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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 퍼포먼스도 연기도 '소통' 느낌으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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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필름 속 60년 전 서울의 모습을 찾아서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도시 공간은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온 시간의 레이어가 중첩된 결과물이다. 어떤 곳은 레이어의 층위가 그다지 많지 않아 과거의 모습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반면, 어떤 곳은 너무 많은 층위가 겹쳐 불과 수년, 수십 년 전 모습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도시 중에서 사회·문화·정치·경제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서울의 도시 공간은 아마도 대부분 후자에 속할 것이다. 특히 서울 도심부는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 광복, 6·25 동란, 군사정변과 산업화라는 역사의 격랑을 거치며 무수히 많은 시간의 레이어가 촘촘히 덧씌워져 왔다. 이러한 서울의 역사적 조건은 미시적인 변화상(예를 들면 1960년대 서울은 1950년대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는가)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각각의 레이어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 주도로 제작된 <대한뉴스> 및 각 관청에서 촬영한 행정 기록용 사진들은 여전히 상당수 남아있다. 하지만 이들 기록은 ‘국가의 시선’에서 취사 선택되었다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 <대한뉴스>의 제작 목적은 국가 정책 홍보와 대국민 계몽이었으며, 관청 사진들 또한 행정 결과 보고라는 목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면 민간(시민)의 시선에서 날 것 그대로의 도시 공간에 가장 근접한 기록은 무엇일까? 당대 시민의 생활상을 담아낸 영화 작품이야말로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영화 < 마부 >(강대진, 1961)는 서울에 거주하는 서민 가정의 가장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그린 작품이다. 김승호 가 분한 가장 춘삼은 1960년대 서울에서 이미 전근대적 운송업으로 취급받기 시작한 ‘마부’이며, 그의 자식들은 당시 서울 시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민 가정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모든 등장인물이 서울 시내 각지를 방황하는 이야기 전개상 4.19 혁명 직후 서울 시내 곳곳의 모습이 명확하게 포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흑백 영화라는 시대적 한계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거리의 모습 때문에 첫눈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춘삼네 식구들의 희로애락이 투영된 장소가 지금도 엄연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서울 시내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60년 전 서울의 어느 서민 가정을 매개체로 하여 95분의 러닝타임 속에 담긴 60년 전 서울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옥인길에서 촬영된 세련된 오프닝 시퀀스 <마부>의 오프닝 시퀀스는 춘삼의 작은아들 대업( 김진 )이 훔친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내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업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그 형태, 그리고 1960년 10월에 치러진 보궐선거(서울시의원 종로 제1선거구) 벽보와 배경의 산세로 보아 지금의 누상동·누하동의 옥인길로 추정된다. 시퀀스로 미루어 춘삼네 집은 옥인길 초입에서 5분가량 걸어올 라가면 나오는 옥인동 47번지 일대의 비탈진 곳에 위치했으리라 짐작된다. 지금은 주거환경개선사업 등으로 인해 한옥과 판잣집을 찾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영세한 필지만큼은 춘삼네 가족이 머무르던 시절을 담고 있다. 장충동에서의 근대-전근대의 교차 다음으로 주목할 장면은 작은딸 옥희( 엄앵란 )가 남성과 자동차를 타고 가다 마차를 끄는 아버지 춘삼과 길에서 마주치는 씬이다. 숭정문이 저 멀리 내다보이는 가운데, 장충동의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근대의 문물(자동차)과 전근대의 문물(마차)이 사고를 일으킬 뻔했다. 도로를 지배하는 교통수단이 마차에서 자동차로 옮겨간 시대적 배경에서, 이는 춘삼이 겪는 가난이 사회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드러내는 씬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영동 성남극장 극중에서 춘삼과 수원댁( 황정순 )이 영화관 데이트를 즐기는 곳은 남영동의 성남극장이다. 1918년 세워진 ‘경룡관(京龍館)’을 전신으로 하는 성남극장은 서울의 수많은 초창기 영화관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극장 건물이 남아있는 드문 사례다. 한강로를 건너는 춘삼과 수원댁의 배경에는 서울전차의 원효로 분기선이, 교차로에는 221호 전차와 1950년대 후반 출시된 미제 닷지 트럭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우마차의 시대가 이미 종결을 고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은 트럭과 전차의 출연은 당시 서울의 교통 환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류의 중심지, 서울역 마차를 끄는 춘삼과 수업( 신영균 ), 그리고 ‘서울소화물’이라 적힌 화물 오토바이를 모는 창수( 황해 )는 당시 서울역 북서쪽에 위치한 화물 취급소를 자주 찾는다. 트럭 운송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대부분의 장거리 화물은 기차로 서울에 옮겨졌고, 이를 시내 각지로 운반하는 영세 운송업자들은 자연스레 서울역 서쪽으로 모여들었다. 맞은편 북쪽에는 서울수산시장(1975년 노량진으로 이전, 現 서소문역사공원)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물류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찻길 옆 시가지, 청파동 춘삼은 기찻길 옆 돌다리 위에서 수원댁과 만나 담소를 나눈다. 오른쪽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개천이 흐르며, 왼쪽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점에서 이곳이 옛 만초천을 복개한 청파로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이 일대가 서울역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임을 감안하면, 화물 취급소로 향하던 춘삼이 자연스레 수원댁을 만났다는 공간적 개연성이 확보된다. 수원댁과 헤어진 춘삼 너머로 보이는 높은 굴뚝은 1930년대부터 존재했던 철공소(청파동1가 183번지)의 것으로, 오랜 세월 청파동의 근대산업유산으로서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마부> 촬영 이후에도 60년 가까이 살아남았으나 2019년에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왼편에 철공소 굴뚝이 보인다. 해당 철공소 건물(1938년 12월 준공, 2019년 철거. 사진: 필자 제공) 불안한 해피엔딩, 중앙청 앞 율곡로 <마부>의 결말은 오프닝과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오프닝의 카메라는 누하동의 굽이진 골목길을 어지럽게 쫓아가지만, 결말의 카메라는 행복한 미래를 맞이한 춘삼네 가족이 중앙청 청사와 옛 경기도청 사이의 율곡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는 큰아들 수업의 성공으로 춘삼네 가족이 더 이상 서울역 화물 취급소, 누하동 비탈길, 장충동 교차로를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간적 단절을 의미하는 듯하다. 다만, 과연 춘삼네 가족에게 그런 미래가 찾아왔을까? 현실의 서울에서는 수업의 성공으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고, 독재정권이 도시계획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서울 도시 공간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춘삼네 가족과 그들의 삶이 투영된 서울 또한, 결말의 줌 아웃을 끝으로 그 이전과 단절된 셈이다. <마부>는 95분의 러닝타임 동안 미처 글에 담지 못한 장소들(노들섬 한강대교, 문배동 오리온 제과공장, 충무로 대한극장 앞)을 포함해 서울 시내 십여 곳에서 직접 촬영을 진행하고, 이를 ‘어딘가에 존재했을 법한’ 서울 사람의 생활 동선으로 엮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부>가 첫 개봉으로부터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당대 서울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다시금 조명받는 데는 이러한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 속 서울의 모습은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작품 수에 관객 수를 곱한 것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읽어내야 할 과거 서울의 모습이 무궁무진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서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켜켜이 쌓여왔음을 의미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과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 속 서울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이어지길 바란다. 김영준 연구원이 들려주는, <마부> 속 서울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영화X공간] 영화 "마부", '1961년 서울의 삶' 클릭!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우미관
우미관은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 관철동에 존속했던 영화관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소였다.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동업하여 1912년 12월 11일 관철동 89번지에 건립한 우미관은 수용 인원 1,000명 규모의 2층 벽돌 건물로,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종로2가 큰길에서 관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했다. 우미관의 설립자 하야시다 긴지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어용상인이었다. 잡화 판매를 비롯해 석탄 판매업,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상업 자본가로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하야시다상점(林田商店)을 경영했다. 한편 동업자 시바타 미요지는 청계천 모전교 부근 무교동에 처음으로 목욕탕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해서였는지, 비슷한 시기 건립된 다른 영화관과 달리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었다. 1912년 당시 조선인 관객은,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상영했던 원각사나 유광관(有光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던 장안사와 같은 연극장에서 특별 프로그램 형태로 활동사진을 접했다. 물론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알려진 경성고등연예관을 통해서도 영화 관람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연예관은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함께 받아 민족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당시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하여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짧은 길이의 영화에는 유용했지만 장편영화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에 설명하는 중설(中說)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장편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자연스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대정관과 1913년 설립된 황금관은 애초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으며, 1912년 설립된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을 두어 오로지 조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다. [자료] 우미관 신축 낙성 개관 광고(《조선신문(朝鮮新聞)》, 1912.12.11.) 조선인 극장으로서 우미관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1910년대 중반,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하던 때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에서 들여오던 생필름의 수입이 중단되고 파테사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수입되던 영화의 수도 현저히 줄면서 필름 가격이 폭등했다. 반면 1915년 미국의 유니버설사가 할리우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인 유니버설시티를 짓고 영화를 양산, 세계 시장을 향해 대규모 수출을 시작했다. 1916년 무렵 영국의 필름 마켓에서는 미국영화가 무려 9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위력을 떨쳤는데, 특히 유니버설의 필름들은 영국의 필름 마켓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폭풍처럼 미국산 필름의 인기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시리얼’(serial)이라 불리는 연속영화였다. 연속영화는 주로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을 일컫는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영화 흥행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르다. 일반적으로 2권 분량의 에피소드가 1편을 이루며 대략 15편으로 완료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료될 때마다 다음 편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소위 ‘클리프행어 효과’가 관객들로 하여금 상설관을 지속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조선에 처음 소개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는 1916년 6월 10일 황금관 신축 이전을 기념하여 상영된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프란시스 포드(Francos Ford)가 만든 이 작품은 1915년 일본에서 상영되어 이미 큰 인기를 얻은바, 일년 뒤 조선에 소개될 때는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 말고도 조선인 극장인 우미관에서 상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한편 <명금>을 배급하던 유니버설사는, 1916년 7월 이전에 제작하여 이미 수입업자들에게 판매한 필름들을 제외한 모든 신작 필름에 대하여 유니버설의 일본 법인이라 할 수 있는 하리마(播磨)-유니버설(훗날 유니버설 동경지점)을 통해 임대 계약을 체결한 후에라야 상영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유니버설의 정책이 필름을 판매에서 특약관 임대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조치는 유니버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할 수 있게 하여 유니버설 영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료] 우미관이 유니버설사와 특약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광고(《매일신보》, 1916.12.17) 장편영화 1편을 상영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상설관은 여러 편의 짧은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의 TV 편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묶어 3시간 정도 분량이 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었는데, 대정관이나 황금관과 같은 일본인 상설관은 서양영화와 더불어 일본의 구파, 신파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설관인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오로지 서양영화로만 프로그램을 짰기 때문에, 유니버설과 특약관 계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본격 상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이유로 우미관은 1916년 12월 유니버설과 특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유니버설영화를 독점 상영하게 된다. 그 결과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들 외에도 ‘블루 버드’(The Blue Bird)니 ‘레드 페더’(Red Feather)니 하는 브랜드의 장편 영화들이 우미관을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우미관에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를 상영하던 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끈 변사가 서상호였다. 그는 굵다란 목소리로 웅변조의 설명을 했는데, 막간에는 무대에 나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 클랙슨을 끼우고 ‘뿡뿡’ 소리를 내며 이른바 ‘뿡뿡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때는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이라는 신파극단에 가입해 신파배우로도 활동했다. 유니버설의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서상호를 위시한 우미관의 변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1918년 이후에는 변사들이 각 상설관의 흥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서상호 같은 인기 변사는 각 상설관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1910년대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은 1918년 설립된 단성사와 1923년 설립된 조선극장과 경쟁하며 삼파전을 벌이던 중, 1924년 5월 발생한 실화로 건물 전체가 전소된다. 같은 해 12월 신축되기는 하였으나 시설이나 프로그램 경쟁력이 다른 극장들보다 떨어져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파격적으로 전석 10전이라는 싼 관람료를 책정,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 비해 화장실의 규모가 작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의 대명사가 된다. 시설이 형편없다 보니, 1943년 조선흥행엽합회가 영화관의 시설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책정된 가격 이하로만 요금을 받기로 했을 때, 우미관은 전체 11개 등급 중에서 6~7급 정도를 받았다. 1~4급까지는 개봉관, 5~10급은 재개봉관, 11급은 문화영화관으로 크게 구분되던 당시의 기준에서, 명치좌와 동보영화극장, 성보영화극장이 1급을 받았으며 동보중앙극장, 희락관, 대륙극장이 5급을, 우미관, 낭화관, 신부관이 6~7급이었다. 서울의 영화관이 1류극장-2류극장-3류극장으로 구분됐 때 우미관은 3류극장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서양영화만 상영하던 우미관이지만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제정된 1934년 이후로는 일본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상설관에 일본영화 의무 상영이 강제되자, 재정이 어렵던 우미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우미관은 경성촬영소 및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가 맡아 경영했다.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와케지마는 조선인 상설관 운영도 고려하여 우미관을 임대했는데,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아리랑 고개>(홍개명, 1935) 같은 작품이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우미관은 오랫동안 종로의 조선인 흥행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우미관이 건립되자 조선인 관객들은 관철동 골목으로 모여 들었고 미로 같은 관철동 골목은 환락가가 되었다. 1920년대 3류 영화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미관은 저가의 입장료로 관객을 유인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도 역시 우미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몰려 있던 그곳은 변사 서상호뿐만 아니라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깡패들 혹은 그들을 소재로 한 활극영화의 주요 무대로도 기억된다. 해방 후, 전쟁 후까지도 관철동 골목을 지키던 우미관은 아쉽게도 1959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화신백화점 옆에 우미관이란 이름의 영화관이 신축되지만, 새로운 우미관은 1982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역시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구보씨, 우미관 영화 보러 갈래요?」, 『구보학보』 17호, 2017, 9~40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59~171쪽. * [사진](상단).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매일신보》, 1916.12.17[사진2 참고] 十二月 十四日 브터 / 特別大寫眞 / 泰西大々活劇 야구이 全五卷 今也 歐洲戰乱 의 結果 日本 에셔 輸入 ᄂᆞᆫ 「 후이룸 」 은 米國 이 獨有 ᄒᆞᆯ 이라 . 此時 ᄅᆞᆷ 當 야 本館 은 米國 에 在 活動寫眞 의 有一無二 大會社 인 「 유니바사루 」 社 ( 資本金 五億萬圓 으로 米國 의 活動寫眞 「 후이룸 」 製造會社 十七社 를 合倂 고 彼 名寶 와 黑箱 等 을 製造 會社) 東洋總代理店 된 東京 「 유니바 - 사루 , 하리마 」 商會 와 早速 히 特約 을 締結 고 本日 로 爲始 야 全部 同社 의 封切 寫眞 을 上場 ᄒᆞᆷ은 他館 에 類例 가 無 고 本館 이 獨有 ᄒᆞᆯ 이오니 此 가 全 혀 觀客 諸賢 의 平素 愛願 야 주신 結果 로셔 其 感謝 ᄒᆞᆷ을 一筆 難記 로소이다 . 仰乞伏望 노니 倍舊 愛護 샤 續 々 來觀之榮 을 賜 심을 伏望々々 나이다 . 謹白 [자료] 《매일신보》, 1943.07.03. 1 級 ( 封切館) 八十錢 으로 / 今日 부터 映畵常設館 入場料 를 引上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이 二 일부터 올낫다 . 조선흥행연합회 ( 朝鮮興行聯合會 ) 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을 올릴려고 당국에 신청 중이든 바 二 일부 관보로써 개정 요금이 고시되엿다 .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안에 잇는 영화관을 최고 一 급으로부터 최저 十一 급 지 구별하야 그 입장 요금도 최고 一 급 八十 전으로부터 대걔 五 전씩 차이를 두고 최저 十一 급 二十五 전 지 현재보다 三 할 三 부가량 빗싸게 결정하엿다 . 一 급 八十 전 / 二 급 七十五 전 / 三 급 七十 전 / 四 급 六十五 전 / 五 급 六十 전 / 六 급 五十五 전 / 七 급 五十 전 / 八 급 四十五 전 / 九 급 三十五 전 / 十 급 三十 전 / 十一 급 二十五 전 그런데 四 급 지는 봉절관 ( 封切館 ) 으로 하고 五 급부터 十 급 지는 재상영 ( 再上映 ) 상설관으로하엿스며 十一 급은 문화영화 『 뉴 - 스 』 영화 등의 상설관으로 하엿다 . 이 『 급 』 을 결정하는 것은 각 도의 사정에 의하야 결정되는 것인데 경성의 예를 들면 명치좌 ( 明治座 ) 동보 ( 東寶 ) 영화극장 , 성보 ( 城寶 ) 영화극장 등은 一 급 ( 八十 전 ) 에 속하고 동보중앙극장 ( 中央劇場 ) 히락관 ( 喜樂館 ) 성남극장 ( 城南劇場 ) 대륙극장 ( 大陸 ) 등은 五 급 ( 六十 전 ) 우미관 ( 優美館 ) 낭화관 ( 浪花館 ) 신부좌 ( 新富座 ) 등은 六 급 내지 七 급에 속한다 . 이번 결정된 요금은 영화를 흥행할 의 요금으로서 최고 요금이므로 영화에 한하여서는 이상은 더 못 밧기로 되엿다 . 입장료에는 세금과 관남료 지 전부 포함되여 잇는데 세금은 전액의 一 활 五 부를 차지하고 잇다 . 즉 八十 전은 그 중 十 전이 세금이고 七十五 전은 九 전 六十五 전은 八 전이 세금인데 『 뉴 - 쓰 』 나 문화영화관의 입장료 ( 二十五 전 ) 에는 세금이 붓지 안는 현역 군인 ( 하사관 이하 ) 과 七 세 이상 十四 세 미만의 소인은 그 입장료의 반액을 밧는다 .
용산의 극장들
용산지역에는 상설극장이 아닌 가설 형태로 극장이 처음 들어섰다. 가장 먼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용산무동연희장(龍山舞童演戱場)인데, 용산의 넓은 빈터에 천막을 두른 가설 형태의 연희장이었다. 이 같은 가설 형태의 연희장은 극장이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 근대식 상설 연희장이 설립되는 데까지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료] 용산좌 신년 광고(《조선신문》, 1913.01.01) 용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상설극장은 용산좌다. 1906년 말 용산 영정(榮町)에서 개관했다. 현재 용산 원동교회 근처에 있었으며, 개관 당시 좌주는 사사베 모쿠자에몬(笹部杢左衛門)이었다. 1911년 5월에는 다케모토(竹本水朝) 일좌(一座)가 조루리의 일종인 오사카 여성 기타유(大阪娘義太夫)를 공연했고, 1912년 2월에는 나카무라 카시쿠(中村かしく) 일좌가 나니와부시를 연극(芝居)으로 상연했다. 1913년 신년 광고를 보면, 당시의 흥행주는 아시자와 쓰야(蘆澤つや)라고 한다. 일본의 전통 연희를 주로 상연하던 용산좌는 1917년 개성좌(開盛座)로 개칭되었다. 개성좌의 흥행주는 계약에 따라 자주 바뀐 듯하다. 예컨대 1924년 1월 5일자 《조선신문》에 게재된 개성좌의 광고를 보면 “용산 영정 개성좌 하타다흥업부(畑田興業部)”라고 기록된바, 당시 개성좌는 하타다 흥업부가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성좌는 소규모 흥행 회사들이 일정 기간 대관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좌와 같은 작은 극장은 공연에 대한 기록보다는 사건 사고로 신문 지면에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해 보자. 7日 午前 한 時頃에 市內 元町 3丁目 開盛座 2層에서 불이 이러나 一時 騷動을 하얏스나 卽時 鎭火되얏다는데 原因은 화로불에서 불이 붓흔 것이라 하며 損害는 약 6圓假量이라더라. 1 11월 7일 오전 1시경에 개성좌 2층에서 화롯불에서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여 일시 소동이 일어났으나 금방 진화되었다는 기사이다. 또 다른 기사는 배우가 되고자 개성좌에 들어간 한 여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그 어머니가 용산경찰서에 신고한 사건을 보도한다. 이것도 인용해 보자. 시내 죽첨뎡 이뎡목 이십륙번디(市內 竹添町 二六) 최성녀(崔姓女)의 둘째딸 박뎡옥(朴貞玉)은 금년 열여섯 살 되는 어엽분 소녀인바 배우 되기가 소원이여서 자긔 어머니의 승락으로 구룡산에 잇는 개성좌(開城座) 2 라는 연극단에 드럿든바 다닌 지 몃칠 되지도 안어서 지난 이일부터는 집에도 도라오지 안코 전긔 연극단에도 나오지 안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연극을 가릿킨 하고 시고가티 부터단이든 전긔 개성좌의 남자 배우 백운옥(白雲玉)(23)이란 자가 유인하여 가지고 시내 주교뎡 모처(市內 舟橋町 某處)에 은거하였다는 말을 듯고 지난 삽아일에 룡산경찰서(龍山警察署)에 호출하여 동 서에서는 그날로 백운옥이란 자를 인치한바 백운옥은 사실을 자백하엿다 하며 엄중히 설유한 후에 내여 보내리라더라. 3 16세 처녀를 배우 시켜준다며 유인하여 가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개성좌의 남자 배우가 조선인인 것을 보면 이 즈음에는 조선인 극단이 개성좌를 대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가 천연두에 걸려 극장을 비롯해 그 일대를 소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와 시내의 도박꾼들이 미생정(弥生町) 유곽에서 도박을 하다 일망타진당한 사건도 기록이 있다. 구용산에 자리했던 개성좌는 사건 사고로 먼저 기억되는 공간으로 1940년대 초반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사쿠라좌의 1916년 신년광고(《경성일보》, 1916.01.05) 구용산에 용산좌와 그 후신인 개성좌가 있었다면, 용산역 정면의 신용산에도 극장이 있었다.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가 이끄는 일본의 신극 단체인 예술좌(藝術座)가 1915년 11월 공연했던 장소가 용산의 사쿠라좌였다. 한자로는 ‘櫻座’ 혹은 ‘佐久良座’라고 표기한다. 사쿠라좌는 1910년 5월 건물을 낙성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던 시기로, 개관 당시의 좌주는 야마네 효스케(山根兵助)였다. 아래의 기사는 사쿠라좌에서 흥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내용이다. 龍山 新市街 山下町 에 建築 中 이던 大劇場 櫻座 ᄂᆞᆫ 內部 의 設備 ᄀᆞ 旣 히 完成 되얏슴으로써 來月 上旬 부터 日本 大阪 一等 俳優 ᄅᆞᆯ 招聘 하야 演劇 을 開始 하기로 目下 交涉 中 인 同座 ᄂᆞᆫ 前 朝鮮日之出新聞社 記者 ᄅᆞᆯ 聘 하야 顧問 으로 定 하고 諸般 의 改善 을 謨 한다더ᄅᆞ 4 조선 내 일본어 신문인 조선일지출신문사(朝鮮日之出新聞社)에 근무했던 기자를 고문으로 하여 문을 연 사쿠라좌는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주로 흥행했으나, 1915년 무렵 용광관(龍光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전문적으로 상영하게 된다. 용광관은 1917년 1월 현재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닛다연예부에서는 용관관 관리를 위해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를 출장원으로 파견했다. 용광관은 훗날 이름을 용산극장으로 바뀌었다. 용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룡관(京龍館)은 경성 외곽의 극장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영화관이었다. 1920년 12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를 비롯해 이시즈카 가네키치(石塚謙吉), 다니구치 가메타로(谷口龜太郞) 등 경성의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과 용산 사이 과거 연병장 자리에 활동사진관 설립을 출원, 주식을 발행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자본금 20만원에 불입금 5만원 규모의 주식회사 경룡관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19일 활동사진관 경룡관을 개관했다. 경성부 한강통 3번지 14에 자리한 경룡관은 활동사진, 기타 흥업에 관계된 일체의 사업 및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했다. 주식회사 경룡관의 주요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대표 이시하라 이소지로와 이사 이시즈카 가네키치, 다니구치 가메타로 외에도 다테야마 가쓰요시(立山勝喜), 우에다 헤이자부로(上田兵三郞), 마에카와 도요지로(前川豊次郞), 진나이 시게키치(陳內茂吉) 등 이사진과 감사 도이 가즈요시(土井一義), 가네코 도요조(兼古禮藏) 등이 있었다. 5 주식회사 경룡관은 1923년 주식회사 성남연예(城南演藝)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관 직후 경룡관은 닛카쓰 연맹에 가맹하고 닛카쓰의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곳카쓰(國活) 직영으로 바뀌었고, 1923년 5월부터는 각종 연희물을 상연하며 경룡좌(京龍座)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24년 1월에는 중앙관(中央館)과 공영 형태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직영관이 되어 마키노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3일, 경룡좌는 극장을 새롭게 정비하고 이름을 성남극장이라 바꾸었다. 1943년 당시 성남극장은 홍계 계통의 극장으로 객석은 총 750석 규모였으며, 흥행주는 우에다 도모요시(上田友義)였다. 해방 후에도 존속하던 성남극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영화 관람 문화가 크게 변하던 2003년 폐관하게 된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 “개성좌에 소화(開盛座에 小火)”, 《매일신보》, 1928.11.08. 2) 원문의 "개성좌(開城座)"는 개성좌(開盛座)의 오기로 추정된다. 3) "여우 견습 유인(女優見習誘引)", 《중외일보》, 1930.01.15. 4) “사쿠라좌의 무대 개시(櫻座의 舞臺開始)”, 《국민신보》, 1910.08.19. 5) 『朝鮮銀行會社要錄』, 中村資良, 東亞經濟時報社, 1921년판, 232쪽. * [사진] 1921년 개관한 경룡관 외관(《경성일보》, 1921.07.20) [자료] " 小野 小林 兩 判事 龍山 方面 에 出動, 룡산극장에 생긴 사건 殺人 事件 檢證次 로", 《동아일보》, 1930.11.09 금 八 일 경성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소야 ( 小野 ), 소림 ( 小林 ) 량 판사는 동부 서긔 통역을 대동하고 목하 공판 진행 중의 피고 매원진웅 ( 梅原辰雄 ) 에 대한 상해치사 ( 傷害致死 ) 사건의 검증 ( 檢證 ) 을 하기 위하야 시내 룡산 ( 龍山 ) 방면에 출장하얏는데 사건은 금년 봄 룡산극장 ( 龍山劇場 ) 에서 대소롭지 안흔 일로 피고 조선 사람과 말다틈을 하다가 그를 ᄯᅡ려 죽게 한 것이라는 바 검증 여하에 ᄯᅡᆯ하서는 피고의 범죄 소위가 살인죄로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야 매우 주목된다고 한다 . [자료] " 京城 에 天然痘 發生, 龍山 開盛座 에서 興行師 가 發病 ", 《매일신보》, 1938.03.29. 선만 각지를 순회 중에 잇든 『 만사이 』 사 림정웅 ( 萬歲師 林靜雄 )(44) 일행 八 명은 지난 十二 일 입성하야 부내 영정 ( 榮町 ) 개성좌 ( 開盛座 ) 에서 흥행 중이엇섯는데 지난 卄一 일 밤 림정웅은 별안간 몸에 열이 올라 시름 へ 알코 잇섯슴으로 무슨 병인지를 몰르고 잇든 중 卄八 일 오후 령시 三十 분경 부 위생과 ( 府衛生課 ) 의사가 출장 진단한 결과 의외에도 진성 천연두 ( 眞性 天然痘 ) 로 판명되어 동 좌 일대는 잠시 동안 대소동을 이르키엇는데 부 위생과에서는 즉시 룡산서 ( 龍山署 ) 와 협력하여 가지고 동 환자를 순화병원 ( 順化病院 ) 으로 옴기고 좌원 ( 座員 ) 八 명의 다니든 곳과 개성좌 원정 ( 元町 ) 一 정목 영정 ( 榮町 ) 일대와 그 부근 전부를 대소독하는 한편 이튼날 卄九 일 오전 十 시부터는 영정 ( 榮町 ) 원정 ( 元町 ) 一 정목 경정 ( 京町 ) 대도정 ( 大島町 ) 일부의 거주자 약 三 천여명을 원정 소학교 강당 ( 小學校 講堂 ) 으로 소집하여 가지고 임시 종두를 행하기로 되였다 . 그리고 림정웅은 황군위문 ( 皇軍慰問 ) 차로 룡산 육군병원 ( 陸軍病院 ) 에서 출연한 일이 잇섰고 그 외 연병정 ( 練兵町 ) 에서도 二 , 三 일간 유숙한 일이 잇섯슴으로 이곳까지도 전부 대소독을 하여 예방에 노력을 하고 잇는데 아직ᄭᅡ지 발병자는 림정웅밧게 업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