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
- 감독
- 김대진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김추련, 천은경, 정진, 김형자, 권순명, 정혜선, 김애경, 김인문, 길달호, 주상호, 나갑성, 박예숙, 조학자, 유경애, 전숙, 유명순, 나정옥, 박종설, 강성환, 서평석, 김대현, 조경희, 김경란, 김애란, 천유선, 김명희, 김은지
충무로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장르적 지형도의 변화를 겪는다. 크진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는 기록할 만하다. 먼저 여전한 장르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이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 류의 신파 멜로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합작(혹은 위장 합작)을 통한 무협 액션 영화도 왕성했다. 합작과는 무관하면서도 ‘중국식 제목’을 단 한국영화들, 그러니까 < 무림오걸 >( 김시현 , 1979) < 애권 >( 이형표 , 1980) < 소림사 주방장 >( 김정용 , 1981) 같은 영화들의 러시가 이뤄졌고, < 협객 시라소니 >( 이혁수 , 1980) 같은 전통적인 ‘따찌마리’ 액션도 이어졌다. 사라진 장르도 있었다. 호러가 대표적이다. 메이저 장르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공포 영화는 198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부활을 목격하기 위해선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까지 1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새로 생긴 장르도 있었다. 아동용 SF 액션이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특수효과로 점철된, ‘우뢰매’ 시리즈(1986~93)나 ‘별똥왕자’ 시리즈(1987~88)는 198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변형된 장르가 있다. 일종의 진화라고 해도 좋을 거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에 연령대를 조금 높여서 < 대학얄개 >( 김응천 , 1982)로 다시 태어났고, < 오성군 한음군 >( 박호태 , 1988)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1989년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이후엔 사회적 이슈와 결합되어 1990년대 초를 장식했다. 1. 토속 영화의 조짐이 보였던 < 심봤다 > 2. 1985년에 나온 < 뽕 >은 토속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으로, 이후 컬트로서 추앙받는다. 3-4. 정윤희 가 주연을 맡았던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왼쪽)와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오른쪽). 자연 속에서 파라다이스를 즐기던 순수한 남녀는 외부자에 의해 그곳을 침범 당하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1980년대에 또 하나의 ‘변종’이 있다면 흔히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제목으로 지칭되던 그 영화들이다. 이 글에선 ‘토속 영화’라는 명칭으로 통일할 이 영화들은, 거칠게 정의 내리면 이른바 ‘문예영화’가 에로티시즘을 만난 결과다. 1970년대까지 검열의 수위 안에서 원작 소설을 표현했다면, 1980년대엔 과감해졌다. 과거 이미 만들어졌던 정비석 의 『성황당』, 이효석 의 『분녀』, 나도향의 『물레방아』 등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정진우 , 1981) < 산딸기 >( 김수형 , 1982) < 물레방아 >( 조명화 , 1986) 등으로 좀 더 에로틱하게 재등장했고, 김유정 의 『땡볕』 『떡』 등도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문예영화의 범주를 벗어난, 다소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거나 창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토속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로티시즘 사극과 구분되어야 한다. 토속 영화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토속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는 사극이 지니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며, 시대 배경은 식민지 시기 농촌이나 어촌이다. 공통점도 있다. 1980년대 토속 영화와 사극은 한국영화에서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장르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며 죽음에 이르는 여성들의 영화. 그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모순을 떠안아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당시 외국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리면 서구 관객들은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여자를 때리느냐”고 항의성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1. < 산딸기 >의 한 장면. 물레방앗간은 토속 영화에서 반복되는 핵심적 공간이다. 주로 비밀스러운 정사가 이뤄지는 그곳에선 종종 여성의 운명이 결정된다. 2. < 산딸기 >의 엔딩. 명준과 분녀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명준은 말한다. “그래 저 학들처럼 천년만년 살자.” 토속 영화는 ‘새’의 상징을 자주 사용한다. 정진우 감독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를 만들었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3)까지 묶어 ‘새 3부작’), < 여자의 성 >에서 별녀는 어릴 적 숲에서 죽어가는 새를 데리고 와 살리는데, 그 가련한 새는 이후 별녀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산딸기 2 > <여자의 성>은 모두 새 소리를 섹스의 신호로 사용한다. 3. < 숲속의 바보 >는 토속 장르에 ‘백치 여인’ 캐릭터를 끌어왔다. 4. 문예 영화는 1980년대에 토속 영화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지속된다. 사진은 김동인 원작의 < 감자 > 그 시작을 살펴보면 1970년대 말에 조짐이 있었다. 선두 주자는 정진우 감독이었다. 이은성 작가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 심봤다 >(1979)는, 문예 영화의 톤이 짙긴 했지만 이후 등장할 토속 영화 트렌드를 예견케 했고,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가 이어졌다. 결정타는 김수형 감독의 1982년 작 < 산딸기 >였다. 안소영 - 선우일란 - 강혜지 - 소비아 로 주연 여배우의 변화를 겪으며 1994년 6편까지 이어진 이 토종 프랜차이즈는 토속 영화의 얼개를 만들었다. < 산딸기 > 1편을 보자. 화전민 마을에 분녀( 안소영 )가 산다. 한가위 마을 잔치 때 취바리 탈을 쓴 누군가에게 겁탈당한 분녀는, 그 주인공이 마을 청년 명준( 임동진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다지를 찾아 만주로 떠난 명준을 분녀는 기다린다(안소영과 임동진은 같은 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에서도 공연했고, 여기서도 안소영은 (감옥에 간 남편) 임동진을 기다렸다). 마을 남자들은 호시탐탐 분녀를 노리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는다. 이에 ‘남자 잡아먹는 X’라며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분녀는 가마 주인(남궁원)을 따라 읍내로 가 술집 작부가 된다. < 산딸기 >는 토속 영화의 핵심 구조를 제시한다. 바로 이분법이다. ‘시골 vs. 도시’라는 구도 속에서 토속 영화는 여러 대립항들을 만들어낸다. 아직 물물교환이 익숙한 ‘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장터’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돈’의 세계가 있다. 마치 서부극의 ‘자연 vs. 문명’ 구도처럼 토속 영화는 두 세계의 충돌 속에서 전자의 붕괴를 보여준다. 산속이나 섬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거나 약초를 캐며 살아간다면, 양복을 입은 외부인들(여기엔 종종 일본 순사가 가세한다)은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협의 대상은, 그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음험한 욕정의 대상이 되고, 결국 도시로 끌려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술과 몸을 팔게 된다. 이 구도는 < 여자의 성 >( 문여송 , 1985) < 산딸기 3 >( 김수형 , 1987) < 옹기골 뽕녀 >(김수형, 1987) 등에서도 정확히 반복되는, 토속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같은 해에 나온 또 한 편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 장미희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 숲속의 바보 >( 박용준 , 1982) 다. 이 영화는 토속 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한다. 바로 ‘백치 여성’의 등장이다. 복희( 장미희 )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영화 제목 그대로 ‘숲속의 바보’인데, 이후 수많은 토속 영화들은 핸디캡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통해 이 장르가 지닌 ‘원시성’ ‘본능성’ ‘순수성’ 등을 드러낸다(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진 않지만, 그런 점에서 말 못 하는 수련( 정윤희 )이 등장하는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정진우 , 1981)도 토속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캐릭터의 계보는 < 불새의 늪 >( 고응호 , 1984)의 봉은( 원미경 ), < 여자의 성 >의 별녀( 최선아 ), < 소금장수 >( 김대진 , 1988)의 냉이(천은경) 등으로 이어지며, 그들은 섹스에 대한 ‘원초적 본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불새의 늪 >에서 화가 종훈( 마흥식 )은 봉은에게 ‘수성’(獸性), 즉 ‘짐승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며, <여자의 성>의 뭍에서 온 침입자 억수( 독고영재 )는 “잠자리가 뛰어난 여자거든!”이라며 별녀에게 집착한다). 1-2. < 산딸기 2 >(왼쪽)와 < 물레방아 >(오른쪽)의 선우일란 과 마흥식 . 두 배우는 토속 영화의 간판스타였다. 3. 문여송 감독의 히로인이었던 < 여자의 성 >의 최선아 . 4. < 산딸기 >의 김애경. 무당 캐릭터는 토속 영화의 핵심적 조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테마는 바로 ‘근친적 설정’이다. 문명 이전의 상태에 대한 메타포일까? 심의 때문에 진짜 혈연적 근친 관계를 내세우진 못하고 유사 근친 관계를 설정하긴 하지만, 많은 토속 영화들이 근친적 관계를 내세운다. < 숲속의 바보 >의 복희는 남매처럼 함께 사는 머슴 만복( 김동현 )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에서 최 영감( 황해 )은 고아인 수련과 문영( 최윤석 )을 키우는데, 혈연은 아니지만 남매처럼 자란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 여자의 성 >의 별녀는 데릴사위로 온 거무( 이구순 )와 남매처럼 지내다가 결혼한다. < 소금장수 >의 덕만( 김추련 )도 엉겁결에 맡아 딸처럼 데리고 다니는 냉이와 부부적 관계를 맺게 된다. < 화녀촌 >( 김기 , 1985)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종섭( 이영하 )은 상처한 후 산에서 어머니( 김지영 ), 처제 정분( 최현미 ) 그리고 딸과 살아간다. 그는 형제나 마찬가지인 옆집 친구 덕만( 나기수 )의 아내( 이상숙 )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데, 덕만 내외가 갓난아이를 남긴 채 마을을 떠나자 처제를 아내처럼 받아들여 그 아이를 키우며 산다. 근친적 관계 이외에도 토속 영화는, 도시와 문명이 반대편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본능적인 모습들을 클리셰로 드러낸다. 대표적인 것만 간추려 보겠다. 1. 수시로 목욕을 한다 모든 토속 영화엔 꼭 이 장면이 있다. 여성 캐릭터들은 숲속의 계곡이든 강가든 폭포 아래든 수시로 목욕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엿보는 남성의 시선이 있다. 많은 사건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언제 어디서든 정사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집이든 물레방앗간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개울가든 옥수수밭이든, 그들은 정사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 역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들킨다. 3. 껄떡대는 건 죄가 아니다 욕정의 도덕률이 무너진 상태에서, 마을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가운데 놓고 많은 남정네들이 치근대는 건 토속 영화에서 전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겁탈을 해서라도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유부남/유부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것은 < 뽕 >( 이두용 , 1986)과 <떡>( 김수형 , 1988)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4. 무당을 조심하라 무당이든 박수든, 토속 영화에서 ‘무속인’은 빠지지 않는다(< 불새의 늪 >에서 봉은은 아예 무당의 딸로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급살 맞아 죽는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이며, 권위를 내세워 음모를 꾸민다. 5. 여성은 거래된다 사극이 여성을 대 잇기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정절을 강조하며 억압했다면, 토속 영화는 상품처럼 거래한다. 그 배경엔 남성의 어리석은 물욕이 도사리고 있는데, 서너 명 만 모이면 반드시 투전판을 벌이는 그들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 딸을 팔아 먹고(< 산딸기 3 >), 여자는 몰래 몸을 판다(< 물레방아 >). 여기서 자연 속에서 사는 여성 캐릭터들은 장터를 통해 문명을 접하고, 동동 구리무와 박하 분과 손거울의 유혹 앞에 종종 마음을 연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에서 김 주사( 최봉 )도 그렇게 순이( 정윤희 )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여자들은 결국 유린당한다. 1 . < 화녀촌 >의 근친적 결말. 2. 토속 에로에선 그 어떤 곳에서도 정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 소금장수 >의 옥수수밭 3. 남자들이 셋 이상 모이면 투전판이 벌어진다. 사진은 < 산딸기 2 > 4. 여성은 결국 술집 작부가 되며, 그곳에서 번 돈은 남자의 노름 밑천이 된다. 사진은 < 산딸기 2 > 토속 영화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서서히 변주되고 확장된다. 하명중 감독의 리얼리즘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 땡볕 >(1985)과 < 태 >(1986)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변장호 감독의 < 감자 >(1988)나 임권택 감독의 < 아다다 >(1988)는 문예 영화에 좀 더 가까운 케이스일 것이다. 여기서 이두용 감독의 < 뽕 >(1986)은 토속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원작이 나도향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예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 <뽕>은 기존 토속 영화가 지녔던 신파적이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멜로드라마의 톤을 걷어낸다. 베테랑 이두용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영화를 조절하며 끌고 가는데,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도, 절박하거나 경직되지 않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유머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 뽕 >의 꽤 논쟁 지점이 있는 영화다. 안협네( 이미숙 )는 마을의 매춘부이며, 그녀에 대한 동네 남정네들의 음험한 시선을 영화는 자연스레 합리화한다. 여기서 안협네라는 캐릭터가 다른 건 육체관계에서 일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토속 영화들이 ‘겁탈당하는 여성’을 보여준다면, <뽕>의 안협네는 철저히 거래하는 여성이며 원치 않는 남자는 거절한다. 같은 해에 나온 < 변강쇠 >( 엄종선 , 1986)의 ‘옹녀’( 원미경 )가 강한 성적 능력으로 위협적 존재가 된다면, 안협네는 유혹적이면서도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다. < 뽕 > 이후 토속 영화는 약간 변화를 겪는다. < 옹기골 뽕녀 > 같은 유사 제목 영화가 나왔고, 나도향을 비롯해 김유정 , 계용묵, 김동인 등 토속 영화의 재료로 삼기 좋은 작가들의 소설이 대거 각색되었다. 흥미로운 건 김수형 감독의 < 떡 >이다. 김유정 의 원작을 옮긴 이 영화는 <뽕> 이후 토속 영화(와 사극)의 트렌드가 변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떡>은 ‘<뽕>+< 변강쇠 >’이다. 마을 남자들은 (그녀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점례( 선우일란 )를 넘본다. <뽕>의 안협네 같은 존재인 셈. 그런데 점례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에너지를 완전히 빨려 버린다. ‘옹녀’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결말인데, <뽕>에서 안협네의 남편 삼보(이무정)를 통해 암시만 되었던 독립운동가 콘셉트가 <떡>에선 명확하게 제시된다. < 산딸기 >나 < 뽕 >은 이후 프랜차이즈를 이루며 1990년대까지 이어졌지만(<뽕>은 최근 < 뽕 2014 >( 공자관 )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토속 에로는 대체적으로 1980년대 말에 수명을 다하고 만다. 이것은 에로 영화가 1988년 올림픽 이후 수그러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며, 이 시기 한국의 에로틱한 영상 콘텐츠는 극장에서 비디오 시장으로 급속하게 중심 이동을 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토속 에로의 흐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와 기획영화가 등장했던 1990년대에 살아남기엔, 그 정서의 우울함과 여성관의 한계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뽕>이 최근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감독을 처음 만난건 1950년대 명동에서였다. 피차 20대 초반의 나이로 영화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뛰어들고 나서였다. 당시 명동 한복판(옛날 명동 공원) 바로 옆에 5층 건물 있었고 3층에 고 이병일 (李炳逸) 감독님 사무실이 있었다. 다섯평 정도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상언 을 처음 만났다. 나는 수도(首都)영화사( 홍찬 사장 경영)에 공채로 합격하여 영화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으나 얼마 못있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가야만 했다. 군제대 후 영화계에 돌아 와 보니 수도영화사는 최초의 칼라 영화 ' 생명 '( 이강천 감독) 영화 하나만 만들고 어쩐지 비실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반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음알음으로 이병일 감독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 이성구 감독, 촬영기사 홍동혁 그리고 이상언이었다. 이상언은 당시 홍동혁 촬영기사의 촬영부 제2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병일 감독님의 작품을 촬영중이어서 그런지 활발한 모습으로 요즘 말로하면 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난 연출부 지망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이상언과 부딛칠 기회는 없었다. 충무로 바닥이 워낙 좁은 곳이라 길거리에서 이상언과는 눈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놀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성구 감독 밑에 조감독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 연출부에 상언이 들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언 은 일찌기 대구에서 연극을 하였다니까 아마 배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나 보았다. 몇편의 영화 출연도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가 촬영부에서 카메라를 익히다가 다시 연출부로 뛴걸 보면 상당한 계산을 두고 차곡차곡 계단을 밟지 않았나싶었다. 일테면 상언이는 말을 똑똑하게 잘했고 좀 설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치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성구감독은 이상언 을 주로 상대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나는 현장에서는 상언이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언이가 나를 경계한다고 할까. 어쨋던 그럭저럭 상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상언이는 술을 못해서 술을 좀 하는 나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상언이 나한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의 집이 중구청 뒤쪽 적산집 이층이었는데 모친님과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튼 상언이는 자주 그의 집에 나를 끌고 갔다. 그 이유는 그가 구상한 시나리오를 나한테 씌우려고 한 것 같다. 그 시나리오 쓰는 일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서 먹구자고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자연히 상언의 생활 반경이 나한테 노출되었다. 그때 상언의 교제하는 애인이 그 유명한 부인 김숙자 여사였다.(상언은 김숙자 여사를 잘도 물었지) 김숙자 여사는 영화계에서 다 알다싶이 이름 난 헤어드레서로서 김지미 여사와 동거동락 하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나는 상언이와 김숙자씨 연애하는 사이에 끼어서 맛있는걸 얻어 먹곤했다. 이감독은 1965년도에 합동영화사에서 ' 후회하지 않겠다 ' 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무난한 데뷔였다. 그는 총 33편의 작품을 감독했는데 이 정도면 영화 감독으로서는 상당한 작품을 감독한 셈이다. 특히 ' 형 ' 이란 작품은 두 번씩이나 리바리벌 활 정도로 힛트를 했다. 형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갖은 고생하여 공부시킨 아우가 나중에 번듯하게 출세를 했음에도 그 신세진 형을 되게 괄세한다는 내용이다. 일테면 (孝)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많은 관객을 울렸다. 그리고 ' 2박 3일 ' 영화. 이 작품은 연방영화사(사장 주동진 )에서 제작했는데 애당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기로 됐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나 난 겹치기 연출로 스케쥴이 맞지 않자 이상언 감독이 레디고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배우는 하명중 윤연경 김희갑 등 호화 캐스팅은 결코 아니었다. 일종의 쿼타용 맞춤 영화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선전도 별로 하지를 않았고 충무로에서는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2박 3일'' 영화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김위원장과 기자들 사이에 한국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김위원장이 '2박 3일'' 영화를 아느냐고 기자들에게 물었다.(홍콩을 통해 프린트가 북으로 넘어 간 모양) 그러나 기자들 중에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어 잠잠하자, 김위원장이 '2박 3일' 의 영화 내용을 침을 퉁기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그 얘기가 또 국내 일간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이상언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대신 '2박 3일' 시나리오 쓴 나를 기자들이 찾아와 묻기에 인터뷰에 응하고 한 기억이 새롭다. 상언은 참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얘기도 그의 입을 일단 거치면 개똥 철학이든 아니든간에 뭔가 그럴듯한 인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때문에 상언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은 그냥 듣기만 하면 밑천을 건지고도 남는다. 이상언 이 사망하기 전까지 영화사 사장직을 맡아서 일 한때가 있었다. 김숙자 여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추억한다. 남편이 영화 감독이 되고 난 후로 제때 또박 또박 월급 봉투를 안겨 준게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상언이 친구들 밥 먹이고 술 사는데 쓰는걸 다 알면서도 김여사는 그런 남편이 뿌듯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상언의 단골 쯤 되어 그의 술 파티(상언은 그냥 폼으로 술 마시는 형)에 빠지지 않게 끼이게 된걸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저녁 때 쯤이면 상언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나 혼자만 불러서 갔는가 혀여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후 줄줄이 사탕으로 배고픈(?) 손님들이 하나 둘씩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다. 별로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나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들 밥먹여서 보내고 잡담하며 지내는걸 즐기는 상언이인지라 아무 부담이 없다. 거기에는 반듯이 김숙자 여사가 그림자처럼 동석하게 마련이다. 상언이 친구들을 좌우에 좍 거느리고 그 유명한 담론을 쏟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한눈을 팔래야 팔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언은 얘기의 달인이다. 그의 화제가 값이 있는 건 흔이 술자리에서 있게 마련인 남에 대한 험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돋보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게 있는데 그의 일본말 구사 능력이다. 별로 학구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본말 구사는 기름을 친 듯 거침이 없다.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 간단한 생활 일본어임이 분명한데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더러 일본인이 합석하여 상언의 일본어 구사를 듣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요절 복통을 하는걸 옆에서 지켜 보면사 감탄 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원어민을 앞에 앉혀놓고 일어로 웃긴다는건 보통 수준이 넘는다. 난 일본어 원서를 읽지만 회화는 아작도 더듬거리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상언이 일본갔다가 무슨 집회 같은데서 백여명 넘는 일본인들 앞에서 연설한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되게 일본인들을 웃겼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상언의 기지(機智)라면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잘 했대서 웃는게 아니라 일부러 어수룩하게, 또는 유치하게 단어를 골라서 함으로서 일본어로 웃기는 그런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상언이는 한번 일본인을 사귀면 상언이를 계속 쫒아 다니게끔 만드는 모양이다.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도 일부러 일본에서 건너 와서 상언이를 만나고 가는 그런 일본친구들을 나도 몇 명인가 인사를 받았다. 그는 무슨 영화인 단체회의 모임에, 주최측은 이미 짜고 진행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서 독불 장군식으로 한마디 하고나서야 넘어간다. 이상언 은 그런데 단골멤버이다. 이상언이 그냥 말없이 넘어가면 심심 할 지경이다. 그러나 맹탕 헛소리 하는 경우는 드믈다. 외톨이 동끼호테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딱 한가지 배울게 있다. 이상언 이 같은 말도 기왕이면 듣게좋게 돌려서, 양념을 처서 하는 솜씨는 일단 평가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 그가, 참 잘 나가기 시작하던 그가 뜻밖에도 1993년 6월 14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딱 10년전에 우리 곁을 부랴 부랴 떠났다. 당시 이상언 이 사장으로 있던 SKC 영화사 작품 '남자위의 여자'를 고용남 감독한테 맡겨 한강변에서 촬영 진행중이었다. 특별히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원래 찰영부에서 솜씨를 닦았고 나중에 연출까지 익힌 이상언 감독이 고영남을 대신하여 헬리콥터에 오른건 숙명이 아니었나싶다. 헬리콥터에서 부감으로 낮게 날게끔 이상언이 독려한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단지 헬리콥터 조종사가 미숙했을 뿐이다. 이상언은 일찌기 촬영부에 있을때 익힌 카메라에 자신만 있지 않았드라도, 또는 감독 출신만 아니었드리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헬리콥터 부감에서 고도를 점차 낮추면서 가장 멋진 캇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메라가 돌아가는 신바람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언에게 있어 어떤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고귀하게 순직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이상언 의 장례직장에는 영화계에 유례없는 조객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에서도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다. 고인에게는 안됐지만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다가 현장에서 타계한건 더 없는 명예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조문진 (영화감독) / 2003년 <프로필> 1937년 2월 1일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 후회하지 않겠다 > 데뷔 1993년 6월 14일 타계 <작품 연보> 1965 후회하지 않겠다 / 잃어버린 세월 / 현금은 내것이다 1966 집없는 천사 / 소금장수 1967 동심초 1968 갈망 1969 형 1970 당신을 알고 나서 / 범띠 가시내 / 잊을 수가 있을까 / 저 하늘에도 슬픔이(속) / 누가 그 여인을 모르시나요 / 타인의 집 1971 흐느끼는 두 여인 / 검은 장갑을 껴라 / 오빠 1972 불장난 / 항구의 등불 1973 똘똘이 해상특공대 / 흑조 1974 시집갈래요 / 2박3일 1975 조약돌 1976 별하나 나하나 1978 오빠하고 누나하고 1979 터질 듯한 이 가슴을 1981 0번 아가씨 1982 화순이 1984 형 1985 오싱 / 여자정신대 1987 뜨겁고 깊은 겨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