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 감독
- 정동희
- 제작년도
- 1996
© 글항아리 도상해석학으로 유명한 독일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서문에는 인간성(humanitas)에 천착했던 인류의 역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고대의 인간은 인간 ‘이하’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 야만, 속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대비 행위를 통해 발견하려 했는데, 이때 사용됐던 인간성의 토대는 교양이었다는 것. 그러던 인간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상’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성을 규정하고자 했다고 파노프스키는 쓴다. 신적인 것, 가령 신성과 대비되는 인간성 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인간 ‘이하’ 혹은 인간 ‘이상’의 것을 무대 위에 올리고 무대 위에 선 존재를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를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대비’의 행위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오래전 파노프스키의 이 책을 묵독하면서 나는 혼자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짐승이든 신이든 외적인 것을 질료로 삼으려 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외부의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까. 열차에 앉은 탑승객이 자신이 탄 열차의 모습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없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가 속한 세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그때 규정되는 인간성은 상상된 인간, 상상된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선 열차 바깥에서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이 필요해지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다. 문자 텍스트로 집필된 문학이든, 스크린이라는 형식에 근거하는 영화든,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므로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있게 되며, 또 그것이 예술의 존재 의의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자주 빠져들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골몰했던 특정한 분야는 원작 소설이나 원작 희곡을 가진 영화였다. 소설이나 희곡, 또는 그래픽노블 등 원작을 가진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참으로 묘한 장르다.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예술 형식을 확보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구현된 인간성을 외부에서 ‘두 개의 눈’으로 응시하도록 이끄는 매력을 가진다. 변주 과정에서 무엇이 추가되거나 삽입되었는지, 또 무엇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비의도적으로 누락되었는지를 확인하면, 등장하는 인물의 탄생과 죽음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또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흔히들 말하듯 문학에서는 소설가가 창조주의 위치를 점하고, 영화에서는 연출자가 창조주의 위치에 오른다고 할 텐데, 원작을 가진 영화의 경우 다른 눈을 가진 두 신(神)이 한 인물의 생성과 소멸을 입체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발견되는 ‘차이’를 통해 우리는 한 세계와 그 속에 속한 인간을 더 웅숭깊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파노프스키가 사용한 단어 ‘대비’의 원문 단어는 ‘contrast’이고, 내가 두 장르의 변주 과정에서 노출되는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 ‘비교’는 ‘comparison’이기에 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대비가 뚜렷한 차이에 집중하는 반면,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대상을 ‘견주어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마음으로 『밤과 책: 영화탐문』을 썼다.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8년의 어느 날이었다. 햇수로 8년 전이다. ‘원작을 가진 영화’에 관한 글을 오랫동안 써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에,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Sátántangó)』를 만났다. 이 소설은 1985년 처음 출간된 후 1989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인 1994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라슬로의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이 영화는 ‘7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악명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2016년 한강 소설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현재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직후였다. 맨부커상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2015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 『사탄탱고』였던 터라, 2018년 5월 한국의 알마출판사가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직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영화를 구해 7시간이 넘는 지옥과도 같은 길이의 영화를 아주 천천히, 원작의 세계와 비교하면서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진: La Cinémathèque québécoise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소설 『사탄탱고』와 영화 < 사탄탱고 >가 구현한 두 세계의 차이가 처음부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이므로 그저 소설의 줄거리에만 주목하면서 영화를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하지만 ‘괴취미’에 가까울 만큼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세 번쯤 보았을 때 차이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령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이름 없이 마을 의사로만 거론된다)를 원작자 라슬로와 연출자 타르가 그려내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줄거리 복습이 필요하다. 완전히 망한 헝가리의 집단농장의 마을 주민들은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마을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고 재건의 희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술집에 모여 만취한 상태로,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때, 이미 처형된 줄로 알았던 이리미야시란 인물이 마을에 돌아와 마을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마치 재림 메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리미야시는 그들의 절망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던 천박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혀에 굴복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예정된 몰락일지언정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리미야시의 뒤를 따르며 스스로 망해버리기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의 하층부 약자인 에슈티케란 소녀가 스스로 쥐약을 먹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막연했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폐허의 소동을 지켜보던 마을 의사는 자신이 본 지옥도를 자꾸만 글로 써내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살펴봤던 인물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기록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였다. 그 이유는, 원작과 영화에서 의사의 기록 행위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만 보면 그의 병적인 기록 욕망은 소설가 혹은 예술가의 필연적인 운명을 상징 혹은 은유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그래서 마을 의사에게 기록이란 필연적인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원작 소설은 마을 의사의 기록 행위에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광기에 가까운 마을 의사의 기록 욕망을 두고 원작자 라슬로는 이렇게 쓴다. “그는 갈수록 사물들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 이를테면 접시와 담배, 성냥갑과 일기장, 탁자와 창가, 안락의자와 벌레가 갉아먹어 부스러질 지경인 나무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중략) 그 중심에 안전하고 전능하게 서 있음을 발견할 때면, 그는 아늑함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86~87쪽) ‘전능함’은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원작에서 마을 의사는 목격한 사건을 단지 종이 위에 옮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사람들의 행동과 사람들의 전락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질서를 갖춘 문장 위에 무질서한 세상을 배열하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의 신적인 위치는 명료하게 판명 난다. 스포일러로 보일까 저어되지만 굳이 밝혀두자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가 집필하는 글은, 바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읽었던 바로 그 대목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가 실은 마을 의사의 기록이었음을 누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망각에 저항하려 했던 한 인간의 초상으로 마을 의사를 그리지만 소설에서는 명백하게도 그를 무력한 신으로 배치하고 있다. 소설 속 마을 주민과 마을 의사의 관계는 절망의 폐허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신의 관계와 등가를 이루게 된다.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비교 혹은 대비라고 해도 좋을 ‘견줌’의 과정을 이렇듯 통과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은, 작품의 내부에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밤과 책』에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벨라 타르에 관한 글은 일부러 제외했다. 그 이유는, 비교와 대비를 통해 차이를 발견하는 ‘인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책으로 이 책이 기억되기를 바라서였다. 자신이 읽은 책과 자신이 확인한 영화여야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책은 ‘감각을 공유하는 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리라고도 봤다. 고민 끝에 책에 실릴 원고를 선별하면서는 가급적 수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영화부터 우선적으로 골랐다. 이제 대중적인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 아마데우스 >, < 패왕별희 >, < 색, 계 >, < 아이즈 와이드 셧 >, < 양들의 침묵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쉰들러 리스트 >가 우선적으로 꼽혔고, 현재적인 영화까지도 이 책이 끌어안기를 바라는 마음에 < 햄넷 >,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 콘클라베 >, < 파워 오브 도그 >, < 컨택트 >, < 그을린 사랑 > 등 상대적으로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를 추가하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기록을 남겨두자면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과 < 룸 넥스트 도어 >는 원고 초벌 작업을 끝마쳤음에도 예정된 출간 일정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진다면 진력을 다한 뒤의 체력 문제 때문에 책에 담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경우 목차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배제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원작을 가진 장편영화 5편(< 올드보이 >, < 공동경비구역 J.S.A >, < 박쥐 >, < 아가씨 >, < 어쩔수가없다 >),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 설국열차 >, 이창동 감독의 < 밀양 >, < 버닝 >) 등도 초벌 작업을 마쳤지만 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 가운데 몇 편의 영화를 고르는 일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책으로 출간되도록 힘써볼 계획이다. 『밤과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일러두기’ 1번에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이 책은 영화평론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평론이나 비평의 관점에서 읽히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고, 그 점에 대해선 출판사와 수차례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과분하게도 영화기자로 몇 년간 일했지만 나는 평론에 능하지 않으며 그건 나보다 우수하고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일임을 알고 있다. 또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이 책이 비교의 차원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감각의 차원에서 독자들과 만나기를 바란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공통의 DNA를 가진 두 개의 장르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입구와 출구가 다른 두 개의 집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면서 발견되는 감각에 대한 책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색에 대한 책도 아니며 ‘원작의 의도에 충실한 각색과 불충분한 각색’이란 오랜 화두를 다시 건드리려는 시도 역시 아님을 밝혀둔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유태(기자·시인) l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근무하며 문학, 출판, 영화를 담당했다. 프랑스 칸영화제,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독일 베를린영화제 등 글로벌 3대 영화제의 레드카펫 현장을 취재했다.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인터뷰로 한국기자협회 주최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및 만찬에도 참석했다. 문예지 《현대시》에 「무국적 체류자」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21)와 독서 에세이 『나쁜 책: 금서기행』(2024)을 출간했다. 현재 미국 골든글로브 투표권자로(Golden Globes Voter)로 참여 중이다.
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 >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200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울리히 사이들의 < 개 같은 나날 Hundstage >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똑같이 생긴 서민 주택들이 늘어선 모습을 후경으로, 한 남자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누워 있다. 그의 육중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살덩어리 위로는 보는 이조차 질식하게 만들 질척한 땀줄기가 흘러내린다. 성냥갑 같은 모습으로 길게 늘어선 주택들과 서구 영화에서 익히 보기 힘든 거대한 육체성의 조합은 앞으로 이 감독, 울리히 사이들이 전개할 영화적 세계를 함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울리히 사이들은 오스트리아의 90년대에 등장한 ‘뉴 오스트리아 영화’ 혹은 ‘앙팡테리블’의 대표주자였다. 우리에게 알려진 미카엘 하네케나 예시카 하우스너 조차도 오스트리아 영화를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의 어떤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만큼 개성 강한 존재들이지만 울리히 사이들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1990년대 < 상실시대 Mit Verlust ist zu rechnen >, <애니멀 러브 Tierische Liebe> 등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시작된 그의 영화 이력은 줄곧 이민 노동자, 섹슈얼리티, 육체성, 계급, 소외 등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해부하였고, 2001년 < 개 같은 나날 >을 계기로는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는 실재하는 현실의 요소와 카메라 앞에서 인공적으로 직조된 삶을 정교하게 직조하는 것이었다. 주인공들은 지속적으로 함께 하는 몇몇 전문 배우를 제외하고 이민 노동자, 요양원 노인, 아프리카의 실업자 등 실제 그러한 삶의 이력을 지닌 이들을 캐스팅하였고, 촬영의 장소 역시 다큐멘터리처럼 현장성을 중시했다. 울리히 사이들의 최근작은 ‘파라다이스’ 연작으로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이다. 2012-3년 사이에 만들어져 각각 칸, 베니스, 베를린에서 소개된 이 작품들은 러브, 신념, 희망의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모두 지옥과도 같은 현실의 잔혹함과 파괴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욕의 문제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에 천착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정색하고 작업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2014년에 만들어진 < 지하실에서 Im Keller >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이 작품은 상영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불편함을 못 견디고 극장을 빠져나가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며, 울리히 사이들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가장 극단적으로 관객의 관음증, 그중에서도 스스로를 교양주의자라고 믿고 있는 부르주아적 윤리 의식의 소유자들의 보는 행위를 공격하고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영화는 울리히 사이들의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오스트리아 도심의 중산층 저택의 지하실들. 그 지하실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다. 1층이 주방과 거실로 이어지는 접대의 공간(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공간, 사회적인 시선이 개입된 공간)이라면 지하실은 흔히 남들에게 내보이지 않는, 주택 소유자의 은밀하고 사적인 취향이 실현되는 공간일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리비도의 공간이고, 장르 영화의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범죄와 은폐가 벌어지는 공간일 것이다. 울리히 사이들은 그러한 호기심으로 오스트리아 중산층 저택의 지하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뜬금없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지하실을 보여달라고 했고, 선뜻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독특하거나 기괴한 취향을 가진 이들은 직접 캐스팅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 지하실에서 >라는 다큐멘터리이다.(이 작품의 촬영과정은 콘스탄틴 울프의 다큐멘터리 <울리히 사이들: 작업중의 감독>(2014)에 기록되어 있다) 지하실에서 누군가는 불법 수렵한 동물들을 박제해 박물관처럼 전시해 놓았으며, 또 누군가는 또래 아이들과 록 그룹을 결성해 생활한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상황들은 성과 정치에 관한 풍경들이다. 과거 나치 친위대원이었을 법한 한 노인은 지금도 지하실 전체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향수 및 충정을 담아 엄청난 애장품들로 꾸며놓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나치 제복을 입고, 히틀러를 숭배한다. 검붉은 나치의 유물들과 마네킹으로 재현된 나치 친위대 병사들의 모습들은 언캐니한 금기와 공포의 풍경들이다. 사상적으로 금지된 이 공간은 관객들에게 생경하지만, 그와 그의 브라스밴드 친구들에게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편안한 여가의 공간이다. 그들은 누구도 이 공간을 정치적으로 문제 삼지 않으며, 평범한 도시 노동자의 여흥을 풀어낸다. 그러나 역시 관객들을 가장 아연질색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역시 부르주아 윤리를 공격하는 성에 관한 에피소드들이다. 이 영화는 각각의 지하실 풍경과 그 속에서 내밀하게 벌어지는 주인들의 성적 취향들을 적나라하게 담아내는데, 누군가는 그곳에서 매춘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를 결박한 채 가학-피학적 성행위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할애를 하는 지하실은 주인과 노예 게임을 하는 한 부부의 모습이다. 육중한 육체를 가진 남자(왜 아니겠는가!)는 일터에서는 평범하면서도 듬직한 관리인이지만, 집 안으로, 특히 지하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발가벗은 노예가 된다. 짐승처럼 포박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의 성기에는 주인(아내)이 쇳덩어리 종을 달아놓고 고문을 하거나 일을 부리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 밖에 영화에서 벌어지는 많은 순간들은 도저히 언어적인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복종 게임과 적나라한 성적 유희들이다.(이들 커플이 묘사되는 순간 전주의 관객들이 상당수 극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의심들이 올라온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관객이) 왜 이것을 봐야 하는 것인가 혹은 감독은 왜 이것을 관객들로 하여금 보도록 강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영화 < 지하실에서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위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기이한 존재들처럼 간주된다. 성적으로 도착되어 있으며, 불온한 정치적 신념을 종교적으로 숭상하며, 자신이 도살한 짐승들을 박제하며 그는 그 짐승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희화화되거나 포르노그래피화 된다. 그러나 영화적 흐름 속에서 이 이미지들이 건조하고 무심한 방식으로 반복될 때, 관객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던 ‘시선의 윤리’와 ‘대상의 착취’라는 문제의식들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규정된 ‘정상성’과 그 용어가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하고 근원적인 욕망들은 그들만의 사적이고 은폐된 공간인 지하실에서 역동적으로 꿈틀거린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하며 인간의 욕망을 여전히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이것이 과연 다큐멘터리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과연 실제의 삶인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특유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즉흥성과 우발성은 배제되어 있다. 모든 카메라 앵글 및 인물들의 시선 그리고 억제된 대사들은 감독의 통제하에 연출된다. 울리히 사이들이 연출했던 극영화들에서 빈번히 보았던 타블로 샷(극 중 인물들이 무표정한 얼굴과 부동의 자세로 마치 액자 속에 들어간 듯한 앵글로 카메라를 직시하는 장면들)들은 말할 것도 없고 행위들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이 기괴한 영화적 모드는 울리히 사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울리히 사이들: 작업 중의 감독>에서 설명된다. 울리히 사이들은 주인들을 관찰하고 설득하고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세운 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연기하도록 지시한다. 지하 공간에 존재했던 소품들은 그의 카메라 앞에서 다시금 배치되고, 심지어 인물들의 의상과 행위 동선, 시선까지도 매우 섬세하게 지시된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임에도 극영화적 양식으로 구성된 것은 그들의 일상적 삶과 취향, 욕망 모두 카메라 앞에서 다시금 가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 속 인물들의 욕망이 기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카메라 앞에서 가감 없이 그것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울리히 사이들의 괴력은 여기서 발휘된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지하실로 침투해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금기된 열정을 내보이고 촬영을 허용한다. 언제나 검은 정장을 입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화를 이어나가는 감독은 얼핏 유머러스하고 온화한 듯하지만, 사실 그 조용한 목소리와 시선 속에서 대상들이 거부하지 못할 단호함을 지니고 있다. 정작 지하실의 주인이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기도 한 인물들은 마치 감독과 주인-노예의 게임을 하듯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들의 삶을 가감 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기이한 카리스마와 괴이한 통찰력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인간의 성욕, 계급, 노동의 문제를 피력하는 울리히 사이들의 영화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오락거리로 보지 않길 바란다. 내 영화가 관객과의 삶을 연결하는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창을 통해 극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대면했으면 좋겠다.”(울리히 사이들) PS: 국내에서 소개된 그의 극영화는 발가벗은 육체들을 감추느라 블러 처리되어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만들었던 < 파라다이스 러브 Paradies: Liebe >(2012), 영화의 20여 분을 아예 심의 삭제하여, 훼손된 상태로만 소개됐던 < 수입, 수출 Import/Export >(2006)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