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서커스의 그 장엄함!
- 제작년도
- 2010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김정민 감독의 < 감자 >는 한편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여러 기괴한 볼거리를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쇼에 가깝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어느 감자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 농부, 천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원씬 원컷으로 촬영한 이 단편영화의 매력은 원시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성이란 영화가 역사적으로 말하기(telling)를 획득하기 이전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여주기(showing)의 역량과 관련이 있다. <감자>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 고구마밭을 감자밭이라고 우기는 농부, 감자밭에서 경찰을 내쫓으려는 천치 사이에서 우발적, 기습적, 충격적으로 발생하는 대사, 몸짓, 사건을 활용해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의 관습이 그러한 것처럼 <감자>에도 미스터리한 사건과 인물이 있고, 사건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긴장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기보다는 핵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를 전시한다. 을씨년스러운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방에 있는 감자밭의 풍경, 배우들의 다소 별난 몸짓, 관객의 예측을 벗어나는 우발적 상황 등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이다. 이와 더불어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밭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나 줌인, 패닝, 틸팅 등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가면서 프레임의 경계를 확장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특징은 ‘어트랙션 영화(cinema of attrac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영화학자 톰 거닝은 아직 영화라는 매체에 서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어트랙션 영화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는 초기 무성영화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관음증적인 시선을 유발하기 위해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를 개념적으로 참고했는데,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는 어트랙션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서커스, 보드빌, 놀이공원 등과 같은 근대적인 여가 문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무대, 의상, 연기와 관련이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어트랙션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 심리,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어트랙션에 관한 이런 논의에 따르면, 영화에서 쓰이는 어트랙션은 관객이 다양한 볼거리를 바라보면서 작품 속 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에 가깝다. <감자>를 구성하는 여러 기괴한 이미지들은 이 작품을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웃음 코드는 특정 상황에 대한 오인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에 기초한다. 통상적으로 코미디 영화에서 오인은 특정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의 무지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어느 인물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그러하다. <감자>의 오인은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대략 이러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이 밭에 도착하면, 농부가 경찰을 향해 걸어온다. 경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고구마밭의 주인을 찾는데, 농부는 그 밭이 감자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국내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감자라는 단어는 고구마라는 단어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감자가 유입되기 전까지 국내에는 고구마라고 불리는 작물만 있었다. 하지만 감자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그것의 생김새가 고구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고구마 또한 감자라고 불렸다. 고구마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감자>에서 한 농부가 고구마나 감자나 전부 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작품에서 농부가 감자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정작 감자도 고구마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농부는 땅속에 묻힌 시체를 가리켜서 감자라고 우긴다. 영화는 감자밭에 파묻혀 있던 시신의 일부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농부에 의해서 유지된 오인의 상황에서 웃음기를 거둬들인다. 진실과 거짓의 위계가 무너져 내린 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바라보는 농부는 더 이상 평범한 농부가 아니며 그가 바라보는 천치는 더 이상 인지능력이 부족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웃음 코드는 오인과 관련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 사건, 몸짓과 관련이 있다. 과거 찰리 채플린과 같은 코미디 배우들이 자신들의 신체와 몸짓을 통해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 작품 또한 배우들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몸짓들은 롱테이크의 미학 속에서 사실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 사실성을 위해 연출자와 배우들은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과 배우들 사이의 연기의 합을 수학적으로 미리 계산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사실성은 논픽션에서 기대되는 우연적이고 비-연출적인 요소보다는 픽션에서 기대되는 계산적이고 연출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 중 일부는 관객의 오인, 즉 특정 장면에 대한 관객의 예측이 실패하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신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죽은 줄 알았던 신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 즉 산 주검(living dead)은 과거 어트랙션 영화가 즐겨 활용했던 소재 중 하나였다. <기이한 마차 사고(An Extraordinary Cab Accident)>(1903)의 경우 한 남성이 마차에 치여 숨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교통사고, 살인, 죽음 등에 대한 공포를 활용해서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감자>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괴한 볼거리로 가득한 상황, 사건, 몸짓을 만들어내는 작품들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인 볼거리를 통해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지각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보여주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영화적 경험,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오인과 무지에 기초한 영화적 경험이다. 김정민 감독의 <감자>는 예술이 관객에게 호기심, 쾌락, 관음증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볼거리이며, 그러한 바라보기의 경험이 일어나는 동안 관객의 상상력에 의한 판단과 오인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기의 충실성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올해 초쯤, 계속되는 팬데믹 속에 적응해 나가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에 대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기승 덕분에 국내의 한 해 총 관객수가 73.7% 급감했던 터다. 극장 개봉 일정들은 미뤄지거나 아예 취소 되어서 작품들이 OTT 서비스로 직행하는 경우가 속속 나왔다. 그리고 제작사들을 취재하다 보니 원래 극장용 영화로 기획 되던 작품들이 예산을 줄여 작은 화면 OTT용으로 만들 궁리를 하거나 심지어 시리즈물로 변환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 생존을 위한 현실적이고 당연한 처사였다. 유독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와 통화했을 때, OTT에 열려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이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성과 적응력을 보였지만, 외유내강은 거기에 더해 패기를 보였다. <모가디슈>라는 영화가 그런 제작사에서 나온 것이 놀랍지 않다. 뉴욕 아시안 영화제 조직 위원장 사뮤엘 자미에는 ‘카 체이스 씬 하나만 보려고 극장에 가도 될 만 한 영화다’라고 하면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부터 유엔 가입을 먼저 하는 것을 목표로, 남한과 북한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1990년 말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숙적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어떤 때는 실화가 더 거짓말 같을 때가 있다. 관객들이 못 미더워 할 같아 많은 취재와 고안 끝에 카 체이스 씬도 나온 것이라 류승완 감독은 말한다. 아이들까지 해서 네 대의 차량에 나눠 탄 두 대사관 사람들은 구조 비행기를 마련한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간다. 류 감독은 실제로도 처음에는 정부군이 반군으로 오인하면서 사격을 가했고, 탈출 하는데 반군이 또 정부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의 추격과 사격을 받으면서 이탈리아 대사관 50미터 앞까지 가는데 한 사람만 사망한 실화가 너무 기적 같아서 고민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 영화로 처음 이것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싶어 조사 하다가 당시 AK 소총이 전화번호부 한 권을 뚫지 못했다던가, 명중률 자체가 낮은 데다가 정부군 조차도 훈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표적을 잘 못 맞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 있는 책과 문짝, 즉석에서 헌 옷으로 만든 모래 주머니를 박스 테이프로 차에 붙여 임시방편으로 나름의 방탄 차량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와중에 아이들 팔에 매직 마커로 크게 혈액형을 적어주는 모습이 잠깐 나온다.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직시 하며 현실적으로 대비 하는 모습이 긴장감을 한층 높여 준다. 준비 끝에 서커스단 차량처럼 색색가지 물건으로 뒤덮이고 그 무게에 눌려 기우뚱거리는 외교관 차량 네 대의 행렬은 가관이다. 실제로 촬영 중에 이 80년대 자동차들은 세월과 물건들의 무게를 못 이겨 가다가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스펙타클 보다 서스펜스’를 목표로 연출했다고 말한다. 총알 세례 추격전 중에 네 대의 차량 내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샷인 듯한 것으로 모든 이의 공포와 서스펜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창문에 매달린 군인과 싸우는 모습까지 가미해 결국 액션, 서스펜스, 스펙타클 두 마리도 아닌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모가디슈> 언론배급시사를 놓치고 광복절 주말 극장에 가서 보고 이틀을 못 참고 다시 보러 간 사람으로서 카 체이스 씬에 더해 하나를 더 꼽는다면, ‘양주 장면’이다. 엄청난 소리와 액션과 위험이 따르는 카 체이스에 반해, 늦은 밤 대사 집무실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장면이지만 서스펜스와 솔솔한 재미가 있는 장면이다. 남한 대사 한신성 역을 맡은 김윤석 배우가 안기부에서 파견된 강대진 참사관 역을 맡은 조인성을 회유하는 장면이다. 양주병을 들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따라주려다가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 섭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마치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을 내려 놓는 한 대사, 시선이 은근히 양주병을 따라가다가 자기 차례 대로 회유에 나서는 강 참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풍습 대로 자작은 또 서로 못하게 하는 등 둘의 안무는 큰 화면에서 가히 볼 만 하다. 이런 경우, 연기도 스펙타클이다. 소말리아에서는 계속 되는 내전으로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여 모로코에서 100% 촬영한 영화다. 2019년 11월 11일부터 2020년 2월 18일까지 에사우이라와 케니트라 두 항구 도시에서 찍고, 수개월의 후반작업으로 90년대 초 모가디슈 모습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오디션 끝에 한국, 케냐,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배우를 데려와 한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통역도 여러 명 둔 촬영 현장이었다. 그리고 무술팀이 현지에서 임시 액션 스쿨을 만들어 배우들을 훈련 시켰다고 한다. 이 영화, < 블랙 호크 다운 >이 아니다. 역시 소말리아 내전 배경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1년 영화도 모로코에서 찍은 것이라 비교가 되기도 하는데, 아는 사람이라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할리웃 액션영화만큼 잘 만들고 재미있을 지는 몰라도, <모가디슈>에 나타나는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르다. 아프리카 현지인을 ‘우리 주인공들이 그저 넘어서야 할 장애물’ 또는 악당 역으로만 그리는 일반 할리웃 영화와는 달리, <모가디슈>가 소말리아인들을 그리는 방식은 한국인들을 그리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관객이라면 안다. 사실상 멀지 않은 과거의 한국에서도 소말리아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독재 타도를 위한 시위, 폭력진압, 그리고 심지어 학살까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부 인사가 자녀 학자금 명목으로 뇌물을 요청할 때, 민간인들이 시위를 하고 무참히 밟힐 때, 전쟁통에 시장에서 난리가 날 때, 우리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람들의 행동 모습들이 너무 낯익어 기억 속의 영상들과 중첩 될 때가 있다. 주인공들이 드디어 떠날 때 창 밖을 보며 재난이 닥친 그 나라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가는 모습도 그래서 더 와닿을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사를 모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모가디슈>가 무조건 할리웃 영화처럼 현지인들을 치부할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런 편견을 깨는 것도 우리 몫일 지 모른다. 그 외에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하고 당연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먹는 것과 거기에 담긴 의미에 관한 게 있다. 국내에서 많이 회자 된 ‘깻잎 장면’은 남북 대사관 사람들이 서로 긴장된 첫 식사 자리에서 깻잎 반찬이 붙어 북한 사람이 난감해 할 때 남한 사람이 잡아주는 장면이다. 같은 아시아인끼리도 김치나 깻잎 같은 걸 잡아주면 깜짝 놀라서 고마워 하는 경우는 봤지만 이런 행동을 당연 시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쬐그만 행동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서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습격을 받고 중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남한 대사관까지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까지 서로 온갖 방해 공작에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다. 한 대사가 들여보내주기를 거부하고 허준호 배우가 맡은 북한 림용수 대사에게 계속 핀잔을 준다. 그러다 같이 나온 꼬맹이들에게 눈길이 가면서 ‘아이들 밥은 먹였소?’ 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명분은 필요 없다. 애들은 굶기는 게 아니다. 보면서 속 시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말 한국적인 영어 사용법이었다. 예전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걸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영어 문장은 세련된 고위 관료의 것인데, 발음은 기가 막히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당연하다. 그 시대, 그 세대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 된 사람들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공부했겠는가? 발음 연습과 교정의 기회가 얼마나 됐겠는가? 지금처럼 편리한 인터넷과 DVD나 방송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안기부 직원이라면 외신 기자에게 담배 한 보루 선물 던져 주면서 “Your favorite cigarette!”을 그냥 (사실 단수가 아닌 복수가 맞는데) 한글로 발음 적어놓은 듯, “유어 패이버릿 시가렛!”을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하는 것이 사실상 더 자연스럽다. 대사관에 쳐들어오려는 현지 경찰들을 막으려고 “Listen, you can’t come in here!”라고 해야 되는데 흥분해서 “리슨, 유 캔트 낫 컴 인 히어어”로 (이중 부정의 문장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서기관의 모습, 그런 모습들이 더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다. 한국 배우가 영화 속 인물에 적절하지도 않은 영어 숙어나 문장 구조와 발음을 구사하면서 연기는 뒷전,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얼마나 잘 외웠나, 발음은 얼마나 잘 하나, 무슨 줄타기 곡예 구경하듯 긴장하면서 보는 한국 영화는 이제 많이 없어져서 속 시원하다. 발음이 너무 한국적이어서 해외 배급할 때 자막 깔아야 하면 그냥 깔면 된다. 우리도 북한말 나올 때 한글 자막 까는데 무슨 상관인가? 인물에 맞는 말하기 방식과 발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 전달 되는 게 더 많다. <모가디슈>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이것저것 더 할 수 있겠지만, 일단 ‘2021년 사사로운 영화’의 원고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작품을 보면서 한국 영화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 패기가 넘친다는 것에 기쁨을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