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세친구(지형영화)
- 감독
- 손종권, 리인철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미상, 미상, 미상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응산 교수 는 작품의 텍스트와 미학적 형식에 집중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퀴어영화를 연구한다. 특히 퀴어에 내재된 시간성을 반영하면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작품들에 관심이 있으며,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 실험을 거듭하는 영화 작업을 포괄해 퀴어영화로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워싱턴대 아시아언어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앞서 이야기한 관점으로 1990년대 이후 퀴어영화를 분석한 결과를 담은 저서 Future Imperfect 를 집필하고 있다. 풍크툼의 관찰자에서, 퀴어영화 연구자로 강연을 제안받은 이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된 지점을 반추해볼 수 있어 뜻깊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지인께서 주신 무료 관람권을 가지고 형과 지역의 단관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개봉 작품들을 거의 다 봤을 정도로 극장에 자주 갔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영화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보다 일찍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 단관극장 대부분이 아쉽게도 사라졌고, 영화를 접하는 매체마저도 노트북과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지만,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런 아련한 추억들이 내 영화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준 것 같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준 단관극장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작품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보는 이를 ‘찌르는 듯한’ 이미지로서의 풍크툼(Punctum) *주1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나에게는 두 편의 장르영화가 풍크툼을 경험하게 했다. < 양들의 침묵 >(조나단 드미, 1991)은 포스터 자체가 시선을 사로잡았을뿐더러, 작품 속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인물 설정이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음을 알린 한 영화잡지의 기사, 그리고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던 작품 속 일부 장면들까지 작품의 여러 요소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영화를 본 후 나는 트랜스나 동성애자 등이 악인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꼭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의구심을 가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봤던 < 캐리 >(브라이언 드 팔마, 1976)도 비슷했는데, 흥미롭게도 주인공 소녀의 관점에 공감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기 전 복수를 감행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관심을 받고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설정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앞서 두 작품이 안겨준 충격을 풍크툼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배우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 느끼는 것 ’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양들의 침묵>과 <캐리> 돌아보니 나는 공포영화를 볼 때 괴물이나 귀신, 복수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것 같다. 흔히 ‘빌런’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에 자신을 동일시했던 당시부터, ‘퀴어’와 연관된 생각이나 태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괴물 >(2023)과 같은 수작들을 지켜보면서도, 퀴어영화는 정체성을 그리는 영화, 미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 혹은 퀴어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에 의해 재정의되는 영화 중 어떤 것에 해당할지를 깊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관한 서사에 국한하지 않고, 퀴어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와 삶 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반복되는 형식적 특징은 발견되지 않기에 이를 ‘장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엄연히 영화의 한 양태로 자리 잡은 퀴어영화를 다각도에서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동아리 차원에서 퀴어영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집을 만들고 관련 작품을 선정해 학내에서 상영하는 ‘이반영화제’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영화제에는 놀랍게도 아주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 안토니아스 라인 >(마린 고리스, 1995), < 화분 >(하길종, 1972), 그리고 대사의 구성 등으로 볼 때 퀴어문화의 맥락에서도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는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외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또 한 가지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 해피 투게더 >(1997)가 1997년 당시 존재했던 검열 제도로 인해 국내 상영이 불허되었을 때, 동아리 구성원들과 어렵게 테이프를 구해 학내 광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러자 퀴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수없이 몰려들었다. 아직 영화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던 시절임에도, 이렇게 영화 상영을 직접 기획하는 경험을 거듭하면서 영화의 영향력과 효과를 몸소 체험했고, 영화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확인했다. 영화는 문화와 예술, 산업 등 다양한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강연해주신 교수님들과 달리 나는 영화학계에 다소 늦게 입문했지만, 국내 여러 영화제에 다니며 ‘현장’ 참여를 중심으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 전주, 부천을 비롯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와 서울인권영화제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서울인권영화제는 제2회가 이화여대에서 열렸는데, 퀴어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 하비 밀크의 시간들 >(롭 엡스타인, 1984)을 상영할 때 경찰 인력이 이화여대를 둘러싸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시선을 발전시켰던 시간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지금의 자양분이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양한 영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준 영화제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영화학에 관한 여러 외국 도서가 유입되곤 했는데, 내가 퀴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접한 경로 역시 번역서였다. ‘퀴어영화’라는 개념이 논의되기 전 게이·레즈비언 영화를 다룬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로빈 우드, 1993),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호모 PUNK 이반)』(바바라 해머 외, 1999)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고, 퀴어영화의 고전을 감상하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를 관통한 또 다른 풍크툼이 된 작품들을 만났다. 먼저, < 세친구 >(임순례, 1996)는 게이 인물 한 명을 포함한 세 친구의 삶을 보여준다. 친구 한 명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표현은 이들 사이에서 중요치 않으며, 그들은 절망한 청년들로서 199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가난하고 힘겹게, 하지만 더불어 살아간다. 이를 지켜보면서, (만약 ‘퀴어성’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면) 영화의 퀴어성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성적 지향성만 해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퀴어는 연대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퀴어성은 ‘누구와 연대하는지’를 결정하고 연대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장치 이지 않을까? 퀴어를 둘러싼 맥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런 영화들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올리버>(닉 디오캄포, 1983)는 필리핀의 게이클럽에서 유명인을 모사하는 올리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올리버라는 인물은 성소수자이지만, 자녀를 낳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간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퀴어영화는 대부분 당사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밀도 높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소수자 남성이 가정을 형성하고, 그러면서도 게이라는 지향성은 잃지 않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은 당시의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게이클럽에 찾아와 올리버와 같은 필리핀 현지의 성소수자들을 착취하는 제1세계 외국인 관광객들도 카메라 너머에서 등장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관광객의 시선과 일치하고, 아동 성착취 기사와 동성 성매매로 삶을 연명하던 과거 어린 시절 올리버의 고백이 몽타주로 재배치되어 등장한다. 마르코스 치하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민중의 모습을 전경으로 삼아 하층민 퀴어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는 장면까지. 영화를 통해 그 착취의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식민주의적 억압을 자행하는 태도를 소위 자유롭고 글로벌한 게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면서 제3세계 성소수자 집단 위에 군림하는 제1세계 성소수자들과, 빈곤한 현실에 부딪혀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어려워하는 현지 성소수자들이 절대 동일한 층위에서 분석될 수 없음을 지각하게 된다. 이들을 같은 종류의 집단으로 지칭하는 순간, 퀴어정치학의 본질을 망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올리버>는 퀴어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독립된 채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족 간의 유대,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 등에 익숙한 아시아의 퀴어는 규범적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젠더 표현과 자신이 속한 현실 사이에서 ‘ 타협 (Negotiation)’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퀴어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양태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흥미로워, 아시아 퀴어영화를 서구 이론의 틀에만 가둬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아시아 영화를 주된 연구 분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세친구>와 <올리버> (사진: " Oliver ", IMDb) 퀴어영화의 각기 다른 얼굴을 찾아 유학 중 영화를 공부한 경험으로 잠시 주제를 옮겨보자. 사실 주전공을 영화학으로 바꾸기 전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기에, 미국 워싱턴대로 유학한 이후 퀴어이론을 방법론으로 하여 영미권 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드 헤인즈 등이 이끌고 1990년대 퀴어영화의 대표적 경향으로 자리 잡았던 ‘뉴 퀴어 시네마’를 중심으로 미국의 퀴어영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의 작품 중 퀴어 및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분명하게 재현되는 경우보다, 그의 영화적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퀴어미학에 더욱 관심이 갔다. 예를 들어, <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즈, 2002)에서는 흑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이 이별을 통보할 때,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짧은 길이의 로우 앵글 숏으로 보여준다. 샷의 배치 역시 타인의 시선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으면서도 히스테리컬하게 구성되어 있다. 퀴어한 인물을 바라보는 규범적 이성애자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기존의 퀴어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공식을,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한 장면에도 적용한 점이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영화 속 퀴어적 순간을 보다 다양한 맥락으로 조성하는 시도가 궁금해, 관련 주제로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적 지향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요약할 수는 없는 퀴어영화(특히 아시아 퀴어영화)의 미학적 특징 을 발견하고 싶었다. 대학원 과정 중에 출간한 두 편의 영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두 작품을 그 예로 소개하고 싶다. 두 편 모두 영화의 소재를 차별화하고 미학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한국 퀴어영화 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 줄탁동시 >(김경묵, 2011)는 내가 개념적으로만 구상했던 퀴어영화의 이론을 영화적 언어로 이미 구현하고 있었다. 한국의 퀴어영화 역시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담론이 아니라 미학적 대상으로 연구될 가능성이 충분함을 확신한 작품이다. 주인공 준( 이바울 )은 탈북 청소년이고,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관계없이 동성 대상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착취당한 후 지금 보여드릴 장면에서처럼 청계천을 따라 정처없이 걷는다. 그 옆모습이 계속 롱테이크로 잡힌다. 천의 흐름을 거슬러 청계천의 끝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이 장면이 역사적 진보의 흐름, 즉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성애·동성애규범적 시간성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의지 를 함축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특히 서구의 여러 퀴어 담론과 운동들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주의적인 접근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상황적 진보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퀴어들의 삶과 미래는 어떠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면은 종로3가, 즉 게이 유흥업소들과 커뮤니티들이 자리한 일대에 다다르며 끝난다. 퀴어하지만 동시에 탈북 청소년이기도 한 준이, 성소수자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성소수자라는 정치화된 집단, 혹은 이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를 묘사하는 영화가 ‘퀴어하다’라고 인식되었다면, <줄탁동시>와 같은 작품들은 이를 넘어선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미학적 함의 를 퀴어와 연관지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위 논의를 접한 지도교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아시아 영화를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동의하셨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줄탁동시> 중 <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2016) 역시 성 노동자인 여성 노인과 한국계 필리핀인(코피노) 아이의 삶을 중첩해 퀴어영화의 폭을 확장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독특한데, 한국인 산부인과 의사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버리고 온 코피노 소년 민호( 최현준 )는 필리핀인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부인과(재생산이 이뤄지고, 재생산 정치를 강화하는 장소)를 찾고, 병원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주인공 소영( 윤여정 )이 안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를 보더라도, 국가의 관심 밖의 영역에서 출생한 코피노가 국내 재상산 정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두는 존재가 재생산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이 든 성 노동자라는 설정이 특별하다. 작품 말미에서는 주인공 소영과 트랜스젠더 티나( 안아주 )가 민호를 함께 양육하기도 한다. 미국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의 견해를 빌려 설명하자면, 미국은 재생산의 미래지향적인 측면을 이데올로기화 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적극 반영하여 소위 아동들을 죽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로, 지속가능한 미래성의 상징으로 그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재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퀴어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국가의 돌봄을 받지 못한 코피노 아이의 상징적 재생산을 돕는 주체는 퀴어 이다. 미국 내 주류로 자리 잡은 퀴어이론으로 동시대 퀴어영화를 비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죽여주는 여자> 중 위의 여정을 토대로 정립된, 퀴어영화에 관한 나의 연구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의 매체인 영화가 ‘퀴어’라는 개념에 반영된 시간성 을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한데, 특히 1990년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퀴어영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미학적 실험 을 분석하고 싶다. 그리고 미국 중심적으로 해석된 뉴 퀴어 시네마 이론을 아시아 퀴어영화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관습에 저항하려고 한다. 최근 대두된 지역 영화 (Regional cinema)라는 개념을 퀴어의 측면에서 구체화해, 아시아 지역의 퀴어영화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더불어,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공유되는 규범상으로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 퀴어는 영화에서도 절망 또는 실패의 형태로 나타나며, 유토피아적 상상력 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그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퀴어만의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변태적 시간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성애중심적 가치관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타협 과 돌봄 , 그리고 취약한 타인에 대한 연대 를 실천하는 퀴어의 면모를 영화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싶다. 미학적 실험, 타협 및 돌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의 방향성 미래불완료의 아시아 퀴어영화, 계속 꿈꾼다 집필 중인 저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다. Future Imperfect , 즉 ‘ 미래불완료 ’라는 제목이다. 미래에 완료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미래불완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시제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시아 퀴어영화의 성격이 이와 유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퀴어문화를 제도권 안에서 존중하려는 노력이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어서, 그 안의 퀴어영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동원한 판타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 퀴어영화는 앞으로의 변화 양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미래불완료 시제의 주체가 되는 영화 양태에 속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가득하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퀴어는 ‘ 시간 ’과 분리해 논의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저서에서는 시간을 조작해 선보일 수 있는 매체인 영화가 이를 담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한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개념으로서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문득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푸코가 제시한 ‘ 헤테로토피아 *주2 ’가 몇몇 퀴어영화에서 공간성으로 구현된 사례도 기록했다. 한편, 파울 클레의 회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1920)를 본 벤야민은 ‘ 역사의 천사 (der Engel der Geschichte) *주3 ’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진보하는 시대를 따라 날갯짓하면서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로 시선이 향해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천사의 모습에는 동시대 퀴어영화의 숙명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도 있으면서 실제로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선전되곤 하는 동성혼 합법화 등, 퀴어를 존중하는 제도 한 가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다양한 계급과 차이를 가진 퀴어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가 펼쳐질 수 없고, 그들은 늘 어딘가에서 차별로 인해 고통 받았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퀴어 안에서도 계급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거나 혹은 성소수자로서 생활하기에 보다 안락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과,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따라서 갈수록 규범화되어 가는 퀴어의 영화적 재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 상의 실험 을 통해서, 그리고 퀴어라는 개념이 포용할 수 있는 집단 혹은 주체의 저변을 확장 함으로써 퀴어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진보적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모두 아울러 더 나은 세상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퀴어의 윤리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에 이 윤리가 상당 부분 구현되었음을 추후 연구와 저서를 통해 계속 전달하고 싶다. 2000년대에 가까워지며 영화 촬영과 감상의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여러 감독이 각자의 특색을 반영한 퀴어영화를 다수 발표해왔다. 아시아 곳곳에서 활동 중인 그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미학적으로 실험을 거듭하는 작품들이 선을 보일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툰스카 판시티워라쿤 감독은 태국의 역사나 현실을 고발하는 장면을 그와 관련 없는 다른 쇼트와 병치하는 등 퀴어성과 정치성을 결합하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퀴어가 태국사회에 정착된 규범을 거스르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영화로 탐구하는 흥미로운 창작자이다. 한편, 퀴어한 영화에 대한 작업으로 국내에서 돋보이고 있는 창작자로서 임철민 감독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퀴어한 촬영과 편집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 프리즈마 >(2013)의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값비싼 촬영기기 없이 단순 용도의 짐벌이나 핸드헬드로 구현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부드럽게 유영한다. 사실 촬영 당시 짐벌이 고장 났고, 이를 수리할 여건이 변변치 않았던 임철민 감독은 고장 나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짐벌을 가지고 하나의 쇼트를 촬영해봤다고 한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결과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임철민 감독은 <프리즈마>를 포함해 이렇게 우연과 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그 실험성으로 인해 배급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작품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유통 면에서도 퀴어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 실패 ’가 곧 미학적 실험의 성과 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이다. <Santikhiri Sonata>(툰스카 판시티워라쿤, 2019)와 <프리즈마> 마지막으로 퀴어영화에 대한 재미있는 리메이크 사례를 소개하며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애자인 남성 주인공의 연인이 숨진 후 남성으로 환생한다는 설정을 가진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는 몇 년 전 국내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작 시나리오 작가분께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리메이크에 반대하면서 제작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태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사로 리메이크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으로 환생한 연인과 이성애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죽음을 택한다. (사실 동성애 금기에 관한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리메이크작 <듀, 우리 함께 떠나자>(추키얏 삭위라쿤, 2019)에서는 본래 동성 연인이었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 숨진 후 이성으로 환생하고, 이들은 동성 연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인물이 지향하는 관계에 대한 설정을 완전히 뒤바꿨다. 여기서 한국 또는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징이자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얼마든지 퀴어한 영화로 재탄생하며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 영향력을 이어가는 힘. 한국 퀴어영화에도 그 힘이 가득하다는 점을 믿고, 응원해 주시기 바란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듀, 우리 함께 떠나자> * 질문과 답변 * (질문1) 퀴어영화 연구를 위해 영화학과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이론을 도입해 간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듯하다. 다만 여전히, 해당 이론들만으로 아시아 퀴어영화를 완벽히 연구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 도중 이와 같은 이론적 공백 을 발견하게 되신다면 보통 어떻게 대처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답변) 말씀하신 대로 퀴어나 영화이론 자체가 영어권 중심으로 논의되어왔고,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퀴어이론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며 느낀 아쉬운 점을 역자 후기에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담론이 원활히 생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영화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이 영미권이며 퀴어영화 연구도 거의 미국 중심으로 이뤄져온 터라, 그간 형성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론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영화의 텍스트 로 돌아간다. 이론 자체는 서구에서 발생한 논의를 참고하더라도, 이를 반박할 근거를 영화 텍스트에서 찾는다. 작품 속 다양한 재현 양상,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특이성, 한국영화에서 타협과 가족이 중요한 이유 등을 살피다보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텍스트는 영화 분석의 필요조건이다. (질문2) 임철민 감독의 작품처럼 미학적 실험으로서의 퀴어영화들의 사례를 알려주셨다. 영화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작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영되는 장소로 ‘ 미술관 ’도 자주 언급된다. 혹시 퀴어를 소재로 한 미술 작업 중 눈여겨보신 사례가 있을까? (답변) 이 자리에 와 계신 김경묵 감독님께서도 몇 년 전 대안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VR과 AR 매체를 이용한 개인전 <QUARANTINE: 독방의 시간>을 개최하신 것처럼, 퀴어영화의 무대가 꼭 영화관이 될 필요는 없다. 임철민 감독 역시도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이 ‘퀴어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제에 출품하고자 했지만 퀴어 관련 국내 영화제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퀴어영화의 성립 조건을 주로 동성애나 트랜스 재현 관련 내용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국내 영화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임철민 감독도 그랬듯이 이 작품들은 오히려 미술관에서 상영의 기회를 얻었고, 많은 퀴어영화 감독 및 작가들이 미술관과 협업하며 자신의 작업을 공개할 대안적 공간 을 찾고 있다. 이런 기회들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작품들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보전 되어 퀴어영화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3) 대학에서 한국영화사 강의와 영화사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셨다. 영자원의 데이터베이스 KMDb의 영화글 카테고리 중 ‘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이라는 코너에서는,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시대적 한계 등으로 인해 미처 드러나지 못한 퀴어적 측면을 발견해 분석하고 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한국고전영화 작품들 중에서 퀴어와 관련하여 맞닥뜨리게 되신 풍크툼 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신재영) (답변) 현재 집필 중인 저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영화들만 다루지만, 이후에는 한국영화라는 주제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싶다. 한국고전영화 중에서도 퀴어한 순간들을 다수 포착할 수 있다. < 화분 >(하길종, 1972)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 여사장 >(한형모, 1959)에서는 규범화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애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온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순간이 등장한다. 극중 자유부인 오선영( 김정림 )은 처음으로 비어홀을 찾았다가 서구식 무용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무희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깨달음을 얻는다. 자유부인이 각성하는 계기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부인의 내면에 있던 욕망이 여성 무희를 봄과 동시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 이어도 >(김기영, 1977) 역시 재생산을 언급하면서도 작품의 중심에는 여성 집단이 있으며 여기서 길러진 남자 아이들은 출가한다. 이성애를 규범으로 인정하고 재생산을 목표로 삼은 사회의 통념을 역이용한 서사로, 충분히 퀴어적으로 해석될 만한 텍스트이다. 이외에도 퀴어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한국고전영화에서의 순간들이 아주 많다. 여러 연구자분들께서 또 다른 사례를 활발히 발견해주신다면, 후에 이를 성실히 인용하며 연구를 이어가겠다. (상) <자유부인> 중 무희의 춤에 놀라는 오선영 / (하) <이어도> 중 (질문4) 현재 춘천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데, 올해(강연일 기준 2024년)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와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를 상영했다. 흥미롭게도, 상영 이후 관객들 대다수가 잘 만들어진 ‘가족영화’라는 감상을 전했다. 강연에서도 말씀해주셨지만 아시아 , 특히 한국 퀴어영화 는 가족 과 연결지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가족을 중시하는 아시아 문화를 고려할 때 아시아 퀴어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짙게 나타난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 시인의 사랑 >(김양희, 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애 규범에 따르며 가족을 이룬 이들도 삶의 특정 ‘상황’에서 퀴어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이들을 규범화된 이성애자로만 인식할 수는 없음을 짚고 싶다. 퀴어를 논할 때 오직 당사자의 정체성(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으로만 퀴어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지양 해야 한다. 한국 퀴어영화의 가족을 이해할 때 역시, 위와 같이 퀴어적 순간을 경유한 인물이라면 현재 소속된 가족에서 이성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폭넓은 관점에서 ‘퀴어’로 바라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퀴어영화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에게, 정체성 정치만으로 퀴어의 영역을 재단하는 경향으로부터 이제는 탈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시인의 사랑> 중 *** 주1. 롤랑 바르트가 저서 La Chambre Claire (밝은 방, 1980)에서 사진과 관련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관찰자가 지닌 개인적 측면을 건드리며 그를 찌르거나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우연적 요소로서 풍크툼을 설명한다. 관찰자는 사진 속 풍크툼을 통해 자신을 사적 개인으로 인식한다. 주2. 미셸 푸코가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말과 사물, 1966)에서 처음 설명한 개념으로, 현실의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는, 하지만 현실에는 존재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했다. 주3.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라는 글에서, 파울 클레의 작품에 묘사된 천사는 진보의 폭풍에 떠밀려 날갯짓하고 있기는 하지만, 폐허가 된 과거의 잔해더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한다고 말한다. 미래로 향하는 진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상처받은 과거는 치유되지 않은 채로 잔존함을 암시한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정말 힘들다. 그렇긴 해도 대상이 되는 작품이 있을 땐 어떻게든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획의 실체 없는 주제가 주는 자유 속에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게 한국영화 비평의 안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간간이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지만, 나는 제대로 된 비평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이 사실에서 오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게 기회가 닿은 이 글을 일단 시작해보려 한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 보기로 했다. 영화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한 것들 중에는 ‘말’을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주로 빛이 사라진 스크린 앞 객석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서 말이다. 1. 영화와 관련해 내가 처음 맡은 일은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상영이 끝난 후 작품을 해설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 일이 사라지기 전까지 1년 넘는 시간동안 매 주말 한 극장의 객석을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방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의미를 독해해주었다. 실은 큐레이터가 아니라 ‘해설자’나 ‘도슨트’ 정도의 이름이 걸맞은 일이었다. 15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혼자 말한 후에는 객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해설을 듣기 위에 자리에 남은 적지 않은 관객들은 영화에서 감독이 감추어놓았을 수수께끼들에 관심이 있었다. 한 번은 작품에 등장한 상징을 알려달라는 한 관객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가 다른 관객으로부터 ‘두부’에서 순수함이라는 상징을 왜 읽지 못하느냐는 꾸지람을 들은 일도 있다. 주인공 의상의 색상에서 어떤 변화의 도식을 찾아내려는 집착의 눈을 마주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지만, 아트하우스 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의 성향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핑계로 쉬운 길을 택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약간 덜었고, 이론 용어를 덜 쓰게 되었으며, 때로는 관객의 반응에서 보람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읽는 어떤 습관이 생겼고, 따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비평과는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비평은 단지 감독이 의도한 것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2020) 관련 전주국제영화제 장기 상영회 중 필자 진행 GV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X ) 2. 내가 가장 최근에 활동한 장소는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 다. 나는 영화제 기간에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비평워크숍 ‘활동사진’의 전체 진행을 맡았고(이동윤 평론가가 처음 기획한 것으로, 나는 멘토로 참여해오다가 작년부터 이 일을 했다), 영화제 GV의 모더레이터를 했다. 인천 지역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디아스포라영화제 상영작을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프로그램, ‘영화, 학교가다!’의 모더레이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역할은 주로 앞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GV(Guest Visit) 또는 관객과의 대화. 영화 상영 후 게스트(주로 감독)를 초청하여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자리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과 관객 사이의 대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작품을 세심하게 보고 정보를 찾아 알고 있어야 했다. 아트하우스 영화 해설과는 다르지만, 나는 GV 진행을 하면서도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로는 비평적 시각을 지켜내면서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의 무의식적인 수행을 발견하게 하는 뛰어난 GV 진행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경험이 많지 않고 역량이 부족한 내게는 진행의 매끄러움이 우선 과제가 되었고, 순발력을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진행자는 이 열린 대화의 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해야하기 때문이다. 객석의 질문이 없거나 감독의 대답이 지나치게 짧아 진행자의 말이 많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단편 섹션에서 한 쪽으로만 질문이 몰리거나 순차통역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해서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다. 사실 이것들은 사전에 잘 준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관객이 말을 걸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제는 클래식 밈이 된 ‘GV 빌런’의 존재 말이다. GV에 참석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분에 대한 저마다의 피로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진행자의 덕목일까? 나는 빌런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관객으로서 나는, 가끔은 일부 관객들이 질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얼마 전 참석한 한 영화제 GV에서 나는 영화제에 거의 처음으로 온 듯한 어느 비시네필 관객이 영화를 본 후 한껏 들뜬 자신의 감상을 길게 늘어놓는 동안 관객 여럿이 우르르 자리를 뜨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장황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관객의 소감과 그에 대한 감독의 대답에는 왠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있었다.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영화, 학교가다!’ 프로그램에서는 시네필이 만족할 전문성 있는 질문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초대받은 감독과 진행자인 나는 이곳에서 영화제 GV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네필 바깥의 시선들을 만난다. 학생들이 영화에 대해 주로 궁금해 하는 것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학생들에게 되돌렸을 때 흥미로운 반응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주인공인 남자 고등학생이 숨겨왔던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친구들 앞에서 밝히며 끝나는 한 작품(< 동우 >(박호범, 2022))을 여러 학교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시선을 갖게 된 두 집단의 의견이 뚜렷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로 여학생들이 이 영화의 결말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암울한 후일담을 예상한 것이다. 나는 이후에 이 작품을 보게 된 학생들에게 앞서 확인한 이 결과를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가 촉발시킬 수 있는 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3. 한 명의 강사가 강의를 하고 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는 일반적인 비평워크숍들과 달리, ‘ 활동사진 ’은 한 명의 멘토와 네 명의 참가자로 구성된 복수의 모둠이 각각 활동하는 워크숍이다. 총 4회 차로 구성된 이 워크숍에서 각각의 모둠은 이틀간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작들을 함께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제를 기준으로 1주 전에 영화 비평 특강이 있고, 1주 후에는 비평문 초고에 대한 멘토의 피드백 시간이 있으며, 활동 종료 후 비평문 최종고를 엮어 비평집을 발간한다. 나름대로 고심한 구성이지만 비평적 글쓰기를 훈련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이 워크숍 활동의 정점은 글쓰기보다는 활기 넘치는 토론시간이라고 느껴진다. 여러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며 ‘그간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주위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비슷한 관심으로 만난 일면부지의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본 후 즉각적인 감상을 나누고 각자의 비평적 주제를 찾아가는 일은 분명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노출된 정보와 평가가 거의 없는 영화제 작품들을 선입감 없이 보고 판단한다는 상황이 흥분과 긴장을 더하는 것 같다. 워크숍 '활동사진' 활동 장면 (사진: 필자 제공) 영화를 본 직후에 이루어지는 토론은 말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본 것을 글로 바꾸고 고치면서 생각을 정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멘토가 주제를 제시하며 방향을 잡지만, 간혹 대화는 참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엉뚱한 길목을 기웃거린다. 한 모둠이 토론하는 모습을 한발 떨어져서 지켜본 적이 있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린 한 참가자가 다소 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다. 그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한 사람의 몸짓과 그의 말이 언제 끝날 지를 살피고 있는 듯한 다른 사람의 복잡한 얼굴이 함께 보였다. 여느 대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상황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입되었다. 나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과 보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그 영화가 전혀 다른 말을 걸어올 수 있다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4. 역동적이고 미묘한 대화의 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극히 단순하게도 김덕중 의 < 컨버세이션 >(2021)을 떠올린다. 유운성 평론가는 “ 한국독립영화 속, 대화의 언어 ”라는 글에서 한국독립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빈약한 연출을 지적한 바 있다. <컨버세이션>은 한국(독립)영화에서 긴장감을 만들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쳤던 ‘죽은’ 대화 장면을 섬세한 연출로 살려냈다. 이 생생한 장면들에서 우리는 대화를 구성하는 것이 말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세 친구가 집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대에 파리에서 함께 유학 생활을 한 적 있는 은영( 조은지 ), 다혜( 송은지 ), 명숙( 김소이 )이 은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모인 것이다. 코너형 소파에 나누어 앉은 이들의 모습은 풀숏의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함께 보인다. 카메라를 마주한 명숙이 먼저 파리 시절에 새겨진 자신의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새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혜가 입을 뗀다. 그런데 한 박자 늦은 은영이 다혜보다 큰 자신의 목소리를 밀고나간다. 카메라 가까이에 앉은 은영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화면에서 얼굴이 가려져버리던 다혜가 결국 은영에게 발화권도 빼앗긴 것이다. 이제 카메라는 은영과 다혜를 마주보는 자리로 옮겨간다. 다혜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은영은 삶에 대한 느낌과 남편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화면 오른쪽에 있게 된 명숙이 끼어들어 말하기를 시도하지만 은영의 말이 멈추질 않는다. 실패한 명숙은 이후 소파에 몸을 기대어 슬며시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동시에 나온 목소리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떤 말들은 묻혀버리는 상황. <컨버세이션>은 발화 경쟁이 있는 익숙한 대화 상황에서 활동하는 힘들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또렷하게 가시화한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의 장을 구성하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이 장면에는 초대받지 않은 바깥의 존재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끓고 있는 커피포트는 은영을 프레임 안팎으로 들락거리게 해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근처에 잠들어 있는 아기의 존재는 음량을 조절하게 만든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강한 태양마저 은영의 얼굴 위에서 빛과 그림자의 그림을 부단하게 그린다. 이 바깥의 존재는 이어진 씬에서 대화의 다른 차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다혜와 명숙이 아파트 복도 끝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다혜가 명숙에게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하면 ‘빡이 친다’고 말하며 앞선 발화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런데 이처럼 강한 토로 후에 이어진 다혜의 말은 하필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묻혀 때때로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게 된다. 건물 고층에 서있는 두 사람과 건너편 같은 높이의 어느 장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사이에 마치 심연과 같은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인물들의 대화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것들이 시선과 몸짓을 통해 드러났다면, 이 장면에서는 인물들의 세계와 관객이 자리한 현실 사이에 놓인 모종의 간격이 시청각적인 거리감으로서 드러난다. 말하자면, 어떤 외부가 항상 대화에 끼어들고 있다. (영화와 현실의)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객 사이의 대화에서도. 5. 대화의 장에서 발신자의 말은 수신자에게 진실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다. 홍상수 의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는 이 불완전한 ‘말’을 대하는 한 인물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동일한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 같은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이틀간의 여정이 반복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수원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하루 일찍 도착한 영화감독 함춘수( 정재영 )는 화성행궁을 서성이다 윤희정( 김민희 )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윤희정의 화실에도 간다. 만남이 술자리까지 이어지자 함춘수는 부지런히 구애를 하고, 윤희정의 요청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지인들과 합석하게 된다. 영화의 1부(‘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와 2부(‘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 기본적인 상황 위에서 그려진다. 이때, 1부와 2부의 두 세계 사이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상황을 대하는 인물의 말, 그리고 그에 따른 표정과 몸짓, 감정 등의 변화다. 1부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이 나누는 대화들은 우스꽝스럽다. 두 사람은 ‘알 것 같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서로 반복한다.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정말로 좋아요. 뭘 한 건지 알 것 같아요.” 이어서 그는 자기 영화를 표현하는 데 쓰던 말로 그녀의 그림을 상찬한다. 하지만 그날 밤, 술자리 동석자들에 의해 그가 빈말을 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고, 함춘수는 자신에 대한 말(사실과 소문)들에 둘러싸여 난처해진다. 결국 수치심을 느낀 윤희정이 자리를 벗어나자 둘의 관계는 맥없이 끝나버린다. 이튿날, GV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이냐’는 ‘빌런’같은 질문을 던진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연 함춘수는 기어이 격분하며 이렇게 소리치고는 극장을 나간다. “우리의 삶은 그런 말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말의 힘? 저는요, 그런 중요한 말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말에 대한 그의 입장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어차피 진실을 전하지 못하는 말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냉소적인 태도 말이다. 그렇기에 함춘수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텅 빈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감’이라는 착각, 그것이 주는 편안함에 기대려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1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함춘수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그가 독백의 공간에 갇혀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만을 남긴다. 2부의 함춘수는 ‘말’에 대해서는 1부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말을 ‘함부로’ ‘많이’ 하면서 어떻게든 진실을 전하려고 분투한다. 윤희정은 처음엔 함춘수의 말에 상처받지만 곧 그를 믿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새벽이 오자 두 사람은 그들의 짧은 만남을 정리하며 부드러운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다. 함춘수는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했다’며 사과의 말을 건네고, 윤희정은 함춘수의 실수를 덮으며 자신이 ‘말을 잘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다독인다. 또 다시 이튿날, 다행히 이번 GV는 무사히 끝난 것 같다. 함께 담배를 피우던 모더레이터가 함춘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태프에게 좀 전에 만난 GV 빌런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아까 안경 낀 걔는 너무 깼어.” “너무 말을 많이 하죠?” 함춘수는 여기서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온 윤희정과 재회한다. 이 대화 장면은 영화의 예고편으로 쓰였다. 그런데 예고편은 영상을 거꾸로 재생한다. 이 역재생된 화면 위로 ‘지금’, ‘그때’, ‘맞다’, ‘틀리다’라는 단어들로 조합된 말들이 자막으로 나온다. 말의 언어적 의미가 소거된 이 영상에는 서로에게 집중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 더욱 잘 보인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그 비언어적인 소리와 시각적 표현들을 통해, 혹은 우리가 배우지 못한 미지의 언어를 가지고서 정말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이 세계를 탐험하는 동안, 비언어적 의미들이 함께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영화는 대화들로 구성된다. 영화 속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인물과 세계 사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대화가 있다. 영화비평은 그런 영화와의 대화다. 우리는 영화의 대화를 추적함으로써 그것이 의도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 외부의 활동을 발견한다. 아니, 거꾸로 이 잉여적인 것이야말로 비평이라는 대화의 장을 연다. 비평은 다른 비평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극장의 평론가 대담이나, 온라인 팟캐스트 같은 것들이 있다. 내가 이따금 참여하는 ‘ 비평의 편지 ’는 영화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간 세 통의 편지를 독자에게 발송하는데, 잠재적인 다수의 수신자를 가정하고 쓰인 사적 대화라는 점에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를 닮았다. 영화의 대화, 영화와의 대화, 그리고 비평의 대화는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독백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 외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금’에 충실한 말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강소정(영화평론가) l 가끔 영화에 대해 말하거나 쓴다. 제2회 독립영화비평상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부문 당선.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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