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루의 일생
- 감독
- 미조구치 겐지
- 제작년도
- 1952
- 출연
- 다나카 키누요, 도시로 미후네, 시미즈 마사오, 수가이 이치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아마 그래야 할 것이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안하였다. 1969년 9월 14일 다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킨 다음 7개월 만의 일이다. 그 해는 모든 것이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시인 김지하가 당시 재벌,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을 (을사보호조약 당시의 매국노에 비유하며) 담시(譚詩) 형식을 빌려 풍자한 시 <五賊>을 발표하자 이 시가 실린 문학지 ‘사상계’ 시판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6월 1일 자에 이 시를 다시 게재하자 미리 정보를 입수한 기관원들이 6월 2일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 새벽 1시 50분에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종로경찰서 경찰이 인쇄소에 난입하여 인쇄한 10만 부 전량을 강제 회수하였으며, 6월 20일 시인 김지하와 사상계 대표, 편집장을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북한 선전 선동물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기소 하였다. 7월에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지만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미싱 시다공’ 전태일은 “우리들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다음 분신을 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3선 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김대중과의 득표 경쟁에서 이 과정은 몹시 힘겨웠다. 독재를 위한 확고한 지지 세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농촌을 중심으로 산업간 소득격차를 줄여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감시의 외곽지역에 놓여있었던 지방을 조직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 속에서 새마을 운동은 유신 정권의 행정체계 안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사업이 되었다. 아마도, 아마도 이 시기부터 이미 시작된 감시하의 문화예술과 학계에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국책지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중들과의 전선에서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 버림받고 다른 한편으로 유혹당했다. 1973년 영화 진흥조합에서 영화진흥공사로 기구 개편을 한 다음 공사는 정부 지시에 따라 “한국영화 진흥을 위한 개선책”이라는 명분 아래 국책영화를 지원하기 위한 우수영화 보상 제도를 부활시켰다. 여기서 우수영화는 반공영화와 새마을 영화, 문예영화로 다시 분류되었다. 한국영화는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검열이라는) 이중검열과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으로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매우 제한적인) 외화 수입으로 영화산업을 가까스로 이끌던 국면이었지만 그 와중에조차 정부는 외화수입이 외환을 보유해야 하는 국가 경제적 차원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화사들의 수입권을 제한하였다. 그런 다음 내세운 당근인 우수영화 제도는 ‘우수영화로 선정된 작품에 한해 제작사에 외화 수입쿼터 권리 1편’을 보상으로 내세웠다. 이 과정은 물론 한국영화의 산업적 몰락을 부추겼다. 영화사들은 ‘쿼터’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우수영화’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은 (좀 더 정확하게는) ‘쿼터를 따기 위한 우수영화’에 동원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국책지원을 하는) 우수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은 이면의 외설적 진실을 놓친 절반의 사실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착취당한 것이다. 그걸 도대체 누가 본다고? 여기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감독들은 ‘흥행 감독’들이었다. 왜냐하면 ‘우수영화’는 반드시 그 사실을 (문화부의 권고에 따라 ‘강제적으로’) 광고에 표기해야 했으며 관객들에게 ‘우수영화’는 재미없는 ‘국책영화’와 이음동의어였기 때문이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 거리의 포스터와 신문 기사, 라디오에서 시간마다 울려 퍼지는 (베트남 파월장병들을 위한) 군가, 학교에서 암기해야 했던 국민교육헌장, 새마을 노래, 국민들은 국가정책에 관한 선전에 극도로 피로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극장에 가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학생들과 공무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단체관람을 시켰다. 좀 더 우스꽝스럽게 말할 수 있다. ‘흥행 감독’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며, ‘우수영화 감독’들은 (제작사를 대신해서) 우수 영화에 선정되어 외화 스크린 쿼터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쓰긴 했지만 그러나 당신께서는 이걸 비웃으면 안 된다. 이건 먹고 사는 문제이다. 그리고 다른 선택이 없었던 상황의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를 그만 두면 된다. 하지만 그런 다음 영화산업 바깥에서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없는 기술적 산업적 조건 아래에서 영화를 만드는 기술밖에 없던 사람에게 어떤 다른 선택이 남아있었을까. 여기는 물샐 틈 없는 감시망으로 이루어진 경찰국가였고, 피비린내 나는 독재정치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의 창백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여기에는 어떤 미래도 없었다. 박정희는 영원히 살 것만 같았고, 민주주의는 숨을 죽였으며, 사람들은 정신없이 진행되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일상생활 속의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이제 막 독점재벌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었다. 잠시만, 잠시만 멈추어야 한다. 당신은 이 부정적인 연쇄 망 속에서 문득 긍정적인 수사가 출현했을 때 당황스러울 것이다. 나는 지금 거짓 긍정을 말하는 중이다. 자, 여기서부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새마을 운동이 정권연장을 위한 경제적인 속임수였으며 사실상 실패한 국가주도의 경제계획이었다는 것을 지금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미 파국의 계획에 대해서는 1980년대에 전두환이 이 국가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새마을 운동연합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벌어진 이 기괴한 부의 재분배를 둘러싼 국가사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간단치 않아진다. 나는 지금 외면, 이라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 새로운 단계. 당신에게 부자라는 (허구적) 타자로부터 (거짓된) 주체에로의 전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시간의 기회가 도래했다.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아니, 우리 모두 부자가 될 수 있어요. 금융자본과 결탁한 (거짓된) 부의 증식. 하늘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잉여가치. 그걸 국가가 보장하겠다고 나섰을 때 온 사회가 들뜨고 있었다. 아마 정확하게 바란 것은 그 (정치경제학적인) 혼수상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슬로건이 자본주의를 밑바닥부터 전복시키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타자의 황당무계한 약속을 사람들은 믿었다. 그들은 믿는 척한 것이 아니다. 그때 국가는 실체였으며, 어떤 부(富)도 국가보다 작은,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객관적 정세에 기반을 둔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의 중심부로 들어서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은 이 글의 성격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반대로 그 안에 휘말려 들어간 국민들에게 새마을 운동의 유혹이 무엇이었을 지를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에(조차,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박정희의 정책과 결과. 그 효과로서의 박근혜의 (유예받은 환상의) 프레임. 반문하고 싶어진다. 새마을 운동을 단순하게 거짓 사기극이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박정희 자신조차 이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심으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치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논점을 여기서 재빨리 멈추고 영화에로 돌아갈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서 건드린 논점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혼수상태 안으로 멈추지 않고 들어가는 중이다. 여기서 영화라는 제도는 단순하게 국가 정책을 반영하거나 복제하는 기계가 아니다. 혹은 제도라는 기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제도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면 어떤 식으로건 구체적인 정치사회적인 조건이 그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조건은 단지 영화를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스스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영화 안에서 제도가 요구하는 검열의 방식으로 활동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역사와 역사 안의 영화 사이의 관계는 종종 경계로 옮겨간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서든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둘 사이의 흔적은 서로 각자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은 서로에게 역사의 이름으로 기억의 내러티브가 된다. 그때 우리는 말하자면 기억을 다루는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이를테면 볼셰비키 혁명과 쿨레쇼프 공장은 1943년 직후 로마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얼마나 서로 같으면서 다른가. 1919년 표현주의 영화와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 ‘직후’의 영화는 또한 얼마나 멀리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영화 안에서 자기의 역사, 자기의 조건, 자기의 상황,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힘이 능동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시대에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사실상 각자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존재론적인 대답이다. 대답으로서의 질문. 이때 질문이 대답으로 이동하는 자리를 둘러싼 상황과 조건이 영화 안에서 형식이 될 정도의 특이한 사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건의 모습으로서의 형식이다. < 아내들의 행진 >(1974), < 아내 >(1976), < 옥례기 >(1977) 임권택 은 (이 시기의)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우수영화에 동원되었으며 세 편의 새마을 영화를 찍었다. 물론 반공영화를 포함하면 그 숫자가 훨씬 많아진다. (그리고 문예영화들이 또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범주의 난점이 있다. 이를테면 < 증언 >과 < 짝코 >가 모두 반공 우수영화라는 제도적인 분류와 그 사이에서 얻게 된 행운이자 위험으로서의 미결정성. 여기서 우리는 제도가 처리하는 방식과 비평이 가져야 할 해석 사이에서 서로 공유하기 힘든 그늘을 본다. 우리의 괄호로 돌아오자. < 아내들의 행진 >과 < 아내 >, 그리고 < 옥례기 >.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예외 없이 세 편 모두 새마을 운동에 자발적으로 헌신한 세 명의 여자에 관한 실화를 찍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세 명 모두 아내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물론 이 인물의 선택이 임권택의 결정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매번 잘 기억나지가 않아요, 라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아내들의 행진>은 영화진흥공사 제작이고 <아내>와 <옥례기>는 우진필름 제작이다.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가지이다. 아내의 실화. 우리는 임권택이 그 자신의 영화를 시작했다고 스스로 말한 < 잡초 >가 아내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임권택은 아내에 관한 영화를 줄기차게 찍었다. 여자로부터 아내에로의 이행. 딸로부터 아내에로의 치환.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영역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전망. 좀 이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임권택은 여자보다 아내에 훨씬 관심이 많다. 여기에는 그 자리에 대한 몹시 강력하고도 집요한 요구가 있다. 새로운 가족.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가족 안으로의 편입. 그런 다음 그 자리의 책임이라는 문제, 한국 사회 안에서의 그 자리의 독특한 부름과 응답.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삶의 형국. 그런 다음 임권택 영화 전체 속에서 드문드문 그러나 계속해서 실화를 다룬 영화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계산에 포함해야 한다. 어쩌면 임권택은 점점 더 허구의 이야기, 그 안의 인물을 믿지 않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자책하듯이 혐오해오던 장르영화(들)를 빠져나오는 방법을 어쩌면 실화에서 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멀리 떠나온 다음 다시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서” 되돌아온 <장군의 아들>에서 조차 김두한이라는 실존 인물을 거의 마지막 방어선처럼 거기 그렇게 배치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홍순혜 김진호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 아내 >의 첫 장면에는 “이 영화는 도시 새마을 운동의 기수 홍순혜 여사의 성공사례를 소재로 한 것이다”는 자막이 뜬다. 홍순혜 씨의 이야기는 「억새풀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자서전으로 출판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KBS에서 <억새풀>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진 이듬해 홍순혜 씨는 도시 새마을운동 전진대회에서 대통령상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실화이지만 여기서는 영화로 쫓아간) 홍순혜 씨의 전기의 요약. <아내>가 영화의 무대로 삼은 시간은 그녀의 삶 거의 전부이다. 이야기가 홍순혜의 22살에서 시작하지만 금방 영화는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과거로 넘어간 다음(flash_back) 태어난 집에서부터 시작한다. 극장 매표직원으로 일하는 홍순혜. 그녀는 지금 막 자신에게 구혼한 남자 김진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중이다. 무대화된 영화 안에서의 수행과 행위. 서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해서 학교에서 창문 너머 배우던 시절.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겨우 손에 쥔 초등학교 졸업장, 끝. 그런 다음 단 한 차례도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만) 진행되는 이야기. 마치 홍순혜의 삶의 태도에 대한 반영과도 같은 시간의 질서. 김진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김진호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으로 장사를 하고 홍순혜는 쌍둥이 아들과 그 아래로 두 딸을 낳고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면서 저택에서 마님 소리를 들으며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김진호는 미군 부대 사업을 그만둔 다음 사기를 당하고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하루아침에 시골 달동네로 이사 가야 하는 온 가족. 여전히 큰소리치는 김진호는 집안 살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한다. 홍순혜는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지게를 지고 물동이를 나르며 동네방네 돌면서 물장사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구들장을 고치고, 떡 장사를 하고, 공사장에 나가서 남자 인부들처럼 벽돌을 나르고, 그런 와중에 허세의 잘못을 깨우친 남편이 택시 운전기사를 시작하고, 홍순혜는 재봉 학원에서 새롭게 공부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한 문장으로 썼다. 영화는 그렇게 일사천리로 나아간다. 그런 다음 약간의 일시적 정지. 후일담처럼 덧붙여진 우수영화 제도를 위한 이야기 안의 이야기. 거기서 배운 기술과 타고난 근면으로 사업에 성공한 그녀는 옛 달동네에 찾아가 신세타령만 하면서 화투로 소일하는 부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의 기회를 열어준다. 말하자면 착한 이야기. 약간의 (사회적) 설명을 덧붙이면 홍순혜의 새마을 사업은 하나의 모델이 되어 1980년대에 가정 파출부 직업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직업은 연변 중국인들, 혹은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여성노동자들로 다시 대체 되어갔다) 변수는 거의 개입하지 않으며 홍순혜는 앞으로만 나아갈 뿐 실패를 알지 못한다. (우)박동룡 임권택 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가장 경제적인 방식을 택한다. 디테일은 대부분 홍순혜가 상황이나 내면의 감정을 설명하고 있으며(voice_over_narration) 시퀀스를 대부분 씬으로 압축한 다음 전개하는 대신 배치한다. 물론 이것은 긍정적인 시간의 분배 안에 부정적인 제한을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 범주들이 도식적으로 제한받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어선 운동. 치워진 흔적.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충해야 할까. 게다가 가끔 이 경제성은 < 아내 >에서 의심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바닥까지 추락한 남편 김진호가 “한탕을 위해서 옛 친구들을 만나”자 친구들이 은밀하게 말을 건넨다. “흑인 존이랑 어디 한번 해보자” 하지만 그런 다음 이 제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게 그냥 영화 안에서 사라진다. 이 영화 안에서의 수많은 불안정한 스타 기호의 출몰과 소멸의 한 예. 박동룡 은 (아마도) 오직 이 씬을 위해서 김진호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 다음 내내 영화에서 보이지 않다가 여기서 다시 출연한 다음 마치 영화가 그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사건도 없이 또다시 사라진다. 아마도 이 이름이 낯선 당신에게 약간의 소개. 박동룡은 < 돌아온 팔도 사나이 >로 처음 한국영화에 출연한 다음 단 한 번도 조연조차 하지 못하면서 거의 내내 ‘다찌마와리’ 영화와 공포영화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악한 배역을 떠맡다시피 했다. (박동룡 자신은 인터뷰에서 악역 배우라는 표현 대신 ‘성격파’ 배우라고 불렀다) 그가 남겨놓은 인상은 지나치게 결정적이어서 첫 삼 년 동안 35편의 영화에 악역으로만 출연할 정도였다. (아주 이따금 그가 착한 배역을 맡을 때는, 착하면 착할수록 더욱더,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끝까지 불길하게 남겨 놓았다) 그래서 한국영화에서 박동룡은 등장 자체가 장르적 약속에 따라 악한 기호처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표지. 임권택은 한국영화사 전체에서 달리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이야기의 경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출자이다. 하지만 일직선으로 진행하고 있는 홍순혜의 이야기 전체로부터 김진호가 탈선할지도 모르는 이 장면을 찍은 다음 만일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말 그대로) 삭제하지 않고 편집에서 남겨두었는지 알 수 없게 이 에피소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스스로 소멸해버린다. 무언가 하나의 행위가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활동했음이 분명한데도 어디에서도 반응이 오지 않고 그저 거기서 마치 우발적인 실수인 것처럼 머물 때 자꾸만 영화 안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게 된다. 설명하기 힘든 잉여. 아무런 반향도 없는 진동. 이런 불균형이 <아내>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방에 남아있다. < 서학일대녀 > 하지만 불균형이 < 아내 >에서 부정적인 표시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재표시의 순간과 마주할 때 임권택 안에서 다른 임권택이 시작되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 순간이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약간 멍한 상태가 된다. 홍순혜가 김진호를 만나서 결혼을 한 다음, 그러니까 홍순혜의 긴 고백이 끝난 다음 다시 한 번 김진호가 청혼을 하자, 그다음 장면은 결혼식 장면 없이, 이미 네 아이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누리고 있는 씬이다. 임권택은 마치 홍순혜의 행복한 시절에 거의 관심이 없기라도 한 듯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런 다음 김진호가 사기를 당하고 몰락할 때까지 거의 특징 없이 홍순혜의 실화를 장르처럼 다루면서 진행될 때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이기조차 한다. 그런데 홍순혜가 후암동 저택을 팔고 성북구 송천동 달동네로 이사 온 날, 그날 아침 홍순혜는 물을 동네 저 아래서부터 길어오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주인댁이 있는 이웃집에 간다. 거의 이제까지 진행되었던 방법을 무효로 만들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카메라는 약간 뒤로 물러난 다음 홍순혜가 부엌에서 나오는 것을 내려다본다. 처음에는 그저 홍순혜와 그의 가족이 살게 될 이 집의 가난한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master_shot)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부엌문을 열고 나와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를 따라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옆집 아줌마에게 주인댁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본 다음 이웃집에서 다른 아줌마들과 함께 화투를 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그 집을 나서서 골목 계단 길을 따라 올라간다. 두 개의 선. 홍순혜의 동선과 카메라의 시선. 홍순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동선을 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pan) 때로는 가상 수평선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면서 다가갔다가 다시 물러서면서(zoom_in_and_out) 두 개의 선은 하나가 된다. 그런 다음 그 집 안의 방문을 여는 장면(end_point)까지 따라간다. 느린 팬과 재빠른 줌, 약간의 달리, 조심스러운 틸트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낸 이 롱 테이크 장면은 단지 임권택 안의 임권택의 새로운 발견일 뿐만 아니라 임권택 영화 전체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쇼트 중의 하나이다. 그 위에 다시 덧쓰기로서의 방법. 그 순간 즉각적인 영화사적인 연상. 명백히 이 장면은 < 서학일대녀 >의 어떤 쇼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때 임권택은 아직 미조구치 겐지의 어떤 영화도 보기 전의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 임권택이 미조구치 겐지와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결론의 교집합을 이루는 시간은 < 개벽 >에서 끝났다) 그가 언제 이러한 미학에로 이끌렸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 이런 방법을 발견했는지는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런 다음 다시 왜 이 방법을 중단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내>의 첫 시작부터 이 순간에 이를 때까지 이상하게도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왜 이 영화에 미학적 일관성을 부여하지 않았는지는 누구도 설명하기 어렵다. 혹은 이 동네에 들어서야만 그러한 방법이 가능한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한다. S#_1 S#_2 S#_3 S#_4 나는 이 장면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홍순혜의 가족이 머무는 이 단칸방 집을 다른 씬의 다른 쇼트에서 방문을 등으로 하여 맞은편을 보면(reverse_shot) 거기엔 마당 말고 다른 것이 없다. 임권택 과 (이 영화를 촬영한) 이석기 는 이 좁은 마당에 짧은 레일을 놓은 다음 줌을 단 카메라를 올려놓고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홍순혜와 카메라 사이의 동선과 이동을 서로 맞추었을 것이다. 홍순혜는 약속된 선을 따라 움직였겠지만 종종 재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며 줌의 범위를 빠져나가기 쉬운 난처한 장소의 블랙홀들이 사방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가로막은 나뭇가지들. 유감스럽게도 마당이 좁아서 카메라를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쇼트는 부엌문에서 나온 홍순혜( S#_1), 둘러본 다음 이웃집 아줌마에게 물어보는 홍순혜( S#_2), 무언가 생각하는 홍순혜( S#_3), 대문을 나서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이웃집에 들어서는 홍순혜( S#_4)를 하나의 쇼트로 찍은 것이다. 물론 디테일을 더 세분해서 나눌 수 있으며 방향과 동선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서트가 필요해질 것이다. 혹은 좀 더 단순하게 찍는 방법이 있다. 이 영화는 1.66 비스타비전 사이즈이다. 그러므로 단지 좀 더 물러나면 된다. 그러면 더 넓은 화면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 질문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이 장면을 하나의 쇼트로 찍을 필요가 생긴 것일까. 여기서 임권택은 홍순혜를 유심히 바라보고 싶어 한다. 그때 홍순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영화적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그래서 마치 방향을 돌아서기 위한 일종의 전환처럼 보이는 잉여로서의 순간인, 그러니까 내가 S#_3이라고 지적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잠시 멈춰선 홍순혜의 생각의 시간이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은 그저 생략해도 괜찮은 순간(dead_time)처럼 보이지만, 혹은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동선의 방향을 틀어보기 위한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이지만,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단순하게 나눠 찍어도 괜찮을 이 장면을 그렇게 공들여서 하나의 쇼트(안의 쇼트)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한다, 는 동사의 쇼트. 비가시적인 생각의 행동. 이 순간은 일시적인 정지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선 안에서 찍어야 할 필요가 생긴 잉여의 시간(dead_time)이다. 말하자면 임권택은 (그의 영화 전체 안에서) 이 부근 어딘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부근 어딘가에서부터 데드 타임을 찍을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그는 데드 타임의 쇼트를 인서트로 삽입하는 대신 쇼트의 진행 안에서 일종의 푼크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거기 그렇게 존재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노엘 버치의 충고. 모든 쇼트는 언제나 맞은편의 쇼트(reverse_shot)와 어떻게 이음매를 만들 것인가(raccord)라는 문제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좀 더 단정적인 충고를 보충한다. 쇼트 사이의 접합을 논증하는 건 영화에서 진실의 문제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홍순혜가 이웃집에 도착해서 방문을 열었을 때 두 개의 공간이 만나게 될 것이다. 안과 바깥. 그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아니, 차라리 어떻게 접속시킬 것인가. 하나로 귀속시키는 조형력, 서로 간의 사이에서 도식적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통일된 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는 원칙. 여기서 임권택 은 공간을 펼쳐놓은 다음 홍순혜로 하여금 그 안의 굴곡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나쳐서 목표에 가 닿도록 이끈 다음 방안에 들어서면 그녀가 바라보는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화면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약간의 원을 이루면서 수평으로 앉아있다. 이때 이들이 원형으로 보이는 것은 몸과 머리를 분리한 다음 앉아있는 자세와 시선을 두 개의 방향으로 서로 다르게 연결시켜 놓은 일종의 착시효과이다. 물론 여기서 그렇게 펼쳐놓은 인물의 미장센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이 구도를 < 망부석 >에서도 보았다. 그리고 임권택은 이 방법을 (아마도 유일한 스승인) 정창화에게서 가져왔(을 것이)다. 방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 여기까지 홍순혜를 이끈 바로 그 힘, 우리들이 방금 바라보았던 갑작스러운 일시적인 정지라는 반응에 대해서, 롱 테이크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데드 타임 안의 동작에 대해서, 다음 씬에서는 대사에 의해서건, 제스처를 통해서건, 드라마를 이용해서건, 이웃집 방문을 열고 나면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그때 홍순혜는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미소를(close_up) 짓는다. 임권택은 이 장면을 그저 지나쳐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커다란 얼굴의 쇼트로 다시 보여준다. 별다른 동작도 없이 그저 얼굴 가득히 소리 없는 웃음을 짓는 표정만이 그 전부이다. 편집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만 다가간다면 여기서 시간은 잠시 중단되고 일종의 과잉된 여백의 상태가 된다. 이 장면이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앞으로, 단 한 순간도 물러나지 않고, 잠시의 틈도 없이, 진행되던 리듬 바깥으로 빠져나오면서 더 인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결코 이웃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부자 동네로부터 가난한 달동네로 추락한 다음 여전히 마님처럼 보이는 그녀를 향해서 이웃들이 보이던 적대감에 대해서) 그녀가 내보이는 (항복하는 것만 같은) 위장의 표시는 더더욱 아니며, 그녀 자신이 짓는 (일시적인) 만족의 표현도 아니다. 이 표정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통과할 수 없는 불투명성. 그리고 그것이 핵심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렵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극장 매표원이 된 다음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일시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환경에서 살았지만 여기까지 홍순혜는 아직까지 (네 아이의 엄마이자 김진호의 아내) 홍순혜일 뿐이다. 그러나 달동네에 온 첫날 홍순혜는 마치 새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갑자기 새로운 태도를 획득한다. 나는 당신에게 이 장면이 홍순혜가 달동네로 온 첫날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일깨우고 싶다. 첫날, 새 아침. 여기에 도착하자 문득 그녀는 새로운 주체가 된다. 여기에는 홍순혜에게 던져지는 어떤 질문도 없었다. 조건이 주어지자 그렇게 된다. 그런 다음 그냥 그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간다는 듯이 홍순혜는 새마을 지도자로 가는 길의 첫걸음을 아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다. 거기에 없는 전체 안의 과정. 그러므로 그녀가 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치 실존적 깨달음처럼 주어진 새마을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삶. 이 결정적인 첫날의 첫 번째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일시적인 정지의 생각하는 순간이라는 시간을 찍은 다음 그 공명현상처럼 자리한 쇼트의 자리에서 홍순혜의 커다란 표정으로 짓는 웃음을 찍을 때 임권택은 새마을 운동의 지도자라는 자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만큼 뒤로 물러난다. 왜 당신은 그렇게 희생적인 자리에 가려고 하나요? 무엇이 당신을 불렀나요?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요? 그런데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그런 다음 이렇게 기괴한 웃음을 짓는 홍순혜의 표정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거의 마지못해 임권택은 웃음 짓는 홍순혜가 작은 부처님의 상을 모시는 장면을 찍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은 알리바이를 전시하지만, 홍순혜의 이어지는 행위는 불가의 가르침에 따르는 그 어떤 연상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기괴해 보일 뿐이다. 이야기는 투명한 데 인물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주체의 과정은 정반대로 그만큼 불투명하다.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임권택 과 홍순혜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간극의 심연이 존재하고 있다. 이때 < 아내 >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영화를 임권택이 찍고 있었을 때 새마을 지도자로서의 홍순혜의 활동은 현재진행형이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홍순혜는 대통령상을 표창받았다) <아내>가 다루는 이야기는 홍순혜가 새마을 지도자가 된다, 라는 단 하나의 진술로 환원되지만 여기에는 임권택의 어떤 포기가 있다. 포기?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거기서 마주치는 간극 안에서 점점 더 음울한 희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네 명의 아이들은 어려서 시작해서 십 대를 지나도록 어머니 홍순혜의 활동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그녀의 성공에 어떤 한순간에도 방해가 되기를 원치 않기라도 하듯이 행동한다. 심지어 이 아이들이 십 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영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다음 이따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인사를 아침마다 씩씩하게 하기 위해서 등장할 뿐이다. 남편 김진호는 홍순혜가 자기 몰래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는 모습을 본 이후 개과천선을 한다. 드라마의 상투적인 반전. 그런데 그런 다음 김진호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단지 이것을 가정에서 (경제적) 힘의 새로운 분배에 따른 재배치라고 설명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남편은 거의 사라진다. 홍순혜의 가정이 몹시 행복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 평면적인 외양은 내게 홍순혜의 알 수 없는 미소처럼 보인다. 아마 임권택 도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이따금 이 단조로운 평면을 뚫고 나오는 흔적들은 여기에 종종 왜상(anamorphosis)의 순간들과 마주치게 만든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은 힘든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다. 집은 아줌마들로 가득 차 넘치면서 재봉틀과 씨름을 하며 넘쳐나는 일감에 돈 버는 재미로 밤 깊은 줄 모른다. 이때 임권택의 관심은 오랜만에 남편에게로 향한다. 그때 김진호는 마치 남의 집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장모가 열어주는 대문 사이로 들어선 다음 거의 조심스러운 자세로 들어선다. 여기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남편 김진호가 마루에 들어섰을 때 일하는 아줌마들 중에서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위계질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매일처럼 마주쳤을 그들 사이에서 왜 아무런 인사가 없을까. 그건 김진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그녀들. 차라리 우글거린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넘쳐나는 아줌마들. 그녀들은 깔깔대고 웃으면서 신바람이 나 있지만 정확하게 그만큼 김진호는 그녀들 바깥에 놓여있다. 이 층에 올라서서 눈이 마주쳤을 때야 비로소 이 층의 그녀들은 그에게 인사를 하지만 곧 시선을 돌리고 일감에 매달린다. 김진호는 구태여 계단을 따라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홍순혜를 구석으로 부른 다음 이제 우리들의 가정생활을 가질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한다. 하지만 홍순혜는 더 기다려달라고 대답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너무 상투적이어서 거의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완전히 대화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상투성 자체를 동요하게 만든다. 동시적인 두 개의 장면. 먼저 홍순혜가 김진호의 요구에 대답하는 장면. 분명히 김진호가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홍순혜는 대답하는 순간 마주 보던 몸을 돌린 다음 자신의 대답이 끝날 때까지 마치 그의 요구에 대한 거절을 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약간 웅변하는 것처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이해도 없다. 또한 둘 사이에서 가능한 일말의 해결도 없다. 홍순혜의 선택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기서 홍순혜가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을 독백으로 바꿔칠 때 여기에는 임권택의 포기가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도착적으로 읽는 방법이 가능하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홍순혜와 김진호를 벽 옆에 세워 놓은 다음 카메라를 마름모꼴로 세웠다. 물론 이 위치는 홍순혜가 김진호에게 대답(하는 척하면서 독백을)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얼굴을 보기 위한 자리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홍순혜와 김진호의 그림자가 마치 정말 보여주고 싶은 진짜 모습이기라도 한 것처럼 벽에 비쳐 보인다. 이때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위험한 해석이다. 과잉진술에는 언제나 어딘가 외설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망설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임권택이 바라는 두 사람 사이의 진실한 행위가 아닐까. 전체의 배치 속에서 괄호를 치는 것은 내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임권택 의 영화 중에서 새마을 영화들이 (볼 때마다 점점 더) 매우 이상한 위치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단지 제도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거장’ 임권택을 이야기하다 말고 이 자리에 오면 슬그머니 피해버린다. (아마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아내 >가 < 왕십리 >와 같은 해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비평을 불편하게 만든다. 지레짐작을 하고 ‘이 시기의’ 임권택은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들)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미리 방어선을치기도한다. < 족보 >와 < 짝코 >가 우수영화였다는 사실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임권택 자신은 “우수영화로만 선정되면 되니까 그저 제작자 눈치 보지 않고 관객들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볼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 아내 >에서는 “하고 싶은” 무엇을 “해 본” 것일까. 그 무엇이라는 모순의 미지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이 세 편의 영화, < 아내들의 행진 >과 < 옥례기 >, 그리고 <아내>를 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거의 와해 직전까지 간 다음 불화를 무릅쓰고 갑자기 거기서 무언가 환상의 쾌락을 누리려는 듯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게 볼 때마다 몹시 이상하게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잠시만 <아내>의 소재를 옆으로 치운다면, 그래서 그저 하나의 드라마로써 다가가 본다면, 아아, 라고 탄식할 정도로 이 영화에는 임권택 영화로서 보기 드물게 행복한 순간들이 과도할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져 나온다. 그게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그 자체를 임권택이 잠시라도 망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임권택은 결코 홍순혜에게 단 한 순간도 동일화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거기서 무얼 얻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나는 용기를 내서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행복에 대한 도착적 기쁨의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걸 내어줄 수 있다면 모든 고난을 감수해야 할 지도 모르는 희생을 치를 용의가 있다는 대답이 거기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쳐다보아도 괜찮은 것일까. 임권택은 이 순간 두 개의 시선 사이의 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차라리 찢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여기에는 이야기 안에서 오가는 시선과 이야기를 쳐다보는 시선이 완전히 다른 차원에 서로를 내맡기고 각자의 시선을 갖기 시작한다. 여기서 희생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체로서의 자기의 자리를 잃고 불투명한 타자의 질서에로 밀려나는 반면 주인공의 행동을 쳐다보는 시선은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대신 마치 그것이 자기의 기쁨이기라도 한 양 반대로 타자의 질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척한다. 그때 기쁨과 희생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임권택의 새마을 영화(들)는 그렇게 매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어디를 향해서?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임권택은 여기서 비로소 임권택이 된다. 그렇지만 여기 머물고 있는 두 명의 임권택. 영화 안에서 무언가 서로 다른 목소리가 웅성거릴 때 우리는 어느 쪽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핵심을 찾으려면 안 된다. 반대로 우리를 무질서에 내맡겨야 한다.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속삭임들이 들려온다. 여러 명의 소리. 기꺼이 질문의 카오스 속에서 부서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재난을 환대한다. (계속) 1976년 99분 컬러 1.66 감독 임권택 우진필림 각본 문상훈 , 박철민 촬영 이석기 조명 차정남 편집 김창순 음악 정인섭 태현실 ... 홍순혜 박근형 ... 김진호
금지된 질문. 영화감독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황당무계할 뿐만 아니라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간절하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나는 오랜간 종종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영화에 관한 개념의 활용. 비평이라는 거리. 하지만 우리들은 제대로 윤곽을 파악한 것일까. 항상 우리들을 사로잡은 불안. 혹시나 그저 뇌라는 스크린의 가장자리만을 맴돈 것을 아닐까. 물론 우리들은 쇼트와 씬을 이용해서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때로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지는 요새. 어떤 힘 앞에서 느끼는 경이적인 감탄. 어떤 미로 앞에서 난처하게 길을 잃은 다음 이리저리 헤맬 때마다 느끼는 불안. 나는 내 동료들에게 걱정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가까스로 숨을 쉬듯이 질문하곤 했다. 혹시 당신은 표류하는 듯한 기분을 지금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렇게 물결에 흘러가듯이, 조수에 밀려가듯이, 항로를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흘러가는 이미지를 본다. 어쩌면 최악의 순간을 맛볼 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경우. 자꾸만 밀려나서 어느 순간 해안가로 밀려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비평가가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멈추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제발 잠시만이라도 멈추어주세요. 아니요, 그건 영화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저 영화를 따라오세요. 어느 순간에 마주칠 지도 모르는 번개 같은 깨달음. 그걸 믿어야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정말 멈추어 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영화가 무엇보다도 물리적이며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신경조직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가. 영혼과의 마주침. 달리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다. 영화라는 기계적인 운동은 우리를 둘로 나누어 놓았다. 영화라는 스크린과 그것을 보는 우리들. 그 사이에 수많은 이론들이 걸쳐서 있다. 라캉을 경유한 봉합(suture). 장-피엘 우다르가 발견한 로베르 브레송의 < 잔다르크의 재판 >의 시선에서 잘려나간 쇼트들. 벨라스케스를 인용한 푸코로부터 영감을 얻은 표상과 재현의 변증법들. 파스칼 보니체는 더 밀고 나가길 원했다. 프레임의 변형들 속에서 관객들은 어디에 있을까. 장 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의 기계적인 해석. 이때 이 논쟁이 1968년 5월 파리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거리로 내려온 구조. 행동개시. 고다르는 과격하게 영화를 부수고 있었다. 안토니오니는 유럽의 모던한 시간을 잠시 등지고 중국의 혁명적 시간을 방문하였다. 상영시간 4시간 27분의 < 중국 >. 베르히만은 베트남의 사이공에서 분신자살하는 승려의 이미지를 자기의 영화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불태웠다. < 페르소나 >. 글라우베 로샤의 축제와 제사. 오시마 나기사의 정치적 실험.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논쟁. 장-루이 보드리와 장-루이 쉬페르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물론 이론들을 시네필의 행동에 따라 재번역한 세르주 다네를 잊으면 안 된다. 미국식으로 번역된 교육의 코드(tutor code). 그건 모두 남자들의 이론일 뿐이에요. 여자 관객들의 자리를 생각해야만 해요. 롤라 멀베이는 조셉 폰 스턴버그와 알프레드 힛치콕의 이야기의 눈길 속으로 들어가 ‘남자가 되어버린’ 시선의 쾌락을 공격하였다. 정말 그런가요? 스티븐 히스는 회의에 차서 반문하였다. 그럼요, 우리는 시선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해요. 카자 실버만이 가세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라캉을 오해한 것은 아닌가요. 지젝은 익살맞게 논쟁을 무효화 시키고 싶어 했다. 나는 여기에 조안 콥젝을 더하고 싶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관객들은 거기 그렇게 ‘상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이빗 보드웰은 근엄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참, 거기 영화라는 이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극장을 쏘다녔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다소 장황하게 다시 한 번 시네필의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분류들. 감각들. 액션들. 정감들. 그리고 시간. 무심한 결론. 영화의 이론이라는 건 없어요, 영화의 개념들이 있을 뿐이지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를 철학에 복종시키려는 위험한 함정이다. 나는 영화가 영화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모험을 계속 하였다. 21세기의 영화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질료. 먼 여행. 질문의 포물선.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의 자리? 그렇다. 앙드레 바쟁이 했던 질문. 우리들은 영화라는 상형문자를 독해하기 위한 주석을 달고 있는 것이랍니다. 만드는 쪽과 보는 쪽. 그 절대적인 차이. 단지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차이지어지고 지연된 이미 거기와 지금 여기. 나는 영화에서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말의 공허함을 느낀다. 다시 둘로 나뉘어진 우리. 때로는 멀어지고 가끔은 가까워지지만 서로 겹칠지언정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우리.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절대적인 거리. 이론적으로 아무리 시도해도 결국 내 앞에서 무효가 되어버린 통일. 그건 둘로 나뉘어진 셈이다. 먼저 이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수없이 그 둘 사이의 통로를 찾았다. 감추어진 질서인 ‘누군가’. 그래서 나는 이 지식(들)을 껴안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만났다. 하지만 감독님과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한 번도 그 개념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종종 흐려진 언어들. 이따금씩 멈추어선 말. 그 사이의 행간들. 나는 그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종종 그건 매우 위험했고,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점핑을 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질문하려는 영화의 모든 쇼트를 셈할 수 있었으며, 그 순서를 따라 복기할 수 있었으며, 가끔 남들이 느껴보지 못한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했으며, 반대로 때로는 남들이 모두 본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으며, 그러면서도 동선과 상상선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나는 매번 놓쳤다. 처음에는 세상이 있었다. 그런 다음 창조가 거기 개입하였다. 그리고 생산이 이루어진다. 생산된 접속들. 하지만 물리적인 이접효과. 나는 다른 인터뷰를 읽어보았으며, 배우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기술 스텝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결국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소로 좁힌 거리. 하지만 영화에서의 뇌의 고유한 위치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단상들. 초안에 관한 이야기. 연대기적 대응. 그 영화는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일까. 얼핏 산만해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 나는 이럴 때 어디서부터 작품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어디서 멈추어야하는 것일까. 조형적인 힘이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때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은 저기에 있다. 그건 영화의 운명이다. 여기에 있음과 저기에 있음. 그 사이의 벽. 나는 여기서 영화를 본 다음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쓴다. 그때 나는 영화에 대해서 쓴다기보다는 영화를 본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 그 사이에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 이 이상한 숨바꼭질. 블랑쇼라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속에서 중얼거림이 전해져올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라는 (바르뜨의) 선언, 그런 다음 작가는 누구십니까, 라는 (푸코의) 질문. 두 개의 포스트. 우리들은 포스트구조주의를 통과한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주의에 대한 살해를 지켜보았다. 위대한 말라르메. 아마도 거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인칭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 그는 말했다. 전대미문의 순수함에 이를 때까지 거울을 희박하게 만들어라. 희미해진 거울. 나도 잘 알고 있다. 주체의 문학적 죽음. 혹은 주체에 관한 임상실험.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선명하게 말라르메의 그림자를 본다. 라캉이라면 좀 더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선 당신. 당신이 말하는 그 곳에 당신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멀리 간 다음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여기에는 환원 불가능한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스스로의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누가? 내가. 영원한 되풀이. 거의 순환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매번의 반복. 물론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이 반복의 기회가 동일한 순간의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라리 이 약속의 상실이라고 불러야 할 기회. 중단 없는 중얼거림. 그때 내가 본 영화에 대해서 쓴다는 문제를 생각한다. 그건 한 번의 주사위를 던지는 내기이다. 다음번에 던지면 다른 패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패가 동시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내기를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임권택 감독님의 많은 영화에 대해서 글을 썼다. 매번의 주사위 던지기.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진다. 아마도 언젠가 세 번째 주사위를 던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내기를 하는 중이다. 이번에 나올 새로운 패. 내가 던질 때마다, 우리들이 던질 때마다, 영화에 대한 글은 영화 앞에 도래한 그 순간의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기호이다.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 할 한 순간을 잠시 멈출 때 오는 불안함.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말이 아닌 것, 영화 안에 있는 그 무언가, 그저 중얼거림, 세계 안에서의 영화의 자리, 그저 떨림, 영화 안에서의 세계의 존재, 부분집합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운동들, 내가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침묵보다 덜한 것, 그렇다, 텅 빈 심연보다 덜한 것, 그럼으로써 영화를 본 나를 일깨우는 순간들과의 접촉,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내내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무언가의 가득함,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들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다양한 표현, 매번 느껴야 하는 새로운 감각,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인상들, 그 앞에서 마주친 형상들, 생각을 멈출 수도 없고, 중단할 수도 없는 떨림, 그리고 이미 중얼거림, 영화 안에서 중얼거리는 이미지들, 청각적 신호들, 수많은 영화의 기호들의 다발들의 웅성거림, 거기서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중얼거림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토록 가득 찬 비어있음을 쓰고 또 쓴다. 가득 찬 비어있음. 결코 그 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말. 영화 비평의 글쓰기는 매번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이 글은 텅 빈 말이 아닌가요. 물론 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비유. 침묵의 소리, 존재의 중얼거림, 그건 우리가 귀에 조개껍질을 대고 있을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득 찬 비어있음과 같고 소리가 된 침묵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글을 쓰다 말고 잠시 중단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서 당신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시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두 개의 나뉘어진 자리 사이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듯이 가깝게 만들어보고 싶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의 행간에 귀를 기울이기. 잠시 동안 머뭇거림에 있을 지도 모르는 배움. 당신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그 순간, 영화는 죽는 것이다. 영화의 죽음에 관한 (맹렬한 저항의) 사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영화는 그 어떤 분류의 정답에 귀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끝낼 수 없게 영원히 다시, 또 다시, 또 다시, 그렇게 되풀이해서 생각할 때, 그 자리에서 영화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화라는 삶. 영화의 생명. 당신께서는 이 만남 속에서 사용된 말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혹은 영화에 대한 도구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관해서, 라고 쓰지 않고 대해서, 라고 썼다. 물론 용법은 각자의 몫이다. 말하자면 도구상자로서의 말. 나는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 < 달빛 길어 올리기 >까지의 최종 책임자로서의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청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의 자리를 둘러싼 이론적 수수께끼들, 차라리 주인을 둘러싼 그 어떤 이야기. 우리가 항상 되찾으려 했던 영화적 사건. 무엇을 무엇과 짝짓는다는 문제. 우리들은 수 없이 많은 모델들을 만들어왔다. 기호학적 모델. 정신분석학적 모델. 신화적 모델, 형식적 모델, 철학적 모델, 현상적 모델. 그 사이의 관계와 격리. 서로 각자의 취사선택. 수업시간에 한 한생이 내게 물었다. 이 모든 모델(들)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없는 것일까요. 그럴 때 마다 나는 자문자답하였다. 어떤 모델도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란 결국 없는 것일까. 나는 모델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단지 영화라는, 내가 지금 막 보고 난 그 고유의 대상으로서의 그 영화가 궁금한 것이다. 질문들. 항상 그것만이 영화 앞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났다. 차라리 나는 영화를 만든 감독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번번이 무언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플라톤의 동굴. 종종 거기서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의 웅성거리는 듯한 메아리를 듣는다. 두 개의 이미지. 내 질문(속의 영화들)과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속의 영화). 두 개의 울림. 좀 더 단순하게 질문과 대답. 아주 가끔씩 이루어지는 사고와 세계 사이의 우연한 접촉. 어디로 나갈 지 알 수 없는 길. 동굴에서 표지판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수천 갈래로 갈라진 길. 여기에 지름길 따위란 없다. 그러니 여기서 그런 행운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낭떠러지. 이 길을 따라가면서 여기서는 오로지 자기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언젠가 여기 온 것일 지도 모른다는 기억을 더듬어야만 한다. 이미 본 영화, 이미 만든 영화. 양쪽의 (서로 다른) 경험. 어쩌면 영화 앞에서 느껴보는 덧없음으로 인한 자신의 어둠에 잠긴 사고를 향해 던져질지 모르는 섬광 같은 배움의 순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이 자리를 청한 것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거리를 좁혀보고 싶을 뿐이다. 물론 마지막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만남은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렇게 내 질문은 시작한다. 정성일 _ 이렇게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1987년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진행할 때 감독님의 영화에서 무엇을 배우면 됩니까, 라고 질문하자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굴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 그러니까 2003년에 인터뷰를 마치면서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감독님은 내 영화의 빛을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그 질문을 드린 지 10년이 막 지나가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드리고 싶습니다. 임권택 _ 나이를 봐라.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임권택 영화에 대해서 보라는 대답을 하고 싶어요. (잠시 생각) 내 영화를 본다면 임권택의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령 < 축제 >라는 영화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이 영화를 1998년도에 찍었고 그걸 가지고 출연자들과 그때 이미 다 함께 본 영화에요. 거기서부터 15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난 명절 무렵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여준 모양이에요. 거기 출연한 연기자가 전화를 해 와서, 나한테 그때는 전혀 안 보였던 것이 지금 나이에 와서야 보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분은 연기자는 아니고 변호사고, 그때만 해도 이미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십여 년 후에 그때 안 보이던 것이 많이 보였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 전 (칸 영화제 코디네이터인) 피에르 리시앙이 지금 < 만다라 >를 세계에 배급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오는 거예요. 자기도 30년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안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많이 보이는 영화라는 거예요. 아마도 일정한 세월을 살아내면서, 그렇게 삶의 누적이 주는 그런 체험의 세계가 영화에 많이 박힐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읽히는 그런 영화를 내가 만들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 왜냐면 같이 작업하면서도 안보였다니까, 그렇게 긴 세월 영화를 보아온 사람들조차 이제는 보인다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나이만큼, 나는 나이 이상도 이하도 찍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나이만큼, 살아온 삶만큼 영화를 찍은 거예요. 그 안에서 영화를 같이 찍은 사람조차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그 감독의 나이를 읽어줬으면 좋겠고 그걸 보려고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정성일 _ 오늘 들어야할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습니다.(웃음) 오늘은 제 동료들이 감히 감독님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제가 대표해서 드리겠습니다. 저는 영화비평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영화를 본다는 문제에 관해서 자기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직업적인 관객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옹호하기도 하고 방어하고 또 공격하기도 합니다. 때로 감독님께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불편한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감독님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임권택 _ 이를테면 영화비평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해요. 좋은 쪽도 나쁜 쪽도 다. 그 어디서 오는 불편이냐, 그것은 연출자가 작품을 해내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하고 하는 비평, 또 아니면 해낸 것보다도 도가 지나친 칭찬이 있다든가, 그런 것에 대한 어리둥절, 그래서 늘 불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성일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도움이 되었던 순간은 있습니까? 임권택 _ 늘 도움을 받죠, 늘. 어떤 거냐면 어떤 비평도 내가 비평하는 사람들한테 실제 영화에 담아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잘 전달되지 않았구나하는 자성 같은 것이 생기게 되요. 그런 비평을 만나면 비평가들에게 내 생각이 좀 더 명료하게 잘 짚이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 _ 좀 더 부정적으로 비평가들이 감독님의 영화와 불화를 겪는다, 혹은 더 나아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임권택 _ 뭔가 자기들 틀을 미리 가지고 내 영화가 자기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비평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그 틀 안에 들어갔든, 안 들어갔든 간에 사소한 의견이라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성일 _ 데뷔작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쓰면서 당시 감독님 영화에 관한 비평을 열심히 찾아 읽어봤습니다. ‘젊은 감독 임권택 군은...’ 이런 표현도 있었어요(웃음) 처음 감독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뉴스로 실린 신작 소식 이외에 어떤 비평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권택 _ 그 만큼 내 영화가 주목받지 않았고, 심층적으로 평을 할 만큼 잘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좌측상단부터) < 족보 >(1978), < 깃발없는 기수 >(1979), < 짝코 >(1980), < 만다라 >(1981) 정성일 _ 하지만 저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화비평이 대중영화에 무관심한 것은 영화비평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1987년은 이미 감독님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 < 티켓 >을 만든 다음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도 좋습니다. 이미 1964년 < 망부석 >은 그해 한국영화 중에 가장 좋은 영화중의 한 편이었습니다. 한국영화 비평사를 돌아보면 이미 1960년대에 영화비평의 활동이 활발했고, 많은 영화비평가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시기에 감독님의 영화가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면 저는 1970년대에 < 족보 >가 훨씬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권택 _ 그랬겠죠. 만약 내 영화에 대해 비평가들이 많은 평을 해주었다면 나 자신도 비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봤을 테고, 그 사람들은 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예민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내 영화에 대해 무관심하게 봤던 것처럼 십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으면서 나도 비평가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정성일 _ 본격적인 비평이 나온 것은 < 만다라 >가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진지하게 영화를 다룬 (영화진흥공사에서 나오던)「월간 영화」를 비롯해서 영화 비평가들의 <만다라>에 대한 상찬과 호의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 이전에는 감독님 영화에 관한 그렇게 진지하거나 집중적인 비평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다라> 이전에 < 짝코 >나 < 족보 >같은 걸작이 이미 있었고, 비평의 관심도 있었을 법한데, 신기할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왜 비평가들이 <만다라>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영화의 무엇이 비평적 시선을 끌었을까요? 임권택 _ (잠시 생각)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열심히 만들었고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 짝코 >, < 깃발 없는 기수 > 정도 부터였던 거 같은데, 아마도 정성일 평론가와 그 무렵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시작이었어요. 서강대학교에서 내 영화를 놓고 비디오로 회고전을 하고 글을 발표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서부터 내 영화에 대한 어떤 진지한 주목이 생긴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전혀, 전혀 없었지요. < 족보 >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평이 아니고 ‘지평선’과 같이 신문에서 논설했던 쪽 사람들의 영화 감상이나 단상을 써낸 거 외에는 거의 본격적인 영화비평은 없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의 진가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견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토 다다오(佐藤忠男)선생님의 < 만다라 >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마닐라 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작품을 처음 보신 것 같습니다. 마닐라 영화제에서 <만다라>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걸작을 만났다”고 썼는데,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온 걸작이란 표현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임권택 이라는 감독을 발견했다는 흥분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 비평가는 영화를 국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작가의 발견에 주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2000년 『한국영화의 정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영화사가 아니라 사실은 감독님의 영화를 통해서 한국영화를 생각하는 ‘임권택 연구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감독님이 영화비평가와 첫 번째 우정을 만든 사토 다다오 선생님과의 인연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 _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난 것은 아마도 일본에서 < 길소뜸 >과 함께 한때 왕성하게 한국영화들을 초대할 때에요. 처음은 못가고 두 번째 초청받아 일본에 갔을 때, 만나서 얘기하는 자리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이 끼어 있었어요. 정성일 _ 몇 년도로 기억하십니까? 임권택 _ 80년대 초반이나 될까. 이런 저런 질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느낌은 저 평론가는 나를 보호하려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은 한국영화가 대부분 지나치게 감상에 치우쳐서 절제의 측면을 잃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 영화의 절제에 대해서 칭찬을 했어요. 이런 비평을 들으면서 절제라는 것, 이것이 영화가 가져야하는 미덕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까지는 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하여튼 뭔가 절제를 많이 잃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노파심 같은 게 있는 거요. 절제 때문에 자칫 설명 부족이랄지, 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시켜야하는 부분을 그렇게 건너뛰면서, 자칫 잘못된 비약, 이런 게 오히려 설명 부족이 되고, 오히려 폐단의 우려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명도 장황하고 그랬는데, 그런 비평의 소리를 일본 쪽에서 들으면서 내가 지나치게 장황한 노파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극을 주신 분이 사토 다다오 선생이지요. 정성일 _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영국에서 발행되는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전 세계 영화비평가들의 앙케이트를 받아 집계를 내서 영화사상 10편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2002년에는 < 춘향뎐 >을, 그리고 2012년에는 < 만다라 >를 열편 중의 하나로 선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비평의 관습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면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세계 영화사의 계보 안에 하여튼 위치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감독님의 영화를 미조구치 겐지의 계보 안에 위치 지은 첫 번째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임권택 _ 일본에 갔을 때 내 작품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일본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내 영화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은 점이 많다는데 사실 그때까지 나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고, 일본영화는 한국에 수입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일본에 방문했을 때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 떠나기 전날, 일본 국제교류 기금에서 <우게쓰 이야기>와 < 서학일대녀 > 두 작품을 16밀리 프린트로 보여줬어요. 그때 시간이 없어 두 작품밖에 못 봤어요. 12월인 건 기억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거의 끝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 쪽에서는 좀 더 시간을 내면 갖고 있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두 작품을 본 이후에 그 분의 영화를 다 보기위해 더 머무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그 이후 왜 내 영화들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았는가 보니까 정말 영화를 끌고 가는 정서적인 어떤 것들이 비슷한 데가 있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미조구치 감독의 영화는 무인사회가 갖는 정서에 바탕을 두는 것이고 나는 문인사회가 갖는 바탕에서 영화의 운행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선생도 동양인에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어떤 것이 있어서이지 거기에 무슨 표절을 했겠냐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정성일 _ 한편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영화를 보시면서, 정서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일본영화 중에서,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는 친근함이 드신 감독이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그게 동시대이건, 아니면 고전적인 영화이건 관계없이. <아! 노무기 고개>(1979), < 행복의 노란 손수건 >(1977) 임권택 _ 나는 어렸을 때 짧은 무성영화 몇 편을 본 거 외에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지금 그냥 문득 떠오르는 영화들은 1979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여행을 시켜주었는데 미국에서 귀국하는 마당에 도쿄를 들려서 일본 영화 몇 편을 본거요. 그때 내가 이것은 참 괜찮다싶은 영화는 <아! 노무기 고개>라는 견사공(絹紗公)들에 대한 얘기요. 일정시대 시골여자들이 끌려가서는 물레 돌리는 직조공장에서 근무하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를 만든 야마모토 사츠오라는 감독이 상당히 괜찮은 감독인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는 영화로는 야마다 요지의 < 행복의 노란 손수건 >이란 영화를 재밌게 본 기억이 나고, 그 감독의 시리즈로 주욱 나왔던 < 남자는 괴로워 >도 세편 정도 봤어요. 그거 말고는 일본 영화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면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 전혀 교류가 없었고. 시나리오 같은 거는 책으로 보고 많이 베끼고 했다는데, 하지만 나는 국민학교에서 어설프게 일본어를 배웠고 또 그런 걸 그때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지금처럼 DVD나 그런 것도 없었어요. 필름이 들어와서 영사기에 걸려야 일본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이죠. 그래서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어요. 완전히 단절되었으니까. 정성일 _ < 만다라 > 직후에 런던에서 다섯 편의 한국영화를 초대해서 상영을 한 기획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초대받은 영화 중 한편이 < 안개마을 >이었습니다. 이때 유럽 영화저널에서 <안개마을>에 대한 평가가 있었고, 여기서 다섯 편을 소개한 행사는 이후 유렵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지금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임권택 _ 그때 나도 영화와 함께 런던을 방문했었어요. 하지만 직접 거기서 마주친 느낌은, 글쎄, 어떤 평가가 나왔는지는 몰랐고, 영국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이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별로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정성일 _ 아마도 비평적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 안개마을 >에 대한 이해는 미지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처음 마주친 비평의 난처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종종 안토니오니를 인용하면서 이 영화를 테시가하라 히로시의 < 모래의 여자 >의 계보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처음 감독님의 영화가 유럽과 만났을 때, 호의는 충분히 느껴지지만 오해되고 있을 때의 난처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 _ 질문이 들어오는 걸 보면 이 사람이 내 영화를 제대로 봤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난처함 정도가 아니고. 피에르 리시앙의 말에 따르면 임 감독 초기의 영화는 때려 죽여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고까지 했어요. (웃음) 문화의 벽이었던 거죠. 하지만 계속 당신의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나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정보가 당신 영화 도처에 있다. 아마도 당신 다음 세대의 한국영화들은 당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정성일 _ 한국 영화가 런던에서 상영된 이후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독일을 경유해서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독일 영화비평가인 클라우스 에더는 감독님의 영화를 방어했고, 더 나아가 뮌헨 영화제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획할 정도로 지지하였습니다. 유럽의 영화비평가들, 영화 저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클라우스 에더는 비교적 정서적으로 동양 사람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서양인들이 갖는, 어떤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많이 없는 평론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뮌헨 영화제 이후로는 별로 만난 적이 없어요. 사실 만나도 언어가 안 통하니까 많은 이야기를 하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토니 레인즈랄지 프랑스 평론가들은 자주 만났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가 서방에서 결정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 씨받이 >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흘러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 라쇼몽 >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그 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였다. 그 상은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에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7년 <씨받이>로 상을 받았을 때 감독님에게 그 상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그쪽을 얘기하려면 난 참 난처한 게 많은데 진흥공사에 장영목이라는 사람과 둘이 베니스 영화제에 갔어요. 닷새인가 호텔 숙소를 내주고 그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경비를 대야한다고 하더라구요. 거 참. 닷새가 지나니까 경비가 없다고 둘이 머무는데 하루에 80불 받는 상 마르코성당 뒤에 아주 낡은 호텔로 옮겼어요. 폐막식이 가까워지면서 < 씨받이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프랑스에서도 호의적으로 쓰고, 그냥 막연하게 그런 소리만 듣고 있었어요. 마침 ZDF 독일 제2 방송이 인터뷰 요청을 해서 가는데 내 앞서 인터뷰를 한 여자가 심사위원장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인터뷰 끝나고 스쳐 지나가다가 내가 <씨받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자 “나는 심사위원장이긴 하지만 내가 상을 줄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는 <씨받이>를 굉장히 좋은 영화로 봤다”고 얘기하고 갔어요. 그러고 며칠 뒤 시상식 날인데 그때 분위기는 아주 작은 거라도 탈 수 있지 않겠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일 년 전에 일본에 그 날짜에 들어가겠다고 약속을 해놔서 나는 수상식까지 있을 수 없었던 거요. 그래서 영진공 사람만 남았어요.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잠시 들린 서울에 가서야 수상 소식을 알았어요. 나중에 일본 사람들이 이 약속을 좀 어기면 어떠냐, 그 중대한 시상식을 놔두고, 참 답답한 인간이다. 저건 한 번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지키는 놈 그랬을 거예요. (웃음) 한국 신문들이 수상결과를 아주 작은 지면으로 보도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큰 상을 작게 보도하다니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때 이게 큰 상이었구나 생각했고, 사실 내 영화에 기대한 게 없으니까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보람 아니냐, 그런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상을 탔을 때는 아주 우물우물 지나간 거예요. 그 다음 < 아다다 >, 또 그 다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로 이렇게 매해 계속 상을 받으니까 이거 별것도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가 또 < 춘향뎐 >에서 칸 영화제 경쟁본선에 들면서 세계 배급이 되고, 그러면서 수상이란 게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그때서부터 큰 영화제 수상이라는 게 내 개인뿐 아니라 한국 영화의 위상과도 관계 되어있고 그 때문에 전 세계로 배급도 되고 하니까. 그때부터 수상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런 정도인 거지요. 정성일 _ < 씨받이 >가 상을 받은 이후로, 말하자면 한국 관객들로부터 우리와 다른 문화의 관객들을 향해서, 영화가 받아들여진다는 면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습니까? 임권택 _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인터뷰할 때 내가 1분 얘기하면 10초도 번역이 안 되는 이상한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쨌거나 그 영화가 통하는 거요. 내가 제일 관심이 컸던 게 뭐였냐면 내 영화가 어디까지 통하고 있는가. 영어를 모르니까 내가 점검해 볼 통로가 없었어요. 평론가나 기자들 시사 끝나고 보면, < 씨받이 > 경우 굉장히 엉뚱한 질문만 나오고. 너희 영화 검열은 어떠냐, 그런 질문만 했어요. 때로는 질문이 아주 기초적이어서 쟤들이 우리를 놀리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하지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를 통해서 이런 페이스로 가면 누가 의심하고 말고도 없이 내 생각으로 찍으면 유럽이고 어디고 통하는 영화가 되겠다는 자신을 가졌어요. 정성일 _ 감독님의 전면적인 회고전으로 1989년 낭뜨 영화제에서 10편을 상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칸 영화제 경쟁 초대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프랑스 비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프랑스에서는 처음부터 굉장히 호의적이었어요. 샤를 테송도 그랬고 장 미셸 프로동도 그렇고. 정성일 _ 프랑스 비평가들이 특히 좋아했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나라마다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선호하는 영화가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임권택 _ < 춘향뎐 >도 좋아했고, 그때 경쟁에 갔을 때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었던 < 인도차이나 >를 찍은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는 올해 자기가 칸에서 본 영화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 취화선 >으로 칸에 갔을 때는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빗 린치는 파티를 하는데 내게 다가와서 전체로서나 지엽적으로나 모두 완벽하다면서 당신은 완벽주의자로 영화를 만든다, 라고 하더라구요, 고마운 이야기지요. (웃음) 정성일 _ 프랑스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질문을 던졌던 부분들이 있습니까? 임권택 _ 많이 공감이 가는 소리를 하는 게, 르몽드에 있던 장 미셀 프로동은 < 천년학 >을 본 다음 < 서편제 >와 < 춘향뎐 >을 통해서 판소리를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떻게 <천년학>의 그런 영화적 수준을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면서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기까지는 다소 시차가 걸렸습니다. 1996년 USC에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웰옥令돈?대대적인 회고전과 학술발표가 있었고, 그런 다음 영어로 된 첫 번째 감독님 연구 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임권택 _ 그리고 뉴욕영화제에서 거푸 두 번을 임권택 특별전을 했을 정도로 성원이 있었고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아주 전적으로 내 영화에 대해서 지지를 보냈고, 그런데 그 배경을 보니까 스탠 브래카쥬 같은 사람이 열심히 옹호를 해줬어요. 정성일 _ 비평의 전통이 미국과 유럽이 크게 다른 편인데, 유럽 비평가를 만났을 때와 미국 비평가를 만났을 때의 차이를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 안거 >(1997) 임권택 _ 글쎄, 뭔가 문화적 벽을 갖고 서로 만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에... (잠시 생각) 상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에 경쟁으로 온 영화중의 하나로 (후빙 리우가 연출한) 중국 영화 < 안거 (安倨)>를 심사하게 된 거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함께 한 사람 중에 헝가리의 이스트반 자보, < 황금연못 >을 찍은 미국 감독 마크 라이델, (러시아 감독) 엘렘 클리모프, 일본 여배우인 마츠자카 케이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었어요. < 안거 >라는 영화는 내가 보기에 아주 잘 찍은 거요. 무슨 얘기냐면, 광동 쪽 어딘 거 같은 데, 중국이 막 개방하고 열렸을 때 주인공이 자기 처와 둘이 열심히 살면서 인테리어 하는 가게를 차려서 돈을 잘 벌고 하는데, 어머니는 굉장히 나이가 들어가지고 따로 집을 얻어서 살게 해요. TV, 냉장고, 전화기. 없는 거 없이 살게 해요. 그런데 남편이 효자여서 매일 어머니를 찾아가 뵈니 여편네가 짜증을 내는 거요. 덮어 씌워서 아들한테서 온 전화를 받고 해요. 아주 잘 찍은 영화라고 나는 봤어요. 경쟁영화 중에 다른 중국 영화로 굉장히 스케일이 큰 놈이 있었어요. 영국군이 침공해왔던 아편전쟁 무렵이었던 거 같아요. 그걸 티베트 국민들과 같이 막아낸 대작 영화가 있어요. 뒤에 가서보면 전투 씬이고 뭐고 엉망인데, 중국 친구들, 러시아에서 온 감독은 이 전쟁영화를 막 칭찬을 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뭐 이게 칭찬할 만한 영화냐, 전투 씬이고 다 엉성한 영화이고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영화인데 막 좋다고 우기는 거요. 왜냐하면 이게 티베트 국민들과 힘을 합쳐 싸운 영화이고 중국 정부에서 돈을 댄 영환데 나는 눈치도 모르고 어쩐지 얘기를 하다 보니 싸늘한 거요. (웃음) 집행부 사람도 다 있고 그러는데. 하지만 내친김에 그만 둘 수도 없더라고. 근데 다른 감독도 가만히 있더라고. 좀 나서서 아니면 아니라는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거 참. 그래도 내가 주장을 해서 <안거>라는 영화가 상을 받았어요, 결정을 하기 전에 자보가 나한테 자기는 그 작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러는 거요. 왜 어머니가 이 전화에다 천을 씌어놓은 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좋은 가구도 많은데. 그러면 중국 쪽 누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시나리오협회 회장이란 친구도 그렇고 홍콩에서 온 감독도 그렇고, 그쪽은 아주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전쟁 영화도 떨어지고, 아마 그래서 그랬나 봐, 그래서 내가 설명했어요. 이 할머니의 나머지 생은 오직 아들과의 소통에서 보람을 찾는 얘기다, 근데 아들과 소통의 기구인 소중한 전화에 보자기를 씌운 것은 둘의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지 보여주는 건데 납득 못할 게 뭐있냐, 효심에 대한 얘기인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투표에 들어갔는데 자보도 그 작품에 표를 줬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하도 우겨서 찬성을 했지만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는 거요. 그래서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되냐 물어보니까 왜 이 할머니는 아들과 소통을 위해서 멍청하게 남은 인생을 사냐, 왜 자기 인생은 안 살고, 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동과 서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구나, 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 벽들이 도처에 있는 거예요. 정성일 _ < 씨받이 >이후 이 시기까지 오면서 한국에서도 비평이 감독님의 작품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 절정은 대중적 성공과 함께 < 서편제 >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비평적 관심 속에서 한국어로 쓰여진 비평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임권택 _ 그러니까 옛날에 내 영화에 대한 외면이 지지로 돌아섰던 거 아니요. 그거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였는데, 그런 지지가 사실상 영화를 바로 보고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적인 정서나 한국 사람들의 삶이나.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미국 영화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것에서 같이 만나고 있는 건데, 지금까지. 지금의 평가 중에는 내가 해냈으면서도 여전히 미처 알아주지 않는 대목들이 남아있고, 또 내가 연출을 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저렇게 영화에서 읽어내기도 하고, 내 자신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얘기들을 해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꾸 생각하는 기회를 주는 거요. 하여튼 많은 사람들의 관심, 각기 자기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이나 이런 걸 따라서 영화를 달리 보는 사사로운 평가, 그런 것들을 많이 만나는 거죠. 정성일 _ 많은 비평이 쓰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영화가 있습니까, 혹은 다시 이해받고 싶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랄까,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못 받아들이는 걸까, 의아스러운 순간들, 그런 영화들이 있습니까? 임권택 _ 최근에 비로소 한 얘기지만 < 족보 >는, (잠시 생각)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아무도 얘기 안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족보>를 만들면서 내가 미국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비로소 많이 빠져나온 결과물이고, 한국 사람이 가질법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정서. 이런 것들을 내 영화에서 윤곽을 찾아냈구나하는 굉장한 성취감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전혀 이해를 안 해주고 완전히 외면을 당했어요. 내가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은 정성일 평론가가 내 영화를 < 만다라 >에서 볼 게 아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봐야한다는 얘기를 해줄 때였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 <족보>나 이런 영화를 깊이 들여다 봐 줬으면 <만다라>로부터만 내 영화를 얘기해준다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정성일 _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저로서는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꼭 과거에로 거슬러 올라가서만이 아니라 현재진행중인데도 감독님 영화중에는 이상하게 얘기가 잘 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근작에서 < 축제 >와 < 하류인생 >이 그렇습니다. 두 편에 관해서는 한국에서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비평가들은 소통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 이 영화들과 뭔가 친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이들이 영화에 다가가는 걸 몹시 힘들어 한다는 거죠. 그 중에는 < 개벽 >도 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만났을 때 감독님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임권택 _ 정말 불편하죠. (부산영화제 유럽 코디네이터인) 임안자 씨가 전해준 말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 이었던) 울리히 그레고어 부부가 러시아에서 지금 영화 관계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하는 행사 중의 하나로 자기가 그 동안 본 영화 중 세계에서 가장 볼 만한 영화 10편을 꼽았는데 그 중에 < 축제 >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그 영화를 통해 어떻게 그런 감흥을 받았으며 우리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 선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잖아요. 한국의 장례를 다뤘는데 여기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기서는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 하류인생 > 찍을 무렵 뉴욕 MoMA에서도 내 작품 몇 편을 가지고 회고전을 했을 때 <축제>를 틀었어요. 그러면서 거기서 가장 좋은 영화로 <축제>를 꼽았어요. 그런데 국내에선 안 닿고 있더라구요. <축제>를 만들고 이청준 씨랑 시사를 본 후에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 서편제 >보다 훨씬 좋은 영화인 거 같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는데 개봉을 하고 보니 둘이 헛소리 하고 있었던 거요. 대중이건 비평이건 한국에서는 관심밖에 내 놨던 거요.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닿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판 그렇지 않고 나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둥절한 거요. 하지만 그런 불편한 심사를 얘기할 수가 없잖아요, 자기 작품이 잘 안 받아들여진다고. 정성일 _ 영화를 만들면서 이 영화는 결국 잘 안 받아들여지겠구나, 라고 만드는 중에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 _ < 개벽 >이 그랬어요. (잠시 생각) < 축제 >도 그랬고. 왜냐하면 <축제>의 구조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 영화는 얘기 가닥이 가족사를 따라서 워낙 여러 가닥이기 때문에, 그 복잡한 가닥을 어떻게 정리해서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내느냐 힘을 쏟았는데, 하면서도 내 소신을 갖고 있는 거지, 영화에 대한 결과가 내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할 순 없었죠. 그래도 그 작업을 해내면서 어느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 짝코 >도 그 복잡한 구조를 어찌 보면 굉장히 정밀한 조직을 통해서 해내고 있는데 그런 거를 잘 모르는 거요 사람들이. 그런 영화는 그 영화를 볼 사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거죠, 그런 거 같아요, 영화는. 정성일 _ 영화평론가뿐 아니라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자들, 인문사화학자들, 같은 많은 영화의 친구들의 영화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철학자 김용옥 선생의 글도 그런 비평 중의 하나입니다. 감독님에 관한 많은 글들이 영화 비평 바깥에서 오고 있는데 그들은 영화문법에 미숙하지만 각자의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부분을 집어내고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이 도움이 되는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 _ (한참 생각한 다음) 도움이 된 부분도 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도움이 안 되었을 리가 없죠. 정성일 _ 반대로 영화적으로 미숙한 것을 한편으로는 거의 소설에 가까운 비평으로 그것을 메우면서 영화를 오해하거나 불편하게 만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 몹시 불편해집니다. 임권택 _ 나는 그런 것도 여러 번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이력이 붙은 거요. 그런 소리, 그런 견해 얼마든지 좋다. 뭐,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정성일 _ 평론가들이 비평하면서 영화에 접근할 때 자기들이 사용하는 개념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의 수없는 경우의 수 안에서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 중의 선택으로 만든 영화 앞에서 평론가들이 오로지 개념적 용어들로만 영화에 접근해올 때 그 영화적 개념들이 어떻게 읽히십니까? 임권택 _ 비평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의 영화를 자기 틀 안에 가두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요. 하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개의치 않아요. 어떻게 봐도 무슨 상관이냐 해요. 왜 그러냐면 한 두 작품에서 그런 게 아니고 끊임없이 만나는 평가니까요. 내가 한 가닥만을 쫓아서 그들 기호에 맞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나도 내 기호가 있는데 생각해요. (웃음) 정성일 _ 제 나쁜 습관 중의 하나는 남의 집을 방문하면 꼭 서가에 있는 책의 목록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웃음) 감독님 서가에 많은 책이 꽂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서가에 영화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입니다. 임권택 _ 영화를 하면서 나는 영화를 잘 보지 않아요. 조수시절 정신없이 영화를 봤어요. 쫓아다니면서 영화를 열심히 보고난 이후 두려워진 것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그 영화의 잘 된 부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는 거예요. 아예 모르고 살면 죽으나 사나 자기 능력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해내서 그 미숙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해내고 그래야 되는 건데. 그 뒤로부터는 그런 걸 두려워하고 잘 안 보게 되었어요. 아마 그것과 비슷한 이유일 거예요. 영화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지향하는 폭이 넓었나 몰라도 나이 들면서부터는 그게 점점 좁아졌어요. 내가 대중소설을 손에 닿는 대로 읽은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얼마나 속독이었냐면 『청춘극장』몇 권을 아침에 빌려서 읽고 책방에 갖다 주면 주인이 다 읽고 갖다 주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내가 18살 그때 집에서 가출해서 부산에서 떠돌던 시절 잘 데가 없어서 노숙을 했어요. 밤에 빈 좌판에 누워서 내가 거기 누운 다른 노동자들한테『수호지』같은 걸 얘기해줘요. 그런데 다 해버리고 밑천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적당히 끊고, 그러면서 밤마다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해줬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굉장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별별 얘기들을 바로 읽어내듯이 촘촘하게 풀어내먹고 그랬어요. 노동판에 들어가면 지게 지는 일꾼들이 무리지어 가야하는 일들이 있어요. 그 열 명 무리 속에 나만 꼬투리로 떨어지곤 했는데도,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나를 붙여줄 정도였어요. 그때는 대중소설 읽을 것을 복기할 정도로 얘기를 잘 했어요. 그 당시는 시나리오 질이 형편없을 때여서 손으로 봐가면서 찍었을 텐데 뭘로 찍었냐고 어떤 교수가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걸 그대로 옮겨서 찍은 일은 없었어요. 내가 그때 읽었던 숱한 대중 소설들을 복기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대신 아주 멀리 돌아서 응용을 했겠죠. 정성일 _ 영화를 찍어오면서 어떤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영화 개론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임권택 _ 읽을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대신 시나리오 작법은 봤죠. 정성일 _ 오랜 시간 전력을 다해서 영화를 찍어온 감독으로써 여러 세대의 비평가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영화비평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 _ 비평가들은 내가 찍어놓은 영화, 이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 내가 영상으로 담아낸 게 있을 텐데 통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 비평가 입장에서는 뭐 그렇게 깊이 보고 천착할 만한 영화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 읽어내라고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비평가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는 거요.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테니까 그러니 누가 묻는다면, 이를테면 사토 다다오 선생이 한국에 영화 비평이 있냐, 묻는다면 더러 있죠, 나로서는 이렇게 애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은 이런 뜻인 거예요. 정성일 _ 21세기 영화 대중의 새로운 현상은 1인 미디어 시대가 되어서 모든 관객들은 비평의 자리에서 자기의 가치에 따라 자기 블로그에 영화평을 올리고 평점도 줍니다. 비평가들을 특별한 관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중관객도 특별한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마다 영화관객들은 계속해서 변했고, 또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2012년의 대중들은 어떤 영화 관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임권택 _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생각을 늘 해요. 그래서 관객의 기호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따라가야지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따라가 본 적이 없어요. 늘 내 멋대로 찍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임권택 x 101」댓글을 통해서 네티즌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준휘님(kinop)의 질문입니다. 감독님께서는 < 춘향뎐 >처럼 전편이 판소리인 영화를 다시 한 번 만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임권택 _ 깊이 생각 안 해봤는데 예전에 (전 영상자료원 원장이었던 소설가) 조선희씨가 < 춘향뎐 >을 본 뒤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을 영화의 두 시간에 끝내는 게 아니라 다섯 마당 다 찍어보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어요. 생략 전혀 없이. 그런 제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나이가 너무 들어 힘들어요. 그건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지 않나요. 원본이 갖는 맛과 흥이 있어요. 그 자신이 갖는 위대한 것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있고, 그 안에 나도 살아서 들어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정성일 _ 이인영님(jyunjyong)의 질문입니다. < 장군의 아들 >같은 액션 활극을 한 번 더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임권택 _ 글쎄,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태흥영화사에서 < 장군의 아들 >을 찍자는 제안이 처음 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몇 번을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걸 승낙하면서 내 뼛속에 흐르는 저속한 액션 드라마를 찍는 것에 대한 매력이 끊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못하겠어요. 그것도 아마 내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정성일 _ 이선화님(2011corso)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주제에 대한 선정과 그 시대의 연관성이 서로 어떤 영향 아래 놓이는지요? 이 두 가지 문제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어떤 감독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감독은 몹시 민감하게 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임권택 _ 내 영화 이력을 보면 60년대에는 저질 액션 영화를 했고 70년대는 반공영화를 했어요. 그러면서 체질적으로 미국 영화 흉내 내기를 내 영화에서 빼내고자 했고 < 족보 >서부터는 미국영화로부터 덜미 잡힌 것에서 빠져나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80년대는 이렇게 < 만다라 >랄까, 그런 영화 무렵부터 총체적으로 보면 인본(人本)을 다룬 거지요, 사람답게 살아야한다는 주제와 한국전쟁을 겪은 자가 직업으로 영화감독을 가진 다음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의 총체적인 느낌을 담았어요. 90년대에는 < 장군의 아들 >, < 서편제 >, < 태백산맥 >도 있고, 그 전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소재로 했어요. 그리고 < 춘향뎐 >으로 넘어가요. 하지만 지금도 시류와 관계가 없는 영화들만 한 게 아니고 지금 현대에 이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잘해낸 소재가 판소리에요. 이춘희씨의 ‘이별가’라는 노래가 있어요. < 취화선 >에서 장승업이 걸어가는 장면, 그 영화를 준비하느라 어수선할 때 차를 몰고 가면서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들었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그 노래를 가져와라 해서 연출부를 모아놓고 들었어요. 내가 이 노래를 <취화선>에 쓰겠다고 하니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한참을 지나더니 연출부 한 명이 나서서 감독님 우리 모두 의견을 모았는데 이 노래를 쓰면 젊은 애들이 다 웃습니다, 라고 강경하게 나왔어요. 하지만 녹음하면서 다시 노래를 넣었죠. 그 장면에서 영상과 붙여놓으니 다들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춘희씨가 부른 그 민요를 오래되었다고 듣고 있으면 안돼요. 그 일은 현대에 그걸 생생하게 갖고 올 수 있다는 신념이 갖고 온 개가에요. 어떤 시점에 맞춘다기보다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시점이 늘 현대에요. 아주 옛날 거라 해도 그걸 현대에 갖고 와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든 놈이 임자죠. 정성일 _ 박상미님(iamfiction)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감독님 작품에서 ‘그 무엇’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임권택 _ 작품마다 달라요. 이를테면 < 서편제 >는 판소리가 우리 마음 안에 생동감 있게 감흥을 지니고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어요. < 개벽 >은 한 종교를 통해서 이 민중적 사고를 깨우침을 관객들이 같이 가져주기를 바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냐에 따라서, 소재나 주제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정성일 _ ‘그 무엇’을 영화 찍으러 가기 전에 결정하시나요, 아니면 계속 그걸 찾아가면서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 편집을 시작할 즈음 그걸 깨닫게 되는 건가요? 임권택 _ 후자는 너무 늦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그게 정해져야 하는 거예요. 물론 정해졌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생각이 서는 건 아니에요. 끝날 때까지 그 자신의 소신을 영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쥐어짜야 해요. 그렇게 그걸 찾아가는 거지요. 정성일 _ 감사합니다. 감독님의 답변이 저에게 앞으로 남은 글을 써나가면서 매번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이 배울 것입니다.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102번째 영화 촬영현장에서 다음 인터뷰를 계속 하겠습니다. 인터뷰_2012년 12월 8일 날씨 맑음 정리_ 이지영 (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