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시나리오 - 송길한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송길한
<만다라>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스튜디오가 인플루언서들의 극찬을 수집할 수 있다면 누가 영화평론가를 필요로 할까요?” 2023년 7월, 《가디언》에 실린 기사의 도발적 제목은 영화 저널리즘이 직면한 현실을 꼬집는다. 평론가 마누엘라 라직은 < 바비 >(그레타 거윅, 2023)의 런던 시사회 경험을 크게 두 가지 풍경으로 일축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플루언서들 사이에 합류한 기자에게도 각종 굿즈를 건네주는 안내원. 그리고 이어지는 독려. “긍정적인 느낌을 공유해주세요!” 프리랜서 크리틱인 그는 자기 계정에 무슨 말을 쓰려다 말고 개봉 이틀 전에야 엠바고가 해제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고 쓴다. 기사는 가뜩이나 영화 매체의 대중문화적 위상이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무슨 소용인지 자조하는 모순적 자기검열로 마무리된다. 올해 칸 기자회견장 옆자리에서 통성명한 《인디와이어》 에디터에게 용기 내 이 기사를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땐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뻔한 소리, 요샌 부정적 평가를 미리 예측해서 특정 비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식의 가이드도 오는데요 뭘.” 비평가를 위한 친절한 가이드라. 선댄스발 코미디 영화 제목 같다고 생각했다. 취재 기자의 실무는 산업적 관점에 자주 노출되고 그래서 홍보, 마케팅 환경에 질식하기도 쉽다. 잡지사의 생리는 작품의 시의성이나 신속한 이슈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영화는 너무 성급히 말하게 되고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를 놓친다. 다각의 요구와 마감 시한, 닥쳐오는 개봉작들을 포용하는 이 일은 자기 감식안의 모서리를 ‘업계’의 비바람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극장에서 상영관을 확보하는 영화들은 중·저예산의 참신한 기획을 내건 작품들조차 아찔할 정도로 안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맞서지 않고 있다가는 예리해지긴커녕 시시각각 풍화될 가능성이 크다. 행여 영화기자의 호러라는 장르가 생긴다면 명대사는“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영화지”일 것이다. 취재의 특권은 비평 앞에서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분열하고 충돌하는 내면의 목소리들이 가끔 시끄럽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필름메이커들의 속내와 고충을 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걸작이든 범작이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말한)다. 주관적 진실 속에서 창작자의 자부심과 소통하는 저널리스트의 객관성은 늘 자기 의심의 대상이다. 현장 비평을 향한 열의가 때로 거의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실의를 동반한다. 매주 지면 안팎에서 줄다리기가 열린다. 감독, 창작자, 제작진의 예술적 비전을 정확히 전달하고 해설하는 중간자의 본분이 한쪽에, 작품 본연의 의도보다 평자의 패러다임이 선명한 창조적 쓰기가 다른 한쪽에서 실랑이하는 형국이다. 잡지계의 악명 높은 평론가 폴린 카엘에 관해 《뉴요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반대자(contrarian)”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카엘의 탁월한 반대는 역설적으로 발굴과 호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은 고전이 된 < 보니 앤 클라이드 >(아더 팬, 1967)를 구해내어 할리우드가 그 명성을 스스로 재창조하도록,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독려한 인물로 기억된다. 걸출한 반대자의 식견, 호전성, 무시무시한 헌신과 성실함을 동경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가 않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선 사람의 막막한 과제다. <만다라> 중 법운과 지산 번뇌 앞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를 되짚어본다. 6년의 수행에도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자조 속에서 고뇌하는 승려 법운( 안성기 )은 술 취한 탕아 행색이 더 어울리는 행자 지산( 전무송 )과 스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법운은 지산에게서 구도의 가능성을 본다. 그의 야생성은 안쪽에 자리한 단호함과 순수를 동경하게 만든다. 그러나 법운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지는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신당의 불상 점안식을 도운 뒤 마을 어귀에서 술에 의지하던 지산은 불탑 아래 엎드리며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다. 지산을 발견한 법운은 그동안 자신이 찾아 헤맸던 깨달음을 하나의 형상으로 발견한 사람처럼 슬피 운다. 혹한의 날씨에 불상 앞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굳어버린 수행자를 기리는 마지막 의식이 곧 법운의 몫이 된다. 지산의 죽음 이후 법운의 행적에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통과하며 청년들의 죽음이 들려오는 시절의 수치와 공허를 절감하는 중에 <만다라>를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기에 <만다라>는 시대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흔들림이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 우회로를 터 내는 영화다. 말미에 이르러 법운은 승려라기보다 매개자로 변모한 모습이다. 암자에 불을 붙여 다비를 마친 후, 법운은 지산이 잊지 못했던 여인 옥순( 방희 )을 찾아간다. 지산의 유품, 그가 직접 조각한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불상을 전하러 간 것이다. 이어서 법운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어머니를 찾아가 더 이상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담히 전한다. 직접 불붙인 암자의 화마를 잠자코 지켜본 뒤 여관방과 다방을 향한 법운은 혼란을 거두고 세속의 안쪽을 통과한다. 유품을 건네고 어머니(들)에게 (대신) 안부한다. 이 뜻밖의 행로에서 법운은 자기 안에 지산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어찬 사람같이 부지런하다. <만다라>의 마지막에는 먼 길을 걸어가는 매개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방향을 뒤집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그는 멀어진다. 물론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불탑 앞 기도하는 자세의 지산 / 암자에 불을 붙인 법운 속세와 구도의 경계에서 겁먹은 수행자의 클로즈업이 종내에 아득한 롱쇼트로 바뀌어 갈 동안 나는 극장에 앉아서 짐짓 딴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말을 전하고 의식을 치르는 매개자의 역할이 품을 수 있는 쓸모 같은 것을 궁리했다. 창작자와 관객, 예술과 산업, 비평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각각의 형식과 규격, 정당성 같은 것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매체의 본래적 지향과 그것을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태계에 제각기 충실할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되고, 이미 만들어진 영화가 관객에게 가는 경로를 터 낼 수 있다면. 한 주에 80페이지가 훌쩍 넘어 과연 어느 성실한 독자가 다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 근심하게 되는 지면에 틈새를 더 파내어 보기로 한다. 이상할 정도로 말해지지 않는 영화들 쪽으로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한다. 슬며시 머릿속에 내게 주어진 길 하나를 그려본다. 직업적 특권 아래 남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영화와 영화 안팎의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는 길. 이 길이 안녕하냐고 물어올 때 드리우는 암울한 직업적 자의식을 거둬내고 나면 답은 간명하다. 저널리즘과 비평가를 위한 가이드가 주어지는 현실은 동시대 영화 매체가 처한 메마른 환경부터 극명히 가리킨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황무지를 횡단하는 시도의 필요를 믿어볼 때다. 영화 안팎의 안부를 그러모으는 매개자의 눈과 손이 겁을 떨쳐내기를. 말끔히는 어렵더라도 부단히, 부단히. <만다라> 중 김소미(영화기자) l 영화주간지 《 씨네21 》 취재팀장. 책 『불이 켜지기 전에』(2025)를 썼다.
198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국가의 학살을 시민의 항쟁으로 맞섰지만 그 결과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공수부대원들이 자행한 학살의 이미지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겹쳐지는, 아니 이를 훨씬 능가하는 잔인함으로 기억되었다. 박정희의 18년 체제가 무너진 그 자리, 다시 쿠데타로 들어선 신군부가 바로 그 배후였다. 곧이어 그들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날조해 국민을 우롱했다. 한국의 극우 독재체제는 이렇게 연장되었다. 한국사회의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영화계는 1970년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신 정권이 구축한 통제 정책이 승계되었고, 한국영화는 외화 수입쿼터의 대체물로 취급받았다. 당국은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00편 내외로 설정하고, 등록된 20개의 제작사가 각 4편 이상을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1981년도 영화시책 기준). 그리고 2편 이상의 ‘우수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또는 대종상에서 최우수·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1, 87, 97, 91, 81편으로 100편을 넘기지 못했다. 1980년대는 단관 개봉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영화문화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다. 1980년 12월부터 방영된 컬러 방송으로 컬러TV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인기가 극장 흥행을 잠식해갔다. 1984년 VTR 보급 대수가 50만 대를 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는 ‘안방극장’이 제대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그랬듯, 한국의 극장가 역시 대형영화와 저예산영화로 생존책을 모색했다. 전자는 70mm 외화의 리바이벌 상영, 후자는 괴기·무협·코미디 장르였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 임권택은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의 그는, 제작자에게는 우수영화를 안겨주는, 영화진흥공사에는 국책영화를 척척 만들어주는 감독이었다. 여러 영화학자에 의해 한국 ‘분단영화’의 기원으로 평가 받는 < 짝코 > 역시 기획의 외관상으로는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반공영화였다. 이는 1980년 관제 영화제인 19회 대종상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고, 1981년 20회 대종상에서 반공영화부문 특별상을 재차 받은 것으로 증명된다. 제20회 대종상영화제부터 우수반공영화상을 특별부문으로 변경해, 최우수반공영화상에도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하기로 했는데, < 짝코 >는 1981년에야 상영되는 바람에 그 첫 수상작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개봉 여부는 관심도 없던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한국영화의 불황이 극에 달한 이때,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왜 <짝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실제 영화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직업 감독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193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 은 어린 시절 부친과 삼촌의 좌익 활동으로 그 역시 고초를 겪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3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했다고 한다. 1956년 정창화 감독의 도제로 영화계에 입문, 20대 후반인 1962년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감독 데뷔해 주로 사극과 액션, 전쟁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많을 때는 한 해 7~8편을 만드는 직업 감독으로 다작의 시기를 거쳤다. 그가 장르영화의 대가로 완성된 시기일 것이다.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52번째 연출작 < 잡초 >(1973)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적 자의식을 영화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평론가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한 말을 옮기면 “< 잡초 >가 내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영화라면, < 왕십리 >(1976)는 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기 시작한 영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는 이장호 , 하길종 등 ‘영상시대’ 감독들이 새로운 한국영화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제부터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구석에 몰린 느낌”을 받았다던 임권택의 회고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이냐라는 뼈아픈 고민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는 < 족보 >(1978), < 짝코 >, < 만다라 >(1981), < 안개마을 >(1982), < 길소뜸 >(1985) 등 작가주의 감독 임권택으로 평가되는 일련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의 삶이 반영된 한국적인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한국’영화를 찾아가던 시기인 것이다. < 서편제 >(1993)의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100만 흥행 성공, < 취화선 >(2002)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2015년 102번째 작품 < 화장 >을 연출했다. ‘반공영화’가 아닌 ‘분단영화’ 작가 송길한 과 임권택 이 < 짝코 >의 영화화를 위해 의기투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시대적 배경과 자기 성찰에 있었다. 그들이 이 영화의 기획에 착수한 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좌절로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시점이다. ‘서울의 봄’의 대학생 시위대들이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이 ‘빨갱이’로 둔갑되었다. 임권택에게 1980년은 “혼란기에 빠져든다고 해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온”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던 때다. 그는 송길한 작가와 기존의 국책 반공영화를 벗어나고자 마음먹고, 좌익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둘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 종군작가 김중희 의 단편소설을 거의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전투경찰 송기열( 최윤석 )과 빨치산 부대 대장 짝코( 김희라 )의 30년에 걸친 비극을 세련된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열강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멸시키는지 보여준다. 송기열은 평생을 바쳐 짝코를 추적하지만 결국 둘은 오갈 데 없는 부랑아들이 모이는 갱생원에서 만나게 된다. 이미 노인이 된 둘의 비극은 갱생원에서도 계속된다. 송기열은 무장공비 이력의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해 짝코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짝코는 수은을 먹여 송기열을 죽이려 한다. 영화 마지막, 결국 송기열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짝코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한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경찰들조차 무장공비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임권택은 영화를 통해 송 경사와 짝코가 국가의 꼭두각시였고, 더 나아가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북한은 열강들의 장기알에 불과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와 영화 본편을 대상으로 한 두 번의 검열을 통해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삭제되었다. 바로 다음의 두 장면이다. 6·25 특집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한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전쟁이 열강들의 국지전 시험장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갱생원을 도망 나온 송기열과 짝코를 만난 경찰이 망실공비가 뭐냐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는 검열의 흔적만 남아있다. 전자의 경우 TV에서 6·25 프로그램이 잠깐 나온 후 이를 본 짝코가 송기열에게 “저 사람들 말이 진짜라면 말이시… 나나 거그나 불쌍한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는 장면만 남았고, 후자는 “망실공비?”라는 대사는 지워진 채 경찰의 입 모양만 남았다. 이는 “망실공비도 몰라”라며 송기열이 애처롭게 반응하는 대사에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권택은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 검열에 순응했다. 하지만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 대목의 아쉬움을 표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우리는 장르영화 그리고 국책영화로 단련된 그의 내공을 짐작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해 연속 반공영화상을 휩쓸며 국책 반공영화로서 인정받았다. 개인의 비극을 쫓아가는 정교한 플래시백 영화는 송기열과 짝코의 장장 30년에 걸친 비극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된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어쩌면 < 짝코 >는 태생적으로 서구의 영화 문법인 플래시백이 한국영화만의 그것으로 훌륭하게 수용된 첫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김기영 의 < 이어도 >(1977)에서의 플래시백이, < 시민 케인 > (1941)와 < 라쇼몽 >(1950)의 그것에서 출발해 그만의 스타일로 뒤틀어진 것이라면, <짝코>의 플래시백은 고전적 의미에서 관객을 배려하면서도 임권택 이 하려는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와 훌륭하게 조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8번 정도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송길한과 임권택이 공들여 배치한 플래시백은, 송기열의 입장에서, 짝코의 입장에서, 때로는 송기열이 짝코를 초대해 함께 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각자의 경험에서 이야기가 반복되며, 플래시백의 대미를 장식한다. 좌우익의 비극적 대립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현재를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8번의 플래시백은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송기열은 갱생원에서 짝코를 발견했지만 그를 데리고 탈출할 형편이 아니다. 합숙소에서 연속극을 보던 송기열은 첫 번째 플래시백으로 들어간다. 전투경찰로 활약해 마을에서 인정받고 가정도 행복하던 시기다. 그날 밤 송기열은 짝코의 침상으로 가 두 번째 플래시백으로 이끈다. 송 경사가 짝코를 생포하지만 그를 놓치고 마는, 둘의 공통된 기억이다. 세 번째는 송기열을 죽이기 위해 거울 뒷면에서 수은을 긁어내는 짝코의 것이다. 지리산에서 수은 가루를 먹고 자살하려는 점순( 방희 )을 말린 뒤 송 경사에게 체포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네 번째 플래시백은 다시 송기열의 것이다. 짝코의 고향집에서 그를 놓치고 불법 총기 소지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지서장이 된 복만을 때리고 감옥까지 다녀온다. 불운은 연달아 닥친다고, 고향에 돌아오니 아들마저 죽었다. 다섯 번째 플래시백은 송기열이 짝코에게 자신을 파면한 상사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들어간다. 네 번째 회상의 앞 이야기로, 아내까지 자살하게 된 송기열의 비극에 짝코를 동참시킨 것이다. 합숙소의 장기자랑 장면, 짝코의 시점에서 여섯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속초에서 그와 화숙( 김정란 )의 도화경이 마치 판소리 소리꾼의 ‘아니리’처럼 펼쳐진다. 이를 듣던 송기열의 시점에서 그가 화숙을 찾아간 뒷이야기가 일곱 번째 회상으로 펼쳐진다. 계속되는 장기자랑, 송기열은 다리가 부러지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마지막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다. 그는 짝코가 탄 기차를 쫓다가 택시가 전복되어 다리마저 불구가 되었다. 이후 부랑아가 된 송기열은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옆방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짝코와 점순을 발견한다. 갱생원의 변소간에서 짝코가 송기열에게 그날 밤 점순의 안부를 물으며, 다시 짝코의 시점에서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점순을 사창가에서 만나 둘이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처럼 30년을 쫓고 도망친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며 영화는 마지막을 향한다. 짝코를 생포한 송 경사 “한국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영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에서 정성일 의 평가처럼, < 짝코 >는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원형임에 분명하다. 그가 장르영화를 통해 축적한 스타일이 만들려는 주제, 하고 싶은 이야기에 걸맞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간 갈고닦은 전쟁 신의 연출은 잠깐 등장해도 존재감과 만만치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 짝코와 임신한 점순이 토벌대의 총탄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그렇다. 화면에 슬로모션이 걸리면서 등장하는 김영동 의 국악은 그 조합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개인의 비극을 더 넓은 차원으로 환기시키는 데 일조한다. 임권택이 “국악을 체계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영화부터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송기열과 짝코는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과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짝코는 숨을 거두고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다. 사실 이 장면은 결국 그들이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육신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송기열은 아주 짧은 회상으로 아내와 아들과의 단란했던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송길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 장면이 호남선이 아닌 원주행 기차를 타고 아예 반대로 가는 것으로, 심의 대본에는 부산행 기차를 잘못 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시나리오의 정보를 배제한다. 점순과 짝코가 도망가는 장면에서 김영동의 국악이 흐른다. 1980년대 전반의 대표 장르 국풍 ’81을 위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느슨해졌고 기다렸다는 듯 1980년대를 장식하는 에로티시즘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1981년부터 등장한 소극장 그리고 대여용 비디오의 붐이 에로영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 애마부인 >은 1980년대 에로영화의 어떤 상징이 되었다. 성적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에로 장르는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토속에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에로영화 일변도의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그 반대편에는 다양한 결의 멜로드라마가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우드 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적’ 멜로드라마를 극복한, 어떤 의미에서는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빌려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배창호 가, 당대 관을 사로잡는 세련된 화법의 멜로드라마로 충무로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 연출로 1984년 <비구니>는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될 뻔했던 영화, 걸작이 될뻔 했던 영화,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중단이 된 군부정권 시절 비운의 영화다. 그런데 당시 송길한 작가의 각본 170여 장면 중 약 1/5 분량 촬영이 끝난 상태로 유실됐던 필름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됐고, 그 후 한국영상자료원과 전주국제영화제 (이하 JIFF)의 협업으로 39분 길이의 본편으로 복원, 편집됐다. JIFF는 송길한 작가 특별전의 일환으로 관계자 인터뷰 위주의 24분 길이 다큐멘터리도 제작했고, 지난해 본편과 함께 제18회 JIFF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했다. 발굴, 복원된 필름은 편집이 전혀 안 된 16mm 러시 필름이었고, 사운드는 아예 없었다. 박홍렬 촬영감독이 생필름 촬영본을 편집했고, <비구니>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색보정을, <취화선> 등의 작품에서 정일성 촬영팀의 일원이었던 박정훈 촬영감독이 편집과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았고, 김영진 JIFF 수석프로그래머가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올해 봤던 <비구니>가 인상에 남은 것은 제작 중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의 필요성에 대해 시사하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발굴돼서 복원, 편집된 작품 자체가 사운드 없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원숙한 김지미 배우의 연기는 무성영화 시절 표정, 자태, 몸짓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을 전달하던 배우들처럼 공명한다. 대사는 안 들리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극적인 갈등과 욕망, 염원이 충분 느껴진다. 또한 작가, 감독, 촬영감독이 함께 로케이션 헌팅부터 해서 영감을 얻은 후 시나리오 작업을 한 만큼, 장면 하나하나의 압축된 구성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1981년 작 <만다라>로 개인 수련을 중심으로 한 소승적 불교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에 이어, 새로운 영화로 ‘중생과 더불어 밝음을 지향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려내고자 한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주인공이 세속적인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큰 스님이 돼가고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송길한 작가는 전한다. 마침 그 당시 연기의 전환점을 찾던 김지미 배우도 이 영화 공동기획으로 참여했고, 삭발, 노출, 그리고 영하 12도의 추위에도 물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심전력을 다 했다. 애초에 제작 의사도 표시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규모 예산에 안정적인 프로덕션을 꾸려줄 회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 흥행사에서 영화제작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려던 이태원 사장은 국제영화제에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는 <비구니>를 태흥영화사 창립 작품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야심 차게 꾸려진 <비구니>는 1984년 3월 13일 문공부와 영화진흥공사에 제작신고를 했으나, 3개월 후 결국 제작 포기를 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할 당시 불교계에서는 자문과 고증을 도왔음에도 막상 대본을 전달받은 조계종에서는 불교를 모독할 우려가 있음을 표명하며 문공부에 제작중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 태흥영화사와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는 조계종 사회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대본을 수정하는 등 “수준 높은 불교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했으나 종단에서는 불교의 성역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했다. 주인공이 비구니로 입산 후 속세에서의 사랑과 번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전쟁 통에 고아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트럭 운전사에게 몸을 준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결국 제작중지 궐기대회에, 법원에 제작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때 조계종 전국 비구니 대표자 회의가 내놓은 요구 사항은 한번 살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1. 불교재산관리법을 철폐하라. 2. 10.27 불교법란을 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3. 불교 탄압을 중지하라. 4. 국영방송과 기독교인은 공개 사과하라. 5. 극영화 <비구니> 제작을 중지하라. 사실상 <비구니> 관련된 것은 다섯 가지 요청 사항 중의 하나밖에 안 되는데, 심지어 순위도 맨 마지막이다. 여기서 ‘불교법란’은 전두환 정권 초기 1980년 10월 27일 전국의 사찰 및 암자를 수색하고 스님들과 불교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고 고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불교계는 이런 치욕과 탄압에 분노하다가 영화 <비구니>가 나타나면서 마침 기폭제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당국에서도 제작자 이태원을 만나 제작을 포기하라며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 변론과 심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데모하던 비구니들이 전경에 맞서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이에 제작자는 사회적 물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제작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전에 대본 수정과 함께 제목이 <수연 비구니>로 바뀌어 있었던 영화에 대한 제작신고를 ‘자진 취하’하는 문서를 6월 13일 문공부에 접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제작비 2억여 원을 날린 태흥영화사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김지미 배우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임하고 있었던 작품이 중단되자 충격을 못 이기고 일정 기간 창작 의지를 상실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다시 작품 활동들을 하게 됐지만, 당시 타격이 컸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그때는 우리 영화인들이 힘이 없어 접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영화 안팎에서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30년이 흐른 후, 창고에서 16mm 러시 필름이 나왔다. 시나리오의 1/5 분량밖에 촬영하지 못한 것이라 아무래도 원래 대본에서 빠진 것이 많고, 사운드가 없어서 가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서로 다른데 중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영화적인 효과를 놓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배우들의 소리 없는 모습에서 전달되는 것도 많다. 시작 장면에 수경이 민간인 복장으로 산사로 걸어 들어갈 때 애인쯤 돼 보이는 남자가 얼굴과 발걸음만으로도 ‘정말 이래야만 하겠어?’ 하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표현하며 동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경은 절에 들어가 추운 날 나무도 해 가고 냇물에서 빨래도 하는 등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윽고 장엄한 삭발식을 치른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용 앰뷸런스에 타고 가는데 아까 본 남자가 도와주다가 뭔가 엄청난 소식을 전달하면서 떠나고, 비구니는 눈물과 번민에 주저앉기도 한다. 스크린 위의 영상이 펼쳐지는 동안 정적을 깨는 듯한 것들이 가끔 있다. 분명 사운드는 없다. 그렇지만 김지미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집을 찾아가 원삼을 받아 입고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어머니 무덤에 삼배한 후, 시집갈 때 입으라고 지어주신 그 옷과 함께 집착을 불태워버리려 할 때 불꽃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대규모 전쟁 장면에서 폭파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전쟁 피난길 장면들인데, 최근에 나온 스펙타클한 CG 전쟁영화들과는 좀 달리, <비구니>는 폭격의 불길과 먼지와 연기 속을 고되게 뚫고 나가야만 하는 인간상들이 인상적이다. 임권택 감독은 1936년생으로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이미 십 대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생으로 심지어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묻어 나오는 인간성이 다른 듯하다. 피난민의 절박하거나 훈훈한 얘기들 외에도 난리 통에 기회주의적으로 실속을 챙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암시 아닌 암시가 처음부터 떠오르기도 했다. 수경은 가족 잃은 꼬맹이 여섯 명을 챙기며 피난을 가다가 화물 트럭 운전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끈질기게 호소하는 비구니를 순간, 운전사는 음흉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협상이 이뤄진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원하는 대로 해달라. 사운드는 없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비구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추위에 떠는 꼬맹이들을 보며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되는지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는 폐허에 이끌려가 일을 치르고 와서는 아이들을 트럭에 실어 떠나 보내고 횡 하니 서있는다. 이윽고 눈 덮인 냇가에 가서 아랫도리를 씻는데 얼굴 클로즈업이 되면서 마치 감정에 북받쳐 나온 것처럼 영화에서 기대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주 미니멀한 우리 소리가 눈발을 맞으며 땅을 치면서 우는 수경의 모습 위로 흐른다. 정적 속에 마치 귀가 막혔다가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흡사 개도나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 같은 느낌 같기도 하다. 마침내 수경은 옷을 다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않고 후두두 떨면서 기도한다. 목숨을 건 김지미 배우의 과감하고 단호한 선택이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말 대로 촬영 당시 영하 12도의 날씨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 기도 하는 모습이 연기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목숨까지 건 영화 창작이 그렇게 암울한 시절 중단됐다는 것은 잊혀서 안 될 일이다. 영화제 관계자나 영화 학자,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 사회학자, 민속지학자, 박물관 관계자 등이 관심을 갖고 상영 및 포럼을 기획해도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무성영화 시절 사용했던 것 같은 인터타이틀 삽입도 고려해볼 만할 것 같다. JIFF는 특별전에 맞춰 『작가 송길한』이란 책에 인터뷰, 기사, 사진 자료 등을 비롯해 영화 <비구니>의 시나리오 전편도 수록했다. 이 글을 쓰는 데에도 참조가 많이 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구니> (JIFF 2017 편집 본)에 들을 수 없는 대사와 미처 다 찍지 못해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원래의 엔딩 등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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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한 구술 컬렉션 | 35건 | 2025-09-25 | 2022-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