다행히 광희공립심상소학교(광희초등학교 전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소학교 때부터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극장 주변을 자주 기웃거렸고 공연 포스터를 보면 친구들에게 장차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녀가 종로 6가에 있던 경성기예고등학교(京城技藝高)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방공 연습을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연극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 월북)의 소개로 마침 <칭기즈칸>을 준비 중인 극단 ‘아랑(阿狼)’(대표 황철)의 의상을 거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승낙 없는 결행이었다. 1943년 열 여덟 살 때였다.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하며 시름을 달래던 그녀에게 기회가 온 것은 대전 공연 때였다. 문정복이 한번 해보라며 무대로 올려 세운 것이다. 비록 하녀라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극의 반전을 돕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날 공연한 작품이 ‘아랑’의 단골 레퍼토리인 신파극 <청춘극장>(임선규 작)이었다. 그 시대에는 연구생으로 들어가면 일단 선배의 화장가방부터 챙기는 일을 해야 했다 (최은희, 『고백』 ‘패기의 수업시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38쪽). [사진] 극단 아랑 시절 최은희 그녀는 지방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문화계가 정비에 들어간 가운데 토월회가 부활하자 그녀는 신극을 표방하는 이 극단에 참여했다. 이때 무성영화 시절의 복혜숙, 서월영과 일제강점기의 김소영, 김일해, 최운봉과 같은 배우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분들을 보자 영화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어릴 때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문예봉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의 몇 장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극은 무대를 떠나는 순간 존재 가치가 없어지지만 스크린은 그 폭과 생명력에 있어 무한하지 않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영화계 진출이 당면 과제로 다가왔다. 이 무렵 토월회 연극에 함께 출연 했던 최운봉이 제 상대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영화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최은희는 이렇게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1947년)와 인연이 닿게 되었다. 험준한 길, 분단의 희생양 그녀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영화배우로 변신한 촬영기사 김학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사귄 지 얼마 안 된 1947년 가을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스물 한 살인 신부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서른세 살로 재혼이었다. 김학성은 무성 영화시대의 여배우 김연실(金蓮實, 납북)의 동생으로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니다가 복싱선수를 거쳐 영화 <성황당>(1939)의 카메라를 잡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6년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전쟁 때문이었다.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 남산동에 살고 있던 이들은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다. 김학성은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었으나 최은희는 북한군에게 끌려가 위문공연을 강요당했다. 죽을 고비를 겪은 끝에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부역’한 일로 국군에게 붙들려 조사받는 곤욕을 치렀다. 그녀는 종군 뉴스영화 촬영 중에 입은 중상으로 병상에 누운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광복동 ‘녹원(綠苑)다방’ 얼굴 마담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신상옥이었다. 그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극단 ‘신협’ 소속인 최은희가 무대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 뛰어들어 병원으로 옮겨 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사건 이후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유부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무명 영화인에게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화답했다. [사진] 1960년 경 최은희와 신상옥 부부 그사이 신상옥은 <악야>(1952)로 데뷔했다. 그리고 16밀리 문화영화 <코리아>(1954)에 그녀를 출연시켰다. 그녀는 주로 신필름의 영화에 무상으로 출연했지만 회사의 운영을 돕기 위해 다른 제작사의 영화에도 나갔다. 그의 출연작 1백 20여 편 가운데 30여 편을 제외하고는 자회사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 세 편이 그녀가 연출한 작품이다. 그러나 1975년 오수미를 주연으로 기용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검열 위반’ 사건으로 신필름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신 감독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사진] <코리아>(1954)에서의 최은희와 김동원 결국 1976년 여름 신상옥과 23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이 부진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던 78년 1월22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고 만다. 이런 사태 아래서 1983년 3월7일 김정일이 초대한 연회장에 갔다가 신상옥과 극적으로 재회, 그동안 소원했던 감정을 풀게 된다. 이후 <탈출기>(1981년), <소금>(1985년> 등 10여 편을 같이 만든 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단행하고 1999년 10년이 넘는 미국 망명생활 끝에 영구 귀국길에 오른다. [사진]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북 기사 [사진] 북한에서 연출한 영화 <소금>의 한 장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녀의 기구한 삶은 자신이 연기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분단 한국의 최대 희생자이자 황금기 한국영화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던 최은희는 아흔 한 살에 이른 2018년 4월 16일 <어머니와 아들>(이유섭, 1976)의 출연을 끝으로 짧지 않은 투병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1. 생년관련, 그동안 그녀의 생년월일에 대해 『한국연극무용영화사전』(예술원, 1985)과 『여성영화인 사전』(소도 발행, 2001)은 1928년 11월 20일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최은희는 자전적 저술인 『고백』(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에서 1930년 생으로 기재,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1913년생인 김학성에 대해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사람” (51쪽)이라고 했으니 1926년이 맞다.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