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사
- 감독
- 윤봉춘
- 제작년도
- 1952
- 출연
- 윤상희, 이빈화, 이선경, 이향춘, 윤태영, 이향아, 이금룡, 이창섭, 이숙원, 송영, 이은영
2013년 말,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선’을 발표했다.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선정 작업이다. 문득 새 리스트에서 사라진 작품, 그중에서도 초기 작품들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1960년대 이전 작품 가운데 < 어화 >(1939), < 검사와 여선생 >(1948), < 미망인 >(1955), < 양산도 >(1955), < 청춘쌍곡선 >(1956), < 종각: 또 하나의 새벽을 그리며 >(이하 <종각>)(1958), < 이름 없는 별들 >(1959)은 2013년 리스트에 포함되지 못한 작품들이다. 선정위원별로 영화적 가치를 재고한 결과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차후에 누군가 위 작품들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여러 선입견이 작용해 해당 영화를 볼 마음이 전혀 없었거나 애초부터 선정 대상에서 제외했을 경우에 발생한다. 그것은 한 작품이 잊히는 수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 종각 >은 < 미몽 >(1936)의 양주남 감독이 1958년에 연출한 작품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양주남은 편집자로 더 유명하다. <미몽> 이후 한동안 편집과 녹음 전문기사로 활동한 그는 < 집 없는 천사 >(1941), < 자유만세 >(1946), < 마음의 고향 >(1949), < 피아골 >(1955) 등의 영화에 편집자로 참여했다. 1950년대 후반에 감독의 자리로 복귀해 5편의 영화를 거푸 내놓았는데 <종각>은 그 중 한 편이다. 기록에 의하면 <종각>은 외국 영화제를 겨냥해 제작된 영화였다. 1940년대 후반 잡지 『백민』에 실린 소설 <종장(鍾匠)>을 각색한 작품이며, 각색과 제작을 맡은 청남이란 인물은 사실 원작자 강로향 본인이었다. 작가로서 활동하다 10년 가까이 외교관을 지냈던 강로향은 영화사 ‘8월 프로덕션’을 세워 자기 소설의 영화화를 직접 추진했다. 개봉 당시 여러 신문에 실린 글들을 종합해보면 ‘신파와 오락성 영화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예술영화’라는 게 중평이었고, 연말에는 여러 평자들에 의해 그해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혔다. 비록 본선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제9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각>이 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종각>은 단순히 살아남지 못한 예술영화일까. < 종각 >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종쟁이 석승과 세 여성 옥분, 한 과부, 영실( 문정숙 이 세 인물을 연기했다)이 겪는 죽음과 고통의 연대기다. 상영시간 96분 중 1시간은 석승의 내레이션으로 고령사 종을 만들기까지의 사연을 들려주고, 다음으로 영실이 고아로 살아온 20년 세월을 이야기한다. 석승과 세 여성은 근대와 전근대가 교차하는 시기를 통과하는 인물이다. 자연스레 전근대적인 상황들이 그들의 비극을 초래한다. 석승의 첫사랑인 옥분과 아내는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목숨을 잃고, 석승의 스승도 길 위에서 객사한다. 유일한 피붙이인 딸은 홍수로 행방불명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영실의 삶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아로 가난하게 자라 매일 시냇물을 마시며 굶주림을 달랬던 그녀는 직업을 구하고자 상경한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 문전걸식을 하다 소개업자에 속아 광산에 몸 파는 여자로 팔려간다. 밤마다 거친 남자들과 잠자리를 치렀던 그녀는 종군위안부로 팔려가기 직전에 도주해 산사에 숨는다. 석승과 영실은 전근대의 피해자이면서 스스로는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극중 자주 등장하는 말은 ‘고독, 운명, 슬픔, 안식’이다. 석승과 영실은 삶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기껏 하는 행동이라고 해봐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선을 넘지 못한다. 체념의 정서 아래 자기 운명을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 문학과 영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석승과 영실은 전형적인 인물인 셈이다. 심지어 그들은 낭만적인 연대를 꿈꾸기도 하는데, 석승은 종을 만들다 분에 못 이겨 자살한 소문 속 인물을 아무 의심 없이 자기 할아버지로 믿으며, 영실은 석승과 헤어진 딸이 자기와 같은 나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를 아버지라고 상상한다(유사한 이야기인 < 메밀꽃 필 무렵 >의 은밀한 정서와 다르다). 성별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두 사람이 산사 부속건물의 한 지붕 아래 나란히 기거하면서 낭만적 정서는 더욱 강화된다. 늙고 병든 석승과 세상이 두려운 영실은 주어진 공간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살다 입은 생채기투성이인 인물이 몸을 맡기기에 산사보다 나은 곳이 어디 있겠나. 그나마 석승이 늙고 병들기 전까지 흘러가는 삶을 살았던 반면, 젊은 영실이 부동의 삶을 선택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의 수동성은 석승이 새로 만들기로 예정된 종(결국 만들어지지 못한다)에 자기 운명을 쉽게 맡기는 자세에서 바로 드러난다.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될 것이라며, 그녀는 자기 운명을 내건다. 운명의 무게와 견고함은 극의 후반에 가서도 누그러들지 않는다. 일제의 금속동원령으로 종을 뺏길 위기에 처하자, 석승은 맞서지 않고 종과 함께 피신하려 한다. 그의 행동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종마저 사라진 종각에 영실이 기댄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장면을 영실이 종각에 기대 서 있던 도입부 장면과 연결된다. 이야기 전개는 그녀의 태도에 어떤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내일의 새벽을 기다린다는 그녀는 정작 종각에 기댄 몸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종소리에서 “운명에 이겨라”라는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운명에 굴복하는 상반된 행동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석승과 영실이란 인물을 빌려 예술과 의지로 현실을 이겨내기를 의도했으나, 영화의 결말은 주제를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리고 만다. 비슷한 삶을 살면서도 종종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는 미조구치 겐지의 인물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연인지 영화의 이미지도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못하는 인물과 닮았다. 카메라는 일정한 패턴 아래 단조로운 움직임만을 반복한다. 특징이라면 클로즈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카메라가 인물과 줄곧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촬영을 맡은 유장산은 예술영화를 만들겠다는 제작자의 주문에 맞춰 영화적 표현보다 화폭에 어울리는 구도를 지나치게 신경 쓴 모양이다. 대다수 장면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안정된 구도를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원경을 사용할 경우에도,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길게 찍기로 포착하기는커녕 인물이 속해 있는 자연의 풍광에 더 중심을 둔다. 거대한 자연이 인물을 포용하자, 인물들은 현실을 사는 움직이는 생명의 자리를 내주고 그림 속의 한 점으로 기능한다. 그 결과 < 종각 >은 보기에 아름답다. 매 장면에서 멋진 스틸 한 장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다. 다만 그것이 운명 아래 굳어버린 인물과 조화 아닌 조화를 이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즉, <종각>은 몸을 부딪으며 사는 현실보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재현에 가까운 작품이다. 눈앞의 무심한 산수를 보는 듯한 무기력함. 평화로워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근대를 맞이해야 했던 인물의 성격과는 어긋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1950년대의 평자들은 < 종각 >이 창작을 위해 고뇌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란 점에 큰 점수를 줬다. 흔한 상업영화에서 보던 시시껄렁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는 고상한 주제를 이야기한다는 평가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주제와 별개로 <종각>의 외양은 썩 잘 만들어진 편은 아니다. 시선의 처리는 계속 어긋나고, 신의 연결은 어색하며, 편집이 거칠어 툭툭 튄다. 오히려 나는 <종각>의 미덕을 가난함에서 찾는다. 종각 하나만 밋밋하게 그려놓은 오프닝 크레디트나 단출한 세트의 빈곤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양주남 의 데뷔작인 < 미몽 >과 편집에 참여한 < 마음의 고향 >과 견주어 봐도 <종각>은 어딘가 빈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속이 차지 않아 허전한 것과는 다른 의미다. <종각>는 일부러 속을 비워 놓은 듯싶은 영화다. 극중 ‘맑다’라는 대사가 몇 차례 나온다. 요즘에는 거의 듣지 못하는 대사다. 굳이 말하자면 그 느낌이다. 돈을 노리고 영화를 만드는 잡배가 1950년대라고 없었을 리 없다. 더군다나 당시는 연예계의 대통령인 깡패 임화수가 영화계의 큰손으로 행세하던 시절이다. 그런 때, 작가이자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영화인들을 모아 만들어놓은 문예영화 한 편에는 올곧은 기운이 흐른다. 해를 보며 석승이 하는 다짐 - “위대한 생명이 약동하고 자유스럽고 평화스럽고 희망이 넘쳐흐르고 맑은 감동이 샘처럼 우러나는 듯한, 그러한 종소리를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울려줄 수 있는, 그런 종을 지향하게 된 것이오” - 은 곧 제작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1958년에 영화 한 편을 제작하고 사라진 독립제작사의 상황이 오죽 열악했겠나. 그런 상황 아래 혼신을 다한 사람들의 가난한 마음이 <종각>에 묻어난다. 극중 한 장면은 그 방증이다. 표현력이 미숙한 당시에 인물의 불안한 심리 흐름을 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석승이 할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듣고 극도로 불안해하는 장면은 제작진의 숙제였을 게다. 지금은 희극 캐릭터로 기억되는 허장강이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내면의 갈등을 이끌어내려 몸까지 뒤틀어본다. 피아노 독주와 여성합창단이 <성불사>의 테마를 연주해 인물의 불안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극중 드물게 짧은 컷으로 절간의 풍경들을 전환시키며 인물의 심리와 대비시킨다. 이윽고 창호지 바깥에서 비친 빛이 석승의 몸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50여 초에 불과한, 단순하면서 명징한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바친 고뇌와 노력이 느껴져, 몇 번을 돌려 보았다.
1961년 5월 당시 [국제영화]는 손미희자 , 전계현 , 남미리 , 문혜란 , 엄앵란 , 나애심 , 이빈화 등의 당대의 여배우들의 그래머 채점표에서 이빈화를 단연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상을 새로 맞출 때는 언제나 같은 상점을 이용하는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는지, 누구를 사귀기 좋아하는지, 입었던 옷을 새 옷이나 유행하는 의상으로 바꾸어 입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향수나 의상의 색깔 등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설문지는 당시 이 여배우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접어들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상기시킨다.BB(브리짓드 바르도), MM(마릴린 먼로),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등의 이름을 붙이던 시대에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미에 대한 관심도를 테스트해보는 이 설문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기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것과 함께 자기를 감추거나 죽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사교성의 요구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인가를 강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여성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당신처럼 키 큰 여자들이 많은가요?' 1961년 일본에서 그곳에 촬영온 이브 몽땅이 던진 질문에 한국에서는 키가 커서 언제나 곤란을 느낀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빈화는 당시 한국 여배우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에다, 신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밝힐만큼 균형잡힌 체형을 갖추고 있어, 때로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때로는 소피아 로렌에 비유되기도 했다. ''B.B. 붐의 시대'', 즉 신체사이즈로 배우를 설명하는 ''육체의 시대''에 이제 모두들 여배우의 몸에 주목하면서 신체 사이즈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장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1934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이숙한(李淑翰)으로 알려져 있는(국제영화 58년 4월) 이빈화 는 여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으며 국악원 고전무용연구소에 적을 두기로 한다. 이 곳에서 받은 3년간의 수련은 그녀에게 우아하고 세련된 멋스러움을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선사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이빈화는 윤봉춘 감독의 징병을 설득하는 < 성불사 >에서 승무를 추는 여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녀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갑분이는 팔자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동네 처녀들과 춤을 추는 오영진 원작의 < 맹진사댁 경사 >( 이용민 감독,196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보다 가문과 체면을 중시하는 얼치기 양반들을 풍자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버리자니 대감댁이요, 주자니 무남독녀''라서 혼인날 자기 대신 입분이를 절뚝발이로 소문난 판사댁 자제에게 보내고 나중에 진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갑분이역을 맡았다. 따라서 당시 잡지의 글들은 동양무용 서양무용에 조예가 깊은 이빈화와, < 양산도 >로 데뷔한 김삼화 를 호적수로서 ''다같이 무용계에서 진출한 스타일 좋은 내일의 스타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로서 소개한다. ''1950년도 한국영화계에서 얻은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신인 이빈화 양의 등장''이라고 소개되던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일련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56년작 < 청춘쌍곡선 >에서 요염한 자태와 실감나는 연기로 영화와 다시 인연을 맺은 이빈화는 과식으로 병이 난 부자 양훈 과 가난한 학교교원으로 그와 정반대의 병으로 괴로움에 처해있는 황해 가 한 의사의 권고를 듣고 2주일간 서로 집을 바꾸게 되는 이 희극에서 양훈의 여동생으로 출연하여 황해와 짝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분방한 부자의 딸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은 그녀는 뒤이어 한 감독의 작품 < 마인 >(1957)에서도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빈화의 출세작은 박계주 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전편에 박애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이국적인 풍광이 특징적이던 < 순애보 >(1957)이다.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한형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직 조연급에 지나지 않던 이빈화를 여주인공역에 기용함으로써, 스타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힌다.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잡힌 체구를 가진 이빈화에게 ''멜로드라마 시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으로서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에게 맡겨지는 역할이란 전통보다는 현대를,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쟁취하는 역할이 맡겨지곤 했다. < 순애보 >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에어걸(당시는 스튜어디스를 이렇게 불렀나 보다.) 인순(김의향)과 달리 이제는 눈이 멀고 누명까지 쓴 화가 애인을 기다리는 제목 그대로 순애보(殉愛普)적 사랑을 보여주는 명희역의 이빈화 는 오히려 예외적인 셈이다. 따라서 기다림과 통절의 미학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의 자리는 조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원작의 < 흙 >(1960)에서 기생 백선희역으로 등장하여 현대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이빈화는 이후 비비안 리가 나온 < 애수 >를 연상시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를 비롯하여, < 사랑의 역사 >(1960)에서는 과부인 은선( 최은희 )의 다방업을 하는 친구로, 연속방송극을 각색한 <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에서는 종합병원의 여의사로 등장하였다. 충청도 조그만 산골의 산지기 딸( 이경희 )과 그 산주의 아들( 박노식 ) 사이의 애정을 다룬 < 꽃피는 시절 >(1959)에서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역을 맡은 이빈화 는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이 삼각관계에서 계층적으로 자기 보다 못하지만 자신의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연적 이경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아담하다기 보다는 큰 키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래머의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경희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적극적이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할이 적역이었을 것이다. 여교사인 문현주( 조미령 )의 말썽꾸러기 학생중 한 사람인 상호( 안성기 )의 누나로 나오는 < 어느 여교사의 수기 > 역시 이빈화는 부모 없이 자라는 상호의 빠걸인 누나로서 정부가 오는 밤이면 번번이 동생 상호를 쫒아내고 다음날 동생이 책보를 찾으러 왔을 때도 내려진 커튼 틈으로 책보와 아침밥값을 내주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연기를 매정하게 해내었다. 상호 주변의 차가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빈화의 이 계산된 연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균형이 잡히고 요염한 육체미에 예리한 혹은 앙칼진 내면적인 정신의 자세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빈화 만큼 근대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은 영화의 고유한 기능안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멋을 알고 또 그 멋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생활과 서울-동경-홍콩 등지의 국제적인 무대를 통해서 그녀의 자태를 빛냈으며 선천적인 재질, 용모가 장기간의 연기생활을 통해서 비교적 꾸준히 인정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1959)이라는 일련의 홍콩 스타일 합작영화에서는 ''홍콩 마카오를 무대로 이국적 향취를 풍기면서 삼각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적당히 액션 맛도 가미하여 대중 취향의 쇼우''로 만들어 놓았고 친구 사이인 박노식 과 독고성 이 각각 암흑가와 경찰을 대표하여 등장한 < 현금은 내 것이다 >에서는 박노식을 사랑하여 그를 구하는 거칠지만 순정파인 바의 마담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69년까지 연기활동을 한 이빈화 연기의 만개(滿開)는 < 안개 >(1967)인 듯 하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로서 <안개>는 기준( 신성일 )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의 공간의 이동이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무진으로의 여행은 떠나고싶지만 떠날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기준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에서 기준의 서울 생활은 아내로 표상되며 그것은 그의 권태롭지만 풍요로운 현재와 미래를 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빈화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아내이며 기준에게 무진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라고 지시하는 인물이자 기준을 통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세련되고 돈이 많아 보이고 연상으로 위엄이 있어보여야 하는'' 기준의 아내역으로 이빈화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내 휴식의 비법''(국제영화 63년 4/5월)이라고 밝혔던 이빈화 . 괄괄하지만 품위 있으며 세련된 팔방미인인 이빈화의 화려함은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수필에 쓴 것 처럼 너무도 소박한 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꼭 따뜻한 인정속에서 살고싶다. 야박스런 감정에서 자신을 괴롭히고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마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생활신조인지 모른다. ' 후리후리한 키에 스마트한 양장을 하고 유행을 몰고와서는 어느 날 은막에서 사라져간 이빈화에 대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관심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남성들은 물론 동성인 여성들에게까지 질투와 선망을 느끼게 했던 이빈화를 관객들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변재란 (순천향대교수)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숙한 출 생 : 1934년 2월 3일 서울 데 뷔 : 1952년 윤봉춘 감독 < 성불사 > 주요 작품 : < 성불사 >, < 청춘 쌍곡선 >, < 순애보 >, < 마인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