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칠칠(577)위기연발
- 감독
- 박윤교
사진: 정기성 맨몸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좋다. 불필요한 수사도 허세도 없이 알몸으로 돌진해 오는 영화가 좋다. 그런 영화들은 대개 허망하지 않다. 표층과 심층의 분리도 없고 잔망스러운 기교도 없다. 잔꾀를 부린 요사스러운 이미지로 결국은 뻔한 메시지를 전하며 맥 빠지게 하지 않고, 메시지에만 복무하거나 고결한 영화인 척하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대단한 사유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찍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풍경을 지겹게 비추지도 않는다. 이는 물론 영화가 아니라 내가 영화에 다가서서 느끼는 감상에 가깝다. 그러나 실상 무엇이 무엇에게 다가선다고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만난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영화비평이란 영화와 내가 만난 후기와도 같아진다. 나름의 고된 노동으로 생산했으나 세상에 별 이로운 가치를 남기지 않는 생각들의 언어. 오래도록 불편했던 질문 중 하나는 ‘비평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글쟁이 동료들과 대화 나눌 때면 비평가의 역할이 화두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가져야 할 듯해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일말의 사명감이라도 생길까 싶어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고 싶어 날뛴 결과가 내 비평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적든 많든 독자가 있는 지면에 자기 욕망에 못 이겨 쓴 글이 실릴 자격이 있을까? 원고료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찌 되었든 노동력을 들이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욕을 하든 공감하든 누군가 한 명은 내 글을 보며 반응하고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리라고 뻔뻔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하자면 글에 반응하는 이가 꼭 한 명은 있어야 한다. 편집진이든 독자든 단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면을 얻을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제발 한 명은 있어라, 하는 마음이 든다. 일인칭으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서 내용이 반가워 평소 조심스럽게 쓰곤 하는 ‘나’란 말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내 이야기에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자의 문제만은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을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꼬장꼬장하게 쓸 생각이다. 글은 쓰는 모든 사람은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더군다나 고료를 받고 글을 쓰는 이에게 그건 의무 사항이다. 실상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원고를 작성하는 평론가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이는 자격 상실이라고 본다. 적어도 고료를 받고 쓰는 이로서는 그렇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 모든 것에 관한 견해는 각기 다르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어떤 영화에 대한 견해가 한결같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떠드는 일이다. 다만 말로만 떠들면 흩어지고 마니까 정제된 언어로, 글로 남기는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지지 선언도 하고 공을 들여 비판도 하는 것이다. 고루한 이야기를 길게도 했다. 하지만 지루해질지라도 이야기의 과정이 필요할 듯했다. 결코 이 코너의 이름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지만, 비평의 안위에 대해 질문하거나 걱정하는 일을 기피한다. 간혹 ‘비평의 위기’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순조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새로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사에서나 예술계에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잔존의 싹을 제거하려 하거나 흔적을 지우려 드는 일은 지속되어 왔다. 새로운 아버지를 받들려고 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시도도 언제나 있어 왔다. 이는 언제 어느 때고 저마다의 문제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보통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공격받는다. 그런데 심한 개인주의자의 나쁜 전형인 나로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세상엔, 특히 영화계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을까.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인데 왜 신경을 쓰는 걸까. 아니 애초에 진짜 혈육도 감당하기 힘든데 굳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또 두려는 걸까. 물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간의 안이한 생각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혁명적인 선언이 없이는 활동의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싫어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내에선 아니라 할지라도)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이론을 마치 새로이 발견하거나 정립한 이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평문에 적용하거나 한참 전에 유행이 몰아쳤던 유형의 영화가 마치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처럼 추앙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을 지켜보자면 이건 발전이 아니라 도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빌자면 도태되었던 건 나였던 모양이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유행을 탄다. 옷과 마찬가지로 이론에도 유행이 있고, 비평의 유형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는 이론 비평이 일었으나 천편일률적이라며 텍스트 비평에 힘이 실렸고, 이후에는 또 텍스트 비평보다 테마 비평이나 이론 비평에 관심이 쏠린 지 한참 되었다. 그 사이, 가까이 지내는 후배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속한 평론가협회 회원들은 도태되었단다. 거칠게 요약하면 텍스트 비평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협회 평론가들 모두가 텍스트 비평만 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비평문을 쓴다. 그럼에도 그런 인식이 생기는 이유는 확실히 특정 이론을 접목하는 글보다 작품 분석을 기본으로 하는 비평문이 많이 나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태된 평론가라는 후배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충격받았다. 도태되었다는 말보다 그 말이 후배에게서 스스로 인정하듯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그 말을 들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성이 없는 글이라 할 수 없고, 이론에 대해 빽빽이 열거하거나 레퍼런스를 줄줄이 나열한 글이 지적이거나 비평에 맞는 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비평해야 하는 영화 이야기보다 자신이 인용한 문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에 더 몰두하는 글을 보면 혹은 그런 글들이 더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기꺼이 도태되고 실패한 평론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지면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혹할 말한 주제로 기획을 잘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업계 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어서 결국 지면 싸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엄청난 팬을 모은 몇 영화들에 어떠한 흥미도 비평 의지도 일지 않아 원고를 거절하면서 때를 놓쳐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글을 너무 못 썼던 적도 많다. 말하자면 능력은 부족한데 오만했다고 할까. 그런데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인용하려고 발췌해 놓은 문구들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쓰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완전히 확신이 있어 책임질 수 있지 않는 한 함부로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해선 안 된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여러모로 무능력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절대는 이유는 모종의 오기가 생겨 이런 유형의 평론가도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싶어서이고 (반복할수록 화가 나 이 말을 한 후배들의 입을 가만두고 싶지 않고 선배였다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만)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평론가에게도 그만의 의지가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시네필이나 평론가들이 즐겨 사용하거나 좋아하거나 혹하는 단어들이 있다. 물질성, 물질적, 즉물적, 육체성, 신체, 유령, 운동성, 운동감, 생동감, 리듬 등등. 근간에 유행하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어쨌든 이외에도 많다. 나는 한때 ‘유령’이라는 단어 혹은 ‘물질성’이라는 단어가 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난무하는 것 같아 불편하게 여긴 적은 있으나, 평론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몸을 ‘신체’로 쓰느냐 ‘육체’로 쓰느냐에 따라 글을 조금 이론적으로 발전시킬지 감각과 감정에 몰두해 쓸지에 관한 방향성이 달라지기에, 모든 글은 저마다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종 유형 혹은 계파를 나누는 행위를 즐기지만 세부에서 파생되는 힘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어떤 유형의 비평문을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중요하다. 물론 그 해답을 알고 있으면 매번 끙끙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할 수 있을지 고민했더니 결코 좋은 글은 나오지 못했어도 가슴은 시원하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이렇게 제멋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원고청탁서에는 이런 요청이 있었다. “국내 영화 비평계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한국(고전)영화 1~2편에 대한 비평을 곁들”이라는 (정확히는 코너 설명이지만) 요청이었고, 밑줄까지 그어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어떤 구체적인 영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코너를 즐겨보는 이라면 왜 아직도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이유는 서두에 있다. 알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비평이 실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혹은 나의 재능과 능력이 모자라서 뿐만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사진: 정기성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 임권택 감독의 < 개벽 >(1991)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영화에 대해 결코 길게 말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말을 할수록 이 영화와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처음엔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이덕화 )의 긴 이야기를 거의 도주의 형태로 보여주는 영화의 군더더기 없고 강력한 형식에 홀딱 반했다. 그런데 그보다 영화를 볼수록 사무치는 감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욱 끌렸고, 그 앞에서 나의 언어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해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도 해월의 육체성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슬픔이라고만 하기에는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감정, 그러나 결코 눅눅하거나 무겁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무치는 감정 혹은 그 감정에 진동을 주는 무언가가 해월이 있는 풍경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을 풀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리고 한참 후 KMDb에서 임권택 감독에 관한 자료를 찾다 정성일 평론가와 허문영 평론가의 대담을 보았고 그 대담 속에서 영화가 주는 인상에 가장 근접한 표현을 찾았다. 허문영 평론가는 <개벽>을 두 번째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고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 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이상 <개벽>이 안기는 느낌에 관해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말은 임권택 감독 영화의 풍경에 조금 더 다가갈 모종의 영감을 준다. 사진: 정기성 이는 대담의 일부이긴 하지만 포괄해 말하면 좋은 비평문은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나 혹은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는 않을 테다. 허무한 자문자답도 역량에 어울리지도 않는 반성 또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혹시나 기회가 되어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관해 길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또 머리 쥐어뜯으며 말들을 쥐어짤 것이다. 그게 나의 비평이 조금이나마 안녕해지는 길이다. 홍은미(영화평론가) l 2018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필로》, 《씨네21》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써왔고 현재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