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 감독
- 김지운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정우성, 김아중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질한 인물을 그리는 데에는 정도가 있다. 추악하거나 성질이 더럽거나 못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타인에게 드러내야 할 때는 일정 부분 미화하거나 정당성을 가지고자 하는 본능적인 자기방어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지질한 인물은 사랑스러움이 함께 공존한다. 대중에게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외적 특징을 가진다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정도가 없이 등장한다. 커다란 등짝을 비추며 시작하는 카메라는 단지 등짝을 비추려는 게 아니다. 삐져나온 뱃살과 함께 무료한 듯 등을 긁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리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함을 알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구부정한 어깨,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무기력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는 인물에게는 나를 투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 속 인물은 더는 미래가 없는 이 세상을 대변하듯 존재한다. 별것 아닌 다툼에 쉽게 폭발하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동생과 몸싸움을 벌일 때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재되어 있는 깊은 분노와 좌절감이 느껴진다. 자전거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며, 그 위에 올라탄 인물 역시 속도와 방향을 모두 잃은 듯이 삐걱댄다. 주인공은 영화가 절반 이상이 흐르는 내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정도가 없으나 일면 뻔한 캐릭터다. 다만 이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 백엔의 사랑 >(2014) 속 이치코(안도 사쿠라)라는 점에 있다. 나는 이 정도로 ‘정도를 모르는’ 여자 캐릭터를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사와 캐릭터는 보통 남성에게 부여되어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거치며 세상과 감응하게 되는 이야기. 여성 캐릭터는 비록 지질하고 못났더라도 그 못난 모습에서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여자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맡을 때에는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들었을 배우를 생각한다. 살집을 분장하는 대신에 실제로 살을 찌우고 부스스한 머리를 유지하는 일.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우스꽝스럽게 길거리에서 넘어지는 일. 몸에 맞지 않는 이상한 속옷을 입고서 거울 앞에 서는 일. 세상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몸매와는 동떨어진 몸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지 생각해본다. 판타지 속의 인물이 아닌 지극히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를 대변하여 존재할 때는 더더욱이 그렇다. <백엔의 사랑> 중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여전히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른바 ‘외모’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성으로서의 ‘상품성’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은 오로지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기는 어렵다. 물론 화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남성이 맡아왔던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할 때면 더 화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미 익숙했던 장르와 플롯이 여성 캐릭터의 등장으로 특별해진다는 건 이성애 로맨스 플롯이 퀴어 서사에서 특별해지는 원리와 같다. 쓰러져 있던 여성 캐릭터가 두 발로 세상을 딛는 걸 보게 될 때 훨씬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아직도 이런 서사와 캐릭터에는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 실패한 지질한 모습이 남성 캐릭터라면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관객으로서의 저항감이 덜하다는 점에서, 여성이 맡은 캐릭터에는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결국, 이런 캐릭터를 선택한다는 건 감독과 함께 하는 모험에 뛰어드느냐의 선택이 될 것이다. 섬세한 설계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주로 자신과 닮은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대입하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대입하고자 하는 성별, 비슷한 연령대나 직업 등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너무 수동적이면 그런 인물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질 수밖에 없어서, 캐릭터가 미진한 반응으로 비호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땐 이 캐릭터의 선택들을 납득할 수 있는 서사나 후에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비호감을 상쇄시켜줄 장치가 필요하다. 극중 이치코는 반강제적으로 가족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치코의 괴팍하고 모난 성격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때 이치코에게 희망을 본다. 자신이 애용하던 백엔샵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알고 보니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점장의 멍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서 함께 따라가던 시선, 말이 많은 직원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며 방해해도 집중하려 노력하며 서툰 몸짓으로 일을 배우는 장면과, 의외로 근면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해내는 모습, 우연히 지나던 길에서 보게 된 권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는 희망이 있다. 이치코는 권투장에서 권투를 하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처음 본다. 얼마 뒤 이치코는 카노의 경기를 보러 가게 된다. 그 경기를 바라보던 이치코의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카노인지, 경기인지. 카노가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이치코가 그에게 묻는다. “아는 사이에요?” “누구?” “상대 선수요.” “그건 왜?”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길래요.” “시합이 끝나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자 이치코가 말한다. “멋지네요.” 그러니까 처음 권투장을 지나는 모습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권투인지, 카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둘 다여도 상관없다. 그는 연결되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는 그 눈빛에서 비로소 이치코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할 준비를 한다. 카노와 이치코 / 샌드백을 치는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FILM MOVEMENT )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치코가 점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저앉는 대신에 상흔을 딛고서 권투를 시작한다. 권투를 하기 위해서는 한껏 구겨져야 하는 법이기에 이치코의 자세는 여전히 구부정하지만, 자신을 숨기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과 가장 효과적인 주먹질을 위해 잠시 몸을 구부리는 건 분명 다르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눈빛이 흔들리며 세상과 감응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카노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증오하지 않으면 때릴 수도 없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갈 곳 없는 절망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던 모습과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샌드백을 치는 모습이 병치된다. 백엔샵에서 처음 일을 배우던 순간처럼 그의 주먹질은 여전히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는 몸짓에서 배우가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함께 드러난다. 연민하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그 자체. 내내 얻어터지기만 하는 인물을 배우 스스로가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 때, 관객 역시 캐릭터를 함부로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이치코가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링 위에서 쓰러져 있을 때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흔의 순간들을 비로소 과정으로 만든다. 최선을 다해 뻗은 마지막이자 첫 번째 주먹질이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며,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는 이치코의 눈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에 응원과 사랑이 담기게 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일면 뻔하다. 정처 없이 흔들거리던 캐릭터가 비록 실패할지언정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 하지만 내게 이 영화 혹은 캐릭터가 특별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영화 속 내내 구부정한 이치코를 보며 역시 구부정한 나를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완벽할 수만은 없는 삶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안도 사쿠라의 이치코를 기어코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의 실패도 언젠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런 감각은 작품 안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가 종종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진: ART INSIGHT ) 손수현(영화배우) l 연기를 하며 종종 글을 쓴다. < 럭키, 아파트 >(2024), < 양치기 >(2024), < 마더 인 로 >(2019) 등에 출연했고, 『새드 투게더』(공저, 2024),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2022) 등을 썼다.
<Fly To You>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영화관 좌석에 앉은 우리는 언제나 안전했다. 스크린에 투영된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직접 발을 디딜 필요는 없었다. 이 거리는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 충분히 가깝지만 위험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으면서도 끝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미묘한 간격. 그러나 VR(Virtual Reality)은 이 오래된 약속을 파기한다. 더 이상 관찰자로서 멀리 떨어져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은 눈앞의 세계를 보다 근접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어두운 극장 좌석에 고정돼 있던 신체는 풀려나고, 그 자유도와 함께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좁혀진다. 관객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영화 문법 자체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전환이다. 몽타주는 어떻게 가능할까? 클로즈업의 의미는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전통적인 영화적 연출 방식은 VR 공간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까? VR은 전통 영화가 구축해온 ‘거리’의 미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세계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물리적 배치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장치로 다시 작동한다. 필자가 2020년에 연출한 < Rain Fruits >(2020)는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뚜라(Thura)의 글을 각색한 VR 영화다. 그는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 한국에 왔지만, 한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외와 좌절을 겪는다. 영화는 그의 작은 방 안에서, 어릴 적 고향 땅의 비과일 [1] 을 떠올리며 한국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작업의 핵심은 단순한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조건을 관객이 VR 공간에서 몸으로 체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좁은 원룸, 단조로운 작업장,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사물들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라는 비주얼을 통해 VR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관객은 더 이상 스크린 뒤의 관찰자가 아니라, 인물의 곁에 있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못하는 위치에서 경험을 공유한다. <Rain Fruits> 중 연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관객의 첫 위치와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였다. 위치와 간격의 설계는 곧 인물이 느낀 사회적 거리감과 맞닿는다. 전통적 영화라면 클로즈업이나 몽타주로 처리했을 장면들을, VR에서는 공간 자체를 재편하여 체험하게 했다. VR에서는 관객의 시선이 곧 컷이 되고 카메라가 되기 때문에, 촬영 단계부터 그 위치를 찾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원룸 장면에서 인물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좁게 분리하거나, 먼지처럼 사라지는 공간과 인물의 트랜지션은 단순한 공간의 재현을 넘어 주인공의 심리적 고립감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어서 파편화된 포인트 클라우드 공간과 흰 선으로 절단된 주인공의 신체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이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관객은 자연스레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뚜라는 결국 원룸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비과일 숲을 꿈꾼다. 이 장면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겹치는 지점에서, 그가 무대 위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스쳐 가는 객체인지 스스로 되묻게 하는 장치다. 나아가 이러한 ‘거리’의 연출은 인물을 더욱 고립시키며, 관객 또한 그의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작업을 통해 VR에서 이야기를 단순화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시각 정보가 압도적으로 다가왔고, 불필요한 청각 정보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다. VR에서는 거리와 위치, 그리고 정보량의 균형이 새로운 연출의 핵심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Rain Fruits> 중 2024년에 연출한 <Fly To You>는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VR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작업이다. 제목처럼 ‘당신에게 날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상 공간 속에서 구현하며, 작품은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VR에서 관객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현존감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 매체의 한계와 마주한다. 결국, 당신에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결코 만질 수 없는 존재로서, 주체성을 상실한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산가족이라는 소재는 물리적인 이동보다 개인적인 그리움과 연결에 대한 근본적 욕망을 의미한다. VR이라는 매체가 갖는 가장 큰 역설, 가상적 연결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고립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탐구하고자 했다. 실제 이산가족 당사자인 ‘강송절(88세)’의 개인적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금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 속에서 박제된 듯 머물러 있는 자신의 현재가 대비된다. 이를 위해 입체감이 없는 360도 비디오로 그녀의 박제된 현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그녀와 멀린 떨어진 고향 땅은 3D 오브젝트로 표현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했다. <Fly To You> 중 관객은 두 물리적 공간, 즉 현실의 강송절 할머니가 있는 남한과 과거의 북쪽 고향 땅을 각각 체험하며 심리적인 거리감과 기억의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자유로운 비행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움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무리 빠르게, 아무리 멀리 날아가더라도 결국 도달하는 것은 또 다른 가상공간일 뿐이다. 이번 작업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남북의 철책선을 관객이 잠시나마 넘어보는 경험이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VR에서는 NeRF 기술을 통해 그 경계를 건너는 체험을 구현할 수 있었다. 철책선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은 ‘NeRF Studio’의 AI 기술을 통해 재구성했다. 그 결과 관객은 실제로는 닿을 수 없는 강송절의 바람이 꽃잎으로 흩날리며 철책선을 넘어오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 체험은 ‘너에게 간다’라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 경계를 넘는 행위가 아니라, 심리적 그리움의 장벽을 건너는 일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려야 하는 마음의 길임을 깨닫게 한다. 관객이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 역설적으로 VR 헤드셋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체험이야말로 VR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미학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철책선을 넘는 순간 관객은 기존의 스크린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개를 다양한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그 순간 타자와의 연결이 더욱 부각되고 관객은 그리움을 체험하며 주인공이 느낀 심리적 소망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 역시 순간적이며 역설적이게도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또 다른 마음의 거리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로 존재한다. <Fly To You> 중 이 두 작업에서 탐구한 것은 VR이라는 매체에 내재한 ‘거리의 간극’이었다. 물리적으로는 몰입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떠 있는 상태, 혹은 그 반대의 순간들. 이러한 간극은 VR의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감정의 가능성이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상호작용을 제한해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진 VR 공간에서 ‘할 수 없음’이라는 무력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관객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결국 정해진 위치와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제약 속에서 주인공의 소외와 단절을 공감하게 된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세계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면, VR은 그 거리를 해체한다. 하지만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형태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관객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리움과 소외의 거리를 체험한다. VR 연출의 모험은 이 새로운 경계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 현실을 모사하는 대신, VR만의 거리와 리듬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기술과 더불어 진화해왔다. VR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단순히 도구가 바뀌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영화적’이라 불러왔던 모든 것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통해, VR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 그 언어는 아마도 ‘거리’를 전혀 새롭게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 [1] 비가 온 뒤 과일 위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그린 시적 표현으로, 과거 한국문화정책연구원 월간지 《월간 너울》에 뚜라가 게재한 글 「북쪽 섬에서 나를 찾는다」에 나타난다. 송영윤(영화감독) l 이해되지 않는 마음을 붙들며 하루를 살아가는 영상 작업자. 장편 다큐멘터리 <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2019) 공동 연출, VR 영화 < Rain Fruits >(2020), VR 다큐멘터리 <Fly To You>(2024) 연출.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