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 감독
- 히구친스키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사에키 히나코, 신은경, 하츠네 에리코, 휘환, 오스기 렌, 덴덴, 호리우치 마사미, 스와 타로, 테두카 토오루, 아베 사다오, 미와 아스미
© 코리아씨네마 똠얌꿍, 슌사쿠, 国, 國, 纳, 陆海铃, 宍倉紗弥, 髙橋, 﨑, 𠮷野, 辻, 齋藤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은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이자 “사회적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베스트셀러” [1] 『꼬방동네 사람들』(이동철, 198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개봉 당시 “갖가지 사연을 안고 모여 사는 판자촌 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감동으로 그려낸 작품”이라는 언론의 호평을 받았으나 [2] 실제로 이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존재했다. “제작 신고 때부터 우여곡절을 겪고 10개월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3] 라거나 ‘신고 접수 후 <꼬방동네 사람들>의 경우는 1백 21일 만에 수리 통보를 받아 제작에 나서게 됐다’ [4] 는 기사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80년대 초반 ‘사회적 아픔’을 다루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대 상황 및 검열 제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모든 제작사는 시나리오와 영화 필름을 검열받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렇다면 검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신고 과정에서 가장 지적을 많이 받는 부분이 정사 장면, 외설, 비속·저속한 대사 등으로 사회적으로 말썽이 일고 있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크게 브레이크에 걸리고 있다’ [5] 는 기사는 당시 이루어지던 검열 항목을 알려 준다. 특히 에로티시즘은 주요 검열 대상이었다. 그런데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사회적 아픔과 가난한 사람들을 재현하는 데 중심을 둔 ‘사회성’ 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에로티시즘 영화와는 결이 달랐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영화는 더욱 시련을 겪어야 했다. ‘사회성 짙은 영화’에 대해 시대는 매우 민감했고 영화는 결국 수정되어야 했다. 이는 시대가 승인하고 요청한 영화, 그리고 대중의 삶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이 작품이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격동의 시대, 대중 영화가 직면한 시련 이 영화의 제작 시기는 1980년대 초반 사회적 격동의 시기와 겹친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 시대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 초기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한 것이나 문화 분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고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였다. 1984년 5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영화와 영화산업 또한 이런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6] 이러한 상황에서 <꼬방동네 사람들>이 ‘사회 현실’을 다룬다는 게 문화 검열 주체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특히 원작인 이동철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은 “청계천변으로 흐르는 썩은 오물, 똥물, 악취 나는 시궁창을 코앞에 둔 채 즐비하게 늘어선 판자촌 동네” [7] 를 배경으로 성매매 여성과 소매치기, 구두닦이 등의 온갖 도시 하층민들이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산업화 시기 도시 하층민이 그 존재 자체로 불안과 오염의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정주하는 변두리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서 배제된 불안정, 궁핍, 무질서, 비도덕, 비윤리적인 타락한 성벽처럼 묘사되었다는 점 [8] 을 감안할 때,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재현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전두환 정권 수립 초기 사회 안정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 코리아씨네마 이러한 점은 영화의 검열서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원작 소설 속 ‘검은 장갑’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검은 장갑’ 명숙을 주인공으로 삼아 주요 인물들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 산하 공연윤리위원회는 “전체적으로 서민 생활을 절망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도박 등 사회악을 합리화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서 양속과 사회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민층 묘사에 있어 가급적 훈훈한 인정미를 부각시키고 착한 의지로 살아가는 모습에 역점을 둠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구체적으로는 “비속한 대사가 많고 가정(사회) 윤리 저해 장면, 소매치기 장면, 도박 장면, 사기 장면” 등이 문제가 되었다. [9] 결국 시나리오는 대폭 개작되었다. 이후 신고한 시나리오는 “공서 양속과 사회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삭제”했다. 대신 “비록 고난과 역경의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결코 불의에 타협치 않고 밝은 내일을 향해 참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그들의 착한 의지와 인정이 넘치는 삶의 현장을 영상으로 옮김으로써 원작 소설이 주는 어두운 이미지를 밝게 승화시켜 사회 계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10] <꼬방동네 사람들> 심의서류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중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공연윤리위원회는 “전체적으로 서민 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가정 윤리(순결성)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라고 판단, 또다시 제작사에 개작을 요구했다. 문제 장면으로 제시된 “가정윤리(순결성) 저해 장면, 청소년의 건전한 생활 태도 함양 저해 장면, 사회 비리 고발 장면이 전체 장면 126씬 중 29%인 36씬”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11] 대대적인 개작을 요청한 것이다. 결국 제작사는 “시나리오를 전체적으로 재검토, 대폭 순화하여 계도적인 작품으로 개작”해야 했다. 이로써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서민 생활의 부정적인 장면 묘사를 절제하고 가정 윤리를 저해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는 한편” 몇 가지 문제 장면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제작을 허가받기에 이른다. [12] 요컨대 시나리오 개작 과정은, 비교적 소설 원작에 충실했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계몽’과 ‘사회 정화’라는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계몽의 내용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1980년대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삶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의 시나리오 개작과 영화 제작 과정에서 변화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빈민촌을 배경으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이 대거 축소되는 대신 검은 장갑 명숙( 김보연 )과 그녀의 전남편이자 아들 준일( 이재진 )의 아버지인 주석( 안성기 ), 그리고 현 남편이자 살인자인 태섭( 김희라 )이 주축이 된 가족 이야기가 극의 중심을 차지한다. ‘배감독이 당초 원작이 지닌 강한 사회성과 패기의 메시지를 그대로 영화화하려 했으나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네 차례나 개작 지시를 받아 다소 감상적으로 굴절된 느낌’ [13] 이라고 평가한 것도 가족 이야기가 애정 관계와 얽히면서 영화 속에 두드러지게 재현된 점과 관련된다. 둘째,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는 검은 장갑 명숙이 홀로 주석의 아이와 빈민촌에 남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영화에서 검은 장갑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주석이다. 영화는 주석이 과거 소매치기였던 삶을 청산하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도록 한다. 가령, 영화에서 ‘가족 사진’을 고이 간직한 채 명숙과 준일 주변을 맴돌고 “남자한테 가정이란 자기 몸보다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며 명숙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거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꼬방동네를 떠나는 명숙과 준일을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에 태우는 주석의 모습 등은 소설과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없는 새로운 장면들이다. 이로써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당대 정권이 승인하고 요청했던 서민 가족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 코리아씨네마 실제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에서 남성은 가족을 이끄는 권위의 상징이자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산업 역군이었다. 주석은 그러한 현실 가부장의 문화적 판본이었다. 특히 아버지 없이 방황하는 준일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이유는 주석의 윤리적 책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가부장으로서 주석에게는 준일을 훈육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태섭이 살인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자수하기 위해 떠나는 것도 주석 가족의 삶이 사회적 안정과 질서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영화는 1980년대 사회 안정과 근대화를 겨냥하는 계몽적인 가족 영화로서 대중과 만나게 된다. 한편, 당시 이루어진 문화 검열 과정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영화 속 빈민촌과 아파트의 풍경이다. 사실상 공간이 영화 속에서 가족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도시의 변두리 빈민촌은 더 이상 밀려날 데가 없는 도시 서민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요한 장소였다.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도 서민들이 살아가는 변두리 빈민촌의 풍경은,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의 모습과 대비되어 주변화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시각화했다. 나아가 ‘이러한 대비적 장면은 그 자체로서 이미 도시 공간의 구조와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냈다.’ [14] 그런데 당시 아파트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주석을 중심으로 새롭게 꾸려질 가족에게 멀리 보이는 아파트는 어쩌면 그들이 당도할 미래의 안락한 가족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아파트’와 ‘빈민촌’의 선명한 대비는 양가적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발문’에서 이 작품을 두고 작가 이동철이 스스로 판자촌에서 살아오는 동안 겪고 본 자기 동네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엮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15] 당대 삶의 현장성을 획득했던 소설은 출판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화는 달랐다. 배창호 감독의 야심에 찬 데뷔작은 사회 안정에 도움이 안 되는 문화 생산물로 여겨졌다. 영화는 집단 대중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체였던 만큼 다른 문화예술에 비해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당대 문화 계몽은 현실의 모순이나 불합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일반 대중이 공감할 만한 서민 가족의 삶을 통해 근대화의 욕망을 환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영화 속 메시지는 근대화의 긴 터널을 통과하던 대중의 욕망과도 공명하는 데가 있었다. 따라서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1980년대 근대화를 위해 문화적 에너지를 공급했던 영화의 역할과 대중 욕망의 양상, 그리고 문화 제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코리아씨네마 *** [1] “사회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베스트셀러 현암사가 이 시대의 양심에 호소하는 세 권의의 장편소설!”, 《경향신문》, 1981. 9. 28. [2] “새로운 메시지 담은 3편의 영화”, 《동아일보》, 1982. 7. 23. [3] “<꼬방동네 사람들> 제작 완료 기구한 운명 헤치는 여인 그려”, 《경향신문》, 1982. 7. 15. [4] “제작자협 당국 영진공 불황 타개 간담회 ‘영화 제작 행정 규제 융통성을...’”, 《경향신문》, 1982. 5. 3. [5] 위의 글. [6] 김동호 외, 『한국영화 정책사』, 나나출판, 2005, 258~259쪽. [7] 이동철, 『꼬방동네 사람들』, 현암사, 1981, 7쪽. [8]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 2011, 107쪽. [9]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0]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1]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2]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3] “새로운 메시지 담은 3편의 영화”, 《동아일보》, 1982. 7. 23. [14] 정태수, 「1980년대 한국 영화에서의 생산의 공간(1980-1987)」,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 공간Ⅰ(1980-1987)』, 박이정, 2018, 28쪽. [15] 이동철, 앞의 책, 372쪽. 한영현(세명대학교 교수, 영화연구자) l 한국영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전후 영화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이사, 《현대영화연구》 편집위원, 영상문화지평연구소 편집위원장 등 역임.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2022), 「생명⋅기술⋅공간의 삼중주: 봉준호 감독 <미키17>(2025)을 중심으로」 등 집필.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공간』(2018) 등 공동 집필.
사진: " Oldboy ", IMDb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규현 교수 는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일본 대중문화(특히 만화)와 한국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영화 리뷰 사이트 “Koreanfilm.org”에 20여 년이 넘게 한국영화에 대한 리뷰를 기고할 만큼, 그는 열렬한 영화 팬이자 장르영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The Age of Visions and Arguments: Parliamentarianism and the National Public Sphere in Early Meiji Japan(2008)이 있고, “The politics of national language and wartime mobilisation of everyday life in late colonial Korea, 1937-1945”(2016), “Pak Chan-wook’s Thirst: Body, Guilt and Exsanguination”(2013)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 출판을 기획 중이며, UC 데이비스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일본-한국 전공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숨은 주역,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 ‘한국영화’에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의 변화라는 중심 주제를 상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고 싶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영화는 계속 발표되어왔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영화사 관련 문헌 자료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제는 한국영화를 인식하는 지역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에 걸맞게 세계 영화 팬들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 영역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의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거나, 작품을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고찰하고 문화•사회사 이론을 적용해 해석하는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꾸준히 사랑해온 한 명의 ‘영화 팬’에 더욱 가깝기에, 이번 시간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관점을 가지고 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일본만화 덕후이자 컬트영화 팬이었던 내가 대학 입학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고,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한국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한국영화의 재발견을 거듭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의 부추김이 동반되곤 하는 ‘공부’와 다르게, 소위 말하는 ‘덕질’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스스로 열중하게 만든다. 그 에너지는 실로 강력해서 덕질을 이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소재를 ‘공부’하게 된다. 공부의 의의나 성취를 타인이 인정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1960~7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만화 덕후로 지냈다. TV에서 <마징가 Z>를 본 후 명동으로 가서 원작 만화를 찾아 읽으며 나가이 고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바벨 2세』(1970)를 보고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6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삼국지』 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문화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붙인 끝에 일본 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역사 연구자인 내가 수많은 영화에 대한 학술 논문을 내놓고, 바야흐로 박찬욱 감독 작품의 연구서를 집필하려는 의지를 다지게 된 데 역시, 타인의 인정을 애써 요구하지 않는 애호의 마음이 작용했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불리기까지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학술적 논의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요인이 있다. 바로 ‘덕후’로서 그 애호의 마음을 발휘해온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들(retailers and brokers of popular culture)’이다. 이는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며, 일명 ‘컬트영화 팬’을 지칭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특정 장르의 만화나 영화에 열광해 자발적으로 펼쳐온 활동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대중문화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에 부합하고 있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그레이 마켓, 그리고 광학 매체 2023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가 개봉 2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개봉되었다. 나도 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다. 놀랍게도 흥행 성적이 훌륭했다. 재개봉 첫날 전미 박스오피스 9위를 기록했고, 2005년 북미 극장 개봉 당시에는 약 70만 7천 달러였던 수익이 이때는 약 170만 달러로 2배가 되었다. 개봉 직후에는 대중이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몇 작품은 세월이 지나며 결국 그 가치를 인정받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런 한국영화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 즉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발전이 본격화되는 데 기여한 몇몇 조건들이 있다. 먼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고 검열이 완화되며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이슈나 성적 묘사 등을 포함한 소재와 그에 대한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영화를 공부한 ‘영화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하면서, 각자의 관점에서 모범으로 삼는 영화를 참고해 작품세계를 구상하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인터넷 등이 발달해 정보의 송수신이 용이해져 전문가의 비평 언어가 널리 공유되었고, 특수 메이크업 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 등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도 (특히 호러나 필름 누아르와 같은 장르에서) 발전했다. 2000년대 초 제작된 <장화, 홍련>(호러), <지구를 지켜라!>(SF)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성격이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경제 발전, 세계화, 정보통신기술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보다 넓은 계층에게까지 공유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영화’를 제작해 해외에 선보이고 싶다는 국내 영화계의 오랜 과제가 수행되는 데 추진력을 더했다. 여기에 불법 비디오의 유통으로 ‘영화 덕후’들의 감상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한편,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평론은 학구적 색채를 띠기 시작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떴음’이 분명해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고, 나 역시 주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아마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장화, 홍련 >(김지운, 2003),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 등이 개봉한 2003년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2003년에 한국영화에 열광한 이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관객이, 그 이후부터 등장한다. 준-불법 비디오 시장인 이른바 ‘ 그레이 마켓 ’이 융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디오 유통 체인점이 잘 다루지 않는 블록버스터 등을 접할 수 있었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화제와 어느 정도는 연계된 유통망을 구축해놓기도 했다. 또한 DVD 라는 매체가 출시되며 영화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VHS는 매체 특성상 좋은 화질과 음질로 감상되기 어려웠지만, DVD는 ‘복원된’ 영상과 음성 소스를 수록할 수 있기에 같은 작품이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 경험을 제공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영화 DVD에는 대부분 영어자막이 탑재되어있어 해외 시장에서 유통되기도 쉬웠다. 이러한 시류에 힘입어, ‘고상하지 않지만 매우 재미있고 폭력적인’ 일본 시대극들처럼 그간 그레이 마켓에서 주로 관심 받던 작품들의 대열에 한국영화가 합류하면서, 한국영화가 각지의 로컬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각광 받는 길이 열린다. 이때 한국영화의 세계적 유통에 컬트영화 팬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체감하게 해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했던 비디오점 “Le Video”에 가니, 당시 내가 온라인에 게시했던 <올드보이> 리뷰가 가게의 전시창에 붙어있었다. 할리우드나 기타 영화 전문업계에서 생산한 평론보다, 실제 ‘덕후’가 남긴 리뷰를 통해 또 다른 ‘덕후’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비디오 유통을 촉진하는 것이 이 가게의 전략이었던 것 아닐까? DVD 시장에서 출발한 작품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의 활동에 상당 부분 의지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악령의 밤 2 >(마리오 바바, 1977), < 서스페리아 1977 >(다리오 아르젠토, 1977) 블루레이 (사진: Amazon) 사실, 역사적으로도 DVD와 블루레이 시장 자체가 대개 장르영화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북미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값비싼 복원판 디스크 제작의 트렌드가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감독들의 컬트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북미 영화 팬들은 그간 극장의 개봉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해외 장르영화들에 대한 접근성이 광학매체의 유통과 함께 눈에 띄게 높아진 데 열광했다. 그리고 영상 복원 기술은 고전 호러, SF, 필름 누아르 등의 장르영화 디스크의 소스가, 제작자들이 의도한 느낌에 가까운 영상으로 팬들에게 전해지는 데 기여했다. DVD, 블루레이라는 매체에 의해 새로운 영화문화가 조성되는 첫 단계가 바로 장르영화를 바탕으로 진척된 것이다. 이들 특유의 감성과 스펙터클은 북미 주류 사회의 ‘정치적 공정함’과 ‘고상한 취향’에 도전한다고 여겨져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팬들의 관심은 홍콩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이어 한국영화로도 향했다. *주1 그러다가 2010년대 후반, 넷플릭스 등의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VOD 시장을 지배하면서 위의 그레이 마켓을 무대로 번영한 비디오 가게들, 즉 ‘대중문화 소매상’들의 활동은 쇠퇴했다. *주2 하지만 2017~2018년부터 벌써 넷플릭스에 등록된 한국어 콘텐츠의 양이 상당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아 여전히 여러 OTT 플랫폼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서구 장르영화를 닮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들은 왜 북미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일까? 박찬욱 감독에 집중해 설명하자면, 그의 작품이 전 세계 장르영화의 계보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올드보이>는 < 현기증 >(알프레드 히치콕, 1959), < 차이나타운 >(로만 폴란스키, 1974), < 강박관념 >(브라이언 드 팔마, 1976) 등 서구 장르영화 걸작의 기조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금기시된 사랑, 공허한 허구에 대한 집착 등의 소재도 반복되지만, 무엇보다 ‘ 서스펜스 ’라는 요소의 활용이 돋보인다. 서스펜스(Suspense)는 ‘매달리다’라는 의미의 “Suspend”에서 비롯된 용어인 만큼, 영화에 쓰일 때는 떨어지기 직전의 존재가 무언가에 매달린, 즉 아직 불씨가 당겨지지 않은 감정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응어리져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히치콕은 그 요소를 작품에 기막히게 배치하는 거장으로 불리고, 비슷한 경향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이렇게 추락하기 직전에 매달려있는 인물을 볼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보다 복잡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은 서스펜스를 통한 감정의 이 복합성을 이전 세대 장르영화 감독들로부터 멋지게 계승했다. 인물의 선과 악이 뚜렷한 평면적인 스릴러에 나타난 윤리적 지형을 벗어나, 관객이 왠지 모를 불편함을 감지하면서도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 감정 을 느끼러 영화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파업주동자>와 <올드보이> 속 추락 직전의 인물 (사진: (좌) " 1000 Frames of Saboteur (1942) - frame 974 ", The Alfred Hitchcock Wiki / (우) " Oldboy ", IMDb) 일례로 히치콕의 < 파업주동자 >(알프레드 히치콕, 1942)에서 악당 프라이가 추락사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추락 과정의 부감숏과 일그러진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악당의 파멸을 지켜보고자 하는 가학적 욕망과 동시에 추락하고 있는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라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체험한다. <올드보이>에서 수아( 윤진서 )의 추락사도 유사하다. 악당 이우진( 유지태 )의 시점에서 수아는 추락 직전의 상태로 비춰지고, 관객은 이우진이 악당임을 알면서도 누나의 추락 과정을 지켜보는 그의 죄책감을 공유하게 된다. 이는 인물이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다룬다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특성과도 연결되는데, 박찬욱은 그만의 현대적 언어로 이를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극중 진실의 탐구자(Investigator of the truth)로 상정된 오대수( 최민식 )가 자신의 믿음은 거짓이고 진실은 따로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윤리적 세계와 작품의 서사적 자기 완결성은 모두 괴멸해버린다. 예기치 못한 이 괴멸을 지켜본 관객은 복합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지만, 그로써 영화에 더욱 젖어든다. < 박쥐 >(2009)에서 송강호가 창문으로 향해 비상하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의 시점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이 추락으로도, 비상으로도 보이도록 연출해, 관습적 인식의 작동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적 순간을 어김없이 직조해냈다고 볼 수 있다. <올드보이>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도리 액션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하다. (관객) “아프겠다” “웃기다” “너무 리얼하다” “처절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맞고 찔려도 쓰러지지 않자 악당들이 공포스러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맞다. 주인공의 멋진 모습이 부각되는 보통의 액션영화에서의 장면과는 확실히 다르다. *주3 데이비드 보드웰은 저서에서, 홍콩 무술영화의 매력은 ‘발레’처럼 ‘합이 맞는’ 액션이 설계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씬’은 액션을 정교하게 설계하기를 거부하고,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발생하지 못하리라고 판단되는 감정들이 육감적이고 정서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도록 놓아둔다. 맞고 때리는 사람의 피곤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육체적’ 액션이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싸움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물들이 실존적 질문을 던졌을 법하다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현실성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미적 성취를 거둔 ‘멋있는’ 장면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과 다른 배우들의 육체에서 발산되는 피로감에 관객이 공감하는 과정이 그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육체가 작동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이 관찰했기에 이런 공감이 가능해진다. 보통 예술영화에서는 장면이 시각적으로 정교해지는 데 기여하는 장치들을 일부러 노출해 영화의 작위성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소격 효과를 체험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도리 액션씬’에서는 정반대이다. 액션의 기술과 구성 모두 허술하지만, 관객은 그들의 싸움에 집중하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 연루된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왜 이렇게 반응했는지’를 신기하게 느낄 만큼. 최소한의 장치로 특정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효율성의 시네마’를 지양하고, 감각적•감정적으로 다양한 반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장면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또 다른 작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가보자.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2019)은 어떻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북미 영화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소감에서 연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게 해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미국에서 ‘봉준호’라는 작가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을 때였음에도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매번 그의 작품을 꼽아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특히 본인이 “학교에서 마티(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며 공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해 나눠 가지고 싶을 만큼 함께 후보에 오른 영미권 출신 감독들(마틴 스코세이지, 샘 멘데스, 쿠엔틴 타란티노, 토드 필립스)도 존경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장르적 개성에 완성도를 더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계승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이 계보를 함께 이어나가고 있는 동료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재치있게 언급된 < 텍사스 전기톱 학살 >(토비 후퍼, 1974)이라는 작품 역시, 뉴욕현대미술관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중 한 작품으로 영구보존되어있고, 영화 매거진 Sight and Sound 선정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250편 중 183위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고전호러영화이자 장르영화라고 생각할 법한 작품도, 할리우드의 영화적 계보 상에서 영화사적 가치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흐름을 따라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는 영미권 영화감독들과 동료 관계를 형성했고, 그 역시 그러한 계보의 연장선에서 ‘뉴 코리안 시네마’의 적자로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서구를 포함한 전 세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의 영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그만의 매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특히 북미 관객이 열광하는) ‘덕후들의 장르’의 경향에 수렴해서, 즉 ‘좋아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서’가 아닐까? 과거의 한국사회가 천대한 문화가 지금은 당당히 한류의 주축이 된 것처럼, 걸작도 한때는 쓸모없고 천박한 영화로 치부되곤 했다. 소수에게만 환영 받는다고 해서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해 작품의 존재를 숨기지 말자. 이전에도 그랬듯이, 누군가(가령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는 계속 찾고 있을 그 작품을 영화 팬으로서 계속 지지하고 싶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불법 비디오 중심의 그레이 마켓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의 OTT 시대 에는 말씀하신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답변) 넷플릭스를 보면, 전 세계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적 문법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히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작품들(예를 들어 동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 제작된 호러영화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단순 B급 호러영화로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거나 높은 장르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OTT 플랫폼이 아니라면, 그리고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그 플랫폼에서 이들을 발견해내는 불특정 다수의 애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들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동시대 영화 제작의 기술적 수준은 빠른 속도로 평준화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영화 제작과 감상이 (국가나 문화권 단위가 아니라) 특정 취향을 매개로 뭉친 애호가들 (예를 들어, ‘오대수 그룹’과 같이!)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향이 크게 두드러지리라고 예상한다. 이처럼 영화를 향한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의 열정은 OTT 시대에도 가려진 걸작들을 발견하는 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당분간은 OTT 산업이 그들의 활동을 무력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보다 먼 미래까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질문2)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널리 인정받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저만의 기우일수도 있지만, 이렇게 미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이 향후 한국영화계에서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 가 궁금하다. 혹시 교수님께서 이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눈여겨보신 이가 있으신지, 혹은 유사한 인물이 더는 출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보시는지를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나도 그렇고, 많은 분들께서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1980~90년대 한국 현대사를 지나며 민주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영화학의 도입과 시네필 문화의 융성 등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이후 세대의 감독들이 보여줄 작품의 형식과 내용도 그들의 작품에서와 같이 복합적일지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제기하고 싶다. 바로 한국영화 내 ‘작가주의’의 지속성 에 대해서이다. 작품의 예술성을 좌우하는 주체는 감독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고, 연출과 제작 과정의 상당 부분은 감독 개인의 결정에 맡겨진다. 이러한 작가주의적 경향이 지속될 수 있을지가 조금 궁금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에 관한 지식이 편재하게 되면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평준화된 오늘날, 오히려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다양한 집단(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영화애호가 집단 등)이 영화 제작과 유통, 감상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영화를 다각도로 바라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주의의 점진적 소멸이 그리 부정적인 현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본 질문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속 한국사회의 형성을 목도한 세대 이후의 감독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최근 국내 장르영화의 문법이 독창적으로 발전하려는 신호가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는 다른 종류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은 연상호 감독의 행보,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 오징어 게임 >(황동혁, 2021) 등의 작품은, 한국 영상 콘텐츠의 장르적 언어가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 지옥 >(연상호, 2021)과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질문3)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 달리 할리우드의 계보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한국적’ 특색을 선보임으로써 북미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감독 또는 작품이 존재할까? (답변) 두 사람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할리우드의 문법을 모사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의 일면을 효과적으로 영화화한다. 할리우드마저도 이들의 연출 방식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면, 둘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창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영화 한 편으로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문화에서 ‘고유’의 영역을 분리해낼 수는 없듯이, 한국문화는 곧 한국인들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 이다. 여기에는 미처 분석하기 어려운 갖가지 요소들이 뒤섞여있고, 상호 모순적으로 보였던 요소들이 정체 불명의 통일성을 띤 채 놀랍게도 공존함이 드러나면서 한국문화의 위대한 성취가 엿보인다. 한국인들의 삶에서 녹아있는 이 혼잡한 뒤섞임과 공존을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압축해 선보일 수 있겠는가? (질문4) 교수님께서는 영화인이 공유하는 공통 언어로서 ‘장르’를 인식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교수님께서 영화의 ‘장르’를 정의하시는 방법 을 여쭤보고자 한다. 한편, VHS와 DVD가 영화에 미친 영향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던 것처럼, 영화의 텍스트는 매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트리밍’ 매체가 영화에 대해 지닌 영향력 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혹시 가능하시다면, 교수님의 VHS 경험에 대해 더 듣고 싶다. (답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사실 주류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닌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딱히 ‘장르’라는 용어의 정의를 전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관점은 애호가 또는 연구자별로 다양하다. 그런데 사실 장르는 예술의 종류와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적용되어온,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있는 개념이다(에드가 앨런 포가 집필한 대부분의 소설이 호러 또는 미스터리로 여겨지는 것처럼). 작품의 종류를 상업적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거나 그 개념을 둘러싼 관습이 서서히 누적되는 과정을 추적해 개념의 정의에 접근하는 일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스트리밍 시스템이 영화 텍스트에의 접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고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그 반대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 오펜하이머 >(2023) 의 범세계적인 흥행이 설명될 수 없다. 스트리밍 맞춤형 콘텐츠만 환영 받는 환경이라면, 러닝타임 3시간 동안 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으로만 대부분 구성된 이 작품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극중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 작품의 극장 상영의 가치가 충분하고 극장의 관객이 이 점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흥행이었다. 이런 작품들의 인기가 스트리밍 시장에서 흥행하는 콘텐츠에 비해 밀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사실 VHS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매체에 대한 접근성 은 아주 높기에 국외 작품일지라도 더빙판 등이 복사된 자료를 보며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DVD는 접근성에 더해 수록된 영상의 품질까지 담보해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학 매체의 발전이 4K UHD 블루레이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여전히 누군가는 고품질 홈비디오를 찾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나 역시 < 죠스 >(스티븐 스필버그, 1975) 의 4K UHD 판본을 보면서, 1970년대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감상하며 받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됨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이렇게 감상자 개인에게 높은 수준의 화질과 음질 경험 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한 광학 매체 시장 역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직까지도 1930~40년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영화들을 수록한 DVD가 무수히 많이 발매되고 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감독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 등). 스트리밍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이 같은 작품들은 계속 해서 홈비디오의 형태로 마니아들에게 찾아온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준 VHS라는 매체에게 감사하지만, 그립지는 않다. 그보다 뛰어난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홈비디오의 가능성이 이미 전 세계에 열려있으므로. (질문4-1) 선생님께서 아직 버리시지 못한 VHS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물론 있다. 한국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1997). < 달은…해가 꾸는 꿈 >(1992)은 DVD로 발매되어 반갑게 구매했지만, <3인조> DVD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 (질문5) 영자원 역시 한국고전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VOD 채널( 유튜브 , KMDb , 네이버TV )을 운영 중이고, 구독자 대부분은 해외 국가 출신이다. 본 채널에서의 서비스 품질 향상 방법을 고민하다가 기관이 직접 복원한 영상을 4K 해상도 로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회수 증가 속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져, 광학 매체를 통해 대두된 ‘화질’의 중요성이 스트리밍 분야에서도 유효함을 깨달았다. 관련하여, 위에 말씀드린 영자원의 VOD 채널이 교수님께서 계신 미국 내 영화학자나 한국영화 팬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지, 그들에게 본 채널이 주는 도움에 대해 체감하신 바가 있으신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장 김홍준)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중 4K 리마스터작 재생목록 (답변) 지금이라도 한국영화를 찾아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에게 화질과 음질의 수준은 매우 중요하다. DVD라는 광학 매체가 처음 발매된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이에 대한 시청각적 경험이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에 의해 학습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 한국영화는 촬영 기술, 사회적 통념, 미학적 스타일 등의 측면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녔더라도 대중에게 매력적인 작품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밀도 높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기회만 있다면 이들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앞선 질문에 답변한 내용에서처럼, 실체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성’을 보여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전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소개하려는 노력 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전영화를 고해상도로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자원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싶다. (질문6) 오래 전부터 “ koreanfilm.org ”에 올리신 리뷰를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저 자신도 여기에 글을 남기며 교수님과 인연이 닿았다. 당시 ‘한국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있나? (영화번역가 달시 파켓) (답변) 단순하다. 영화 팬으로서 멋있고,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한국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쓰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라서 좋아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 팬인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한국영화계가 갑자기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제작한 작품이더라도, 독특한 매력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얼마든지 ‘덕질’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가 발표하는 작품들의 완성도에서는 충분히 희망이 보인다. 중소 규모의 제작사에서 만든 한국영화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고보니 조금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역사 연구자임에도 영화를 사회적 사상이나 이념의 반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히려 영화 연구자분들께서 그와 같은 ‘사상적-이념적’ 관점으로 연구하시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코멘트) 비디오 리터러시 또는 시네마 리터러시라는 용어가 있듯이, 만약 ‘ 장르 리터러시 ’라는 용어도 성립 가능하다면 영화산업과 아카이브 모두에게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자원도 현재 같은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름 아카이브로서 장르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가 세계 또는 한국영화사의 어떠한 맥락과 닿아있는지를 관객에게 더욱 열심히 알려 대중의 장르 리터리시 신장에 기여하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맞다. 김기영 감독의 재발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르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지역에 관계 없이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접근하고자 할 것이고, 이렇게 조성된 관문을 통해 관객의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한국고전영화의 가치도 더욱 전파되리라 기대한다. *** 주1. 물론 이 과정에서 아시아 장르영화가 과도한 폭력과 성적 묘사를 강조한 “익스트림 시네마(Extreme Cinema)”라는 프레임으로만 인식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비판도 있다. 주2. 그러나 넷플릭스도 실상 그 기원을 따라가면 광학 매체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초반에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DVD 렌탈 서비스’를 표방했고, 방대한 양의 소장자료를 자랑하며 그 어디에서도 감상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비디오 및 디스크 대여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점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주3.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련되게 촬영된 액션영화들에서도 <올드보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는 있다. 넷플릭스 <데어데블> 시리즈 중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이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싸우도록 한 인상적인 복도 액션씬이 대표적이다.
박성배(황정민)는 옛 미군 건물이 재개발을 앞둔 안남 시(市)의 시장이다. 부패한 정치인 성배의 수족 노릇을 하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범죄와 결탁한 자신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검사 김차인(곽도원)과 어쩔 수 없이 내통하는 관계가 된다. 도경이 이 조야한 권력자들에 굽신거려야 하는 이유는 병원비를 변통해야 하는 말기 암 환자 아내 윤희(오연아) 때문이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이 남자는 시장의 오른팔 은충호(김종수)의 장례식에서 한 가지 묘수를 짜낸다. 도경의 기지로 두 권력자가 장례식장에서 화해할 수 없는 상태로 맞닥뜨리는 시퀀스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도경과 선모, 성배, 차인은 예정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순회하면서 서로를 대면하게 된다. 누구든 자신의 앞길을 막는 상대를 향한 으르렁거림과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위협, 땀에 젖은 얼굴을 묘사하는 날카로운 카메라 워크로 주요 인물들 간의 간의 대결이 차례로 기술된다. 성배는 무늬만 시장이지 지하세계와 연줄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죄 조직의 수괴에 가까운 갱스터로 뼛속까지 타락하였다. 성배와 같은 인물이 선거에 통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권력과 도시의 퇴행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법의 수호자인 차인은 성배를 체포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다가 그 자신이 범죄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순진무구한 조무래기 형사였던 선모(주지훈)는 도경을 추종하여 피와 돈의 맛을 본 순간 비열한 갱스터로 빠르게 변질된다. < 아수라 >(2016)는 남성성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작품으로, 네 명의 주인공은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도덕적 타락으로 붕괴한다. 충성심과 우정이 변질되면서 남자들이 차례로 자동차, 손도끼, 망치, 금속 스파이크 및 재래식 무기의 희생자가 될 때 세상은 피바다로 변한다. 김성수 감독은 ‘갱스터’라는 장르의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작가이다. <아수라>에서 그의 연출은 영화에 풍자적인 분위기와 악독한 코미디의 느낌을 고조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에 갇힌 캐릭터에 선의의 뉘앙스까지 부여한다. 세상이 나아질 가능성을 0%로 보는 비관적인 세계관이 새로울 건 없으나 촘촘하게 짜인 긴장을 고조해가는 스토리는 권위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를 경멸하며, 가망이 없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낸다. 어두운 골목길과 옥상, 불길해 보이는 회의실과 경찰서 등 <아수라>의 현대적인 누아르 스타일에선 위협과 위험의 분위기가 반영된 공간 세팅이 핵심을 이룬다. 영구적인 분노와 적대감, 고통에 매몰된 존재의 상태는 폐쇄적인 프레이밍(framing) 연출을 통해 시각화된다. 장엄한 엔딩을 보여주는 장례식장 시퀀스에 이르기 전까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작은 옥상, 미로와 같은 빈민가의 건물들, 골목, 쇠창살의 교도소, 황폐한 건물의 내부 등은 살아남기 위해 모사와 굴욕,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최적의 무대를 제공한다. 구타와 살인이 끊이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김성수는 도경이 마약에 찌든 부랑아 작대기(김원효)를 의도치 않게 살해하는 옥상 신, 조선족 갱단들과 도경이 벌이는 빗속의 자동차 추격 신, 검찰수사관 도창학(정만식)에게 도경이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사무실에서의 린치 신 등을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공간의 함의와 조형에 기초한 김성수의 장면 연출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폭력과 유혈이 도처에 널렸으며 그 소용돌이에 휩싸인 사람은 누구도 탈출할 수 없으리라는 강력한 신호를 전달한다. 공간의 프레이밍 전략은 헤어날 길 없이 갇힌 존재들의 비의(悲意)를 보여주는 폐쇄성에 기초하고 있다. 고문과 구타, 칼질을 포함하여 잔인한 유혈의 장면들 중 대학살로 점철된 클라이맥스 시퀀스는 공간의 시각화라는 관점에서 역사에 남을만하다. 거의 140분에 육박하는 영화에서 이 시퀀스는 서사의 흐름이 지루한 수준으로 끌려갈 즈음 다시 스릴이 넘치는 광경으로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장면 연출의 초점은 수직의 복도에서 벌어지는 자비가 없는 폭력이다. 모든 인물이 벌이는 권력 투쟁과 충성심, 힘의 우열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물들의 위치에서 절정에 이르며 장례식장의 좁고 수직으로 난 복도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파열된다. 김성수의 연출은 도경과 그의 충직한 동생 선모의 쟁투가 벌어지는 복도와 박성배와 김차인의 수하들이 벌이는 장례식장 복도의 살육극을 나란히 배치한다. 두 개의 복도(도경-선모, 성배-차인)는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형제애를 기반으로 했던 도경과 선모의 투쟁, 이권과 권력욕에 눈이 먼 성배와 차인의 대결은 남성적 유대가 파탄 난 세계의 지옥도를 그려 보인다. 각각 경로를 통과한 도경과 성배가 피의 복도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없이 냉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아무려나 우정과 형제애가 사라졌을 때 온 세계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 시퀀스의 촬영과 편집은 도경과 선모가 드잡이 싸움을 벌이는 복도, 성배가 고용한 조선족 갱스터와 차인을 호위하는 검찰 병력의 충돌이 빚어지는 장례식장 복도의 수직적 형상을 강조하는 기교들을 활용하여 구도와 앵글, 사이즈, 조명, 액팅의 세트피스를 보여준다. 시퀀스의 초입에 천장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린 형광등은 초기 설정의 용의주도함을 입증한다. 흔들리는 빛의 특성과 텍스쳐는 현실과 은유적인 차원 모두에서 죽음이 도열하는 이 수직의 공간을 편집증적인 불안으로 세팅하면서, 성배와 도경이 최후를 맞는 대단원에서 시각적으로 절정에 달하는 그 기능(앞뒤로 흔들리며 죽음의 풍경을 비추는 빛)을 예비하고 있다. 공간 연출의 성취는 벽들이 프레임의 1/3을 점유한 복도 공간에서 총 하나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육박전을 벌이는 도경과 선모, 좌우대칭의 비좁은 벽 사이에서 조선족 갱단에 도륙당하는 창학, 길게 수직으로 난 장례식장 홀에 쌓이는 시체들의 조형 방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시퀀스의 목표는 어느 누구도 품위가 있거나 호감이 가는 인물이 없는 이 세계에서 아둔한 남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서로의 목을 조르며, 경쟁 상대를 쓰러트리려 발버둥 치는 형상을 묘사한다. 안남 시라는 가상의 무대 구축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 또는 이해할 수 있는 것 너머로 이동을 허용함으로써 언캐니한 공간감을 조성하고 도시의 음영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은 불가능한 정도의 밀도와 깊이를 전달한다. 갱스터 장르에 대한 김성수의 폭넓은 이해와 공간 연출은 낮은 조도의 조명과 더치 앵글, 대담한 색상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활기를 통해 안남이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라기보다는 ‘씬 시티’에 가까워 보이도록 만든다. 도시 정체성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한데 안남은 도시 구조에 자율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수많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별되는 구역들의 경험은 독특하며, 각각의 구역은 고유한 물리적 특징은 물론 현실 세계의 구조를 압축하고 있다. 도시 갱스터 장르에 대한 감각과 비트를 내장한 하드코어 액션 장면들에서 뛰어난 공간 연출은 장례식 시퀀스 외에도 몇몇 장면들로 선행적으로 축적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 도경의 SUV 차량과 갱단이 탄 승합차가 격렬한 파열음을 내며 경합하는 체이스 시퀀스에서 도경의 차 안에서 번쩍이는 붉은 등과 푸른 화염, 가드레일을 충격하는 동안의 불꽃 등이 사이키델릭 조명을 대신한다. 먹이사슬 구조의 억압과 고통을 광적으로 분출하는 도경의 폭주는 비에 젖은 도로의 번들거림, 수직, 수평으로 교차하는 빗줄기의 미장센과 조응하여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만 할 뿐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는 암흑의 터널 안에 갇힌 인간의 조건을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이모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차의 안과 바깥을 오가며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괴성을 지르는 한 남자가 구제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지옥에 억류되어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선함과 온기를 거둔 정우성의 악에 받친 연기는 흑적색으로 물든 멍자국들, 퉁퉁 부은 눈두덩, 독기를 품은 욕지기로 폭발한다. 허무주의적인 배음과 그림자의 극단적인 사용, 양식적인 구도는 압도적인 불길함을 조성하면서 대비의 인상을 강화한다. 무고한 피해자들과 달리 모든 인물들이 완전히 무참하고 버림받은 채 잔인하게 살해되는 영화의 결말은 도덕적 신념 체계를 완전히 거부하며 진실과 도덕, 선의에 대해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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