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금보는 방법 개쩐다!
- 제작년도
- 2010
영화 < 고려장 >을 둘러싼 논란은 대개 영화가 아닌, 실제 풍습에 초점이 맞춰진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려장은 설화로 남아 있을 뿐, 실제 행한 기록은 없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의 풍습으로 세계에 알려졌다는 점 역시 논란거리다. 영화 <고려장>에는 한 사학자가 과거 풍습으로 고려장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어 고려장을 기정사실화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비판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고려장>은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혹은 실제의) 풍습을 경유해 삶의 단면을 해부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김기영 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정신적인 본능을 영화로 구현해왔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설사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고려장이라는 풍습에 내재한 인간의 욕망에 관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부정하고자 하는 데에는, 단지 사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을 넘는 과잉된 무언가가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를 다시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효’사상이 있다. 고려장은 효사상에 위배되기에 용납할 수 없는 미개한 치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기영은 이질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고려장 문제가 단지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산만이 아님을 꼬집는다. 오프닝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당면한 인구 조절 문제에 관한 TV 토론 현장을 보여준다. 생물학자는 식량이 부족할 때 서로 잡아먹어 개체 수를 조절하는 쥐를 사례로 들자, 사학자는 이를 받아 과거 고려장 풍습을 언급한다. 이것은 뒤이어 등장할 구룡( 김진규 )의 이야기의 요약본이자, 고려장에 관한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고려장이 생겨난 근본 원인이 존속하는 한,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외양을 띤 토론(혹은 법과 제도)의 형태로 고려장은 다시 등장할 것이고 이는 원래의 잔혹한 이면을 감춘 것에 불과하다. 토론 장면에서 인구조절 논리에 대응하는 것으로 ‘운명’이 언급된다. 일흔 정도 되는 한 방청객은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당할 나이’라는 사회자의 발언에 ‘나는 100살까지 살 손금을 타고났다’고 받는다. 그러나 운명이 제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부합한다면 어떨까. 근대 이전으로 회귀해 펼쳐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제도와 운명은 서로 동조한다. 어릴 적 구룡은 무당( 전옥 )으로부터 이복형제들을 죽일 것이라는 점괘를 받는다. 점괘를 통해 예고된 운명은 (잔인하긴 하지만) 인구조절이라는 제도적 목적과 부합한다. 점괘의 저주를 받은 구룡의 형제들은 구룡을 위기에 빠뜨리고 모함한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기회를 얻는다. 그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구룡의 어머니( 주증녀 )가 스스로 고려장을 선택한다. 이때 고려장은 제도와 운명의 결합체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예정된 운명과 인구조절이라는 근대적인 과제를 동일 선상에 놓으면서, 운명에의 저항을 곧 제도에의 저항으로 만드는 것이 영화의 미묘하고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 가운데 고려장은 효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도구와 인구조절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일임이 드러난다. 구룡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목숨을 잃는다. 모함당해 죽고,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어린아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고려장’만을 특별한 죽음의 방식으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서 유독 인상적인 것은 어떤 유예의 순간들이다. 구룡 어머니의 고려장 시퀀스에서 구룡의 행위를 유예시킨 건 구룡의 효심이 아니라 어머니의 살고자 하는 의지였다. 어머니는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공연한 말로 아들을 불러 세운 데 이어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효’나 ‘고귀한 희생’ 같은 추상적인 가치 이전에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더욱 강조된다. 구룡이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이유는 ‘효심’ 이전에 길을 따라나선 아이로부터 ‘이다음에 아저씨를 데려오게 지게를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룡의 갈등 요인에는 단순히 효심과 운명 사이의 고심만이 아니라 고려장이 곧 자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의 실감도 있다. 유예의 다른 순간은 구룡의 10형제에 대한 복수 시간에 도래한다. 연인 갓난이( 김보애 )가 10형제의 손에 죽임당했음을 무당으로부터 들은 구룡은 무당이 전해 준 도끼로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는 충분히 장르적으로 생략해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명 한 명 숫자를 세듯, 형제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는 장면을 이상한 느낌이 들 만큼 천천히 보여준다. 영화 내내 하나의 덩어리처럼 인식되었던 10형제들은 도끼질 속에서 각각의 개체로 분리되며 구룡에게 삶을 구걸한다. 그 속에서 행위에 관한 자각이 싹트고 구룡은 도끼질을 멈춘다. 구룡은 형제를 모두 죽이는 대신 그런 운명을 심어둔 무당의 나무를 자른다. 영화의 결말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멈추고, 살육의 뿌리를 자르자는 지극히 계몽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와 만났을 때는 간절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운명이든 제도든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오직 죽음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므로 다시 묻자. (그것이 실제이든 허구든)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미개한가. 그렇다면 전쟁과 학살은 어떤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자는 누구인가.
정창화 (1928~ )의 < 죽음의 다섯 손가락 >(1972)은 홍콩과 한국 영화계 간에 조성된 일대 흐름이 맞물려 빚어진 시대의 산물이었다. 60년대 초에서 70년대 말까지 한홍 합작영화의 활발한 제작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한상은 < 양귀비 >(1962)와 <무측천>(1963)과 같은 시대극을 한국 로케이션으로 찍었으며, 호금전은 <공산영우>(1979)와 < 산중전기 >(1979)를 해인사와 불국사, 설악산 등지에서, 장철은 <사기사>(1972)를 서울에서 촬영했다.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와 손잡고 다수의 한국-홍콩 합작영화를 기획해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쉼 없이 다양한 영화를 찍어내면서 인력난에 시달리던 홍콩 영화계의 상황은 역으로 한국의 영화 인력이 홍콩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 수업료 >(1940), < 자유만세 >(1946)를 만든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정창화 감독은 1958년부터 홍콩영화계와 꾸준한 교류를 가졌고, 첩보영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홍콩 로케이션 촬영에서 쇼브라더스 사장 런런쇼의 주목을 받아 1968년부터 5년 전속계약으로 기용되어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하게 된다. 밀수꾼을 소탕하는 내용의 데뷰작 < 최후의 유혹 >(1953), 누아르의 장르적 색채가 진한 < 노다지 >(1961), 일제강점기 학도병의 이야기를 그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 전통사극에 서부극을 끌어들여 검객물의 원형을 만든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1968) 등, 일찌감치 한국영화 안에서 액션영화의 지평을 개척하던 정창화의 연출 성향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무협, 권격 영화를 대량으로 양산해내던 홍콩 영화계의 필요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쇼브라더스 무협의 기법과 관습을 답습한 평작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 래여풍 >(1971)의 시행착오를 경유한 뒤에 내놓은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정창화만의 개성을 무협영화의 역사에 각인시킨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왕우의 < 용호의 결투 >(1970)와 더불어 권격 영화의 유행을 일으킨 시효 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영화사적인 의의에 비해 이 작품의 서사 자체는 지극히 평이하다. 제자 조지호(나열)의 재능을 아끼던 스승 송무양은 더 큰 성취를 위해 그를 상무국술관의 손금배 사부에게 보낸다. 주변의 질시를 견디며 묵묵히 수련에 정진하던 지호는 마침내 손금배의 인정을 받고 절기인 철장비법을 전수받게 된다. 함정에 빠져 손이 짓이겨지는 수난을 겪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무공을 회복한 지호는 국술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그러나 일본 낭인과 결탁한 상무국술관의 라이벌 백승무관의 주인 맹동산(전풍)이 지호의 두 스승을 모두 해치고, 분노한 지호는 철장비법의 위력을 발휘해 악한들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수련을 통해 고수로 거듭나는 주인공의 성장과 스승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이라는 천편일률적인 플롯과 모티브를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우직하게 답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기억될만한 컬트 걸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연출의 차별성에서 드러난다. 장철이 슬로우 모션과 핸드헬드를 통해 유혈 낭자한 육신과 죽음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호금전이 유려한 수평 이동과 와이드 앵글로 자연과 공간, 그리고 인간에 흐르는 예민한 공기를 포착한다면, 정창화 는 광각렌즈를 중심으로 한 촬영과 컷 단위로 다듬은 편집, 명암과 색감이 두드러지는 조명 세팅으로 액션의 쾌감과 극의 분위기를 극대화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지호의 스승 송무양이 불의의 습격을 받는 도입부 액션부터 각기 다른 앵글과 사이즈의 컷을 빠르게 이어 붙여 충돌시키고, 무술 안무의 합을 도중에 건너뛰는 점프컷으로 액션의 박력과 속도감을 끌어올리는 불균질한 편집의 기교를 엿볼 수 있다. 손을 망가뜨린 적들을 떠올리며 수련에 매진하는 지호의 플래시백에서도 나무를 때리는 타격음에 맞춰 (긴장감을 자아내기 위해 기울어진 앵글의) 컷을 번갈아 몽타주 하다 국술대회 참가인원을 선발하는 다음 상황으로 점프하는 등 시퀀스의 급격한 전환을 통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 빠른 템포와 리듬감을 부여한다. “액션영화란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키는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라 말한 감독 본인의 인터뷰 발언이 시사하듯,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을 통해 만개한 정창화 식 액션 연출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오락적 쾌감의 경험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장르 감독의 본분에 입각한 것이었다. 술집에서 벌어지는 지호와 진랑( 김기주 )의 대결에서는 술 항아리를, 마음을 고쳐먹은 진랑이 지호를 대신해 일본 낭인을 막아서는 숲속의 결투에서는 잘게 부서지는 목재 소품을, 지호가 마침내 철장비법으로 일본 낭인을 처단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부딪치자마자 무너지는 벽을 배치하는 무대 세팅으로 타격감을 부각시키는가하면, 맹인이 된 한룡이 맹동산과 그의 아들을 급습하는 장면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간신히 드러날 정도로 공간을 어둠에 파묻은 가운데, 인물의 두 눈에 슬며시 빛을 닿게 하며 명암대비를 극단화한 조명으로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국술대회의 말미에 칼에 맞고 죽어가는 손금배와 일본 낭인에 의해 잘린 진랑의 목에는 별도의 녹색 조명을 비춰 죽음의 음울함을 강조하고, 지호가 철장비법을 쓰는 순간마다 펴진 두 손에 붉은 조명을 쏴 흥분과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등, 비현실적이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의 표현주의적인 활용이 돋보인다. (철장비법을 쓸 때마다 사이렌 소리처럼 울리는 음향은 퀸시 존스가 TV 시리즈 <아이언 사이드>(1967)를 위해 작곡한 시그널 트랙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당시 홍콩영화계에서 흔히 있던 사례였다.) 처음에 정창화 감독이 염두에 둔 작품의 원래 제목은 < 철장 >(鐵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권 관객의 취향을 의식한 쇼브라더스 사장 런런쇼의 입김에 의해 홍콩에서는 < 천하제일권 >(天下第一拳)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저가에 영화를 수입하려 한 신상옥 감독에 의해 한홍 합작영화로 위장되어 검열과 재편집을 거쳐 < 철인 >(鐵人)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는 수난을 겪었다. 영화는 한국에선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묻혔다. 정작 액션 장인 정창화가 인정받은 건 고국이 아닌 서구 영화계에서였다. 이듬해인 1973년, 워너브러더스의 배급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소규모 개봉한 영화는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어 확대 상영에 들어갔으며, 잠시 < 대부 >(1972)를 제치고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훗날 ‘헤모글로빈의 시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 킬 빌 > 2부작에서 철장비법을 구사하는 장면의 연출을 오마주하면서 영화는 다시 주목받았으며, 2005년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에서는 루이 말의 < 도깨비불 >(1963), 마틴 스콜세지의 < 라스트 왈츠 >(1978)와 함께 초청되었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명실상부한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액션 영화의 기술적 숙련도가 전에 비할 수 없이 높아진 오늘의 시선에서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의 액션은 철 지난 시대의 유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여전히 순수한 오락영화을 구현하고자 한 열정과 장르에의 매혹, 그리고 언젠가 세련된 형태로 다시 활용될지 모를 흥미로운 연출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한국-홍콩 합작영화가 성행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한 증언이자, 동시대 액션영화가 해낼 수 있는 표현의 저변을 돌파하려 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가치는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