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선생
- 감독
- 김기덕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오영일, 문희, 이낙훈, 안은숙, 김희갑, 최남현, 박암, 김신재, 정민, 최창호, 안인숙, 박기택, 최장호, 남만식, 임성포, 김영인, 김월성, 지계순, 석귀녀, 문미봉, 김경란, 정미경, 김도령, 이상복, 김순자, 허선행, 이명부, 경윤수, 박일, 김세라, 최병철, 마도식, 이정애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본 기획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1950~70년대 한국영화에 나타난 당대 서울의 도시공간을 조명해왔다. 현대사의 질곡에 휘말린 가족이 겪는 비극의 무대로서(< 오발탄 >),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으로서(< 도시로 간 처녀 >), 소외된 이들의 저항의 장(場)으로서(< 바보선언 >), 서울은 소시민의 삶을 표상하는 장치이자 말 없는 배우로서 충실히 기능했다. 이에 더해, 이번 논고에서는 ‘대도시’를 난생처음 접한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서울이 필름 속에 어떻게 담겼는지 살펴봄으로써, 표상으로서의 서울에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유현목 감독의 < 수학여행 >(1968)은 한 번도 서울 구경을 해 본 적이 없는 외딴섬 ‘선유도’의 국민학교 아이들의 눈에 당대의 서울이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를 총천연색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이미 < 오발탄 >(1961)에서 비극의 무대로서 서울을 탁월하게 묘사한 바 있는 유현목 감독은, 본작에서 한층 더 대담한 시선으로 1968년 가을 서울 도심 곳곳을 포착했다. 총천연색으로 담긴 서울의 풍경은 앞서 본 기획에서 다룬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에서도 감상할 수 있지만, 본작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68년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급변하던 서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더욱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의 외딴섬 선유도 국민학생들은 1968년 10월 1일, 서울 출신 섬마을 선생님( 구봉서 )의 인솔 아래 서울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기차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줄로만 아는 순박한 아이들을 태운 기차는 한강철교(37분 34초경)를 건너 서울역에 닿는다. 드넓은 광장과 인파 속에서 처음 겪는 번잡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들 뒤편으로, 현재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 자리에 있던 일제강점기 근대 건축물들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38분 24초경). 3년 만에 재회한 선생님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아이들이 다 함께 64번 버스(現 750A번 버스)에 오르려는 찰나, 한 학생의 벗겨진 신발을 주우려다 버스를 놓친 선생님은 서울역 앞 광활한 대로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카메라는 높은 부감(俯瞰) 시점에서, 종횡무진하는 자동차 사이를 달려 나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담아낸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위험천만한 시퀀스이지만, 이 과감한 촬영 덕분에 우리는 전후 도시 복구의 상징과도 같은 관문빌딩(1960년 준공)과 형형색색의 택시, 버스가 어우러진 1968년 서울역 앞 풍경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역 전경 (37:56) 서울역 일제강점기 근대 건축물 (38:24) 서울역 앞 버스와 택시, 그리고 관문빌딩 (40:58) 아이들을 태운 버스는 건군 20주년 국군의 날 기념 현수막이 걸린 남대문과 그랜드호텔(1959년 준공, 現 흥국생명 빌딩) 앞을 지난다(41분 38초~41분 50초경). 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버스 내부에서 차창 너머를 바라보는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관객이 아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서울의 경관을 체험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촬영 시점으로부터 불과 두 달 뒤 폐지될 서울전차를 목격한 한 아이가 “저거 전차 아녀?”라고 외치는 장면은, 후술할 후반부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시시각각 변화하던 서울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건군 20주년 국군의 날 기념 현수막이 걸린 남대문 (41:38) 서울전차와 그랜드호텔 (41:50) 이튿날, 서울 도심을 활보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카메라는 과감하게 뒤쫓는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보다 2년 먼저 공개된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에 삽입된 것과 유사한 ‘보행자의 시선에서 서울상업은행 본사를 올려다보는 씬’이 등장한다(51분경). 한국은행 본점 옆에서 당시로서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을 13층 빌딩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일종의 ‘대도회지’의 표상으로서 당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은 아닌지 짐작하게 한다.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서소문 옛 대한항공 본사 사옥(51분 15초경) 옆 육교에서 명동 방향을 굽어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포착하는데, 이때 ‘삼환기업’과 ‘현대건설’ 여덟 글자가 새겨진 타워크레인이 줌인되며 프레임을 가득 메운다. 감독의 의도를 전부 알 길은 없으나, 이 공사 현장은 바로 조선호텔(1970년 준공) 부지이며, 프레임에 담긴 타워크레인은 우리나라 공사 현장에 최초로 도입되어 당대 일간지에 기사화될 정도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당대 최대 규모의 특급호텔의 공사 현장이자, 신식 문물의 상징과도 같은 타워크레인을 포착하여 ‘대도회지’의 역동성을 드러내려 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올려다본 서울상업은행 (51:00) 서소문 육교와 옛 대한항공 본사 사옥 (51:15) 조선호텔 부지에 놓인 채 줌인된 타워크레인 (51:29) 이후 수학여행단은 당시 구로공단에서 개최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무역박람회(1시간 7분 33초 이후)를 방문한다. 덕분에 럭키(現 LG), 포드-현대자동차, 신진자동차(現 GM코리아) 등 국내 대기업들의 파빌리온이 총천연색의 영상으로 기록되어, 우리나라 산업 및 무역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더없는 흥미를 선사한다. 곳곳에서 국내 대기업 명칭이 포착되는 국제무역박람회 현장 (1:07:00~) 영화 후반부, 마침내 서울전차를 타게 된 섬마을 아이들은 운전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운전수는 “전차는 새로운 문명인 자동차에 밀려 나가게 되었다(1시간 25분 38초경)”라며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대사를 전한다. 나아가 그는 “이 늙은이는 이 낡은 전차를 떠나지만, 너희는 앞으로 부지런히 새것을 쫓아가야 한다”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초반부 “저거 전차 아녀?”라며 놀라워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수미상관을 이룬다. 이 시퀀스의 촬영 장소는 당시 동대문에 있던 서울전차 차고로 추정된다. 영화가 1968년 9월 이후 촬영되었고 서울전차가 같은 해 11월 30일에 폐지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서울전차 차고의 마지막 모습을 컬러로 담아낸 귀중한 영상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서울전차를 타고 오는 아이들과 운전수 <수학여행>의 플롯은 ‘섬마을 아이들의 인생 첫 서울 여행’과 ‘섬마을 선생님의 화목한 가정 회복기’로 요약될 정도로 실은 상당히 단순한 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서사 구조 덕분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1968년 서울의 풍경이 극의 전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그 결과 57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는 ‘그때 그 서울’을 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지니게 되었다. 한국고전영화 속 도시공간을 들여다보는 이러한 시도가 꾸준히 축적된다면, 표상으로서의 1950~80년대 서울에 대한 통시적 고찰 또한 가능해질 것이라 기대해 본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강수연 이 아직 아역이었을 때다. 나는 영화 < 낮은 데로 임하소서 >를 제주도에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점심을 기다리며 식당의 TV에 무심코 눈을 주던 중 아주 깜찍한 연기를 하는 어린 강수연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앞자리에는 마침 아직 총각이었던 안성기 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주의를 환기시켜 강수연을 유심히 보게 했다. 한참 TV를 들여다보던 안성기가 왜 갑자기 어린애 연기를 보라고 했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쟤 어때?' '뭐가요?' '괜찮잖아?' '응- 연기 잘하죠!' '그게 아니라 매력 있잖아! 어때 저 애? 색시 깜으로….' '누구? 나요? … 에헤이, 형두 참. 어린애 가지구…' 안성기 는 별 싱거운 농담 다한다는 듯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진지했다. 저 아이는 곧 어른이 될 것이다. 불과 5년도 안되어 성인이 될 터이고 그때까지 안성기가 장가간다는 보장도 없다. 안 갈게 틀림없다. 흔한 말로 처녀 장가가려면 길러서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냥 흘려 듣지말구 진지하게 검토해 봐라! 그때 나는 안인숙 이란 배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1965년 전후 무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렴풋이 기억 속에 아역 탤런트였던 안인숙의 껑충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잠깐 들렸던 TV방송국 안에서 어린이프로그램 녹화를 준비하던 목이 긴 아이가 자기보다 작은 애들 속에 둘러싸여서 재잘재잘 수다를 부리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었다. 당시 얼굴은 낮이 익었지만 이름까지 외우지 못했던 그 작은 소녀는 연기를 깜찍하게 잘했고 금세 부쩍부쩍 자라 중학생으로, 여고생으로 출연하더니 불과 5년도 안되어 성인의 역할 언저리를 비슷하게 넘나들더니 결국 훗날 내 데뷔작 ' 별들의 고향 '의 여주인공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할 때는 신랑이 내 고교 선배여서 꼼짝없이 형수님이라 부르는 처지로 바뀌었다. 안인숙 을 캐스팅한 후로 나는 아역배우들을 단순히 어린이로만 보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면 대개 13살 전후다. 덩치가 아무리 커도 틀림없는 어린애다. 그런데 4년만 지나면 각종 미인대회에 나설 정도로 성장한다. 요즘 미인대회를 보라. 고교 2년 정도의 재학생이 꽤 많다. 좀 다른 예가 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영화에서 김지미 씨를 처음 보았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린 을지로의 국도극장에서 보았던 그 '' 황혼열차 ''라는 흑백 필름은 고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로 김지미 씨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통해 13살 어린놈의 뇌리에 코스모스처럼 청순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각인되었던 여배우 김지미의 그때 나이는 겨우 18살이었다. 불과 5년의 차이뿐이지만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엄청난 장벽으로 거리감을 만드는 억울한 시기는 우리 인생에서 오직 이 시기만 유일하다, 안인숙 에 대해 회고하는 지금 먼저 떠오른 모습이 어린 시절이다. 일찍부터 TV와 영화 출연에 익숙한 연기 생활을 한 때문일까? 안인숙의 연기는 맑다. 우중충한 연기가 어울리지 않는 그는 새로운 연기의 세계로 내 시야를 넓혀 준 장본인이기도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성질이어서 나는 안인숙의 다른 영화를 별로 보지 못했으나 안인숙을 통해 느낀 이미지는 매우 밝고 맑고 깨끗하다. 그래서 만약 그가 우중충한 연기를 썩 잘 해낸다고 해도 그 타고난 이미지와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짐작된다. '' 별들의 고향 ''의 크랭크인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창 밖은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뜻밖이었다. 밤사이에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그날 예정된 촬영은 어렵지 않은 거리 로케이션 이었는데 처음 영화에 데뷔하는 감독은 첫 촬영을 쉬운 장면부터 찍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밤사이 내린 축복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는데 그 설경을 보자 나는 이 겨울에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눈일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원작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는 눈 쌓인 벌판에서 죽는다. 그 라스트 신은 조감독 시절의 경험으로 강원도 대관령이나 정선 임계 백봉령 정도에서 촬영하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비한 설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으니 오늘 이 대도시에서 촬영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빨리 조감독과 제작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촬영 계획을 바꾸어 라스트 신부터 찍겠다고 통보했다. 촬영장소는 연애시절 빈번하게 처가를 왕래하면서 자주 지나다녔던 광나루 강변이 머리에 떠올랐고 거기쯤이면 아주 장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침의 모든 갑작스런 계획이 마치 신들린 것처럼 진행된 것 같다. 드디어 촬영 현장에 도착해 우선 촬영장소로 적합하다는 만족감을 스텝들로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촬영계획 변경으로 주인공 경아 역을 맡은 여배우 안인숙 은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분장사도 없었고 의상도 헤어스타일도 미리 연출부와 합의를 보지 않은 갑작스런 촬영인데다 아주 중요한 라스트 신이 아닌가? 연기자의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안인숙은 내색하지 않고 어떻게 분장했으면 좋겠는지 정중하게 감독의 의견을 물었다. 촬영반이 대기 중인 버스 안이었다. 갑자기 촬영 계획을 바꾼 감독을 힐난하는 눈초리로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경험이 일천한 나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머뭇거리다가 겨우 타락한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가까스로 주문했다. 그러나 스스로 말해놓고도 내가 이해되지 않아 덧붙여 말한다는 것이 푹 썩은 얼굴이면 좋겠다고 해놓고는 얼른 돌아서 버스에서 내려왔다. 낯이 뜨거웠다. 연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두 의심하는 것 같았다. 등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스텝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눈 쌓인 벌판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비로소 촬영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 있는 걸음으로 다시 스텝들이 기다리는 버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웬걸! 안인숙 의 얼굴은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푹 썩은 얼굴, 타락한 모습으로 분장사 없이 스스로 자신의 화장품이 그려 놓은 얼굴은 그야말로 '' 13일의 금요일 ''에라도 나오는 악마의 얼굴이었다. '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역 출신 명배우 안인숙의 감독 테스트에서 나는 첫 시험에 불합격이었다.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모든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로 돌아가 촬영하자고 제의했다. 비로소 안인숙은 안심이 된다는 듯 기분 좋게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날 그렇게 나로 하여금 정신을 못 차리게 뺑뺑이 돌리던 크랭크 인은 그래서 그 역사적 감독 데뷔의 첫 외침 '레디-고!'를 언제 어떻게 했는지 전혀, 그리고 영원히 기억나지 않게 만들었다. 안인숙 의 이미지는 맑고 밝고 깨끗하다. 별들의 고향 에서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그의 이미지에 맞추어 성공적인 연기를 해내었다. 아무리 우중충한 장면도 그는 산뜻한 이미지로 나에게 새로운 연기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연기 생활이었겠지만 그 역시 별들의 고향은 아주 특별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언론사상 최고의 인기신문소설의 영화화, 그 수많은 경쟁을 뚫고 획득한 여주인공 경아 역, 본격적인 성인 역할, 구두쇠 제작자의 자존심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아주 흔쾌하게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노 개런티의 출연, 그리고 생전 처음이었을 누드 출연, 16년이나 연상인 슈퍼스타 신성일 씨와의 베드신, 등등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작품을 더 함께 만들었다. 나의 두 번째 영화 '' 어제 내린 비 ''. 개인적으로는 '' 별들의 고향 '' 보다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영화 만드는 맛을 알았고 비로소 영화에서 연출자의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식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또 안인숙 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고 내 친동생 이영호 를 데뷔시켜 안인숙과 공연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안인숙 은 물론, 안성기 도 그렇고, 강수연 도 그렇고 아역 출신들의 공통점은 타고 난 연기력이다. 태생적 연기자란 말은 그 연기의 천재성이 개발된 것이 아닌 만큼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된다. 대개 어려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 천부적 감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연기 기술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재능처럼 본능성을 발휘해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창작의 고통과는 또 다른 거리감이 있어 예술성과 그 깊이에서는 손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품다운 작품을 만나 본인이 투지와 의욕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 할 것이다. 이장호 (영화감독) / 2003년 <프로필> 1952년 10월 28일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1975년 결혼과 함께 은퇴 1963년 최훈 감독 < 부부조약 >에서 아역 데뷔 <주요 작품> 쌍무지개 뜨는 언덕 , 섬마을 선생 , 별난 새댁 , 별들의 고향 , 어제내린 비 등 다수
세월의 흐름의 무상함을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다시 떠올려 생각할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자신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야 그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차태진 사장과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창업하고 전속감독 겸 전무이사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주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으며 예술성이 높은 문예물을 외부에서 감독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 친구 중에 군에 장교로 몸담고 있는 괴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회사로 왔을 때 복도에 걸린 스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한 듯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연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 이낙훈 '' 아형이다. 당시 그이는 한운사 선생 원작, 유현목 감독의 < 아낌없이 주련다 >에 출연 중이었다. 그이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그 청년장교는 군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부문에도 전문가 이상의 혜안을 갖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 이낙훈 이란 배우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작품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그 부끄러움은 커다란 관심으로 바뀌어 그이를 가까이 만나보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 것은 같은 K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사상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다. K고를 나와서 무엇이 할 일이 없어 연극쟁이나 탈렌트 또는 영화판에 몸을 담아야 하느냐고 주위의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런 세상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나이는 필자가 두 살이 위였고 학년으로는 그이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직업상으로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며 상호 간의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돈독한 관계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신혼초였고 우연히도 안사람들의 나이가 동갑내기여서 안사람들끼리의 교분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능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그이가 신혼초에 함께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의 소천시에는 ''호상''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제의를 주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그이의 친가 쪽뿐만이 아니라 처가댁의 여러 친척분들과도 친족 이상의 관계를 맺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 이낙훈 '' 아형은 필자가 감독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주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기꺼이 출연하여 직간접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하나 모두 연대별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 늦어도 그날까지는 >, < 친정어머니 >, < 용사는 살아있다 >, < 결혼반지 >, < 원죄 >, < 동과 서 >, < 그대 이름은 >, < 섬마을 선생 > 등등이 주요 작품들이다. 그이는 참으로 만능의 연기자였다. 라디오 연기(성우)로 시작하여 연극, TV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이의 연기력이 얼마나 원숙하였는가 하는 것은 제1회 동아연극상 주연상 수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 연기상, TV부문 수상, TBC연기대상 주연상 수상, KBS연기대상 수상 등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이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진학하여서도 그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의 MIAMI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력이 그로 하여금 원숙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이와 함께 한 작품 촬영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원죄 >라는 작품의 촬영중이었다. 주인공 역으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 0군을 발탁하여 썼을 때의 일이다. 장면의 내용은 여름 장면이었고 촬영 시기는 한겨울이었으며 장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 세트장에서의 일이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런닝셔츠만을 입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은 이낙훈 씨와 신인인 0군이었는데 0군의 연기가 너무 미숙하여 도저히 그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0군의 연기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모든 스탭들도 기다리기에 지쳤고 그날의 촬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감독인 필자도 체념을 하고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낙훈 씨만은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0군의 연기를 차근차근 지도하여 몇 시간 후에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이낙훈 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연기자의 처지와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후 신인 0군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주연급 스타로 성장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이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기지에 찬 유머 감각은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그의 팔도 사투리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기지에 찬 유머와 팔도사투리는 필자를 포복절도케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단편이 되었다. 그이는 팝송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북창동에 ''MEXICO''라는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살롱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곳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자주 찾곤 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코코부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장우 씨와 박상규 씨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그이는 두 사람의 권유로 무대 앞에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앙상블은 그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연속적인 앙콜을 유발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의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 활동에 있어서 그이처럼 행복한 나날을 즐겼던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그이에게는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던 지병이 있었다. ''당뇨병''이 그것이다. 불치의 병이라는 ''당뇨병''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는 다 찾아다녔고 병에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며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다시피 했다, 병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의 투병 모습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해의 추석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부고가 내게 날아든 것이다, 아연실색한 필자는 곧바로 그의 영전으로 달려 갔다. 유족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간단한 검사를 받겠다고 제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고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62세 한창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귀여운 딸 정화 양과 아들 상구 군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이는 한 사람의 연기자이기데 앞서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신자였다. 그이의 친가나 처가댁 모두가 독실한 신자 집안이다. 천주님께서도 너무나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이제 정말 뭘 좀 알고 일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이를 천주님 곁으로 불러간단 말입니까? 망연한 허탈감과 그동안 그이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별을 잃은 것이다. 앞에서 나의 친구가 단언했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커다란 연기자를 잃은 것이다. 중후하고 품위있는 그의 외모와 원숙한 연기력, 정답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포근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씨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이와 함께 잃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유족들은 그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그이가 다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잇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인 최윤주 여사는 불우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시고 딸 정화 양은 뉴욕대학에서 컴퓨터 아트를 전공하고 돌아와 아티스트로의 길을 다지고 있으며 아들 상구 군은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국대, 순천향대, 경인대,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한양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들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김기덕 (예술원회원) / 2003년 <프로필> 1936년 3월 27일 서울 출생 1998년 10월 7일 타계 195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2년 수료 후 도미 1961년 미국 마이애미 유니버시티 사학과 수료 1965년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데뷔 <주요 경력> 탤렌트 협회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주)범진흥업 대표이사 등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공로상, 특별상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공로상수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갯마을 , 용사는 살아있다 , 돌의 초상 , 돌종 , 목소리 , 연합전선 , 꽃네 , 동과 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