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포비아
- 감독
- 홍석재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변요한, 이주승, 하윤경, 류준열, 유대형, 오희준, 박근록, 임지호, 김용준, 정재우, 전신환, 이강욱, 변진수, 배유람, 김희창, 남문철, 김소숙, 박예영, 김종수, 이여울, 하상명, 구유진, 이서연, 김주인, 엄기성, 김도형, 최성일, 김영진, 이광동
8월부터 12월까지 10회에 거쳐,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의 영화 리뷰를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영화비평과 서평 분야에서도 활발한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기존의 젠더(gender) 개념을 확장, 메타 젠더적 시각에서 새로운 영화 읽기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대상으로 우리 시대 주요 이슈에 대한 필자의 '다른 목소리'를 기대합니다. <소셜네트워크> 너머, < 소셜포비아 > <소셜포비아>는 인터넷 세계를 다룬다. 이 시대에, 인터넷을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혹은 ‘가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 즉 ‘그럴듯한, 사실상의, 현실과 다름없는, 실질적으로, 잠재적인 현실’의 의미를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은 ‘假像, 假想, 假相’이라고 해도 모두 말이 된다. 특히, 이 영화처럼 온라인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실제 오프라인의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물론, 온라인 베틀과 달리, 여성 한 명 vs 무리의 젊은 남성들의 만남은 온/오프의 평등성을 무너뜨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현피', '키워', '안구 정화' 등의, 모르는 단어/험악한 표현/줄임말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나 인터넷 유저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각본을 쓴 홍석재 감독도 인터넷을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체 사용 여부가 곧 매체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전제는 아니다. 문제는 찬반 논쟁, 유저인가 아닌가, 인터넷에 우호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도구(매체)는 인간의 조건을 바꾼다.”는 사실,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는 실천이다. 인터넷 환경은 기술적, 담론적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 소셜포비아 > 제작 당시였던 2014년의 용어는 벌써 공용어가 되었고(‘현피’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 '흉자', '태일해', '세월호 어묵'까지 매일 새로운/끔찍한/기발한 용어와 이벤트가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접근하기 두려운 고통스러운 언어들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관객층은 인터넷 용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인터넷 헤비 유저(heavy users)들일 것이다. 아이디(ID)를 몇 개씩 가지고 있으며, 거의 하루 종일 키워드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모르거나 볼 가능성이 작다. 이 영화가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이들은, 서구를 추격해야 한다는 식민성에 기반한 발전주의자(progressives)이되 어느 정도의 공공성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진보 진영(progressives)일지도 모른다(물론,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 영화는 제작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의 특성, 인류의 제작성(자기 몸의 확장성)을 직면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환경 영화’이기도 하다.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가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7월 말, 대한민국 서울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도래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같다. <소셜포비아>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외면하거나 무지한 분야인 매체의 정치경제학과 문화 권력에 관한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바우만이나 프랑코 베라르디,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같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묘사한 한국 사회를 다시 썼으리라. 그들은 “이 시대의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악마는 이케아와 페이스북”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회 버전은 '다이소, 몰카, SNS' 쯤 되지 않을까. 영화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화면의 윤리성, 연기, 연출 모두 좋다. 2억 원의 제작비와 102분의 상영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매체 경제학, 변화하는 윤리와 자아, 개인의 개념, 젠더, 대중까지 근대성의 거의 모든 키워드를 연결(arrangement)한다. 그 연결도 매우 흥미롭다. 현피는 ‘현실’의 앞글자인 ‘현’과 ‘Player Kill’의 앞글자인 ‘P’의 합성어로, 웹(web)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오프라인에서 실제 살인이나 싸움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10대 학부모가 내게 한 말인데, 그들은 현피가 정기적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피 덕분에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없고 방안에만 처박혀 나오지 않던 아들이,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 온라인 동료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이 부모는 “아이가 강원도까지 갔다”며 흥분했다). ‘키워’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의 줄임말로 컴퓨터 자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戰士)를 말한다. 이들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오프라인)의 무시’라는 더 큰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들의 노동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 '찌라시' 뿐일 수도 있다. 온라인의 물리력이 오프라인에서의 권력으로 계량할 수 있는 인식론이나 방법론은 ‘영원히’ 불가능하므로 온라인의 영향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1인 매체와 인간의 조건 일본의 젊은 연구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를 썼다. 원제 그대로 『不安型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日韓中のネット世代が憎みあう本當の理由』, 이 책의 주제는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실업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자체 해결(도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불안형 내셔널리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인터넷 한․중․일전(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세 나라 남성들이 ‘3국 여성 미모 콘테스트’를 열어 인터넷 투표도 진행했다(당시 한국 남성들은 배우 김희선 씨를 국가대표 미인으로 선정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청년들이 각국의 본격적인 글로벌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항 대신, 자신들을 해고 시킨 바로 그 기술(인터넷)을 사랑한다고 지적한다. 이 도구로 내셔널리즘만 한 것은 없을 것이고, 효과는 막강했다. 결국 자기 사회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키보드 노동에는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문화다. 게임 중독이나 혐오 발화는 “인간성 타락” 아니라 실업 문제다. 많은 이들이 SNS의 장점이자 단점을 속도와 순간적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하자? 하지만 매체, 미디어는 그 자체가 매시지 즉 정치다. 소위 ‘바람직한 방향’ 혹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할 경우에는 장점을 극대화하고(촛불 시위나 페미니즘의 확산...), 반사회적 현상(몰카, 혐오..)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나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누구도 타인의 도구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완전히 대중화, 개인 소지품이 된 컴퓨터를?) 또한, 그 어떤 도구도 장단점이 있다. 발명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황우석 씨 사태가 좋은 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였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핵이든 콘돔이든 다이너마이트든 SNS이든 이 모든 ‘오브제’들이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이라고 생각한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 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시켰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 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 시대다. SNS의 평등주의? 몇 년 전 나는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 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명단을 내게 보내주었는데, 내 친구까지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 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이 SNS에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고(capacity)’와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를 낸 사람의 삶은 같지 않다. 그러나 SNS 문화는 후자를 기득권자이자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 이상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간주한다. SNS가 필요한 사람들은 또 있다. SNS에서 자기선전 후 오프라인에서 픽업되어야 하기 ‘때문에’ SNS가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이미 신문 등 기존 매체들은 소위 오피리언 리더들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페이스북을 기사화한다. 취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심심찮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바람직 여부가 아니라 자아실현, 자기 PR 도구로서 SNS의 절대적 유용성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몇 년 이상의 노력과 노동, 비용을 기울인 저작에 대해 '최악', '저질', '친일' 등의 댓글 테러로 그 텍스트들이 평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형태의 ‘자아실현’이 만연한 사회라면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다. 이전 시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종이 신문이 인터넷으로,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the person)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individuals)인 인간은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상 70억 명 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이지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탈.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 발화의 능력도 바로 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나 ‘오뎅’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 소셜포비아 >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 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의 시대 SNS가 ‘논쟁’, ‘민주주의’의 장이라고 거짓말하거나 믿거나 착각하는 사람은 마크 주커버그 말고도 많을 것이다. 내 경험(주로, '미투'와 성폭력, 젠더 관련 사안)에서 보면, SNS에서의 대화는 만나서 이야기하면 해결될 문제를 관중을 모셔놓고 마치 검투사처럼 논쟁(?)을 벌임으로써 공연을 하는 듯하다. 대화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보다 여론전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때 승패는 키보드 속도와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모욕을 줄 수 있는 능력, 꼬투리 잡기, 열 받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SNS의 특징은 속도가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1인 미디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인터넷 셀럽’이 때론 국영 방송사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경우 어느 유명 지식인의 팔로워가 100만 명에 육박했는데, ‘6대 종합일간지’의 중 모 신문사의 팔로워는 60만 명선이었다. 노조원 만 명이 넘지만 (두 개의 노조가 있어서) 민주노조의 트위터 팔로워는 400명인데, 매스컴 플레이에 익숙한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 스타 노동자’의 팔로워 수는 5만 명이었다. 문제는 이 노동자가 노조의 합의된 공식적 입장을 자신의 SNS 파워를 이용,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짓 선전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개인의 힘이 극대화된 시대가 존재했던가. 어느 누가 이 무한한 자기 만능 감을 선사하는 이 매체를 포기하겠는가. 스마트폰은 이미 우리 몸이다. 맥루한의 명언, 미디어는 우리 몸의 확장이다(extention of men). 게다가 별다른 규제도 없다. 근거 없는 비난, 혐오 표현, 신상털기 모두 완벽하게 가능하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무시해라, 집착 마라”, “탐라(타임 라인)일 뿐이다”, “SNS에 들어가지 말라” 등의 ‘위로’ 혹은 피해자 비난을 들을 뿐이다. SNS의 ‘부작용에 대한 무시’는 해결이 아니다. 홍석재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 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 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소셜포비아 >는 근대 초기 신분 사회로부터 해방된 자유주의적 개인이 이후 100년이 지나자마자,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개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통치자로서 개인의 힘은 막강해졌지만, 사회적 자아는 모두 자본에 종속되었다. 각자도생 시대의 개인의 자유는 통치 원리인 ‘힘센(비윤리적인) 개인’의 등장이며, 결국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파괴한다. < 소셜포비아 >의 착목 지점, 글쓰기 1인 매체의 시대. 매체만으로는 완전히 평등하고, 나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는 시대. 누구나 판관, 감별사,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이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때 혹은 두 세계를 병행할 때, < 소셜포비아 >의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대사 그대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에고는 강한데, 그에 걸맞은 알맹이는 없는 사람. 타인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지만, 자신은 절대 견딜 수 없는 욕먹음(커멘트)”. 그녀는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 강의를 듣는 학생, 작가 지망생이다.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의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SNS에서의 글쓰기는 매체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자기 홍보, 자기주장, 자기도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조작을 넘어 자기 망상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숱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우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느 축구 감독의 말대로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SNS 헤비 유저라면 ‘지식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커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타인에 비친) 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녀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만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대사를 보자. “한국에 간첩이 몇 명인지 알아? 오만이야. 오만. 그렇게 많은데, 왜 안 잡히는 줄 알아? 자기들끼리 서로 상대가 간첩이라며, 간첩을 잡으러 다니거든.”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 누구인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뫼비우스 띠의 선상(線上)을 헤매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자신이 ‘간첩’인 줄 모르는 간첩들이다. 모두 개성을 주장하는 개성 있는 다름(distiction)을 주장하는 개인들이되, 개별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아바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아, 책도 온라인에서 파는군. 지금으로서는 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 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크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 <애니메쥬> 1986년도에 실린 독자 인기 캐릭터 순위. 1위는 해당 잡지에 만화판이 연재되고 있던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주인공 나우시카가 엄청난 격차로 압도적인 수위를 차지했지만, 2위와 6위에 < 천공의 성 라퓨타 >의 두 주인공 시타와 파즈가 올라 1986년 개봉 당시의 <라퓨타>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추천애니 코너에서 쭉 한국 애니메이션만을 다뤄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고전 명작 애니메이션인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에 일본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 있어서 처음으로 일본 작품을 다뤄볼까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연출한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 천공의 성 라퓨타 >(이하 <라퓨타>)를 미야자키 감독 스스로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가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중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키타쿠보 히로유키씨가 트위터에서 발언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 천공의 성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일본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다. 키타쿠보 히로유키씨는 1979년 15살 때에 <기동전사 건담>의 원화를 담당하면서 애니메이터로 데뷔한 감독으로, 1985년 첫 감독작품인 (< 크림 레몬 > 시리즈) 이후 옴니버스 작품 <로보트 카니발>에서 <메이지 기계문명 기담 ∼홍모인 습래지권∼>의 감독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리고 <블랙매직 M-66>(감독·캐릭터디자인), <죠죠의 기묘한 모험>(감독), (감독) 등의 작품에 참여했으며, 극장애니메이션인 <노인Z>(1991년/감독), (2000년/감독) 등을 연출한 바 있다. 그런 베테랑 감독이 한 발언인 관계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정확한 발언 내용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트위터에서 한 발언인 관계로 구어체로 써있는 것을, 필자가 어느 정도 의역해서 문장으로 만들었다.) 2012년 5월 18일 23시 29분 19초∼5월 19일 00시 20분 30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말해보자→ ‘대디’ 미야자키 감독 자신은 < 천공의 성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싫어한다.” “대디 미야자키 감독이 아니더라도, 창작자라면 < 라퓨타 >가 ‘실패작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 상식. Boy meets Girl로 시작되는 스토리에서 ‘주인공은 파즈’, 즉 구조상 주브나일로 성립시켜야 하는데도 설정은 물론이고 가치관까지 전부 부자연스럽게 밸런스가 무너져 있다.” “주브나일, 즉 모험소년이야기로서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우선 탄광부스러운 일을 하면서 미트볼 하나 덤으로 받은 것 가지고 좋아하던 소년이, 부모님도 없이 그렇게 많은 비둘기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정보부가 시타를 잡아가면서 넘겨준 금화를 버리지도 못할 정도이면서.” “스토리의 고조점이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시타 구출 장면이 되면서 본래 가장 중요한 모티베이션인 ‘아버지가 발견한 천공의 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순한 통과점이 되어버렸다는 점.” “게다가 모험 이야기의 왕도인 ‘주인공의 성장과 활약으로 곤란을 극복하여 카타르시스를 얻’어야 하는데도, 사실상의 최종 결정은 파즈가 아니라 시타가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고, 파즈의 선택도 마찬가지로 멸망의 주문을 외치는 할복 자살 만세 공격일 뿐. (중략)” “가장 가치관이 붕괴했다고 보이는 상징적인 부분으로는, 라퓨타에 도착한 병사들이 보물을 꺼내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에 대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네’라고 시타한테 말해놓고서, 라스트에서는 도라 일행이 몰래 숨겨온 보물을 보며 미소짓는 황당함. 세세한 부분까지 예를 들자면 끝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멈추겠다.” (※주브나일(juvenile) - 소설 장르의 하나로, 영미권에서는 ‘영 어덜트 픽션(young adult fiction)’이라고 한다. 틴에이저(10대 청소년)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을 말하는데, 1802년 영국 작가 사라 트리머(Sarah Trimmer)가 14세부터 21세까지의 독자를 ‘영 어덜트후드(young adulthood)’로 구분지은 데에 유래한다. 19세기에 발표된 작품 중 <올리버 트위스트> <몽테 크리스토 백작>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보물섬> <정글 북> 등을 주브나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1970~80년대에 ‘영어덜트소설’보다 ‘주브나일’이란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라이트노벨’이란 신조어에 밀려 이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역사적 단어이다.) ■ “< 라퓨타 >는 실패작” 발언에 대한 반발과 키타쿠보 감독의 본의 물론 키타쿠보 감독의 이 발언에는 여러 가지 이견과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추가로 이런 발언도 남기고 있다. “가치관이 무너져 있지만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한 < 라퓨타 >의 실패가 없었다면 < 이웃집 토토로 >의 대성공도 없었을 것이기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따져본다면 약간 플러스겠죠.” “작품으로서 감독 본인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좋아하는 관객 분들이 계시고, 흥행적으로도 물론 성공했습니다. 그와 유사한 사례라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기억하고 있습니까>가 있겠죠.” 또한 키타쿠보 감독은 팬들의 반발에 대해 “내가 언제 < 라퓨타 >가 재미없다고 했느냐”, “제작자와 관객은 같은 사고 루틴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제작자에겐 좌절이 있기 때문에 다음 번에 꼭 만회하겠다는 강한 모티베이션으로 이어지는 것”, “설령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자기자신이 느낀 반성점을 회피하는 태도로는 작품의 질이 향상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발언도 추가하고 있다.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키타쿠보 감독 역시 관객으로서 < 라퓨타 >를 싫어한다거나 개인적으로 재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창작자, 크리에이터로서의 입장에서, <라퓨타>란 작품이 설정된 캐릭터를 올바르게 스토리로서 구성해내지 못한 작품, 즉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미야자키 감독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 라퓨타 >를 실패작으로 손꼽고 있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키타쿠보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실패였다고 발언한 것을 들은 스태프가 여러 명 존재한다. 다만 팬의 심경을 고려해서 공공연하게는 발언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 창작자와 관객의 입장 문제는 실제로 < 라퓨타 >가 실패작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든, 수용자가 그것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점은 이번 트위터 논쟁에서도 많은 일본인들이 발언하고 있다. 당연히 <라퓨타>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지금까지 일본에서도 TV방송을 여러 번 하면서 매번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11년 12월에도 일본 TV에서 방송되었는데, 작중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주인공 파즈와 시타가 하는 대사 “바르스!”는 당시 트위터 상에서 1초당 2만5천개의 글이 올라오면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2011년 12월 14일의 트위터 공식 발표에 따르면, 12월 9일 일본에서 TV 방영된 <라퓨타>의 방송 중에 1초당 25088건의 투고가 이루어져 당시까지의 트위터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 라퓨타 >는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품이었다. < 미래소년 코난 >이란 TV애니메이션이 국내에서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작으로 자리잡았는데, 그 감독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놓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소개에 <라퓨타>를 접했던 이들이 <코난>을 연상케 하면서도 또 다른 스타일에 반했던 것이다. 필자 역시 1980년대에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다시금 느꼈으니만큼, 당연히 이 작품이 주는 재미를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 역시 앞서 말했듯이 <라퓨타>가 재미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라퓨타>를 재미있게 본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라퓨타>가 본래 좀 더 긴 작품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는 등, 아직 오리지널 장편 극장 애니메이션을 처음 만들던 당시의 미야자키 감독으로서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느꼈을 가능성은 높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특히 본인의 초기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자기반성이 없는 창작자는 발전이 없을 테니,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라면 본인의 초기작인 <라퓨타>를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다만 이처럼 ‘고전 명작’으로 자리잡은 작품에 대해서도 크리에이터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판단을 해야할 수 있다는 점을 키타쿠보 감독은 지적하고자 했던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스토리상의, 설정상의 문제점은 창작자로서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창작자 입장에서의 발언에 대해 대부분 관객 입장일 다수의 일본 트위터 이용자들이 반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위터라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 자체가 일종의 ‘채팅’과도 같은 형식으로, 140자라는 짧은 분량으로 제한적인 발언이 가능한 공간이다 보니 키타쿠보 감독이 표현에 있어서 부족했던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명백히 창작자의 입장에서 < 라퓨타 >란 작품에 이러이러한 면이 설정상 모순이고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설명 부족인 채 건너뛰었다는 지적은 비단 창작자만이 아니라 평론가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사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발언했다는 것임에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창작자, 표현자의 SNS 이용 방법에 관한 문제라든지 대중의 리터러시(literacy) 등 다양한 논의점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 <천공의 성 라퓨타 >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간단히 < 라퓨타 >란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 작품으로, 원작이 없이 처음으로 원작·각본·감독을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맡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프로듀서로는 타카하타 이사오(< 반딧불의 묘 >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감독), 음악은 전작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에 이어 히사이시 죠가 이어서 맡았다. (히사이시 죠는 이후 최신작 < 벼랑 위의 포뇨 >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전부의 음악을 맡았다. 그 외에는 한국영화 < 웰컴 투 동막골 >의 음악도 담당.) 참여 애니메이터를 살펴보면, 일본의 ‘스타 애니메이터’인 카나다 요시노리가 ‘원화 팀장(原畵頭)’이라는 독특한 직책명으로 참가하고 있다. (보통 일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직책명을 카나다 요시노리만을 위해 따로 만든 것.) 카나다는 < 나우시카 >부터 < 모노노케 히메 >까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쭉 원화로 참가했고, <무적초인 잠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로봇 애니메이션에도 참가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외에도 원화 애니메이터로 마에다 마히로(<청의 6호> <암굴왕> 감독), 코사카 키타로(<가지(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 감독), 콘도 카츠야(< 바다가 들린다 > < 코쿠리코 언덕에서 > 캐릭터디자이너), 나쿠라 야스히로(<천사의 알> 작화감독, < 메트로폴리스 > 캐릭터디자이너·총작화감독), 나베시마 오사무(< 괴도 세인트 테일 >=한국 제목 <천사소녀 네티> 감독), 토모나가 카즈히데(< 명탐정 홈즈 >=한국 제목 <명탐정 번개> <루팡 3세 후마 일족의 음모>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작화감독) 등,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 라퓨타 >는 그 내용은 물론이고 제작 스태프 측면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