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인
- 감독
- 송원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1789년 혁명의 여름에 쓰인 인권선언은 재산과 생명을 불가침의 권리로 상정하였다. 이로써 프랑스혁명은 자본주의를 불러왔다. 도둑질을 대가로 가혹한 형벌을 받은 장발장은, 불가침의 권리를 어긴 대가가 얼마나 가혹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가혹한 처벌과 함께 시작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도시를 둘로 갈라놓았다. 도시의 한 켠에는 전례 없는 풍요와 번영이, 다른 한 켠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빈곤이 자리를 잡았다. 도시에 넘쳐나는 이 빈곤과 마주하며 지식인들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말했다. 피에르 르루처럼 다수의 힘으로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며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세기말에 이르러 에밀 뒤르켐이나 마르셀 모스처럼 ‘연대’와 ‘증여’를 사회적인 것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의 행동과 사고를 관찰하며 문제를 분석해보자는 이들도 있었다.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을 말한 아돌프 께뜰레,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을 말한 루이 빌레르메, 그리고 사회학(sociology)을 말한 오귀스트 꽁트가 그들이었다. ‘social’이라는 형용사가 만들어 낸 렌즈를 통해 사람들은 ‘사회’의 형상을 발견해 나갔고 또 발명해 나갔다. 관찰은 주장이 되었고, 정책은 안전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적 안전망은 도시의 삶과 습속의 ‘일반성’과 ‘정상성’ 창출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남성의 경우, 고등학교 내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은 후에는 (핵)가족을 구성하고, 내 집과 내 차를 마련한 후에는 주중에는 일터와 집을 오가고 주말에는 백화점이나 공원과 집을 오가는 ‘보통의 삶’이 20세기 들어 점차 일반화되어갔다. 20세기 중후반 서구사회는 그랬다. 1990년대 한국의 대학가에는 ‘포스트(post)’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었다. 탈독재, 탈냉전, 탈사회주의라는 변화를 배경으로 지식인들은 민주주의 너머(post)를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민족주의, 포스트발전주의 등, 대다수는 이른바 ‘선진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제 한국사회가 ‘정상’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상황 판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느 선진국처럼 민주주의를 누리고, 여느 선진국처럼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는 판단. 그렇기에 이제는 반봉건사회라든지 주변부 사회라 말하기 어렵다는 판단. 이런 판단들이 중첩되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판단과, 이제는 민중을 대신하여 중산층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삶을 보여준다는 판단이 지식인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유령은 다름 아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삶이었다. 도시를 누비는 자동차의 숫자도 ‘아파트’라 불리는 주거 상품의 가격도 빠르게 늘어갔지만, 이렇다 할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빠르게 증가한 것은 불안한 일자리와 불안한 삶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사회가 경험했던 정상적인 삶의 일반화는 인류 중 소수만이 경험한 것이었고, 한국사회에서는 더더욱 소수만이 경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괜찮은 일자리, 자동차, 아파트를 소유하고 중산층 가족을 구성하며 여가와 소비를 즐기는 삶을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 간주한다. 안전망 없이 규범만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사회적인 것’을 말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담론과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 정책과 사회적 안전망의 뒷받침 없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에 관한 규범만 창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 없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구와는 다른 한국사회 특유의 ‘사회적인 것’이 있던 것은 아닐까? 서구와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습속을 창출하는 장치들이 있던 것은 아닐까?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 88 서울올림픽대회 폐회식 야경 원경 ”, 한국정챙방송원 e영상역사관 그렇게 해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1988 서울올림픽이었다. 정상적인 삶을 창출하는 안전망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삶의 외양이 만들어지는 모멘텀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올림픽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아파트뿐만 아니라 백화점, 공원, 미술관, 공연장 등 정상적인 삶의 외양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배치하는 계기였다. 또한 그런 도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인지에 대한 담론이 대량으로 유통되고 정상적인 습속을 창출하기 위한 캠페인과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되는 계기였다. 이러한 도시에서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관한 드라마 <우리는 중산층>(1991)과 <말로만 중산층>(1991~1992)이 방영된 것은 올림픽 직후였다. 그랬기에 한국사회에서 ‘사회’의 탄생을 말하고자 한다면 서울올림픽을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책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논문에서 필자는 서울올림픽이 정상적인 삶으로서의 ‘사회’를 창출하고자 하는 수단이자, 습속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정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가기록원,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문서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와 도서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면서 서울의 골목 골목마다 남아 있는 권력의 흔적을 보여주고, 또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하고자 한 권력의 강박을 보여주고자 했다. 서울올림픽을 도시와 사회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메가이벤트(mega event)로 봄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탈정치화시키고 우민화시키고자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하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메가이벤트라는 프레임은 정상적인 삶과 습속을 만들어가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에 한계를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책은 존 매칼룬과 요시미 슌야 등의 공연론을 프레임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이라는 기획에서 마무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공연의 기획에서 커튼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해 보고자 했다. 또 그 범위가 무대 제작에서부터 배우 준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기에 ‘연출’이 아닌 ‘드라마투르기(극작법)’로서 올림픽의 준비와 상연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사진: (상) "88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식전공개행사, 입장)( 1 , 2 )", (하) "88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 공개 행사( 1 , 2 )", 한국정챙방송원 e영상역사관 그럴 때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권력을 손에 넣은 군인들이 사회 구성원들과 맺은 것은 그럴듯한 공연에 관한 계약이라는 것. 그런 군인들은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 국민을 배우로 동원했고, 관객이 될 외국인의 시선을 앞세워 서울이라는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과 무대 아래 감출 것을 나누었다는 것. 올림픽 이후에는 무대가 확산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연출하는 배우가 되어갔다는 것. 서울올림픽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은 군인을 대신하여 가상의 외국인과 공연 계약을 맺고 공연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는 외국인들에게 그럴듯한 공연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한국사회 내 지지를 획득하는 사회적 질서로서의 88년 체제를 탄생시켰다는 것. 하지만 이런 공연 계약은 무대의 위와 아래를 나누어 사회적 갈등에 분열에 취약하다는 점. 책에는 쓰지 못했지만, ‘극장도시’라는 표현에는 필자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필자가 거주하던 서울 관악구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꿈꾸며 상경한 이들이 개별적으로 고군분투하는 공간이다. 서울은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좁기만 한 원룸이나 고시원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도시다. 이런 공간에 사는 이들이 불안과 우울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은, 한강이 되었든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되었든 집 바깥의 어딘가 그럴듯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곳을 사진으로 남기며 자신의 삶을 전시 내지 상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럴듯한 공간의 다수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서울은 보여줄 수 없는 내 방과 보여주고 싶은 공원, 박물관, 백화점, 미술관 사이의 대비가 분명한 도시이자 무대의 위와 아래가 명확한 도시이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들은 전시적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서울은 극장도시인 것이다. 사진: “ 서울 풍경 ”, 서울특별시 서울사랑 (문덕관) 박해남(사회학 연구자) l 계명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면서 20세기 이후 한국과 일본의 도시와 도시 속 삶들을 연구하고 있다.
572돌 한글날이 며칠 지나긴 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한글 관련 영상을 소개하려 한다. 한국인 감독 김인태 (1931~)가 1967년 캐나다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NFB)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Korean Alphabet(한글) >이다. 파스텔 보드를 이용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NFB를 대표하는 작가 노먼 맥라렌(Norman McLaren, 1914~1987)이 음향을 맡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인공 사운드(synthetic sound)를 삽입해 완성도를 높였다. 노먼 맥라렌은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을 수상한 < Neighbours >를 비롯해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실험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인물로, NFB가 애니메이션과 실험영화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들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작가 노먼 맥라렌의 참여로 더욱 주목을 받은 <한글>은 1968년 제3회 테헤란 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한글>의 오프닝 크레디트 <한글>은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다가 2002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주관한 ‘캐나다 애니메이션 특별전’에서 상영되며 발굴된 작품이다. 김인태 감독은 NFB 최초의 한국인 소속작가로 활약한 것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고, 이듬해인 2004년 제8회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은 어떤 배경으로 NFB에서 <한글>을 만들게 된 것일까? 이 글에서는 <한글>이 탄생하기까지 여정을 대한(對韓) 원조 사업과 연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글>의 장면들 <한글> 제작 당시 김인태는 한국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소속 감독으로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 연수 중에 있었다. 김인태 감독이 소속되어 있던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법령에 의해 독립되기 전까지 통칭 ‘영화제작소’라 불렸는데, 이는 1958년 UN과 미국에 대한 원조로 설치된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와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제작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의 공보 선전은 미국에 대한 원조 정책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진행되었는데 이 영화제작소 역시 카메라, 인화기, 애니메이션 촬영기인 옥스베리(Oxberry) 등의 기계 설비를 구축하는 것부터 인력의 양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원조를 받았다. 그리고 NFB를 역할모델로 하여 한국의 교육영화 제작 시스템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 원조 사업에 따라 미국의 전문 인력들이 ‘시러큐스 계약(Syracuse Contract)’이라는 ‘팀’을 이뤄 영화제작소에서 연출, 촬영, 녹음, 미술 등 분야별로 3~5년에 걸쳐 영화 인력을 양성했다. 김인태 감독은 바로 이 교육 인력 양성 사업을 위해 1958년 선발된 영화제작소의 제1기 공채 인력이었다.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에 등장하는 영화제작소의 전경과 스튜디오 촬영 모습 (좌) 시러큐스 계약 인력과 영화제작소 행정관들의 회의 모습 (우)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이성철 소장자료) 영화제작소는 1958년, 최신식 기재 설치와 시러큐스 계약 인력이 파견되는 것에 맞춰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각 분야의 공채 직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중 미술부의 인력들은 실사영화에 필요한 제목, 자막 등의 기본적인 미술 작업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법을 교육받았고, 이에 따라 1958년부터 문화영화에 부분적으로 애니메이션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이러한 대한 원조로 진행된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 사업에 맞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애니메이션 광고를 제외한 소위 ‘최초의 순수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국립영화제작소가 1962년에 제작한 흑백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 박영일 연출, 정도빈 작화) 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후에도 국립영화제작소는 미술부의 박영일과 정도빈 그리고 한성학 등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개미와 베짱이>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의 김인태 감독은 아쉽게도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교육영화 전문 인력 수련 후 <전화가설>(1959), <전화도수제>(1961), <자동전화는 이렇게>(1962), <전화를 쓸 때는>(1962) 등의 체신 교육영화와 <치아와 건강>(1961), <기생충을 없애자>(1963) 등의 보건위생 교육영화를 비롯해 다수의 문화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NFB에서 <한글>의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미 작품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은 노먼 맥라렌과의 만남은 이 작품의 완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인태 감독의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영화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의 노먼 맥라렌 작품 관람과 NFB 연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61년 12월 NFB와 국립영화제작소 간에 맺어진 문화영화 교환협정이 있었다. 양측은 이 협정에 따라 서로의 영화를 교류했는데 일례로 국립영화제작소는 NFB에 <새로운 고향>(양종해, 1961)을 배급하고, NFB의 <협동조합>과 <의자공과 소년들>을 들여와 우리말로 내레이션을 녹음해 상영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교류 배경에는 원조 사업 초기 영화제작소가 모델로 상정한 NFB의 제작 시스템이 큰 영향을 끼쳤다. NFB는 분야별 소재에 따른 분업화와 1인 제작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역할모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감독들은 NFB의 영화들을 시사하고 제작에 참조했으며, 최봉암, 김인태 등의 감독들이 1960년대 중후반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에서 연수를 받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자공과 소년들>의 오프닝 크레디트: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사전 공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로서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Welcome to Motion Picture>) 목적하에 설립된 영화제작소는 교육영화 분야에서 애니메이션 인력을 비롯한 다재다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립영화제작소로 확대 개편되며 원조사업 진행 당시 집중되었던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를 넘어 정부 선전을 위한 영화제작에 치중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이 글은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와 공영민, 「<의자공과 소년들> 해제」, 허은 엮음, 『영상, 역사를 비추다: 한국현대사 영상자료해제집 7-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해제집 1』, 선인, 2017에서 일부 발췌하여 엮었음을 밝힌다. 출처 <Korean Alphabet> - NFB 누리집 https://www.nfb.ca/film/korean_alphabet /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 개미와 베짱이 > < 전화를 쓸 때는 > < 치아와 건강 > < 의자공과 소년들 >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Welcome to Motion Picture >(1959) - 한국영상자료원 테드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 콜렉션 소장자료 이순진, 「김인태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2년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문화영화 1: 김인태‧이지완‧이정섭』, 한국영상자료원, 2012.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회식에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개최되었던 제18회 아시안게임이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 9월 2일 폐회했다. 인도네시아는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이후 두 번째로 대회를 개최했다. 올림픽과 2년 차로 열리는 아시안게임인데 이번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2년 후인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이번에도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46년 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연이어 같은 개최지가 선정된 것은 우연일 것이다. 그런데 두 대회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북 단일팀 역사의 흔적이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남북 단일팀 협상은 2018년 현재 상황과 대비되어 더욱 흥미롭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회식(좌), 1964년 도쿄 올림픽 폐회식(우) 아시안게임은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6개국 대표가 아시아 선수연맹을 창설해 올림픽처럼 4년마다 국제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1950년 제1회 대회가 준비 미비로 1951년으로 연기되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제2회 필리핀 마닐라 대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고, 1986년 서울, 2002년 부산, 2014년 인천 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1950~1960년대 저개발국 지원에 경쟁을 벌였던 미소 간 냉전정책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서 다양한 국제행사들이 개최되었는데 스포츠 행사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공연대로 묶여 정치‧사회 국제회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행사들을 모델로 하는 영화제, 예술제 등의 문화행사까지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이러한 국제대회 참가 소식들은 당연히 프로파간다의 최전선에서 활용되었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 소식은 미국 선전기관인 미 공보원의 ‘세계뉴스’를 통해 전쟁 중인 한국에도 전해졌다.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이 시기 아시안게임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서야 독립된 나라들로서 신생의 국가기반을 수립하려 하였으나 또다시 뜻하지 않은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동의 운명” 1) 을 갖고 있는 참가국들의 ‘스포츠 민족주의’에 적극 활용되었다. 제1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현판(좌), 시상식에서 선수들을 축하하는 네루 수상(우) 그런 면에서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대회는 냉전체제 하 열강 속 아시아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대회였다. 아시안게임 뉴스는 대회의 위용과 스포츠 정신의 고귀함 그리고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위주로 대중에게 전달되었지만, 물밑으로는 대회를 둘러싼 정치적 이슈가 뜨거웠다. 이 대회에서 당시 중립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위치로 인해 중공과 중화민국,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남한과 북한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중공과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가 중화민국과 이스라엘의 참가를 불허함에 따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비롯한 스포츠 세계 기구의 관여와 냉전의 양 진영에서 정치적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IOC는 아시안게임에 대한 후원을 철회할 거라고 경고했고, 자카르타 대회에 아시안게임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도 결정이 번복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진통을 겪었다. 이스라엘 선수단 자리가 비어있는 개회식장의 모습 1962년 자카르타로 출발하는 한국 선수단 김포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배웅하는 시민들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 스포츠대회의 남북한 단일팀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북한의 참가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북 단일팀의 문제는 남한과 북한 양쪽이 당시 확산되고 있던 각종의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미소 양 진영이 ‘세계화’를 목표로 경쟁적으로 펼치는 국제 대회들에서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는 남북한의 문제는 동서독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포츠를 통한 세계 평화를 표방하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남북한과 동서독의 단일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북한 단일팀 문제는 냉전체제 하 동아시아의 정세와 긴밀히 연관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에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1964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출정식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환영하는 재일교포 인파 남북한 단일팀의 문제는 1957년 제53차 IOC 회의 안건에 상정되며 불거지기 시작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시작된 IOC의 남북한 단일팀에 대한 권고는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강도가 높아졌다. IOC는 남북 단일팀 협의에 남한이 불응하면 북한을 단독으로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며 남북한의 합의를 촉구했다. 올림픽뿐만 아니라 육상, 권투 등 개별 종목의 국제협회에서도 남북한 단일팀 사안을 내세우며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다. 남북한 단일팀 협상은 2년여에 걸쳐 중립지역인 홍콩과 스위스에서 이루어졌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63년 8월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1963년 10월 IOC는 남북한이 개별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했다. 결국 열강들이 올림픽이라는 큰 대회를 앞두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내세워 프로파간다의 최전선에서 활용하려 했던 남북한 단일팀 구성은 성사되지 못했다. 따라서 도쿄 올림픽과 관련해 급증한 뉴스 영상 중에 남북한 단일팀에 관한 뉴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63년 남북 단일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황엽 단장(좌), 협상 결과를 보고하는 황엽 단장(우) 결국 올림픽이라는 ‘국제‧스포츠‧대회’를 통해 냉전의 한복판에서 아직 전쟁 중인 남북한을 ‘코리아’라는 단일 명칭 아래 잠시 감춰보려던 프로파간다는 실패로 돌아갔다. 도쿄 올림픽 뉴스는 단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 대회의 위용과 위상,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알리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은 이후에도 올림픽, 월드컵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안되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냉전 종식 후에야 성사되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991년 4월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코리아’ 팀이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장 앞에서 단일팀을 환영하는 재일교포들(좌), 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를 바라보는 단일팀(우) 1) 『경향신문』, 1954년 5월 3일 자 2면. 출처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 <코리안뉴스>(제441호, 제442호), <리버티뉴스>(제474호, 제582호, 제588호)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대한뉴스>(제380호, 제389호, 제429호, 제488호, 제18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