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 감독
- 서유리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최배영, 이지원, 임은조, 이진
1. 영화검열이 선택한 ‘한국’영화의 풍경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국영화의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오프닝 타이틀을 지나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 내부의 시점으로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을 보여주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카메라는 곧 그 시선을 낮추어 빌딩들 사이, 좁고 낮은 곳에 펼쳐진 난잡한 시장을 비춘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도시로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심 속 이 비루함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일하다 엉덩이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춘식(이영호), 골목 구석 좁은 공간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불을 피우며 연신 땀을 닦아대는 길남(김성찬), 위험한 가스통을 뒤로 하고 쪼그려 앉아 망치질을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는 덕배(안성기)의 얼굴에서 멈춘 카메라는 그들이 현재 도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영화사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장면들에서 기인할 것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나오기 전인 1970년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시기였지만 한국영화에서 가난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하는 것이었고 검열은 강박적으로 성장의 지표들을 영화에 등장시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자 했다. 1970년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검열관들은 검열 시 법적 근거를 지닌 「영화법 시행규칙 제 9조 영화검열기준」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제공된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까지를 참고해야 했는데,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이 기본 방향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약진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부각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영화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 세부방향으로 제안된 것은 ‘가급적 고속도로, 웅장한 공장, 새로운 주택가 등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배경으로’하며 농촌을 소재로 하더라도 ‘가급적 농업의 기계화, 새로운 농지정리 및 지하수 개발’의 적극적인 노출이었다. 고향이 변화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애잔함과 절망이 교차하던 정씨(김진규)의 얼굴에서 갑작스레 바다 위 거대한 다리를 건너는 버스의 줌아웃으로 넘어가 마무리되는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1975)의 기형적인 엔딩은 1970년대의 성장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1970년대를 지나 도달한 1980년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무작정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시에서 겪어내야 했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그만큼 상징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사실 이 작품에 한정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돌출된 것이었다. 1980년으로 진입하면서 영화법 자체의 개정이나 검열의 기준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며 검열의 방식 역시 이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가난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서술되는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검열 역시 한 시대를 묶어 범박하게 설명되는 경향이 크지만 갑작스런 정치·사회적 전복의 순간들은 검열의 탄성(彈性)에 변화를 일으키며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다.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너무도 짧았던 ‘서울의 봄’과 함께 움직였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은 검열에 있어 1980년대‘적’이라기보다 1980년대 ‘찰나의 균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짧았던 ‘서울의 봄,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장호 감독이 1975년 말 대마초 파동 후 재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기존 한국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장호 감독은 활동이 어려웠던 4년 동안 연극계와 문학계 등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 즉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정권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리얼리즘의 회복에 대해 고민했다고 이야기 한다. 1 이 시간을 보낸 이장호 감독이 1980년에 들어 착수하는 작품이 급격한 도시화와 그 안에서 황폐해지는 청년들을 다룬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정확한 일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제작신고 전 이루어졌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의 의견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청춘물’로 분류되어 있으며 ‘底邊靑春(저변청춘)을 不條理(부조리)하게 描寫(묘사)한 것은 아니므로 크게 問題(문제)될 点(점)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별첨으로 추가된 지적사항은 문틈으로 보이는 정사 장면이나 신음소리, 인물들의 상상 속 정사 장면 등의 외설적이라 판단한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다. 검열관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도심 속 밑바닥 청춘들의 모습이 사회 비판적이지 않다고 판단,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시킨 것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작사는 1980년 3월 27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하고 4월 19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제작신고가 수리, 영화는 제작에 들어간다. 영화가 완성된 후 제출된 「예고편 영화 검열신청서」와 「영화 검열신청서」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작품의 예고편 심의에서도 가난에 관한 언급보다는 외설적인 부분에 치중했다는 것과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 필름의 검열이 문공부가 아닌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라는 민간심의기구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먼저 예고편의 영화검열을 위해 제출된 영화예고편 대본을 보면 안마하는 장면이나 안마하는 이를 만지는 장면 등에 삭제 표시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려는 몸부림’,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밑바닥 인생의 삶’, ‘한 판 즐겁게 놀아보자 그러나 이 놀이판에 깔려 있는 슬픔과 한을 잊지 말자’ 등의 자막에는 어떠한 제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가난’, ‘밑바닥 인생’, ‘슬픔과 한’과 같은 정서가 걸러내야 하는 감정으로 자리했던 1970년대와 비교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우울함보다 중요한 것이 외설적인 장면의 삭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영화 검열신청서 위의 서류의 좌측 하단에 찍힌 파란 도장은 1979년부터 바뀐 영화시책의 시행을 방증한다. 정부는 문공부에서 맡았던 영화검열을 1979년 4월 10일부터 민간단체인 공윤으로 이관하고, 영화관계자와 각계 인사들로 영화검열심의위원회를 구성, 이들이 영화검열을 진행토록 했는데 2 , 이러한 계획은 그해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정부주관 문화행사를 조금씩 민간기구로 넘길 것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한 문공부의 첫 번째 실천이었다 3 . 하단의 도장은 영화검열심의 대본과 필름이 공윤 쪽으로 접수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1979년 이후 이 시책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작사에게 영화검열이 늦어진다는 회신을 보내거나 영화검열의 합격을 통보하는 공문을 내리는 일 등은 문공부에서 진행, 1970년대 영화 실사 검열을 직접 진행하던 문공부가 1979년의 시책 변화 이후 제작사측에 결과를 통보하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공윤’의 심의를 거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8월 22일 영화검열에 합격하는데 어떠한 제한사항도 없이, 그러니까 영화 실사검열에서 단 한 군데의 화면 삭제나 단축 없이 심의위원 8명의 전원 찬성으로 검열에 합격한다. 이장호는 당시의 검열 상황을 술회하면서 이러한 결과는 ‘서울의 봄’ 시기에 구성된 전향적인 심사위원 중 소설가 박완서의 강력한 주장에서 비롯되었다며 박완서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검열에 통과시키기 위해 열 시간에 걸친 회의를 하며 애를 썼다고 이야기한다 4 . 여기에서 주목해 볼 것은 민간 심의기구의 한 심사위원이 ‘가난’과 ‘밑바닥 인생’과 ‘슬픔과 한’이 담긴 이 영화의 무삭제 통과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와 그것이 수용될 수 있었던 ‘서울의 봄’ 시기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5 . 3. 다시 ‘고발성 우려’로 삭제되는 서민의 현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3월 27일 제작신고서를 제출, 약 5개월 후인 8월 22일 영화 검열 합격증을 받았다. 민간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지 약 1년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 사이 벌어진 10.26과 12.12 직후의 혼란과 무엇보다 아직 군사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의 짧은 재임기간에 절묘하게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예로 들어 민감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후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흐름을 설명한다거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검열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정말 짧았던 ‘서울의 봄’의 훈기를 탄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어둠의 자식들>(198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와 같이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 가난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줄줄이 제작·개봉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등장 자체가 이전 시기와는 다른 1980년대의 분위기의 예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작품들이 원작과는 분명한 차이를 지니며 6 영화 자체의 분위기나 설정이 어색하고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들이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예상컨대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이러한 작품들의 등장은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리얼한’ 소재가 무리 없는 검열을 지나 개봉한 전례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혼란스럽게 들어선 1980년대이지만 1970년대에 비해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넘치고 있었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를 잘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검열과정을 살펴보면 1981년으로 들어서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보궐선거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 남은 임기를 채우고 다시금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경색되었고, 검열 역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포착된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다르게 위의 작품들은 각종 사유서와 각서로 원작과는 다른 의도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증명해보이고 난 후에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했던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개작사유서 가령 1981년 7월 21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시나리오 심의가 통과되지 않아 개작의 개작을 거듭하고 유의사항까지 통보 받은 후에야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의 의견서의 심의의견 첫 번째에 주목해보자. 심의위원은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명시하기는 했으나 가난하고 절박한 서민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짙게 깔려 있어 많은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을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이라는 설정이 현재가 아니라고는 하나 철거의 문제, 빈부의 격차 등은 ‘현재’에도 분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원 대본에서 완전히 탈피 현 사회에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공해문제로 사회 계도성 주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영화로 개작’하여 대본과 사유서를 제출한 후에야 영화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심 속 철거민, 난장이의 이야기가 아닌 염전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1981년 12월 10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꼬방동네 사람들>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꼬방동네 사람들> 검토의견」에는 ‘서민촌 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회질서 문란과 사회일면의 고발성 우려가 있음’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7 . ‘무허가 건물의 철거로 인해 쫓겨날 형편’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이 ‘고발’로 보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 해도 감추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작품 역시 ‘사회악적인’ 장면을 삭제하고, ‘서민층의 비관적인 삶의 묘사를 피하’며, ‘의지로 환경을 극복’, ‘가난한 판자촌의 애틋한 이야기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밝은 얼굴로 볼 수 있도록 서정적인 영상’을 활용하겠다는 개작 내용을 제출했고, 여러 번의 개작 끝에 엄격하게 실사검열을 진행하겠다, 문제가 생겼을 시 모든 책임을 제작사 측에 묻겠다와 같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들은 후에야 영화를 제작·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은 모두 1981년을 지나 제작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영화화를 시도한 작품들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 진행과는 1년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들에서는 민간 심의위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문공부와 내무부 등이 나서 이 작품이 품고 있을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잠시 동안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이 검열서류들이 너무도 명징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후 가난을 그리는 작품들은 1987년을 지날 때까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옥외 광고탑에서 외치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제 멋대로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1980년대의 진실에 대해 풍자했던 가난한 청년들의 영화 <칠수와 만수>가 1988년 개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여타의 영화들이 놓인 시기적 차이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검열의 탄성(彈性)을 결정짓는 것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갑작스레 밝은 노래로 마무리 되지만, 이 엔딩송이 흘러나오기 전 덕배는 좁은 사각 링 안에서 긴 시간 얻어맞는다. 이 장면에 깔리는 덕배의 내레이션은 희망찬 엔딩송과는 전혀 다른 편에 서 있다. 덕배는 이야기한다. 서울에 올라와 2년을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 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된다고. 누가 때리는 것인지는 모른 채 2년 동안 맞아온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잠시 스크린에 자리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설명할 때의 위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등장한 하나의 경향으로 묶여 설명되곤 한다. 리얼리즘의 회복이라 설명되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그 이후 나온 작품들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로 동등한 층위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기에 영화에서 묘사하는 꾀죄죄함과 비루함에는 무수한 균열들이 도사린다. 그리고 이후 ‘서민’의 삶이 다시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나야했다. 1. 김상민 엮음, 『박정희 시대와 한국 대중문화』, 선인, 2012, 34-48면. 2.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은 4월 1일부터로 명시되어 있지만( 「영화검열 민간 단체에 이관」, 《경향신문》, 1979.3.9.) 당시 실제 영화검열 사무를 담당했던 공윤의 월보 『공연윤리』에서는 4월 10일자로 업무가 이관된 것으로 적고 있다(「영화의 검열 심의업무 공윤 민간 기구로 이관: 심의위원은 각계 인사 17명으로」, 『공연윤리』, 1979.4.(32호), 1면. 신문은 기사에 따라 민간이양 일자를 4월1일이나 4월 2일로 각기 다르게 적기도 하며, 실제 업무를 담당하던 공윤에서 명시한 날짜가 더욱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 영화업무의 민관이양 일자는 1979년 4월 10일로 서술하였다. 3.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 《경향신문》, 1979.3.24. 4. 김영진, 『이장호vs 배창호』, 한국영상자료원, 2007, 50-51면. 이 글에서 이장호는 몇 장면은 끝내 통과되지 못한 채 삭제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장호는 영화에 삽입되어 있던 노래 가사가 문제가 되어 가사 부분의 사운드 트랙을 늘려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서류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서류와 구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 그 상황은 구술자의 기억의 오류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류에는 남아 있지 않는 심의위원과 창작자 간의 협상이나 검열의 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다각적인 접근과 확인이 필요하다. 5.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완성될 무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유신정권 못지않게 억압적인 독재체제가 수립, 1980년대의 말과 상황이 달라져 있다고 술회하지만(김영진, 위의 책, 50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완성, 그 후 검열의 신청과 진행은 최규하의 하야(1980.8.16.) 이전이다. 이때에도 실세는 이미 군부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공식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이전과 그 후는 사회적 분위기면에서도, 영화 내부로 들어온다면 영화 검열 서류상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6.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은 이동철의 동명의 소설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7. 서류에 적힌 ‘직절적인’은 ‘직설적인’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두 소년, 소녀의 대화로 시작한다. “완두의 큰 것과 작은 것을 교배시키면 키가 큰 놈만 나온다고”, “그러니까 영수 너가 이다음에 커서 결혼을 하면 너희 아버지처럼 난장이가 아니라 큰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이지?” 소년 명수의 아버지는 사람들이 ‘난쟁이’라고 놀리는 ‘왜소증 장애인’이다. 아버지가 놀림당할 때, 그의 아이들은 나도 ‘난쟁이’가 되거나, 난쟁이’를 낳게 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한다. 그런 명수에게 어딘가에서 본 ‘멘델의 유전법칙’은 나름대로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명수는 소녀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동네 사람들의 직업인 염전노동자가 되지 않겠다 약속한다. 명수( 안성기 )는 다행히 키 큰 청년으로 성장하고, ‘염전노동자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된 그는 하고 싶었던 공부도 못했고, 변변한 직업도 없는 신세다. 그럼에도 그를 둘러싼 가족만큼은 단단하다. 이들은 가족만을 생각하는 엄마( 전양자 )의 헌신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김불이 )에 대한 존중으로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그래도 우리 가족이 모여 살 집 한 채가 있다는 게 어디냐”고 말한다. 어느 날, 그 집 한 채마저 사라질 위기가 닥친다. 위기는 난데없는 굉음으로 먼저 찾아온다. ‘탁 탁 탁 탁!!!’ 판자를 붙여 만든 대문에 누군가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가족의 표정에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좀비를 마주한 것 같은 공포가 서려 있다. 망치질을 끝낸 사람이 말한다. “번호판을 잘 지키십시요. 번호판이 없으면 보상을 못 받게 됩니다.” 가족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엄마는 마음을 다잡고 아들을 먼저 안심시키려 한다. “놀랄 거 없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꼭 찾아올 것들 중 하나니까, 이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로구나.” 유명한 소설을 영화화하는 감독은 모두가 원작의 무게에 짓눌릴 것이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하 <난쏘공>)을 연출한 이원세 감독은 조세희의 동명 원작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그 무게로부터 벗어난다. 원작의 낙원구 행복동 46번지는 한강을 지척에 둔 달동네이지만, 영화의 배경은 쇠퇴한 염전마을이다. 촬영장소는 지금은 시화공단이 된 과거 군자염전 마을이고, 실제 그곳을 다니던 수인선 협궤열차도 중요한 공간으로 나온다. 영화의 배경이 원작과 다른 이유가 검열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원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에 따르면 처음부터 염전마을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원세 감독 자신이 실제 군자염전마을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경험을 토대로 그는 김수용 감독의 1968년 작 <수전지대>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며 자신이 연출한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1978) 속 아버지를 염전 노동자로 설정하기도 했다. 공간이 바뀌면서 영화는 감독이 가장 잘 아는 곳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영화 속의 염전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전국을 돌며 서커스 공연을 다녔던 김불이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만날 때의 염전은 풍요롭게 빛난다. 하지만 명수가 옆집에서 함께 자란 명희( 전영선 )와 염전 밭 사이를 걸으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는 사방이 축축한 절망의 공간이다. 그 때문에 인물들이 갇힌 공간이 원작보다 더 고립되어 보이기도 한다. 김불이와 명수가 한강에서 작은 나무배를 타고 나가 대화를 나누는 원작의 장면도 영화에서는 바닷가로 바뀌었는데, 이 상황은 멀리 보이는 노을 덕분에 더 애틋하다. “난 너희 어머니를 위해 먼저 달나라에 가서 릴리푸트 마을을 건설할 셈이야.” 이원세 감독은 그처럼 다양한 염전의 표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이면 일터로 나갔다가 밤이면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가족의 모습 또한 그의 기억에서 나온 장면일 가능성이 크다. 덕분에 영화 <난쏘공>은 지금은 사라진 공간에 대한 희귀한 기록이 되기도 했다. 서울 달동네 대한 기록에 비해 군자염전에 대한 기록은 훨씬 더 적을 테니 말이다. 당장 집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가족에게 마땅한 탈출구는 없다. 아파트 입주권을 팔아도 대부분의 돈을 빚 갚는데 써야 하고, 아파트로 들어가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명수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명희의 죽음을 겪고, 유명한 권투선수가 되어 돈을 벌어보려고 했던 동생 영호( 이효정 )는 경기에서 지고 만다. 오빠들이 사랑하는 여동생 영희(금보라)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위험한 모험에 몸을 던진다. 원작에도 나타나는 남루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이원세 감독은 원작보다 더 강인한 인물들을 그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가장 두드러진 묘사는 배우 전양자가 연기한 엄마에서 나타난다. 남편을 존중하고 자식들을 소중히 여기는 전형적인 여성상 같지만, 그녀는 이 가족 구성원 가운데 가장 냉철한 캐릭터다. 자식들에게 이제 너희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을 일깨우고,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당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의연함을 보인다. 이 캐릭터의 가장 강렬한 모습은 철거용역이 집을 철거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가족들은 이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인 걸 아는 듯 고기를 굽는다. 철거용역은 이 집에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철거를 시작한다. 가족들은 집이 무너지는 소리에도 계속 고기를 먹는다. 급기야 철거용역은 아들이 식사를 하는 방까지 부숴버린다. 영화는 인물들의 얼굴 뒤로 집이 무너지는 광경을 배치하면서 이들이 다부지게 고기를 씹는 표정을 강조한다. 철거용역은 그제야 사람을 보고 잠시 철거를 멈춘다. 영화는 이때 엄마의 존재를 또 한 번 부각시킨다. 엄마는 남은 고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철거 단원들에게 한 점씩을 먹인다. 마지막 식사를 배려해준 그들에 대한 최선의 호의.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다. 절망적인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된 지금도 사랑받는 이야기다. 지난 2017년까지 300쇄가 팔렸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주인공 김불이의 가족이 겪는 고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겪고 있을 법한 것이기 때문일 것 같다. 집이 없다는 불안감은 소설이 나온 1975년이나, 영화가 나온 1981년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에나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실제 「난쏘공」은 지난 2006년에도 영화화 시도가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영화화에 참여한 프로듀서는 "원작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를 그대로 반추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라며 “「난쏘공」이라는 뛰어난 작품의 환경과 인물을 빌려 이 시대 가장 낮은 곳에 살고 있는 소시민 가족들의 정신적인 소통과 애정, 사랑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난쏘공」은 1981년의 영화 <난쏘공>이 보여준 것처럼, 공간을 달리해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듯이 우리도 이질 집단으로서 보호를 받았다.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작의 이 문장에서 지금도 울림을 느낀다면, 동의할 것이다. 2020년을 바라보는 지금의 낙원구 행복동은 어디일까?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