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입자
- 감독
- 김민지
- 제작년도
- 2017
시커먼 망루의 표면으로 굵은 물줄기가 쏟아지고 크레인으로 운반한 컨테이너를 타고 경찰특공대가 건물 옥상으로 내려온다. 건물의 계단 아래에서는 갑옷을 두른 진압 경찰들이 위압적인 소리를 내면서 치고 올라온다. 물리적으로 대항하기 어려워진 시위대는 망루 안으로 후퇴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망루에 좁게 난 구멍을 뚫고 화염이 솟구치는 광경이 보인다. 처음에 구멍은 두세 개 정도였으나 불길이 번지면서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구멍을 뚫고 분출한다. 사위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불길은 시위대 5명과 경찰관 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009년 1월 19일 용산 남일당 옥상 망루에서 발생한 참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 두 개의 문 >(2012)의 카메라는 망루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용산은 미군 기지가 있던 서울 중심부 지역으로 술집과 성매매 업소 등이 밀집되어 있고 미군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후 개발업자들이 새로이 입주하여 지역을 재생하고자 한 특별한 내력을 가진 공간이었다. 일부 세입자들이 이주를 거부하면서 활동가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는데, 당국은 철거민 시위대가 기대했던 대로 그들의 요청을 경청하기는커녕 야음을 틈타 무력 진압, 해산에 나섰다. 그제까지 경찰의 진압 작전은 시위대를 화염병 투척으로 격화시키는 데만 기여했다. 이후 건물 내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 중인 시위대를 제거하기 위해 건물을 경찰특공대 병력이 추가 투입되면서 시위대는 남일당 망루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게 된다. 비극적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전조들이 있었으나 중단되지 않은 작전 명령으로 인해 철거민들 중 일부는 망루에 올라간 지 25시간 만에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이후 재판에서는 화염병을 제조하여 저항하는 불법적 폭력 시위가 참사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검찰의 주장과 이명박 정부의 시위 대응, 공권력의 무리한 진압 작전, 오판이 비극을 낳았다는 대책위를 중심으로 하는 진단이 맞섰다. 상반된 주장이 경합하는 재판정에서 쟁론이 오가는 과정까지를 따라잡은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의 김일란, 홍지유 감독은 경찰의 증언 및 진술조서, 채증 영상 등 발견된 이미지, 말과 글, 소리의 조각들로 플롯을 구성한다. <두 개의 문>의 아젠다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공백’이다.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리라 기대했던 이 영화가 가리키는 곳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가 아니다. 정확히는 존재와 인지의 부조화, 실재하지만 우리들이 인식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진실이며, 나아가 진실에 다가갈 수 없는 재현의 무력함을 화제 삼는 것이다. 참사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철거민들의 입장만을 넓게 수용하지 않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다양한 자료 화면들은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택하게 되는 진상의 규명, 책임에 대한 판정, 희생에 대한 위로라는 통과의례를 따르지 않는다. 높아졌다가 잦아지기를 반복하는 불구덩이 안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화재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문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안녕한지에 대한 자막이나 기술도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 밤의 타임라인을 따라 참사의 주변부에 있던 경찰 지휘관, 용산철거민사망진상조사단과 용산참사변호인단의 조사와 탐사,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인터뷰, 경찰 발(發) 채증 영상과 재판의 증인 심문 오디오 파일, 과학과 합리의 프레임으로 그날을 해석하는 전문가들의 의견,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진압 작전에 가담한 사람들의 기록 등이 번갈아 편집된다. 사지로 내몰린 경찰특공대원들 또한 희생자라는 판단이 들게끔 하는 시청각 이미지의 논리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도 밝혀질 수 없는 불 속의 일들을 바라보게만 하고, 나아가 여기에 모인 사건 당사자들 가운데 누락된 책임자는 누구인가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두 개의 문>을 둘러싼 쟁점은 누군가에게 명백해 보이는 참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논평을 이 영화가 쉽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작진들은 철거민들과 오랜 시간 함께 했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만도 하였으나 한 편에 서는 것을 자제한다. 김일란, 홍지유 감독은 발견 영상들을 편집의 재료로 삼아 영화를 역사의 법정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가 제기하는 딜레마는 판관(判官)의 위치에 우리를 앉혀두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는 일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 망루에서 이루어진 진압작전의 이모저모를 모은 증언과 기록이 동원되는데 끝으로 갈수록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재현 방식, 그 효용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판관의 자리에 관객을 두게 함으로써 또는 투명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강변함으로써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 법원은 경찰의 작전이 법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결론으로 재판을 끌고 가면서 살아남은 철거민 4명을 구속수감하는 결정을 하는데 이러한 주장만으로 참사는 납득되지 않는다.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특별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탄생하는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 현실의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현장 기록과 보도, 인터뷰, 재연 영상을 배열한 플롯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함께 비극이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의가 없는 부검 시도와 연쇄살인사건 보도에 묻히는 참사 등 최근 한국 정치사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억압적인 우익 정권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끔찍한 장면이 오버랩될 수도 있다. 영화는 경찰 집단이 잘못했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말하며 이를 입증하려는 듯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그들의 곤경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의 행동이 올바르거나 선한 것으로 말해질 수 없지만 어쩌지 못하고 떠밀려 갔던 상황 속으로 우리도 함께 밀려 들어가는 듯한 언짢은 연루의 느낌을 주는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경찰특공대들이 극한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양한 자료의 뒷받침을 통해 서술되고 있으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으로 저들을 밀어 넣은 상부의 작전 계획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절박하게 서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철거민과 진압 경찰들. 불 속에서 저들의 막다른 대면은 어떤 지옥을 연출하였을까? <두 개의 문>의 스타일 전략은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분기점이 되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진실의 탐구가 현상적인 사실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거나 볼 수 없는 공백을 향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인식이 기초하고 있다. 생사여탈의 현장에서 발췌하여 영화에 삽입된 “모두 입구로 가서 밖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다 죽어’하는 목소리가...”라는 말은 둘 이상의 의미로 해석된다.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가, 맥락은 무엇인가에 따라 상반된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세계의 진실은 모호하고 그것을 승인하는 영화의 수단은 보잘 것 없다는 믿음이 이 영화에는 내재해 있다. 영화를 연출한 공동감독들이 철거민과 진압 경찰의 입장 모두를 공평하게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의 입장, 두 개의 입장, 다수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말은 영화의 윤리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진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 있으며 하나 또는 둘, 그 이상의 증거들을 가지고 승인될 수 없음을 자인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뼈아픈 자성은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 따라서 <두 개의 문>은 억압적인 정권의 모습과 그 정권을 유지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진실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의 수단, 즉 기록과 인터뷰, 의견과 해석, 재연 등이 모두 말해줄 수 없는 곳에 웅크린 진실을 겨냥한다. 이 부조리하고 무기력한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다. 사태를 관망하는 자리에 놓이게 되는 관객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명징한 해석보다 왜 문 안의 진실은 이야기될 수 없으며, 그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하나의 결론으로 판정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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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한국을 포함한 세계 영화계에서 10대 난도질 영화가 호러 장르의 트렌드 세터 역할을 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느린 속도로 기어오는 아시아 산(産) 처녀 귀신 스토리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이런 유행 경향을 의식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윤종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 소름 >(2001)은 영적인 요소와 잊히지 않는 서프라이즈의 순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로움과 비극적인 과거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불안을 성찰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는 낡은 아파트 주민들을 둘러싼 잔인한 고통과 불행을 다루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쟁점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장소에 깃든 역사, 공포의 기원으로서 공간의 의미 맥락을 환기하는 신실한 드라마였다. <소름>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두운 심연에 대한 음울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이 서사의 주동 인물인 택시 운전사 용현을 연기한다. 용현은 돈을 아끼고 직주근접을 실현하기 위해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겨울의 초입쯤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 이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빌려 사는 504호에 깃든 비극적인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된다. 전 세입자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년 전에도 같은 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때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 아파트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준 이는 미스터리 소설을 집필 중인 505호 소설가 이 씨(기주봉)이다. 용현은 편의점 점원으로 만난 선영(장진영)이 아래층에 사는 동네 주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느 날 밤, 퇴근길에 선영을 태워다 준 뒤 도박 중독에 걸린 남편에게 그녀가 학대당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선영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용현은 남편의 시체처리를 도와준다. 내밀한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가까워 지지만 과거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고 아파트 곳곳엔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30년 전의 미스터리가 새롭게 조명된다. 유령의 집은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서 단골 무대를 제공하는 세팅이다. <소름>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집인 아파트를 미스터리와 악몽의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부(富)와 편의, 효율, 안전, 청결 따위의 현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한 ‘집’이기에 앞서 근대화의 표상이다. 경제성장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아파트 단지는 빠르게 성장해 온 이 국가의 발전을 상징해 왔다. 아파트 시세의 등락이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물질적, 정신적 삶을 지배해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의 아파트 개발은 도시 계획의 핵심을 관통하였고 경제성장의 양적, 질적 성과를 보여주는 국가의 전략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소름>의 무대가 되는 미금아파트 장면들은 1969년 준공되었으나 지금은 역사적 기념비 또는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금화시민아파트에서 촬영하였다. 중산층의 신화와 대조적으로 <소름>의 아파트가 소외된 방외자들이 사는 낡고 퇴락한 거주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현과 이 씨의 첫 번째 대화 장면에서 이 씨는 이 아파트가 곧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이 씨는 미금아파트의 역사에 기초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 중심이 되는 것은 용현이 사는 504호이다. <소름>은 모더니티의 표상으로서 아파트를 공포의 기원으로 재설정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상의 아이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다가서는 장면이 있다. 용현이 미금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으로 열리는 오프닝은 정교한 카메라 프레이밍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설정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용현의 뒤통수를 잡은 바스트 쇼트로 시작하는 도입은 일군의 아이들이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방향과 속도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초코바를 물어뜯는 용현의 기이한 제스쳐를 보여준 뒤 먼 거리에서 촬영한 미금아파트의 쇼트로 이행한다. 근경과 원경을 왕래하는 인상적인 편집은 낡은 아파트 건물을 비추는 햇살, 기우뚱하게 선 아파트에 짓눌린 용현의 왜소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쇼트의 프레이밍과 구도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컴컴한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용현의 뒷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다음 쇼트에서 자신이 머물 504호가 있는 층의 복도에 다다른 용현은 어둡고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용현이 끌고 다니는 기묘한 가방을 강조하던 카메라는 서사의 비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사물(천장에 매달린 3구 조명)에 오래 머무른다. 외부에서 내부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평평함에서 깊이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쇼트의 구성과 편집은 서사의 초입에서 관객들이 낯선 공간과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설정이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아파트 건물은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는데, 복도의 조명이 켜졌다 꺼지면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고, 창문은 분노한 얼굴처럼 기묘한 패턴을 형성한다. 인격화된 아파트는 소외된 캐릭터들과 교감한다. 인물의 배후 스토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제자리를 찾은 후에도 용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예측불허의 느낌을 준다. 조용한 방에서 그가 이소룡 흉내를 내거나, 거울을 보며 의문의 상처를 살필 때 또는 아파트 복도의 심연 같은 어둠을 응시할 때에도 신경세포를 긁는 것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헤어스타일부터 줄담배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년간의 학대 끝에 형성된 냉담한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으로 추정되는 선영의 언행도 한 맥락 안에 있다. <소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공포를 일종의 연쇄적인 사건들의 네트워크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기능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운이 좋지 않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저들은 세대를 이어가는 끝없는 공포의 순환에 갇혀 있다. 여기엔 오랜 시간 최고의 선으로 추구되었던, 개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비극의 연쇄고리가 놓여 있다. 인생에서 겪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공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한 측면처럼 느껴진다. 세밀하게 디자인된 악몽 같은 설정, 귀기 서린 음악, 놀라서 뛰어오르게 만드는 설정(jump scare)이 등장하는 살인 스토리 등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요소도 있지만, <소름>은 공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더 가깝다. 504호의 비밀, 몰살된 가족, 과거의 귀환은 이 공간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녹아있으며 장소의 인격화는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아파트가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질 정도로 팽창한다. 어두운 복도와 벗겨진 페인트, 철골을 드러낸 건물의 표면, 눅눅한 계단, 휘갈겨진 낙서 따위를 시각화하는 장면들에서 아파트는 괴물과 살인자, 유령을 대신한다. 스토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느린 템포는 불안감을 증폭하며,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만큼이나 지나가는 말과 그에 대한 반응이 극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끓고, 머리카락이 솟고, 오싹한 장면들로 압도하는, 뉘앙스에 기초한 공포지만 아파트 주민의 삶에 깊이 빠져들게 하여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운명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윤종찬의 연출은 점진적으로 감정의 온도를 비등점으로 향하게 한다. 무엇이 한국의 공포영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모더니티의 유령들, 근대의 뒤안길에 대한 회고적 성찰, 변화하는 젠더 정치학이 멜로드라마적인 과잉의 수사와 연계되어 어두운 과거를 불러내는 플래시백 구조 따위를 거론할 수 있다. 장르의 스테레오타입에 부정의 자세로 선 <소름>은 여러 등장인물의 절망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어둡고 실존주의적인 작품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유령 소녀가 눈에 머리카락을 달고 관절을 꺾어대는 호러 영화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적 맥락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의 사회학적 함의와 공명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암울하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비극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공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괴담의 꼴을 한 이야기지만 1995년 6월 29일 발발하여 사망 502명, 5명 실종, 부상 937명의 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윤종찬 감독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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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늘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왜 공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어째서 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나로서는 공간과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만큼이나 내가 어떤 공간을 좋아하고 그 공간이 어떻게 설계되고 어떤 재료로 마무리되었는지 관심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라고 대답해보지만 질문자들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간이나 건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와 굉장히 특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우리 모두 공간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한 채 주어진 공간에 순응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유럽에 가서 오래된 성이나 교회를 둘러보는 것 정도가 건축에 대한 특별한 경험의 전부일 테니, 새로운 빌딩이 생기면 찾아가서 이모저모 살펴보는 건축덕후는 조금 특이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더 나아가 직장에서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어디에 앉아서 일하면 능률이 오를 것인지 물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준 적이 없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공간에 대한 무결정의 확장판인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다. 인테리어라는 이름으로 내부구조를 변경하고 디테일을 새로 손보는 중산층이 늘어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집에 내 돈을 들여 고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그런 아파트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 되었기에 공간에 대해, 그리고 건축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것은 사치라 여기는 것도 당연할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중국마저도 방의 크기와 개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파트를 공급하는데 한국에서는 건설사가 내 삶의 제반요소를 결정해버린 공간을 수용하기만 해야 한다. 그저 벽지 색깔을 고르는 것이 공간에 대한 결정권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공간에 대해 결정 권리를 가질 때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좌석을 결정할 때나, 카페에 가서 어디에 앉을까를 결정하는 순간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삶에서 전혀 중요해 본적이 없는 공간이나 건축에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내가 사적인 공간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문제로 공간과 건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적인 공간과 공공건축이 어떤 경로로 결정되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가 공적 공간의 탄생과 논의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그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많은 해답을 찾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동상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시와 박정희기념회 간의 논의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다. 우리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모뉴먼트를 만들기 위해 공공건축을 한다. < 말하는 건축 시티:홀 >을 만들면서도 그 논의과정을 지켜보았다. 디자인의 결정 과정이 과잉 의미화된 정치투쟁의 장이 되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울시청을 새로 설계한다는 것은 그 출발부터 논쟁을 예고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서울시청의 설계 공모 지침서를 보면 우리가 건축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다. 의미와 의미가 과잉 충돌하는 지난한 과정은 마치 정치권의 되돌이표와 같이 빙빙 도는 정치투쟁처럼 실리 없고 공허하게 보였다. 건축은 결국 디자인인데 말이다. 디자인은 디자인이고 그 자체로 보기에 좋아야 하는데 말이다. 디자인 감각을 실종시키는 추상적인 말과 한국적 콘셉트의 충돌들을 지켜보면, 건축에 관해서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의미 과잉된, 의미가 되고 싶어 하는, 의미 없는 존재들인가를 깨닫게 된다. < 말하는 건축 시티:홀 >을 개봉한 이후에는 이 다큐멘터리가 누구의 편인가를 확실하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 말하는 건축가 > 정기용 선생을 지지하는 어떤 분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오세훈 시장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설계자 유걸 선생을 다룬 영화가 정기용 선생을 다룬 다큐와 같은 시리즈 제목을 따르고 있다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논쟁적인 영화보다는 두루두루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칭찬받는 영화를 지향하던 나는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시청 직원들에게는 매일 출근하는 직장이고, 서울시민들에게는 민원을 제출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건축이 왜 이렇게 많은 소모적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지금이라면 서울 신청사의 새로운 디자인을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결정했을까. 디자인의 결정 권한은 누가 위임받는 것이 좋을까. 전문가로 구성된 각종 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위임받는 현대사회에서 공공프로젝트의 선정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위원회의 결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촬영하면서 위원들의 심사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결정의 표수를 하나하나 확인해나갔다. 어떤 위원이 어떤 이유로 유걸 선생의 디자인을 선택했는지가 모두 공개되어 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은 시장과 대통령이 좌파인가 우파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나 역시 영화와 관련된 심사에 위원으로 참가할 때가 있다. 과연 내가 참여한 심사의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해야한다면 나는 과연 인터뷰에 응할까. 심사의 시간은 짧고 심사해야 할 내용은 많다. 그리고 심사비는 낮다. 심사에 최선을 다하기가 힘든 구조이다. 결국 결과에 대한 책임은 시스템에 미루게 된다. 공적 기금의 심사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몇백만 원을 주는 결정부터 서울시청처럼 몇천억을 들이는 결정까지, 모든 공적 심사는 시민에게 권리를 위임받은 위원회의 결정에 의존한다.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 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결정되고 누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공공 건축 프로젝트의 경우 선정된 작품에 대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 해외의 디자이너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누가 디자인을 하는가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디자인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의 문제도 역시 중요하다. 각각의 재료와 요소들에 대한 간섭이 심하고 절충이 많아질수록 원래의 디자인은 실종된다. 개성은 사라지고 평균적인 결과물로 귀착된다. 창작 주체의 디자인 감각이나 주제는 주변의 개입을 통해 실종되고 심지어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좋은 공공건축이 나오기 힘든 반면 몇몇 기업이 만드는 건축물은 완성도 있는 좋은 건축물이 많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오너의 집요한 열정의 결과일 때가 많다. 건축 분야의 전문 공무원들이 기업의 오너처럼 자신의 건축물이라는 생각으로 건축 전 과정에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이 좋은 공공건축을 가지는 일이 될 것이다. 서울시는 공공건축가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공공건축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 말하는 건축 시티:홀 >은 현장 담당자의 편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자신이 담당한 프로젝트가 더 나빠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피곤에 지쳐 일하는 담당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이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영화가 되길 바랐지만, 그들은 자신의 피곤한 얼굴을 영화에서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슬펐다.(계속)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