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이다
- 감독
- 여서연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김수린
2017년 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인 인디의 별은 이규태 작가의 최신작인 < Here Winter >가 수상했다. 나는 그의 첫 애니메이션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졸업작품, 러닝타임 8분짜리 단편 < 돌아보다 >(2008)부터 영화제에서 볼 수 있었는데 첫 작품부터 연출과 작화가 뛰어난 작품으로 유명했다. 이후 그는 많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그 중 <더 빅보이>(2013, 6분), <Each Other>(2014, 6분), <Here Winter>(2017, 6분) 등이 주요 작품이다. 이규태 작가에게는 특히 ‘작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데 그것은 그가 일러스트 작가로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작가로서의 이규태는 인상파라고 할 수 있다. 색연필로 빛을 구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삶의 어떤 인상적인 순간들을 포착하듯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색연필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색연필을 잘 쓰는 작가라고도 말한다. 한결같은 일러스트 작업에 비해 애니메이션 작업은 작지만 착실하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이야기 구조에서, < 돌아보다 >와 <더 빅보이>까지는 확실하고 명확하지만 <Each Other>와 < Here Winter >쯤 가면 모호해진다. 작품은 인과 관계에서 설명이 생략된 좀 더 시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게 된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실험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전통적인 실험 애니메이션이 주로 음악을 기준으로 영상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 Here Winter >도 반쯤은 음악을 영상 전개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실험 애니메이션으로 기울지 않는 것은 이규태 작가가 그리는 캐릭터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생긴 느낌부터 이중적인데, 뭐랄까... 포동포동한 귀여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그 안에 안쓰러움과 슬픔, 아련함 등이 공존한다. 이규태 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사실 안쓰럽다. 괴물을 잡기 위해 전 인생을 보내고 나서야 소중한 사람을 깨닫게 되는 < 돌아보다 >의 사냥꾼 남자나 여린 마음에 거대한 몸집을 가진 <더 빅보이>의 거인, 그리고 <Each Other>의 소년까지. 이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이 가여운 사람들이다. 게다가 감독은 해피엔딩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캐릭터의 성질은 이규태 작품을 관객들이 쉽게 즐기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생각해 보니 그런 장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음악이다. 이규태의 모든 작품의 음악을 만든 신현모 의 음악은 이번에도 아련하고 캐릭터에 빠지게 되는 좋은 울림을 만들었다. 애니메이터로서 이규태 의 재능은 무척 뛰어나다. 형태를 변화하면서 주인공이 달리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는 <Each Other>의 마지막 장면은 동시에 주인공의 내면도 보여준다. 형태를 무조건 변화시킨다고 그런 움직임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규태는 인물의 움직이나 동물, 자연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도 뛰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추상의 움직임에서도 생명체의 느낌을 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컷과 연출은 어울리지 않는 두 컷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동시에 음악적인 템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스토리를 즐기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이규태 작가의 최근 작품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광경을 즐기듯이, 그의 작품을 보고 즐기면 된다. 아름답고 따듯한 이미지와 아련한 음악의 조화. < Here Winter >는 작품에 나오는 눈처럼 매력적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래의 작가의 공식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kokooma.tumblr.com/ https://www.instagram.com/kokooma
한 소녀가 돌연 사라졌다. 경찰을 비롯하여 실종된 소녀의 엄마( 서영화 ), 학교 교사, 학생들 모두 실종된 소녀와 늦게까지 있었던 영희( 전여빈 )을 의심한다. 심지어 당시 영희와 함께 있었던 한솔( 고원희 ) 또한 영희가 소녀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증언으로 영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김의석 감독의 < 죄 많은 소녀 >(2017)는 ‘증명’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라진 소녀 경민( 전소니 )이 투신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경민의 죽음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자신은 경민의 선택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려 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경민이 투신하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주변 사람들이 경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을 영희에게만 묻는 탓에,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슬퍼할 틈새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 죄 많은 소녀 >의 영어 제목은 <After My Death>다. 직역하면 ‘나의 죽음 이후’로 번역되는 영화는 중의적 해석을 내포한다. <죄 많은 소녀>는 강물에 투신한 경민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다.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죄 많은 소녀가 된 영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영화의 출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못하는 영희가 학생들 앞에서 수화로 인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살 시도를 벌인 영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시퀀스 초입에서 반복 재생된 이 장면은 오프닝과 달리 자막이 곁들어져, 수화를 모르는 교사와 학생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희가 돌아온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완벽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한 귀환’. 영희를 포함한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경민의 죽음에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워킹맘인 경민의 엄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딸에게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영희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경민의 고백에 죽음으로 너의 사랑을 증명해보라는 무심한 한마디를 건넸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영희와 경민 사이를 질투한 한솔은 경민을 두고 영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조롱한 바 있다. 경민의 투신 이전에 이미 4명의 학생의 자살을 경험한 학교는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행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지레 겁이 난 학생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이들 중에 경민의 죽음을 특별히 부추긴 사람은 없다. 동시에 경민과 관련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조자다. 동시에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경민의 투신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특정 인물을 지목해 단죄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을 공격하고 손가락질하는 행위 또한 내가 경민의 죽음에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토끼몰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토끼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죽음’ 이다. 그들을 위해 죽여주거나 아니면 자신이 먼저 죽던가. 경민이 실종된 다음 날, 자신의 생리통을 믿지 않는 보건 교사에게 질 밑에 묻힌 피를 보여주며 생리 중임을 증명했던 영희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를 택한다. 영희의 자살시도는 영희에게 쏠렸던 의심을 일시적으로 분산시켰지만,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더 이상 영희를 경민의 죽음을 부추긴 죄인으로 몰고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타깃을 찾는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죄인에게 영희에게 씌웠던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한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김의석 감독은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 죄 많은 소녀 >를 통해) 모두가 패배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죄 많은 소녀>의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이다. 경민의 자살을 부추기지 않았고, 그 아이의 죽음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학을 하거나 자신은 경민의 죽음 혹은 영희의 자살 시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희생양을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사람의 선택을 남은 자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특정한 잘못도 아니요, 이유가 있다면 모두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나약한 인간들은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홀로 괴로워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기 전에, 서로를 향한 의심과 질책만 남은 세상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애도와 믿음이 사라진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죄인이 된 소녀는 죽음 아니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세상을 향한 슬픈 복수를 감행한다. 그 이전에 또 다른 소녀는 자신이 혼자 외롭게 끙끙 앓다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두 소녀 중 누가 죄 많은 소녀일까. 신뢰와 믿음을 잃어버린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 죄 많은 소녀 >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2017년은 영화를 보는 게 그렇게까지 즐거운 해는 아니었다. 좋은 영화는 계속 나왔고 내가 놓친 영화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와 (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암청색 양복을 입은 조폭들로 구성된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주류 영화들이 만드는 풍경은 지겨웠고 종종 숨이 막혔다. 사실 올해는 좋아하는 영화보다 싫어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내 리스트는 언제나처럼 조금 랜덤이다. 아마 평론가들은 드니 빌뇌브가 만든 두 편의 SF 영화 중 < 컨택트 Arrival >보다 < 블레이드 러너 > 속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영화가 SF로서 매우 게을렀다고 생각하고, 다소 할리우드적으로 통속화되었을지 몰라도 <컨택트>의 성취가 더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컨택트>가 더 훌륭한 주인공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에 질렸다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건 대단치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부풀어진 슈퍼히어로 유니버스들이다. 마블과 DC 팬들은 제발 전쟁에서 나를 빼 달라. < 로건 >을 뽑은 것은 이 영화가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해있으면서 그 우주의 일관성이나 논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마구 질주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 옥자 >를 SF보다는 <내셔널 벨벳>과 같은 ‘소녀와 동물’을 다룬 전통적인 가족영화의 연장선에서 보았고 그 절절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 로우 >는 지금까지 호러 영화가 여성 감독을 외면해왔던 게 얼마나 역사적으로 끔찍한 낭비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례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를 두 개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준다. < 옵티그래프 >가 사적 다큐멘터리의 작은 틀을 통해 그려 보이는 한국 현대사와 < 택시운전사 >와 같은 대작 영화들이 그려내는 지루한 풍경을 비교해보라. < 땐뽀걸즈 >의 생생한 주인공들에 비하면 비슷한 상황을 다룬 한국 학원물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식상한가. 올해 뽑은 두 편의 퀴어 영화인 < 꿈의 제인 >과 < 판타스틱 우먼 >은 모두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주인공이거나 타이틀롤이다.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彼らが本気で編むときは >와 < 분장 >도 주목할만한 영화였다. 20여 년 전이라면 식상한 방식으로 다루어졌을 주인공들이 조잡한 퀴어베이팅과 위장한 BL 사이에서 빛나고 있다. (< 메소드 >의 욕을 길게 하고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리스트에서 남은 건 < 배드 지니어스 >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대중적 장르물이고 놀랄 만큼 정통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대중영화가 도전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보다 드물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두 작품은 보다 많이 감상되고 깊이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 영화의 팬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는 이 국내 제목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잠재적인 한국 관객들에게 < 칠월과 안생 七月與安生 >이라는 제목이 와 닿지 않을 거라는 걱정 또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두 여자의 14년에 걸친 우정의 이야기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둘은 모두 가명이라는 남자를 좋아한다. 갈등이 생긴다. 이 상황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일단 4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스럽고, 비슷한 내용을 다룬 국내 연속극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다른 삼각관계 영화와 비교했을 때 가장 튀는 것은 이 관계의 꼭짓점을 이루는 남자 가명의 투명함이다. 달리기가 취미인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이 인물에 대해 끝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두 주인공이 가명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감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칠월과 안생은 끊임없이 가명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가명보다는 가명으로 인해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 자기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는 두 주인공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도구적 존재이다. 이렇게 되면 우린 단짝 친구의 남자친구에 대한 안생의 집착이 과연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둘은 그렇게 오래 알지도 않았고 만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건 좋은 가치지만 그만큼 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생에게 가명의 가장 큰 가치는 단 하나, 단짝 친구 칠월의 남자친구라는 것이다. 안생은 칠월의 모든 욕망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가명은 칠월과 자신을 연결하는 또 다른 다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를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수줍었던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둘의 우정을 연애처럼 그린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온갖 일들을 겪어도 서로에 대한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수이며 그들은 아무리 험악한 단계에 접어들어도 이를 당연히 여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지독한 욕은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어!”이다. 요새, 특히 모 시상식장에서 아이유가 자신의 소울메이트 유인나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뒤로 SNS에 자주 등장하는 “A와 B가 친구라면 나는 친구가 없어!”라는 문장은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에도 그럴싸하게 잘 맞는다. 이들의 격정적인 우정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편안한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의 친구들이 모두 이렇다면 삶은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정이 모두 같은 종류여야 하는가. 우정 역시 사랑이지 않은가? 아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정은 처음 겪는 사랑의 형태이고 이후 겪을 모든 사랑의 원형이 아닌가? 여러분의 연애 감정이 언제나 우정보다 위였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연애 대상이었나?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를 우정으로 위장한 로맨스 영화로 보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분명 이들에겐 서로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들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로맨스 이야기, 특히 이성애 로맨스와는 다른 길을 간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는 삶의 선택,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동아시아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과 그 조건의 돌파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칠월과 안생은 언제나 상대방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데, 늘 친구가 하나의 선택을 하느라 놓친 삶의 가능성을 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교환이 가능하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이름을 보라. 영화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소녀에게 安生이라는 이름을, 모범생이며 어른이 된 뒤에도 태어난 도시를 거의 떠난 적 없는 소녀에게 七月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는 초반부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의 성격이 생각만큼 당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캐릭터 설정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가, 우리가 이성애 로맨스를 통해 익숙해진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틀에서 전개되는 러브 스토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안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기 위해 그 누군가가 포기한 길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러브 스토리의 틀은 이성애 로맨스와는 맞지 않는다. 이는 같은 욕망을 갖고 같은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만약 안생이 남자였다면 이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얄미웠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제한했고 이 단어가 포함되는 이야기를 편협하게 장르화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랑의 행위와 이야기가 그 장르의 울타리 밖에 버려지거나 울타리 안의 익숙한 몇몇 공식에 맞추어 재해석되게 된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의 가장 큰 가치는 이 울타리를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관객들을 거의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러브 스토리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칠월과 안생이 그렇듯 우리에게 들려줄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 아이유인나는? 남의 사생활이니 우리가 뭐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