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성][성교육] 6살 딸아이 생식기에 손톱자국이
- 제작년도
- 2010
1990년대 후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주제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다채로워진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투쟁에의 집중에서 ‘일본군 위안부’(<낮은 목소리> 3부작), 비전향 장기수와 탈식민적 현대사(< 송환 >, < 할매꽃 >), 가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 가족 프로젝트-아버지의 집 >, < 고추 말리기 >, <엄마...>, < 쇼킹 패밀리 >), 성소수자 정체성과 수행(< Out: 이반검열 두번째 이야기 >, <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 < 3xFTM >), 여성 노동자의 역사와 투쟁(< 얼굴들 >, < 밥꽃양 >, < 평행선 >, < 우리들은 정의파다 >, < 외박 >) 등 주제의 확장과 교차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감독 스스로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성찰적인 태도 자체를 주제로 삼거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트랜스-장르적 연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정치적 참여의 장이 다변화된 동시에 독립 다큐멘터리 상영이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의 공동체 상영에서 무작위적인 관객이 있는 극장으로 확장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장애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 팬지와 담쟁이 >(계운경, 2000)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이 시기에 장애여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이 몇 편 더 제작되었는데 〈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 〉(김진열, 1999), < 거북이 시스터즈 >(이영, 2002), < 진옥 언니, 학교 가다 >(김진열, 2007)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장애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세 영화는 초점이 다르다. < 거북이 시스터즈 >는 장애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여성 장애인 활동가 세 명이 한 집에서 가족 대안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상을 다룬다면, 연작인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와 <진옥 언니, 학교 가다>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김진옥이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키우는 과정을 쫓는다. <팬지와 담쟁이>는 부산에 사는 수정과 윤정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을 관통한다. 30대 중후반의 저신장 장애인인 수정과 윤정은 부산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는 언니인 수정이 친구들에게 소개받은 성주라는 남자와 ‘썸’을 타고 연애와 결혼을 꿈꾸는 로맨스를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수정의 연애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겨울에 소개 받은 후 설렘을 느끼며 봄을 지나지만 매미가 거세게 울어대던 늦여름의 어느 날 그 모든 감정과 기대들은 씁쓸하게 끝나고 만다. <팬지와 담쟁이>는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의 세월을 지나며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아이러니하게 대비되는 상실의 쓸쓸한 정취를 그린 계절영화이고, 호프집, 미장원, 사진관, 산부인과 병원, 지하철, 공원, 바닷가, 오래된 아파트 등 1990년대 말 부산 구석구석의 풍경을 보여주는 로컬 영화이기도 하다. 로맨스, 계절, 부산이라는 세 키워드를 품은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7개의 시퀀스로 구성된다. 각 시퀀스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웨딩드레스 제작 중 1 - 야학 선생님 결혼식 - 웨딩드레스 제작 중 2- 엄마 기념사진 – 노래자랑 – 여름바다 - 웨딩드레스 제작 중 3.’ 오프닝씬은 호프집에서 술 게임을 하며 성주가 수정의 흑기사를 자처하고 노래방에서 함께 <19살이에요>를 부르며 ‘썸’을 타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퀀스의 제목은 놀랍게도 ‘웨딩드레스 제작 중 1’이다.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어 상호 감정을 나누는 단계를 모두 건너뛰고 결혼을 가정한 채 성관계와 임신 및 출산을 고민하는 단계로 돌입한다. 실제 성주의 관점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성주가 어떤 마음과 의향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썸-연애-결혼’이 압축된 시간성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담론과 연관되어 있다. 수정은 성주가 노래방 ‘블루스 타임’에 키가 작은 자신을 안아 들어 올려 춤을 췄을 때 활동지원사들한테 안겼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연애경험이 없는 수정은 성주의 마음을 확신하기 어렵다. 동생 윤정과 연애상담을 해주는 친한 친구인 수견 언니는 수정에게 “내숭 떨지 말고” 성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며 다그친다. 그리고 그들은 좋아하는 마음의 확인에서 결혼의 가능성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설렘과 연애의 낭만은 생략되다시피 재빨리 처리되고 결혼 이후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안전한 성관계 그리고 임신과 출산 대한 현실적인 고민까지 급속도로 일이 진척된다. 첫 만남의 설렘은 곧 연애가 되고, 연애는 곧 결혼이 된다. 이러한 성급한 ‘웨딩드레스 제작’은 분명하게 발화되지 않지만 암묵적인 몇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첫째, 수정은 성관계와 재생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기회를 삼아 성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둘째, 수정은 이성애 결혼을 원한다. 셋째,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와 장애를 고려할 때 수정에게 연애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그래서 조금의 호감도 곧 결혼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넷째, 수정의 성격과 장애를 고려할 때 의지할 가족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첫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가정은 모두 당연한 현실도 타당한 진실도 아니다. 오히려 수정이 정말로 결혼을 (사실은 연애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결혼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다른 관계와 섹슈얼리티를 탐색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기회’를 잡는다는 건 오히려 다른 기회,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독립된 가구를 꾸릴 가능성을 제거하는 실천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수정이 성주와의 연애에 소극적인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정은 연애가 처음이고 주위에서 부추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과 성주의 마음 모두에 확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정은 성주의 진심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기저에 잠재해있던 수정의 불안은 영화의 결말에서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갑자기 호감 정도의 감정을 급작스럽게 결혼으로 이끌고 갈까? 여기서 <팬지와 담쟁이>는 다큐멘터리가 제작자에 의해 ‘창의적으로 구성되고 설정된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여러 시퀀스의 제목에 사용된 “웨딩드레스 제작 중”이라는 언어적 프레임은 장애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고려하는 데 있어 어떠한 (차별적이고 자원이 한정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연출된 호들갑이자 인위적 과장이다. 그래서 “제작 중”이라는 현재형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들은 정말로 성주와의 결혼만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일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영화는 규범적인 이성애중심성이라는 비판의 위험을 기어이 감수하면서도 이 프레임에 두 주인공을 넣는다. 이 프레임 속에서 수정과 윤정은 함께 성인영화 비디오를 보며 키스, 애무, 체위잡기 등과 같은 성적 행위에 대해 기혼인 수견 언니에게 교육을 받고, 각자의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안전한 성행위는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부끄러움 속에서 낄낄대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사실상 주거의 독립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집에 함께 사는 친오빠 때문에 수견 언니 집에서 비디오를 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자매는 수견 언니의 조언을 들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는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얕은 지식과 희미한 편견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은 구성되기도 전에 제한된다. 나이, 장애, 성별의 교차 속에서 정보를 비롯한 자원의 부족과 차별적 편견 때문에 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제동에 걸리고 한정된다. 그래서 자신들의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탐색할 여유가 만들어지지 않고 규범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욕망이 허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수정은 성주의 관심에 설레어 하고 윤정은 그런 수정을 부러워한다. 두 자매는 야학 교사의 결혼식에 참석해 자신들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욕망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는 일상의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여러 뉘앙스와 제스처의 수행으로 구성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가시성(visibility)이다. 소수자의 영화적 가시성은 단순히 출연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두 자매가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드라이로 앞머리를 산처럼 올리는 행동들의 클로즈업, 성인 비디오를 보면서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눈을 가리는 수정과 침착하게 표정관리를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윤정,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연애 결혼한 비장애인인 어머니를 일종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미장원 원장의 이야기를 듣는 윤정의 표정, 해수욕장에서 선크림을 서로 발라주고 모래장난을 하는 수영복을 입은 자매의 모습을 사운드 없이 응시하는 카메라, 성주가 수정에게 ‘썸’의 끝을 알릴 때 당황한 수정이 손톱을 튕기는 제스처 등이 모두 ‘웨딩드레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시간, 즉 욕망이 실천되고 구성되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과 제스처에는 하나로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일상과 감정들이 섞여 있다. 또한 해수욕장에, 노래자랑 예선에, 보도에, 지하철에 장애인이 존재하고 그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도 자연스럽게 가시화한다. 일상을 쫓는 카메라는 두 자매와 함께 이동하며 관념적 상상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구체성을 전달한다. 걷는 것이 힘든 윤정은 자신의 체격과 신장에 맞는 탈 것으로 아동용 플라스틱 장난감 차를 사용한다. 윤정이 선택한 이동수단은 목발이나 휠체어가 아닌 다른 탈 것의 가능성을 가시화한다. 또한 이 이동수단은 장애인이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활용해 다양한 신체에 딱 맞게 개조한 크립 테크(criptech,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가 아닌 예술로서의 테크네)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녀가 노래자랑 예선 무대 위에서 장난감 차 위에 앉아 이정현의 <와>를 춤과 함께 부를 때, 예선에서 떨어지고 벚꽃이 흩날리는 보도를 지나갈 때 노랗고 빨간 원색의 장난감은 시선을 잡아 끈다. 지하철에서 저신장인 수정과 윤정의 아이레벨에 맞춰 카메라가 낮아지자 자매를 응시하고 있는 어린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은 복잡한 레이어를 만든다. 성인의 신장은 매우 다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아이레벨 역시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위치가 낮은 아이레벨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만 동일시할 수 없다. 동시에 실제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때때로 저신장 장애인을 아이처럼 대해온 사회적 고정관념의 시선을 환기하며 성찰을 유도한다. 그리고 타인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윤정은 자신의 체격에 잘 맞는 장난감 차를 자신의 탈 것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은 윤정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잘 드러낸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다른 장면에서는 높은 지하철 계단에서 장애인용 승강기로 내려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자매는 능숙하게 승강기를 이용하지만 자매와 함께 탄 승강기 위의 카메라 시점은 그 승강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영화 < 접속 >(1997)의 OST로 유명한 <러버스 콘체르토>의 단조로운 경음악이 경고음으로 계속 울려 퍼지자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지하철 계단의 장애인용 승강기의 아슬아슬함, 무심하고 단조로운 <러버스 콘체르토> 경음악, 행인들의 무례한 시선은 이동을 환기하는 정동이자 ‘웨딩드레스 제작’의 조건이다. 그리고 자매는 반복되어 무뎌진 그 일상을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또 다른 가시화는 장애의 서로 다른 유형과 정도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위계이다. 모든 연애관계에는 다층적이고 미묘한 권력이 작동한다. 수정과 성주의 관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권력은 장애의 정도가 된다. 성주는 겉보기에는 장애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증 장애인이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 된다. 늦여름 한낮의 공원에서 성주는 내내 담배를 피우고 주저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어머니가 자신이 장남에 외동이어서 손자를 보길 원한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나이가 있는 수정의 결혼까지 걱정해주는 조심스러운 그의 말들은 날카롭게 상처를 낸다. 듣는 내내 말이 없는 수정은 찡그린 얼굴에 어색하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애꿎은 손톱을 튕긴다. 성주의 “여름이 다갔나”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그들의 연애도 끝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별 시퀀스의 제목은 여전히 현재형인 ‘웨딩드레스 제작 중 3’이다. 이번 연애는 실패했지만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인공적으로 연출된 에필로그 시퀀스는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다 한가운데 쪽배를 탄 수정과 윤정을 보여준다. 둘은 영화 내내 염원하던 하얀 면사포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빨간 입술의 화장을 하고 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수정이 부르는 <나는 19살이에요>가 울려 퍼진다. 소프트 포커스 효과로 꿈처럼 연출된 환상성과 대비되게 둘의 표정은 지나치게 덤덤하다. 이 허구적 스펙터클은 극적 사건이나 분명한 감정의 표출과 거리가 멀다. 공들여 만든 이 장면은 결혼의 은유로 사용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문자그대로의 소원성취인가, 동네 미장원 원장의 말처럼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모두 헛된 꿈이었다는 냉소적 자각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정이나 윤정 같은 저신장 장애 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한 환경과 조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재의 대면인가. 이 장면은 그 모든 욕망과 감정이 중첩된 이미지이다. 이 장면은 그들의 과거의 상실과 실패, 현재의 바람과 희망, 욕망을 탐색하고 실현되기 위한 미래의 조건을 질문한다. 이 허구의 연출된 장면은 그래서 실재적 환상이다. 이 시퀀스의 환상성과 쓸쓸한 정취, 원하던 웨딩드레스를 입었지만 웃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무심한 표정은 목적이 뚜렷한 실패나 성공의 서사를 지지하지 않는다. ‘웨딩드레스’는 그래서 단순히 ‘성공으로서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여성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그 선택의 자유, 그 길의 이동성을 뜻한다. 그래서 여전히 ‘제작 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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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나무 옆에 지어진, 예쁜 집으로 숙녀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찬찬히 들어와 서로를 마주하는데, 건네는 인사말이 예사롭지가 않다. “늙었네. 내가 아줌마가 되면 이렇구나” 하룻밤, 언제일지 언제인지 모를 그 하루 동안 ‘나’ 들이 서로를 보러 온다. 부러움이 뭔지 모르던 8살부터, 많은 것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손을 가진 서른 여섯까지. 각각 자라온 시간 속의 소녀들과 아가씨들로, 여섯 명의 숙녀들이 함께 자리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내어놓는 이야기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아이와 내방이 갖고 싶었던 꼬마 숙녀, 예쁘고 인기 많던 부러운 친구 이야기 그리고 처음 생리한 날. 그 때, 첫 느낌, 기쁨과 오해들 실망과 상처들. 아마도 기억들 중에서도, 깊은 자국이 남은 시간 속 그녀들이 모여든 것 같다. 작은 아이의 눈물을 좀더 자란 소녀가 닦아주고, 또 소녀의 상처를 더 큰 그녀가 감싼다. 꼬마에게 검지만큼 커다랗고 아팠던 가시가, 몸이 자라며 새끼 손톱 마냥 작게 느껴지고, 상처에 앉은 딱지도 떨어져 결국엔 흉터마저 흐릿한 나이가 된다. 그 사건의 순간들이 이 숙녀들을 자라나게 만드는 것인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그녀들을 키워낸 것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는 소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날 거라는 든든한 약속을 하듯 다정하게 들어온다. 서른 여섯의 숙녀는 이제 지나온 시간들을 끌어 안고 보듬어 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자라난 손바닥 뼘만큼 더 크게, 살아낸 시간의 양만큼 더 깊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이만큼은 자라야 비로소, 나의 과거들에 초대장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단짝보다 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쌍둥이 자매보다 더 가까이 공감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 바로 자신뿐일 것이다. 그런데 왠걸, 그녀들의 대화가 매끄럽지 못한다 싶더니 비난하고, 소리지르고 돌아서기까지 한다.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순간들은 나를 자라나게도, 또 바뀌어 가게도 하는 것이다. 가장 소중하다 여기던 것을 뒷줄에 세우기도 하고, 부럽고 크다 여기던 것을 한줌처럼 보이게끔, 좋아하던 것을 더 많이 좋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은 어떻게든 우리를 나아가게 만든다. 이 이야기를 크게 관통하는 주제는 ‘꿈’이다. 조그맣고 예쁜 꿈. 자유롭고 멋진 꿈. 그런데 그 꿈들이, 이루어내지 못한 옛 다짐들이 지금의 내게 비난을 퍼붓는다. 열아홉 청춘의 꿈이, 날 선 원망으로 가슴 속을 파고 들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꿈들에 초대장을 보낸 숙녀는, 이 시간 또한 보듬어낸다. 하룻밤. 언제일지 언제인지 모를 그 하루 동안 ‘나’ 들이 서로를 보러 왔다. 만나러 왔다. 확인하러 왔다. 안아 주려 왔다. 그 하룻밤이 다 지나고 이제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가장 뜨거운 순간을 살고 있을 스무 살을 앞둔 숙녀가, 가던 걸음을 돌이켜 서른 여섯의 자신에게 외쳐 묻는다. “그럼- 이젠 더 이상 꿈꾸지 않아-?” 당신의 옛 꿈들이 당신에게 물어온다. 이젠 더 이상, 꿈꾸지 않아?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그 숙녀는 뭐라 답했을까. 그녀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숙녀들의 하룻밤 이야기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현재(리뷰작성시기준)까지는 유튜브 에서도 시청이 가능하다. 가쁘게 살아가다, 잠시 쉼표를 찍어두고 잠잠히 앉아있고 싶은 날, 이 이야기를 추천한다. 20분 정도의 짧은 이야기와 또 그보다 긴 여운으로 잠시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대 한국 영화에서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서사일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서사에 경도되어 영화를 하리라 마음먹었을지 모르는 나조차 이런 생각을 마땅히 한다. 지금 여성 서사는 우리가 마주한 시대정신이다. 2000년대 이른바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이전의 옛날 옛적 20세기에,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 방화(邦畫)를 주로 지배한 장르는 ‘에로’였다. 90년대만 해도 나는 한국 영화란 아무 맥락 없이 여자 옷이나 벗기려고 애쓰는 덧없는 이야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 한국형 착취 장르의 기원에는 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있었고, 그 대중적 효시가 된 한 작품을 오랫동안 원흉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런 편견과 오해가 깨진 것은 미니홈피가 아직 유행하던 시절의 어느 날 밤 EBS에서였다. 영화란 직접 보기 전에 규정하고 떠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70년대의 밤, 아기 업은 엄마를 조용히 뒤따르는 아이의 뒷모습과 연탄 쌓인 여인숙 골목길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김밥을 파는 행상의 구성진 목소리가 주술같이 들리고, 봉고를 두들기는 재즈 퍼커션 사운드트랙이 깔리면, 어느 여인이 골목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나 허연 눈과 이빨과 손톱을 번뜩이며 귀신처럼 화면에 달려든다. 그리곤 경찰들이 어둔 골목의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끌고 간다. 윤락행위 단속에 걸려 속옷 차림으로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여인들 중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다. 볏짚 거적 뒤에 숨었다가 들켜선 “난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에게 경찰은 외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숨어?” 새빨간 비닐 재킷을 입고 경찰을 향해 관객을 향해 세상을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는 그녀의 얼굴 위로 주인공의 이름을 담은 빨간색 제목이 뜬다. ‘이젠 그만 가야지, 이젠 정말 가야지, 날이 새기 전에, 미련 없이, 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하는 노래와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가는 이 영화가 바로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다. 영자, 영자, 영자.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이름이 한동안 가슴에 사무친다. 월남 파병을 갔다 온 청년 창수( 송재호 )는 간밤의 일제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갇힌 영자( 염복순 )와 3년 만에 재회한다. 창수는 친오빠인 척 영자를 철창에서 꺼내주고, 영자는 창수에게 혀를 메롱 내밀며 살짝 깨무는 시그니처 표정을 지어준다. 헤어지기 전에 창수는 철공소 노동자 막내였고, 영자는 사장 집에 갓 상경한 어린 식모였다. 현재 시점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둘의 과거 속, 순진무구했던 영자는 비록 식모살이 처지라도 자존감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소녀였다. 반말로 “넌 뭐니? 이름은 뭐니? 고향이 어디니?” 짹짹 물어대는 창수에게 영자는 “서울사람들은 아무한테나 반말하나요?” 하고 받아친다. 창수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히고 “나도 시골 놈이야” 고백하고 나서야 영자는 창수 얼굴에 고추장이나 묻혀주며 약간 마음을 연다. 영자가 좋아진 창수는 매번 자기만 꿍해서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묻지만 영자는 창수가 그냥 귀찮다. 입대를 앞두고 3년만 기다려 달라고 매달리며 낑낑 우는 창수에게 영자는 “나는 서울에 돈 벌려 왔지 연애하러 온 게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이도저도 안되면 억지로라도 안아보겠다고 달려드는 창수지만 적어도 영자가 싫다고 하면 곧바로 멈출 줄은 알았다. 그러나 피고용인 여자애가 NO라고 한들 멈출 줄도 모르고 멈출 필요도 없는 사장 아들이 영자를 겁탈하고, 이 일로 되레 영자만 쫓겨나면서 영자의 팔자는 기구한 쪽으로 향한다. 영자의 꿈은 돈을 버는 것, “기술을 배워서 평생 혼자 사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엄혹한 시대에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려던 영자의 꿈은 이미 진취적이고 주체적이었다. 문제는 기술을 배우려면 우선 돈이 들고, 아직 세상은 기술을 갖고자 하는 여성의 의지를 비하할 뿐이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아는 언니조차 “여자가 기술 가져봐야 팔자만 드셀 뿐, 그저 제일 좋은 기술은 그럴듯한 놈팡이 하나 골라잡는 것”이라며 영자의 꿈을 무시한다. 봉제공장 일용직으로 밤새도록 미싱을 돌리며 매일이 고단한 영자는 언니가 집에 남자를 데려오는 날이면 근처 여인숙에 가서 몇 푼을 내고 주인아주머니네 방구석에서 쪽잠을 자야한다. 온종일 재봉틀을 돌려 번 월급은 외상값을 제하고 나자 동전 몇 푼만 달랑 남는다. 정직한 노동의 대가는 황당하리만큼 적었지만, 이때만 해도 영자는 절망하기보단 깔깔 웃었다. 택시를 모는 여성 기사를 보고 운전을 배우리라 마음먹은 영자는 언니를 따라 홀에 나가지만 곧 그만둔다. 언니 말대로 아무리 “돈이 문제”라지만, 아버지뻘 남자들이 추근거리면서 운전 공부를 한다고 하니 집에 가서 밥이나 지으라고 비웃는 곳에 있기 싫다. 그래서 영자는 버스 안내양이 되지만, 매일 콩나물시루 같이 승객들을 미어터지도록 태운 버스에 위태롭게 매달리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왼팔을 잃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 잊히질 않는다. 그녀의 팔은 말 그대로 슝―하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70년대 일본의 ‘도에이 핑키 바이올런스’ 영화 따위나 찾아보며 낄낄거렸던 나는 이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앞에서 깜짝 놀랐다. 나는 <영자의 전성시대>의 이 씬보다 더 잔인무도한 신체 절단 장면을 알지 못한다. 기술을 배우려던 젊은 여자에게 세상은 팔을 앗아간 값으로 달랑 30만원 보상금을 내어주며 “너무 비관 말고 용기 있게 살아가라”는 헛소리나 지껄인다. “고맙습니다” 말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언니는 이 돈으로 미장원을 차리자고 바람을 넣지만 영자는 그 돈을 모두 고향의 늙은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보낸다. 자살 시도에 어이없이 실패하고 돌아와서, 없는 팔이 쑤시고 아파 약을 소주에 타 마시는 영자. 그녀가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온 최소한의 자존과 존엄을 내려놓는 때는, 고통과 슬픔에 지친 나머지 그가 누구든 사람 품에 따뜻하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다. 여인숙 주인의 은밀한 제안에 결국 응한 영자는 이 가난하고 더러운 골목에서 ‘밀로의 비너스’로 거듭난다. 도시괴담에 나오던 팔 없는 매춘부. 그녀가 바로 영자였다. 전역 후 목욕탕 보일러실 구석에서 숙식하며 세신사로 일하는 창수는 다시 만난 영자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없다. 김씨 아저씨(최불암)는 네 장래나 걱정하라지만, 창수는 영자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영자의 성병 치료비를 내고 병이 나을 때까지 손님을 안 받고 술도 못 마시도록 일이 끝나면 매일같이 그녀를 찾는다. 영자 말대로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이다. 김씨 아저씨의 군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창수는 영자와 같이 살 생각이다. 살림 차릴 최소한의 조건인 전세방 구할 돈은 아직 없지만 창수는 손수 의수를 만들어 영자의 빈 팔에 달아준다. 한쪽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숭고하지만, 받는 쪽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의리 때문이라도 이 사랑을 마냥 받기만 할 순 없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관계도 있지만, 하나 빼기 하나가 0이 되는 관계도 있다”는 김씨 아저씨의 말에 영자는 “마이너스 1”이 아니라 “보태기 1”이 되겠다고 나름대로 발버둥 친다. “두 사람 간신히 같이 끓여먹고 잠 잘 수 있는 방”만이라도 창수 손을 안 빌리고 자기 힘으로 마련하고 싶다. 영자에게 팔 병신 운운하는 녀석에게 주먹을 날린 창수가 구치소에 갇히고,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기로 한 날. 꼭 오겠다고 한 영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창수도 영자가 왜 안 나타나는지 알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진다. 둘이 다시 헤어지기 전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 있다. 창수가 한밤중 문 열기 전의 목욕탕에 몰래 영자를 불러 씻기고 때를 밀어주는 장면이다. 창수는 “이 때 좀 봐” 하며 영자의 등을 밀고, 창수에게 몸을 내맡긴 영자는 새삼스레 ‘창피함’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당당하고 창피한 건 없었던 영자는 창수를 만난 이후 이상하게 모든 게 걸핏하면 창피하다. 창수는 영자에게 또 묻는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영자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답하고, 창수는 바라는 대답이 아니라 조금 실망한다. 나는 이 장면을 다시 볼 때마다 인간에 대한 어떤 예의를 발견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저 내가 욕망하는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 옆에서 고단한 숨을 내뱉으며 자는 이 사람이 여자나 남자 따위가 아니라 이 세계를 역시 힘겹게 살아가는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깨닫는 순간이다. 그이와 내가 잠시나마 서로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기적인가. 조선작의 원작 소설에서 영자는 불에 타죽지만, 김승옥이 각색한 시나리오는 영자를 위한 영화 나름의 다른 결말을 마련했다. 비록 그 시절의 한계가 있는 결말이지만 영화적 진실로서 더할 나위가 없고, 나는 영화가 끝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내가 이 작품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누군가를 향해 마냥 영화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뿐이지만, 결말만큼은 쓰지 않겠다.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맞잡고 하고픈 말들은 너무 많아요’ 마지막 삽입곡의 이 가사처럼, 어떤 이야기는 말이나 글로 전하기엔 한계가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인간을, 여성을 착취하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여성 주인공을 통해 자본주의가 파괴하고 소외시킨 인간성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후 이 작품의 대중적 성공을 따라 복제, 재생산하며 유행하기 시작한 호스티스 영화들은 에로 장르로 급속히 변화하면서 도중에 인간과 여성에 대한 예의를 대놓고 빼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들 장르의 영화 속에서도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몇몇 작품들이 오늘날 따로 불리어지기를 바란다. 여성 서사의 기준과 범위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포용될 수 있길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영자 역할을 한 염복순 배우의 얼굴이 개인적으로 현대 여성의 외모처럼 느껴져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롭다. 그의 얼굴은 (우리가 백치미라고 왜곡하는) 죄가 없는 순백의 표정에서 세상을 향한 환멸까지 변화무쌍하지만, 내내 자신만의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 시대의 중요한 작품으로 한국 영화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 영화 속 여성 서사의 역사에 ‘영자’의 이름이 오래 남아 빛나길 바란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새로운 여성 화자(들)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도래하길. >> 영자의 전성시대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