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길
- 감독
- 신종훈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박명신, 고원희, 이휘종, 최무성, 박수영, 박진우, 나종민, 이호현, 홍준표, 민용근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 속 공간적 배경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리 없는 배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곤 한다. 그 어떤 대사가 주어지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뒤에서 극의 전개를 뒷받침해주면서,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다. 따라서 영화를 감상할 때, 배경이 되는 공간(도시일 수도 있고, 농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다)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행위 또한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 걸쳐 총천연색 컬러로 제작된 한국의 영화들은 공간적 배경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자료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1980년 12월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기 이전까지, 대한뉴스를 비롯한 국가 주도의 기록 영화를 제외한다면 당대 한국의 ‘공간’을 총천연색으로 담아낸 매체는 오직 영화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에도 컬러 ‘사진’은 존재하였지만, 아무리 사진의 해상도가 뛰어나다 한들, 24프레임으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이 주는 생동감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 필름이라는 프레임 속에 담긴 공간은, 그 화각이 사람의 시선에 비해 제한적이라는 특성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경관(landscape)과는 또 다른 ‘의도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의 기저에 깔려있는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이러한 ‘경관’에 의도적으로 녹아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므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의도된 경관’으로 재해석할 때,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영화 해석의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 야행 >(김수용, 1977)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1973년에 촬영이 이뤄졌으나 당국의 검열로 인해 1977년에 개봉된 <야행>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당대 일간지에서의 영화평은 물론이요, 201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비평이 이어져 오고 있는 ‘꼭 봐두어야 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야행>에 담긴 공간적 배경(당대의 ‘의도된 경관’)을 살펴보는 것 또한, 영화 제작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서울 도심 전경, 삼일고가도로, 광화문 지하보도를 넘나드는 도입부의 시퀀스 <야행>의 약 2분여에 걸친 도입부는 많은 비평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적한 농촌을 가로지르는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삼일빌딩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감상하는 시점과 무관하게 상경의 과정을 나타내는 시퀀스임을 누구나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구성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퀀스에서 주로 비치는 공간은 고속도로,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고가교,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그리고 광화문 지하보도라는 ‘입체 공간’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감독이 어디까지 의도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서울이라는 장소의 근대성, 도시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2024년 현재의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의 외관 (필자 촬영 및 제공) 주인공 현주( 윤정희 )가 근무하는 은행은, 안국동 로터리에 위치한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김중업 설계)으로, 서울 도심 중에서도 ‘한복판’인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15층의 갱생보호회관은 대폭 리뉴얼을 거친 지금에도 여전히 위용을 뽐내는 건물이니, 반세기 전 서울에서는 더더욱 그 존재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현충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반포주공아파트로 걸어들어가는 현주의 모습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는, 영화가 촬영되던 시점에 갓 입주가 이루어진 말 그대로 최첨단의 아파트 단지였다. <야행>에 대한 비평 이외에도, 반포주공아파트의 의의에 대한 논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 한강 이남에 지어진 최초의 중산층을 겨냥한 아파트 단지로서, 현재의 강남 아파트 신화의 방아쇠를 당긴 단지에서,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엔 유유자적하나 심리적으로는 항상 결핍된 ‘모던한 삶’을 살아간다. 소월길에서부터 덕수궁까지 배회하는 현주의 시퀀스 영화의 20분-23분경에서, 현주는 정처 없이 서울 도심을 배회한다. 남산 소월길을 걷다가 구매한 마스크를 두르고, 시청 앞 덕수궁에 들러서 동물을 감상하거나, 정관헌에서 차를 마시는 현주의 행동은 50년이 지난 지금, 퇴근 후 직장인들의 모습을 종종 관찰할 수 있는 덕수궁의 풍경과 금세 오버랩된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카메라는 그저 현주와 풍경을 비출 뿐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 심적으로 허전해 보이는 현주의 심리 상태를 체감할 수 있는 훌륭한 시퀀스이다. 꺽다리 빌딩 사이에서 조용히, 혹은 외로이 문화유산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는 덕수궁, 그리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익명의 도시인들의 모습이 현주라는 등장인물의 행동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주의 고향, 홍성군 홍주읍성의 조양문 영화의 40분 이후, 현주가 잠시 생각의 전환을 위해 귀성한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카메라는 장항선의 옛 역사, 홍주읍성의 조양문, 읍내의 도로를 컬러로 비추며, 최첨단을 달리던 대도회지 서울과는 대조적인 경관을 훑는다. 강변1로와 5로(현재의 노들길 동작역 부근), 그리고 갓 준공된 반포주공아파트의 부감 시퀀스 51분경에 등장하는 현주의 주거지, 반포주공아파트를 부감하는 씬은 만약 이 씬만 떼어놓고 본다면 마치 대한주택공사의 홍보 영화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대적이며, 도시적이다. 특히 씬의 도입부를 1971년에 갓 개통된 동작동 강변1로와 강변5로(현 노들길)의 경계점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감독은 초고밀도의 서울 도심, 비포장도로 천지인 현주의 고향과는 대비되는 인공적이고 균질하며, 인간성이 결여된(실제로 영화 촬영 시점에서는 입주가 100% 완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시가지 강남’을 이 씬에 담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의 육교 영화의 후반부, 60분과 68분경에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은행 앞 육교가 동일한 구도에서 시간대만 낮과 밤으로 달리한 채 등장한다. 재밌게도, 이러한 구도는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 등의 타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단골’ 구도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도회지 서울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구도로서 너나 할 것 없이 이 육교를 꼽았던 것이다. 걸음을 서두르는 박대리와 그 뒤에 우뚝 솟은 갱생보호회관의 전경 영화의 막바지, 74분경에 예상외의 행동을 하는 현주에 당황한 박대리( 신성일 )는 안국동 사거리의 육교를 황급히 걸어 내려오며 은행으로 들어가는데, 이 씬에서 당당한 풍채의 갱생보호회관 외관이 잠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78분 즈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가 다시 비친다. 비록 영화 전체에 걸쳐서 공간적 배경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으나, 현주와 박대리의 상반된 물리적 관계가 유지되는 두 곳의 장소 모두, 결국에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보면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은 ‘의도된 경관’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2024년 현재 아쉽게도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 모두 촬영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전자는 바로 지난해 재건축을 위해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후자는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영화 촬영 당시와는 외관이 상당히 바뀌었다. 예정된 파국을 맞이했던 현주와 박대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두 곳의 ‘의도된 경관’ 또한 현실 세계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사실상 자취를 감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영화 <야행>을 온전히 역사의 영역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윤대원 감독의 < 매미 >는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느 여름밤 서울 남산 소월길에서 성매매를 하는 트랜스젠더 창현의 이야기를 변신의 모티브와 SF 영화의 관습을 활용해서 그린다. 매미가 유충에서 성충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탈피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창현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을 완벽하게 바꿀 수 있기를 꿈꾼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와의 만남을 다룬 SF 영화처럼 이 작품은 창현의 몸으로 타자가 침입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에 대해 다룬다. 창현의 몸은 창현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창현과 어떤 남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활용하는 가운데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남성은 유사-탐정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흡사 범죄 현장에서 증발해버린 사건의 당사자를 쫓는 탐정처럼 서울 남산의 순환도로를 배회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의 시선에 동기화된 카메라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를 위장막 삼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창현은 도시적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모험과 위험을 맞닥뜨리는 여느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닮았다. 그는 자신처럼 거리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트랜스젠더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거나 그들 중 누군가와 날이 선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창현은 남성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의 은밀한 거래는 대화, 언쟁, 성교,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남성은 창현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창현은 남성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사라지기를 바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적 담화를 구축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해독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습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이원적 세계의 견고함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젠더적 이분법이 하나의 규범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성적 정체성은 주체의 자율적인 선택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어떤 인칭, 어떤 주체, 어떤 기관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하나의 몸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언뜻 보면, <매미>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명확한 이원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을 다룬 도식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영화 또한 기존의 여러 내러티브 중심적인 영화들이 주인공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서서히 봉합해나가는 그런 관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특이하기보다는 전형적이고, 갈등은 복잡하기보다는 단순하고, 결말은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영화적 관습에 기대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작품은 그저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소외된 소수자의 정체성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지를 의미화하거나 그것을 서사에 종속시키는 방식 대신 이미지를 하나의 식별 불가능한 형상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의미 체계를 무너뜨린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은 여러 시각적 이미지가 한 화면 속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서 의미의 사슬에 포획되지 않는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영화는 남산 순환도로와 그곳을 통과하고 있는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의 동선과 겹치는 남성의 시선을 수평축으로 설정한다. 이 가상의 수평선들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와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통해 형성된 수직축과 겹쳐서 가상의 격자를 만든다. 그것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남성의 욕망, 젠더적 구분을 초월하려는 트랜스젠더의 욕망, 그리고 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법의 경계를 가로지르려는 소수자의 욕망이 교차한 결과이다.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단어를 구성하는 접두사 ‘트랜스(trans)’가 의미하는 초월 내지는 횡단을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의미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모호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은 외형적으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다. 어두운 밤에 가로수 뒤편에 몸을 은폐하고 있기에 그 형태 자체가 흐릿하거나 어둡게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견상 여성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아직 신체적으로 여성의 생식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남성도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중간자에 가까우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자리를 잃은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둠이라는 비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에 등장하는 하나의 몸으로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하나의 몸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지배적인 힘이 아니라 그 몸체가 어떤 관계 속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이다. 모든 대상의 몸은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어느 배치물 가운데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마치 <매미>의 창현이 어느 여름밤 남산 소월길에서 만난 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몸과 그것에 깃든 정체성을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창현의 몸은 저항의 장소, 파괴의 장소, 창조의 장소이다. 만약 창현을 신화적 영웅의 비범함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인간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규범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그런 규범을 무효화시키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미>는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와 그것의 변형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이미지의 형상적 변화를 통해서 세속적인 대상들 가운데서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