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 감독
- 장문간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여명, 엽옥경, 임해봉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정점은 2019년이었다. 2019년 한국 영화 및 해외영화 제작/수입 편수는 총 2,207편, 이 중 1,740편이 개봉했고, 다시 이 중에서 647편이 실제 극장에 걸렸다. 대략 하루에 5편의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공개되고 매일 1.8편의 영화가 실제로 극장에서 개봉한 셈이다. 여기에 프리미어 상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국고 지원 7대 국제영화제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상영한 영화는 장편, 단편 합쳐 총 1,432편. 이외의 상당수의 작은 영화제들과 다양한 상영회들도 프리미어 영화나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하곤 하니 이런 식으로 공개된 새로운 영화까지 다 합하면 이미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넷플릭스, 와챠 등의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오리지널 영화들과 독점 공개작까지 더하면 우리는 이미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는 영화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 2월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영화산업과 극장, 극장과 관객이 만나는 길목을 틀어막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걸 꺼리고, 관객이 없으니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개봉 영화가 없어서 관객이 극장을 찾질 않은 악순환은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대부분 축소 또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면서 상영작 수도, 참여 관객 수도 확연히 줄었다. 산업 구석구석에 이익을 분배하며 순환하던 영화산업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겨울과 함께 3번째 대유행이 시작되자 산업은 거의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IT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전통의 극장산업과 경쟁하던 OTT 플랫폼만은 이 와중에도 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순환이 멈추고 산업과 극장이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그동안 별로 상상해본 적 없었던 극장의 죽음에 대해, 극장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영화산업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명백히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산업의 위기다. 그러나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지난 10년간 영화산업은 일정한 틀에 맞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고, 극장은 모든 영화를 똑같이 대한 적이 없었다. 독립예술영화는 스스로 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화계 전반에 걸친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이후 코로나19로 초토화되어버린 극장을 지킨 태반의 영화는 산업과 자본이 만든 상업 영화들이 아니라 극장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립예술영화들이었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산업의 위기는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산업이 자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오른 질문.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다큐멘터리 전문 계간 웹진 <DOCKING>의 2020년 겨울호에는 지난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를 기억하는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씨의 글이 실렸다. (http://www.dockingmagazine.com/contents/21/177/) 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1970년 글라우버 로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클로스 얀초, 사이먼 하르톡이 로마에서 만나 정치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하르톡은 로셀리니가 '영화는 죽었다'는 말에 동의하는지를 물었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업이 사라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글라우버 로샤의 대답: “내 생각에 위험한 것은 바로 산업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유일한 예술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시나 소설을 인쇄하기 위해 편집자가 필요하더라도, 반면에, 각본은 출판될 수 없기 때문에,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화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970년 혈기 넘치던 최고의 청년 감독들이 통찰한 영화와 영화산업 사이의 모순은 20년 하고도 30년을 더 기다렸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19는 지금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의 결정적 요인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상업 영화 만이 살아남지 않겠냐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후 지난 125년간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왔다. 그 위기는 대부분 신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창작자들은 매번 실패를 반복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의 이 위기 역시 누군가에겐 절망의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것이다. 산업의 지형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영악한 지금의 산업이 쉽게 폐허가 될 리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영화든 예외 없이 산업일 뿐 아니라 창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는 폐허 속에 묻히겠지만, 어떤 영화는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지켜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일 년 내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골라낸 영화들을 담았다. < 공포분자 >(1986),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 라이트 하우스 >(2019), < 바쿠라우 >(2019), < 분화구의 두 사람 >(2019), < 애틀란틱스 >(2019), < 언컷 젬스 >(2019), < 트랜짓 >(2018), < 퍼스트 카우 >(2019), < 휴가 >(2020).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들의 리스트이며, 산업의 징후 같은 영화이거나 산업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이거나 산업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력을 이어갈 영화의 이름들이다. 리스트를 만들다가 다른 분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진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첫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분화구의 두 사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끈적이게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자유로웠고, 기묘하게 공허했으며, 기묘하게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가 공동으로 연출한 브라질 영화 <바쿠라우 Bacurau>다. 이 기묘한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건 클레버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전작 < 네이버링 사운즈 >(2012)와 < 아쿠아리우스 >(2016) 때문이었다. 사실 <바쿠라우>는 클레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줄리아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영화적 동료로서의 두 감독의 관계(줄리아노는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담했다)와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바쿠라우>는 실질적으론 클레버 감독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피칠갑을 한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봤던 몇몇 중요한 장르 영화에서 발견한 징후와도 같은 특징-가장 파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라우>는 <기생충>이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레 미제라블>과 함께 공동으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브라질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칸영화제 기간 꽤 화제가 되었고,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결국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작년과 올해 훨씬 더 화제를 되었을 영화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 <바쿠라우>는 각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바쿠라우>를 연출한 클레버 멘돈사 필루는 최근 10년간 등장한 남미 출신의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 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위쪽에 놓을 수 있는 몇 개의 이름 중 하나다. 남미 출신 감독으로는 2016년 이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68년생. 올해로 53세다. 20대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하며 영화평론가와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의 오프닝에서 볼 수 있는 CinemaScopio는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지만 평론가 시절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던 2012년, 첫 장편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 <아쿠아리우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직행했다.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수상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2016년 전 세계 거의 모든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 영화계와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 세 번째 장편영화 <바쿠라우>를 완성했고, 다시 한번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가상의 지명이자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향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공동체를 이끌던 고령의 흑인 여성 리더 카르멜리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식이 끝나자 마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역 정치인의 무능으로 진작에 수도가 끊긴 바쿠라우에 물을 나르던 물탱크 트럭이 총격을 받고, 통신 장애가 발생하고, 인터넷 지도에서 바쿠라우가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낯선 외지인들과 함께 원반 형태의 드론이 목격된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정치인의 사주를 받고 중무장한 미스터리한 백인 일당이 저지른 일이다. 이들은 마치 사파리에 가서 돈을 주고 사냥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냥의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살펴본 이들은 별 죄책감 없이 게임을 즐기듯 바쿠라우를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려 한다. 위기를 감지한 바쿠라우 주민들은 도망자인 트랜스젠더 룽가를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온 잔인한 이방인들을 처단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바쿠라우’는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17세기 브라질, 농장에서 도주한 노예(시마론 Cimarron)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 Quilombo’를 연상시킨다. 낄롱부를 건설한 시마론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를 결속시켰다.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를 돕거나 농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2천 개가 넘는 낄롱부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바쿠라우’는 ‘리믹스된 낄롱부 remixed quilombo’라고 할 수 있다. ‘바쿠라우’가 낄롱부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공간이라는 건 주민들이 밤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며 브라질의 전통 무예인 카포에이라를 추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인, 원주민, 흑인, 트랜스젠더 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이 의식을 통해 저항의 역사를 공유하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바쿠라우’는 가난하지만 존엄한 공동체, 저항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클레버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워드>(2010)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 카펜터의 인더스트리얼 뮤직 ‘Night’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에서 백인 일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공포 영화의 거장에 대한 이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쿠라우>는 마치 민족지 영화처럼 가상의 역사적 공동체가 놓인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1/3지점부터 장르 영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중반에 접어들면서 SF, 스릴러, 호러, 웨스턴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배경(선인장, 말, 총, 인종차별적 악당) 속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과 힘을 유지하며 정부의 무능과 부패, 식민주의의 모순 같은 정치적 주제까지 그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점점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폭력은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위협받을 때 권력과 힘에 저항하여 공동체를 지켜내는 필수 도구로 묘사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장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고, 평론가 출신의 클레버 감독은 이런 장르의 관습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유사한 장르 영화나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그러나 <바쿠라우>는 물론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장르 영화지만 오히려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여 완성한 강력한 정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9년 브라질의 남동부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지사는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장 요원과 스나이퍼들을 시내 빈민가에 은밀하게 배치하여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경찰이 더 많은 범죄자를 사살해야 한다면서 범죄자들을 재판 회부보다는 약식 처형(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숫자는 2019년 한해에만 하루 평균 5명, 총 1,81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쿠라우>가 담으려고 하는 건 동시대 브라질의 이러한 현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로 설정하여 ‘영화 속 현실이 곧 다가올 실제 현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가 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지역 정치인 토니 주니어와 그의 사주를 받은 잔인한 백인 그룹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극으로 영화를 끝낸 다음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검은 화면 위로 3줄로 된 자막이 뜨는데,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이 영화는 800개 이상의 일자리와 함께 국가와 문화, 산업의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창출했습니다.” 과거 국책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낯선 문구는 건조하고 단정하게 씌여있지만 칸영화제가 개최되기 약 4개월 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한 연설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자 풍자이며 냉소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쿠라우>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식의 정치영화는 아니다. 클레버와 줄리아노의 방식은 훨씬 정교하고 유희적이며 영화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창조해낸다. 특히 클레버 감독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고 압축된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능하다. 장편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는 감독의 고향인 헤시피의 한 중산층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동네 건물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 주앙을 중심에 두고 동네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 업체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마을의 미세한 변화를 담는다. 이 영화에서 쇠창살과 철제 대문, 감시 카메라와 사설 경비원 같은 현대적 안전장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적 모더니티는 이웃의 접근을 차단하고 중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동네는 피로 물든 식민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공간, 피로 물든 폭포 속에 선 지주의 후예인 주앙의 모습, 그리고 역사적 피해자의 후손과 지주와의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담아내고 싶었던 정치적 의미를 극적으로 창조해낸다. <아쿠아리우스>의 핵심 공간인 주인공의 오래된 빌라도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 클라라는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집을 자본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싸운다. 문화와 역사의 아이콘인 클라라의 고집과 싸움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영화는 유려하게 과거와 현재, 클라라의 집과 외부를 오가며 이 모든 걸 담아낸다. 클레버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공간의 실제 과거 사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적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헤시피의 옛 지명 페르남부쿠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연달아 보여주는 시퀀스로 시작하고, <아쿠아리우스>는 오버헤드숏으로 찍힌 해변 도시 헤시피의 과거의 모습 - 보아비아젱 해변의 모습과 오래된 차들로 가득한 길게 뻗은 거리, 거대한 고층 건물이 슬럼가를 대체하는 부감 쇼트의 흑백사진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쿠라우>에서는 마을의 작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과거 사진들과 리더 카르멜리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특히 <바쿠라우>는 공간의 지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남미, 브라질, 바쿠라우로 하강하며 좁혀들어오는 오프닝숏은 로컬리티가 고스란히 담긴 공동체를 세계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에서 시작되어 <아쿠아리우스>를 경유한 다음 <바쿠라우>로 수렴된 클레버 멘돈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의 세계는 시간이 축적된 영화적 공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함께 역사를 소환한 다음, 강력한 저항을 촉구한다. 이 세계는 영화적 전통과 관습, 현실의 로컬리티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기존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세계는 1970년 브라질의 선배 감독 글라우버 로샤가 가졌던 영화산업의 모순과 산업 논리가 가진 위험성, 이를 극복해야 하는 영화제작자의 숙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영화산업과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저항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떤 답변도 알아서 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장르 영화의 전통 속에서 저항과 투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담아낸 <바쿠라우>는 다시 한번,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서를 찾으려는 강두 가족의 사투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산업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 분 산업의 활기는 2006년 정점을 찍었다. 2003년부터 80편대를 기록하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6년을 기점으로 100편을 넘어섰다. 2001년 50%를 넘어 2004년부터 60%대에 육박하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급기야 2006년 63.8%를 기록했다. 현재(2018년 기준 50.9%)까지도 가장 높은 수치로 기록된 비율이다. 이처럼 2006년이 한국 영화 산업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준 해였다면, 2007년 이후는 위기 혹은 조정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6년 7월 긴 논란 끝에 결국 스크린쿼터 즉 한국영화 의무 상영제도가 73일로 축소되었고, 때마침 버팀목이라도 무너진 듯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졌으며, 한국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수익률과 수출 실적 또한 하락했다. 2007년 50%로 내려선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8년 42.1%까지 떨어졌다. 2007년부터 시작된 산업의 하락세가 불과 2년 만에 극복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2009년 시장과 관객의 신뢰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2011년부터는 극장 관객과 매출액이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영화도 4년 만에 다시 시장점유율 50%대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2012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산업은 관객 수, 매출액, 수익성 면에서 도약하며 불황의 그늘을 완전히 떨쳐냈다. 한국영화 점유율도 다시 60%대에 육박하게 된다. 2013년 영화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한다. ‘천만 영화’가 말해주는 것들 2004년 < 실미도 >(강우석, 2003)와 <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2004)로 시작된 천만 관객 영화가 한국 영화 산업의 상승 국면과 연동되어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2005년 < 왕의 남자 >(이준익)가 1,200만, 2006년 < 괴물 >(봉준호)이 1,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 중반 영화 산업의 활력을 대변했다. 그리고 2년간의 체질 개선을 거친 2009년 < 해운대 >(윤제균)가 천만 영화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따져보면 천만 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이 회복됐다는 신호가 강해진 시기다. 이후에도 2012년 < 도둑들 >(최동훈) <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2013년 < 7번방의 선물 >(이환경) < 변호인 >(양우석), 2014년 < 명량 >(김한민) < 국제시장 >(윤제균), 2015년 < 암살 >(최동훈) < 베테랑 >(류승완) 등 매년 2편씩의 천만 영화가 잇달아 등장하며, 한국영화산업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의 천만 관객 동원은 무엇보다 영화산업의 양적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산업적 의미가 큰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천만 영화는 제작사의 역량이나 투자배급사의 물량 공세만으로 달성되기는 힘들다. 넓은 층위의 관객들에게 일정한 공감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개봉 시점 한국 사회의 분위기나 관심사와도 들어맞아야 한다. 어쩌면 천만이라는 숫자는,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을 넘어선 일종의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의 장르나 경향으로 일별하기 힘든, 각기 당대의 복잡한 맥락이 새겨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괴물>은 대형 배급사가 150억 원의 총 제작비를 투여하고 스크린 독과점 이슈까지 발생시킨 영화였지만, 영화적으로는 다른 천만 영화들이 목표로 한 대중적 화법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봉준호라는 특별한 감독이 산업과 행복하게 결합한 덕분이었다. 봉준호 감독 영화광 출신의 감독, 글로벌 영화로 나아가다 한국의 ‘영화청년’은 어떻게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봉준호 는 한국에서 감독이 되려는 영화청년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된 감독이다. 영화광으로 출발한 그가 개척한 길은, 현재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인상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구체적인 행보뿐만 아니라 독특한 감각의 영화 세계, 양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1969년생인 봉준호는 대학에서는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해 영화를 공부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첫 단편영화 < 백색인 >(1994)을 만들었고, 영화아카데미에서는 < 프레임 속의 기억 >(1994)과 졸업 작품으로 < 지리멸렬 >(1994)을 연출했다. 이후 충무로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 >(김유진·장현수·정지영·박철수·박종원·장길수·강우석, 1996)에서 각색과 연출부를 경험했고, < 모텔 선인장 >(박기용, 1997)에서 각본과 조감독을 맡았고, < 유령 >(민병천, 1999)의 각본도 썼다. 많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6년가량 그저 버텨보는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감독 데뷔의 기회는 후자의 두 작품을 제작한 차승재의 우노필름에서 얻었다. 한 대학 시간강사가 일으킨 소동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빗대 보는 < 플란다스의 개 >(2000)는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특히 봉준호 영화 세계의 원형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다시 확인해야 할 영화이기도 하다. 2003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1980년대의 시대상을 투영해 풀어낸 < 살인의 추억 >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하며 연출 역량을 인정받았고, 2006년 세 번째 장편 <괴물> 역시 국내를 넘어선 흥행과 비평적 지지를 받으며 봉준호는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2009년 네 번째 장편 < 마더 >는 모성을 미스터리의 소재로 삼아 한국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며 국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013년 450억 규모의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로 글로벌 영화 신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2017년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제작한 < 옥자 >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처음 진출하기도 했다. 봉준호는 이제 한국영화를 넘어, 그의 이름 자체가 영화 브랜드가 된 국제적인 감독이 되었다. 현서가 갇혀 있는 하수구 공간 미학으로 승화된 스타일, 한국사회에 대해 발언하다 영화 <괴물>이 탁월한 지점은, ‘괴수영화’라는 장르적 표면(환상)과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발언(리얼리티)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낸 것이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정교하게 설계된다. 첫 장면은 2000년 시점의 미8군 용산기지 영안실, 감독은 수평 구도의 미장센과 인물의 어깨너머 쇼트를 활용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이끈다. 2000년 실제 발생한 사건인 주한 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을 직접 인용한 영화는, 바로 2002년 한강에서 낚시하던 사람들이 돌연변이 물고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2006년 한 중소기업 사장이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극 중 동료/관객에게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 밑으로 빠져든다. 우리 소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둔하게 살고 있는가. 빗물이 떨어지는 수직 구도의 한강을 배경으로 ‘괴물’의 타이틀이 나오고, 영화는 한강변 매점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노란 염색 머리의 남성 강두(송강호)를 보여준다. 아버지 희봉(변희봉)이 운영하는 매점에서 딸 현서(고아성)와 같이 사는 그는 한눈에 봐도 좀 모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강두는 딸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인 애정을 보이는 인물로, 이후 영화가 진행하면서 현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순간적으로 똑똑해지고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희봉과 현서가 매점 안에서 고모 남주(배두나)의 양궁 대회 중계를 보고 있는 동안 한강변에 괴생물체가 나타난다. 한강을 찾은 시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낀 강두는 그들과 같이 괴물에게 먹을 것을 던지는 등 장난을 친다. 우매한 대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평 구도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괴물이 지상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한다. 백주 대낮 살육의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영화는 한강 다리 위 버스 속 할머니의 시점으로 그 전경을 보여주며 현실감을 놓치지 않는다. 강두는 현서의 손을 잡고 도망가다 놓치고, 현서를 꼬리에 감은 괴물은 한강 속으로 사라진다. 희생자들 가족이 집결한 단체 장례식장, 희봉의 말대로 현서 덕에 남주와 남동생 남일(박해일)까지 모든 가족이 모이게 된다. 죽을 힘을 다해 현서를 찾는 이들은 국가가 아닌 강두의 가족이다. 2014년 4월 전 국민의 비극이 된 사고처럼, 국가 시스템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국민의 생존을 방해할 뿐이다. 시민들 역시 행동은 고사하고 감정적으로도 다른 이의 불행에 연대하지 못한 채, 강두 가족의 사투를 방관한다. 어쩌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전광판의 TV 뉴스를 보며 횡단보도에 서 있는 퇴근길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압축적으로 묘사된다. 역시 수평 구도를 활용한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실체도 없는 바이러스 보도에 이목을 빼앗겨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이다. 과연 영화 속 괴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국가주의 혹은 미국이라는 패권국에 대한 비판일까.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 개인의 이기심 나아가 휴머니즘의 상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복합체가 괴물일 것이다. 권력 피라미드의 하층부에서 수평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민중은, 괴물에 잡히는 순간 수직 구도의 하수구로 떨어져 살아 나오지 못한다.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한 남성이 경고했듯이, 우리 소시민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만 챙기다가 계급 구도의 가장 밑바닥으로 하강해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앞둔 순간, 괴물은 현서와 남자아이를 삼킨 채 다시 땅으로 올라온다. 결국 괴물을 물리친 것은 현서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진한 강두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현서의 시신을 찾는다. 끝내 감독은 해피 엔딩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눈이 내리는 한강변의 매점이다. 이제 강두는 현서가 돌보던 남자아이와 단둘이 산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을 지키는 이는 여전히 총을 놓을 수 없는 검은 머리의 강두다. 에필로그 현재 한국영화는 150억 원 이상의 고예산을 투여하는 대작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2006년 <괴물>이 만들어낸 정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지점은 바로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과 작가주의적 연출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으면서도 천만 이상의 관객으로부터 응답받은 것, 즉 작품성과 흥행성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는 의미의 성취다. 감독의 발언은 선동이라기보다 세련된 우화에 가까웠고, 섬세한 연출 스타일은 미학으로 승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 상업영화의 오랜 경계까지 무너뜨렸다. 지금 ‘천만 영화’라는 욕망을 품고 선보이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과연 <괴물>이 도달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가? 흥행 성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고예산 영화들이 반복되는 현재야말로, 산업의 양적 성장을 질적 수준으로 전환시킨 13년 전의 <괴물>을 복기해볼 시점일 것이다. 2016년 7월호부터 시작한 ‘한국영화사 100년’의 연재를 예정했던 20회보다 빠른 18회로 마치게 되었다. 한국영화 제작이 처음 운을 뗀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부터 2000년대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까지, 이 연재는 각 5년의 시기마다 주목해야 할 감독과 그 영화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술영화보다는 대중영화라는 장에서, 작가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을 선정했고, 대체로 그 작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업영화로 기록된 경우였다. 2010년대를 대표하는 두 감독과 영화를 선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재 초기부터 고민을 멈추지 못한 2010년대 이후의 두 감독을 선정하는 작업을 일단 유보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물론 필자 역시 여러분이 떠올릴 몇몇 감독을 생각했고 그들이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박찬욱, 봉준호처럼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를 지워낸 감독이 등장했느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남겨진 숙제는 다른 지면에서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온다. 앵무새를 얼굴에 붙인 남자가 방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앵무새 남자에게 다른 여자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만난 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낯선 존재가 되었다. < 낙타들 >은 남자 얼굴에 정말로 앵무새가 붙어 있는 이미지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런 표현은 상투적이지만, 정말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이미지다. 그동안 방에는 불안한 듯이 바람이 계속 불고 커튼과 전등이 흔들린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면 주인공에게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변명을 한다. 여자는 담담히 일상을 반복하면서 자신도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고, 삶이 사막을 건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마치 내레이션 같은데 평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대화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같은 대화로 이야기를 채운다. 남자는 방을 떠나려고 하지만 여자가 붙잡는다. 둘은 천장에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서로의 엇갈린 욕망에 대해 말한다. 이윽고 앵무새가 남자를 삼키면 남자는 앵무새 안에 갇힌다. 남자는 그동안에도 계속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집에서 가장 폐쇄적인 공간인 냉장고에서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난 셈인데,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버린 남자가 뭔가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자는 우주같이 넓고 어두운 그곳에서 기차를 기다리지만, 허공을 떠도는 남자가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순 없다. 홀로 잠든 여자의 방에 중국에서 온 사막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미세먼지인지 황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영화 속 공간이 우리의 일상과 멀지 않은 공간임을 말하는 것 같다. 여자가 창밖을 내다보는 건물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풍경이며 이 공간에는 다른 여성들도 있다. 또는 곧 벌어질 다른 갈등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여자의 집에 다른 여자가 찾아오는데, 마치 다방처럼 쟁반에서 보온병과 커피잔을 꺼내 내려놓는 모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방 여성의 이미지다. 앵무새는 여자를 데리고 날아가 버리고 여자 홀로 집에 남는다. 선인장이 자라는 사막으로 변해버린 방에서 여자는 남자가 들어가 있던 냉장고 안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괴로운 마음이 폭발하는 순간, 영화의 이야기도 비약을 이룬다. 그녀는 폭발한 냉장고를 타고 방을 탈출해 우주를 떠돈다. 앵무새 안에 갇힌 남자처럼, 그녀가 냉장고 밖으로 나오려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사막에서 사는 다른 여성들처럼 홀로 존재하는 법을 깨우치거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 찾아야 할 것이다. 여자가 앵무새 안에 갇힌 남자에게 했던 말, ‘그 무언가를 꼭 찾길 바란다.’는 말이 이제는 스스로에게 했던 말처럼 들린다. ‘낙타들’이라는 제목은(실제 환경이 그렇든 혹은 감정적으로든) 사막처럼 황량한 도시에서 견딜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은 냉장고 안에서 잠든 채로 욕망만큼이나 넓은 우주를 떠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