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manii]htc 센세이션 외형
- 제작년도
- 2011
2000년대 초반 한국을 포함한 세계 영화계에서 10대 난도질 영화가 호러 장르의 트렌드 세터 역할을 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느린 속도로 기어오는 아시아 산(産) 처녀 귀신 스토리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이런 유행 경향을 의식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윤종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 소름 >(2001)은 영적인 요소와 잊히지 않는 서프라이즈의 순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로움과 비극적인 과거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불안을 성찰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는 낡은 아파트 주민들을 둘러싼 잔인한 고통과 불행을 다루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쟁점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장소에 깃든 역사, 공포의 기원으로서 공간의 의미 맥락을 환기하는 신실한 드라마였다. <소름>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두운 심연에 대한 음울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이 서사의 주동 인물인 택시 운전사 용현을 연기한다. 용현은 돈을 아끼고 직주근접을 실현하기 위해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겨울의 초입쯤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 이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빌려 사는 504호에 깃든 비극적인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된다. 전 세입자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년 전에도 같은 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때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 아파트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준 이는 미스터리 소설을 집필 중인 505호 소설가 이 씨(기주봉)이다. 용현은 편의점 점원으로 만난 선영(장진영)이 아래층에 사는 동네 주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느 날 밤, 퇴근길에 선영을 태워다 준 뒤 도박 중독에 걸린 남편에게 그녀가 학대당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선영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용현은 남편의 시체처리를 도와준다. 내밀한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가까워 지지만 과거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고 아파트 곳곳엔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30년 전의 미스터리가 새롭게 조명된다. 유령의 집은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서 단골 무대를 제공하는 세팅이다. <소름>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집인 아파트를 미스터리와 악몽의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부(富)와 편의, 효율, 안전, 청결 따위의 현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한 ‘집’이기에 앞서 근대화의 표상이다. 경제성장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아파트 단지는 빠르게 성장해 온 이 국가의 발전을 상징해 왔다. 아파트 시세의 등락이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물질적, 정신적 삶을 지배해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의 아파트 개발은 도시 계획의 핵심을 관통하였고 경제성장의 양적, 질적 성과를 보여주는 국가의 전략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소름>의 무대가 되는 미금아파트 장면들은 1969년 준공되었으나 지금은 역사적 기념비 또는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금화시민아파트에서 촬영하였다. 중산층의 신화와 대조적으로 <소름>의 아파트가 소외된 방외자들이 사는 낡고 퇴락한 거주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현과 이 씨의 첫 번째 대화 장면에서 이 씨는 이 아파트가 곧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이 씨는 미금아파트의 역사에 기초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 중심이 되는 것은 용현이 사는 504호이다. <소름>은 모더니티의 표상으로서 아파트를 공포의 기원으로 재설정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상의 아이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다가서는 장면이 있다. 용현이 미금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으로 열리는 오프닝은 정교한 카메라 프레이밍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설정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용현의 뒤통수를 잡은 바스트 쇼트로 시작하는 도입은 일군의 아이들이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방향과 속도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초코바를 물어뜯는 용현의 기이한 제스쳐를 보여준 뒤 먼 거리에서 촬영한 미금아파트의 쇼트로 이행한다. 근경과 원경을 왕래하는 인상적인 편집은 낡은 아파트 건물을 비추는 햇살, 기우뚱하게 선 아파트에 짓눌린 용현의 왜소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쇼트의 프레이밍과 구도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컴컴한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용현의 뒷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다음 쇼트에서 자신이 머물 504호가 있는 층의 복도에 다다른 용현은 어둡고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용현이 끌고 다니는 기묘한 가방을 강조하던 카메라는 서사의 비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사물(천장에 매달린 3구 조명)에 오래 머무른다. 외부에서 내부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평평함에서 깊이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쇼트의 구성과 편집은 서사의 초입에서 관객들이 낯선 공간과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설정이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아파트 건물은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는데, 복도의 조명이 켜졌다 꺼지면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고, 창문은 분노한 얼굴처럼 기묘한 패턴을 형성한다. 인격화된 아파트는 소외된 캐릭터들과 교감한다. 인물의 배후 스토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제자리를 찾은 후에도 용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예측불허의 느낌을 준다. 조용한 방에서 그가 이소룡 흉내를 내거나, 거울을 보며 의문의 상처를 살필 때 또는 아파트 복도의 심연 같은 어둠을 응시할 때에도 신경세포를 긁는 것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헤어스타일부터 줄담배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년간의 학대 끝에 형성된 냉담한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으로 추정되는 선영의 언행도 한 맥락 안에 있다. <소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공포를 일종의 연쇄적인 사건들의 네트워크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기능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운이 좋지 않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저들은 세대를 이어가는 끝없는 공포의 순환에 갇혀 있다. 여기엔 오랜 시간 최고의 선으로 추구되었던, 개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비극의 연쇄고리가 놓여 있다. 인생에서 겪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공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한 측면처럼 느껴진다. 세밀하게 디자인된 악몽 같은 설정, 귀기 서린 음악, 놀라서 뛰어오르게 만드는 설정(jump scare)이 등장하는 살인 스토리 등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요소도 있지만, <소름>은 공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더 가깝다. 504호의 비밀, 몰살된 가족, 과거의 귀환은 이 공간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녹아있으며 장소의 인격화는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아파트가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질 정도로 팽창한다. 어두운 복도와 벗겨진 페인트, 철골을 드러낸 건물의 표면, 눅눅한 계단, 휘갈겨진 낙서 따위를 시각화하는 장면들에서 아파트는 괴물과 살인자, 유령을 대신한다. 스토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느린 템포는 불안감을 증폭하며,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만큼이나 지나가는 말과 그에 대한 반응이 극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끓고, 머리카락이 솟고, 오싹한 장면들로 압도하는, 뉘앙스에 기초한 공포지만 아파트 주민의 삶에 깊이 빠져들게 하여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운명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윤종찬의 연출은 점진적으로 감정의 온도를 비등점으로 향하게 한다. 무엇이 한국의 공포영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모더니티의 유령들, 근대의 뒤안길에 대한 회고적 성찰, 변화하는 젠더 정치학이 멜로드라마적인 과잉의 수사와 연계되어 어두운 과거를 불러내는 플래시백 구조 따위를 거론할 수 있다. 장르의 스테레오타입에 부정의 자세로 선 <소름>은 여러 등장인물의 절망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어둡고 실존주의적인 작품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유령 소녀가 눈에 머리카락을 달고 관절을 꺾어대는 호러 영화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적 맥락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의 사회학적 함의와 공명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암울하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비극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공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괴담의 꼴을 한 이야기지만 1995년 6월 29일 발발하여 사망 502명, 5명 실종, 부상 937명의 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윤종찬 감독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존 포드에 관해 말하게 될 이 연재의 제목을 ‘존 포드 이야기’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내가 아직 존 포드 감독론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이미 많은 존 포드론이 출간되어 있고, 이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에 접근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존 포드론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길을 찾고 있는 중일 따름이다.(사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1997년 토론토에서 비디오로 포드의 < 도망자 The Fugitive >(1947)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전부터 < 수색자 >와 < 역마차 >를 좋아해오고 있었지만, 이 영화는 내가 아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괴기스럽지만 신비롭고 매혹적인 표현주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를 드디어 35mm 프린트를 보고 그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포드가 어디까지 간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도망자 The Fugitive>(1947) 다른 하나는 한국의 시네필들과 영화애호가들의 존 포드에 대한, 나아가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유럽 시네아스트들에 대한 편애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 고전기 작가들은 오슨 웰즈와 알프레드 히치콕을 제외하면 여전히 무지와 무관심의 사이 어디쯤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혹은 유럽 출신의 옛 거장들조차 점점 잊혀져가는 듯한 불길한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한국에는 존 포드에 관한 단 한권의 역서도 저서도 출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역자로 참여한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한나래)의 한 챕터의 절반가량이, 장르적 시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존 포드를 주의 깊게 다룬 유일한 한글본이다. 이런 상황은 시네마테크 프로그램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산에서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을 8년째 해오고 있는 내 경험으로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 기획전은 객석이 텅텅 비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취향의 시네마테크 관객들이 모여 있는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유럽과 일본의 시네아스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장 르느와르,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이름은 빈번히 오르내리지만,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등의 이름은 찾기 힘들다. 어떤 시네마테크도 수익 혹은 점유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아직 우리에게 존 포드는 새롭게 해석되기보다 먼저 소개되어야 할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 이야기’라는 간판을 단 이 곳에서 나는 한 사람의 해석자가 아니라 소개자로서 존 포드를 말하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몇몇 사람이라도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 거장의 세계와 만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든 음악의 흐름은 바하로 되돌아간다”는 쇤베르크의 말을 모방해 나는 ‘모든 영화의 흐름은 포드로 되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일 이 말을 포드가 직접 듣는다면 그는 화를 내며(그는 다혈질이었고 예술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그리피스나 무르나우에게나 어울려”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또한 다른 만신전의 명부를 가진 많은 영화전문가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이다. 존 포드만큼 우뚝 솟은 많은 감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들을 어떤 영화들보다 원형적이라고 느낀다. 고요한 대지, 말없는 사나이, 떠나는 자의 뒷모습, 발설되지 않은 신음과 폭발하는 광기, 축제와 난장의 활력과 도취, 경건한 제의, 안식으로서의 유머, 추하고 사랑스런 얼굴들, 숭고한 배려와 보살핌, 악인의 예의 혹은 성인(聖人)의 비행(非行),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매혹과 불안과 피로의 풍경, 소멸해가는 공동체의 향기, 그들의 배열이 빚어내는 리듬과 화음과 아름다움 등등 내가 영화를 보고 경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영화에 담길 수 있을까.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우리가 영화에 빠지게 만든 대부분의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의 포드가 아니라 여러명의 포드가 있을 것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슨 웰즈에게 좋아하는 감독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웰즈는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답했다. 웰즈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그의 대답을 존 포드의 다면적 원형성에 대한 찬사라고 느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는 것은 장르와 사조를 넘어 시네마틱한 것들의 난장으로 입회하는 것이다. 존 포드 John Ford 존 포드는 189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다. 1917년부터 1966년까지 무성영화, 단편,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140여편의 영화를 감독했고(무성영화의 상당수는 소실되었다), 전무후무하게 4번의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으며 < 철마 The Iron Horse >(1924)를 비롯한 많은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할리우드 주류에서 환대받았고 세속적 명예와 부를 얻은 가장 출세한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존 포드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장인으로 존중받았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존 포드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다. 포드 스스로도 자신의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화를 ‘시’라고 부른 한 평자의 말을 ‘헛소리’(horseshit)라고 일축했다. 존 포드가 당시의 미국 특히 뉴욕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꽤 알려진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경험담이다. 존 포드의 열렬한 팬인 스콜세지는 뉴욕대학교(NYU) 강사 시절이던 1969년 존 포드의 영화를 수업시간에 상영했다. 당시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티(마틴 스콜세지의 애칭)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가짜 권총을 든 채 교실에 들어왔다. 원래 상영할 예정이던 < 이창 > 대신 존 웨인이 가증스런 인종주의자를 연기하는 서부극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창>을 보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모두 낙담해 ‘우’하고 소리를 질렀다. < 그린 베레 >가 공개중인 때로 존 웨인은 닉슨 다음으로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교실을 나가는 학생은 성적을 주지 않겠어’라며 가짜 권총을 든 채 스콜세지는 교실 문앞에 버티고 섰다. ‘영화의 제목은 < 수색자 >다. 이건 서부극 최고의 걸작이야’라고 말했다. 영사가 시작됐다...... 쓸쓸한 존 웨인의 모습이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문을 통해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1960년대 진보적인 뉴욕 대학생들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던 < 수색자 >는 2012년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가 전세계 846명의 영화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세계영화사 10베스트 명단의 7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존 포드는 가장 위대한 감독 리스트에서 칼 드레이어와 함께 6번째 자리에 올라있다.(<수색자>가 10년마다 집계되는 이 명단에 처음 오른 것은 포드 사후 9년이 지난 1982년이었다.) <수색자 The Searchers>(1956) 또다른 사례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에와 연관되어 있다. 두 사람은 1975년초 자신들의 작품 <모세와 아론>이 상영되는 뉴욕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마르크주의자인 브레히트의 정신적인 제자를 자임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에 2년 전에 죽은 존 포드를 보고 싶다고 말해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리처드 라우드를 당황케 했다. 당시 젊은 영화학도였던 태그 캘러거는 이렇게 회고한다. “스트라우브에 관한 최초의 책을 출간한 바 있는 리처드 라우드는 존 포드를 스트라우브의 안티테제로 통렬히 비난한 바 있다. 라우드의 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뉴욕 사람들은 포드의 영화가 인종 차별과 군국주의, 가부장제, 쇼비니즘, 감상적인 통속성, 진부한 상투성을 옹호한다고들 했으며, 따라서 그를 혐오하는 것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태그 갤러거는 두 사람을 집으로 초청해 거실 바닥에서 존 포드의 < 순례 여행 Pilgrimage >(1933)과 < 도노반의 산호초 Donovan’s Reef >(1963)을 16mm 프린트로 같이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 장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경험담을 전한 태그 갤러거는 10여년 뒤 「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1986)를 썼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존 포드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꼽힌다.) 많은 고전기 할리우드 거장들은 당대에는 비평적으로 경시되다가 영화 이력의 말기 혹은 사후에 주로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에 의해 ‘작가’로 추앙되고 미국 평단이 이를 뒤따르는 경로를 밟았다. 잘 알려진 대로 1967년에 첫 출간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저 「히치콕과의 대화」는 유능한 흥행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존 포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누벨바그 세대가 작성한 ‘작가’ 명단에서 빠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 니콜라스 레이 등에 대한 숭배에 비하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편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것이 누벨바그 세대의 대부인 앙드레 바쟁이 존 포드의 매력에 둔감한 데서 오는 ‘바쟁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바쟁은 서부극에 관한 비평을 여러 번 썼고 < 수색자 >를 수작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같은 해에 나온 버드 보에티처의 < 7인의 무뢰한 Seven Men From Now >(1956)을 더 높이 평가했다. 누벨바그 평론가들의 기지였던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 1958년 12월호에 실린 올 타임 베스트 명단의 24위 안에는 존 포드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1위는 무르나우의 < 선라이즈 >였다). 히치콕에 열광한 프랑수아 트뤼포도 존 포드에 대해선 냉소적이었다. 1975년에 쓴 에세이에서 트뤼포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평가 시절에 나는 존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악평을 두세번 썼다. 하지만 TV에서 < 말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를 보고 내가 얼마나 장님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영화를 계속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은 장 지오노만큼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The Films in My Life」). 하지만 포드의 사후에도 이 정도 논평이라면 어쩐지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4년에 쓴 추도문에서도 트뤼포는 “포드의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항상 캐릭터에 우선권을 준다는 점이다.... 그는 모파상과 투르게네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썼다. 확실히 트뤼포에게 포드는 문학적인 감독으로 비쳤던 것 같다. 히치콕에게 트뤼포가 있었다면 존 포드에게는 린지 앤더슨 Lindsay Anderson(1924~ 1993)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영국 프리시네마의 기수이자 기념비적 작품 < 만약에... If... >(1968)를 만든 이 비평가/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자칭 ‘포드 중독자’였고,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을 통해 1951년부터 존 포드 영화에 관한 열렬한 찬사를 바쳤으며 다섯 차례 포드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종종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누벨바그 세대의 비평만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그나마 그의 비평과 인터뷰를 모은 단행본 「About John Ford」는 1981년에야 첫 출간되었다.(하지만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 수색자 >를 퇴조의 징후가 명백한 영화로 꼽는 그의 독특한 견해는 존중할만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존 포드는 고전기의 거장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견된 시네아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에 대한 비평의 지체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자국 영화에 냉담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보적인 ‘전위 작가’, 보수반동의 ‘고전적인 작가’ 같은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관념들이 영화를 볼 힘을 뺏기 쉽다는 것이다. 셋째는 1970년대까지도 영화사라는 개념의 성립에 필수적인 영화를 볼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2005년 5월25일 서울의 필름포럼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하스미는 “그래서 존 포드에 대해선 우리(동양인)가 서양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기세 좋게 주장했다. 하스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리와 시기에 있는 셈이다. 이 연재는 포드의 전기적 사실들과 그의 작품을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 회에는 존 포드라는 사람에 대해 주로 소개하려 한다. 존 포드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 모두 모순투성이인 복합체라고 말한 사람은 태그 갤러거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은 완전히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존 포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존 포드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흥미로웠다..(계속)
황해도 해안지역의 작은 마을 ‘길소뜸’. 소나기 쏟아지는 벌판의 원두막에서, 염전의 호젓한 소금 창고에서, 달빛 쏟아지는 숲 속에서 자연의 축복을 받으며 풋풋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 한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으로 찢겨지고, 그 시대의 누구나 그랬듯이 참담한 고통을 견디며 세월의 파도 위에 삶의 격랑을 헤쳐가게 된다. 살다 보니 의사의 눈이 아니면 아무도 그들의 몸속에 박혀있는 ‘총알’을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각자는 멀쩡한 외양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KBS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고, 그들은 길소뜸의 옛 낭만과 아픔을 되짚어가며, 둘 사이에 생긴 아들이라고 추정되는 한 사내(석철)와 핏줄 확인 작업을 벌이지만 끝내 단절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상처의 아픔만 확인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궤도로 되돌아가게 된다. 스토리는 간단명료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해방 이후로부터 당시까지 30여 년간의 연대표를 작성해야 할 만큼 복잡다단한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상처는 그동안 역사의 벽장 속에 그냥 처박혀 있던 셈이다. 그것은 언젠가 그리고 반드시 손을 봐야 할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니 메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단념해버린 상처였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초 KBS TV에서 벌인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과 함께 안으로 곪고 곪았던 상처가 일시에 터져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나라 안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민족의 일체감이 소름처럼 돋았고,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영화 < 길소뜸 >은 그 격한 감정들이 대충 가라앉아 버렸다 싶은 시기에 그 벽장을 다시 열고 그때 손 못 댔던 깊숙한 구석의 먼지를 털었다. 임권택 감독과 시나리오를 쓴 필자는 TV가 벌여놓은 일들 속에 파묻혀 버리지 않으면서 TV가 놓치고 포기한 것들을 차분히 재조명했다. 영화에서는 자주 이산가족 찾기의 상봉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TV 모니터나 그것을 지켜보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개개인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국민이 특수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당시의 정경을 환기시킨다. 주인공 화영( 김지미 분)의 안락한 저택에서도 가족들이 모여 앉아 방송을 보고 있다. 엄마의 ‘비극적 운명’을 알지 못하는 자식들도 TV 속의 사연을 보면서 울고, 남편( 전무송 분)도 전쟁 때 헤어졌다던 아들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화영은 KBS 만남의 광장을 향하면서 옛 생각에 잠긴다. 해방되던 해 화영의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일제강점기 동안 만주 등 이역을 떠돌다가 귀국을 한다. 이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사의 이산경험으로서 첫번째 형태이다. 또 다른 양상들은 영화 속 TV의 상봉 장면에도 있고, 전쟁 때문에 헤어진 화영과 동진( 신성일 분)과 그들의 아들 석철의 유소년 시절에도 있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이 이산가족 찾기라는 대대적인 사건과 이런 현실의 반영을 통해 다시 전쟁을 체험케 하는 매우 현실적인 영화로 이야기의 허구에 시달려온 관객들에겐 상큼한 충격으로 전달되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뼈가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감독과 작가의 견해였을 것이다. 주인공 화영과 동진의 사연이 제아무리 기구하다 해도 < 길소뜸 >의 영화적 승패는 거기 달려 있지 않았다. 영화는 결론에 연연하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던질 뿐이다. 지극히 한국적이며 역사적인 이 현상에 대해 영화는 테두리 밖의 불필요한 것을 넘보지 않았고, 그 대신에 문제 제기의 과정을 더욱더 탄탄히 함으로써 어설프게 덮어놓은 상처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하고자 했다. 영화가 제시하는 시각에서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화약 냄새와 포성은 화영과 동진의 아들인 석철에게 까지 아직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거칠고 황폐해진 석철이 부모 손을 잡고 '아버지! 어머니!' 하고 목메어 울부짖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 화영은 제가 낳은 자식이 거의 틀림없다는 법의학 박사의 말을 묵살한다. 영점 몇 퍼센트의 오차마저 수긍할 수 없다며 단호히 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 이 에필로그 부분이 모정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논란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혈액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화영이 전화로 지금의 남편을 포함해서 아이들과 정겹게 통화하는 모습은 그런 비난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 중의 하나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기어코 몸속에 박힌 총알을 꺼내야 할 것인가,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구태여 칼로 드러낼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후자를 택한 어머니를 보여준 것이다. 그녀가 거부한 것은 아들 석철의 황폐한 모습이 아니라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전쟁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석철을 아들로 인정함으로써 애써 떨쳐버렸던 화약과 피 냄새를 이미 다져놓은 제 일상에 끌어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전쟁을 두 번 치를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 부분에 오해가 없도록 사전에 간결하지만 치밀한 복선을 깔아두었다. 세사람이 타고 가던 차에 개가 치이자, 석철은 죽어가는 개를 먹을거리로 여겼고, 동진은 살아있는 목숨이 죽어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화영은 그것을 오직 혐오스러운 물체라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개를 놓고 세사람이 보인 그런 상반된 반응은 전쟁에 대한 그들 저마다의 처지이며, 안으로 잠재되어 있는 각자의 의식이기도 했다. 이를 좀 더 깊이 보면 각자가 제 삶의 궤도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재 이산의 암시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 < 길소뜸 >엔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압권인 장면이 있다. 임권택 감독은 의식과 소신을 영상 속에 좀 더 튼실히 다지는 무기로 롱테이크의 묘미를 십분 활용했다. 이를테면 동진이 아내( 오미연 분)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 서로의 아픔을 내뱉고 감추는 대목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기능을 잃은 듯이 2분여 동안이나 한 장면만 붙잡고 있는 롱테이크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긴장과 호소력이 숨을 멎게할 만큼 백미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만다라 > 이후 두번째로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에 진출해 최종까지 찬사를 받았던 < 길소뜸 >은 임권택 감독과 김지미 가 북한영화 < 돌아오지 않는 밀사 >로 영화에 참가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내외를 극적으로 만나게 했다. 엊그제까지 충무로에서 고락을 같이 했던 그들의 역사적인 재회는 또 하나의 분단의 실체로서 국내외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베를린에서 최은희와 김지미를 만나게 한 바로 그 영화 <길소뜸>. 개봉 당시 대한극장에 커다랗게 걸렸던 간판의 카피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 길소뜸 >은 22회 시카고 영화제에 참가해 영화제 창설자 게츠(Getz)를 기리는 ‘게츠 세계평화메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