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 감독
- 이동렬
- 제작년도
- 2013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현장’에서 탄생했다. 얄라셩,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바리터 등이 제작한 초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민중, 노동, 농촌, 학생,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기록하고, 전파했다. 이 흐름은 4대강 사업, 강정해군기지, 세월호 참사, 밀양 송전탑 등의 현장에서도 이어졌다. 한편으로, 90년대 중순 비디오 캠코더의 보급으로 강화된 기동성에 힘입어 보다 다양한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했다. 빌 니콜스의 분류에 따라 ‘수행적 다큐멘터리’ 라 부를 수 있는 최진성, 이마리오, 경순 등의 작품들, 혹은 다큐-픽션이라 명명할 수 있을 윤성호 등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전의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들이 기록자이자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했다면, 이들 작품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주관적으로 풀어낸다. 김응수의 < 초현실 >(2016)과 < 오, 사랑 >(2016), 이원우의 단편 작업들처럼 에세이영화,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사이에서 활동한 감독들의 작품 또한 이것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다. 디지털이, 더 정확히는 인터넷이 우리의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한 이후의 현장은 새로이 변화하고 있다. 여전히 물리적인 공간을 요구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모종의 결속력과 행동력을 생산하는 것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다. 팬데믹 이후 전개된 메타버스에 관한 논의 대부분은 이미 사회운동은 물론 소통, 유희, 거래, 창작 등 수많은 활동이 온라인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망각한 채 진행되었다.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현장은 알록달록한 스킨의 아바타를 매개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다음 카페, DC인사인드, MMORPG 게임, 유튜브, 틱톡, 스카이프 등의 모습으로 이미 존재해왔다. 이 새로운 현장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까? 물론 박윤진의 < 내언니전지현과 나 >(2020)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인터넷을 접해왔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낸 이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그것을 흥미롭게 그려낸 사례 중 하나다. 다만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현실과 등치시키며 엮어내고 있지만, 새로운 현장 자체를 탐구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탐구하는 두 명의 작가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2019)와 < 들랑날랑 혼삿길 >(2021)의 홍민키다. 퍼포먼스와 영상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홍민키 작가의 작품 중 두 작품은 인디포럼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두 작품 모두 전시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었지만, 미술계에서 생산된 여러 작품이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영화제에 유통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영상작업을 여럿 선보여온 홍민키의 작품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서울 도심 위를 날아다니는 가상의 공중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토론회다. ‘망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망원동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홍민키의 얼굴 위에 주민들의 얼굴을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한 뒤 그들의 음성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더불어 SNS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망리단길의 지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의 이미지를 스튜디오에 둥둥 떠다니게 한다. 수해를 입었던 기억부터 조만간 사라질 거품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 동네에 새로 생겨난 ‘힙한’ 카페에서 중년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증언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온라인과 SNS라는, 물질적인 현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세계는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 장소성을 지니지 못하는 온라인 공간은 존재하는 장소를 어떻게 뒤바꾸어 놓는가?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망원동’이라는 장소가 ‘망리단길’(을 비롯해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전국 곳곳의 공간들)이라는 비(非)장소, 즉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 이 되어가는 현상의 기록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에 그 무엇보다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SNS 타임라인이라는 독특한 비장소를 통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가상의 스튜디오, 토론회, 딥페이크로 합성된 얼굴, 아바타로 만들어진 특파원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홍민키 감독이 친형의 결혼이라는 상황을 맞이해, 게이인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해 가족들에게 직접 질문한다는 내용의 <들랑날랑 혼삿길>은 얼핏 이 주제와 관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형, 형수, 아버지, 어머니, 시장어른 등 가족과의 인터뷰, 대중교통을 타고 가며 지인과 영상통화 하는 홍민키, 그리고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 등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 이 중 가족들의 인터뷰는 각자의 방에서 줌(ZOON)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것만 같다. 하지만 인터뷰의 내용에 따라 통신이 불안정해 화면이 끊긴다거나, 액자가 넘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세히 보면 이 화면은 실제 공간이 아니라 가상화면이다. 홍민키와 지인의 영상통화는 세일러문과 보라돌이 캐릭터를 각자의 얼굴에 덧씌운 채 진행된다. 전자의 공간은 온전히 ‘집’인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공간이며, 후자의 공간은 완전히 개방된 공공의 공간인 것 같지만 퀴어인 두 사람은 얼굴을 감추어야 한다. 홍민키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어떠한 후가공도 없는,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뿐이다. 세 가지 층위는 한국의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존재가 가지는 지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령 가족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은 그것이 지닌 물리적 거리감을, 가상공간의 디자인은 그럼에도 존재하는 모종의 친밀감을 형상화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원하는 캐릭터의 얼굴을 쓰고 영상통화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온라인 공간은 얼핏 모두에게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인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동일한 화면 위로 살포되는 동성애 혐오적인 온라인 삐라를 보여준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은 정체성의 표현을 열어주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퀴어와 호모포비아 모두 동일하다. <들랑날랑 혼삿길>은 이성애를 전제하는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각자의 정체성이 표출되며 복잡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 관한 스케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점에서 홍민키의 두 작품은 온라인과 현실이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영향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홍민키가 온라인 공간의 특징들을 그래픽과 딥페이크 등으로 재현했다면, 정여름의 두 작품은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간다.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은 증강현실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2016)에서 출발한다. 해방촌에 사는 감독은 게임을 플레이하던 중 용산 미군기지 내의 포켓스탑을 발견한다. 포켓스탑은 아이템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게임 내 장소로, 이는 실제 세계의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기념비 등을 기반으로 위치 지어지며 다수의 플레이어가 선택한 장소가 지정된다. 게임 내에서 포켓스탑을 터치하면 실제 장소의 사진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를 통해 한국인 대부분이 출입할 수 없는 용산 미군기지 내부를 탐색한다. <그라이아이>는 그렇게 발견한 용산 미군기지 내의 제국주의, 전쟁, 자본주의, 미국과 관련된 기념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온라인에서 발견한 연관된 푸티지들과 엮어낸다. 이는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현실의 지리학 위에 게임의 지리학을 세워 놓는 특징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부재한다. 오로지 게임을 녹화한 화면과 온라인에서 발견한 푸티지들만이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여름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설계된, 반대로 내부에서는 그곳이 ‘용산’이 아니라 ‘미국’처럼 보이게끔 설계된 용산 미군기지라는 곳을 탐험한다. 보이지 않게끔 은폐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용산 미군기지를, 더욱 가상의 공간인 온라인을 통해 그곳을 가리고 있던 유무형의 장막을 걷어내는 작업인 셈이다. 정여름의 두 번째 영화인 <긴 복도>(2021)은 직접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간다. 국내에 반환된 미군기지 중 하나인 원주의 캠프 롱(Camp Long)에서 직접 촬영된 이미지가 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른 절반은 과거 캠프 롱의 PX에서 일했던 한 인물의 일기와 사진, 그리고 구글맵 이미지 등이다. 흥미롭게도 미군이 철수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구글맵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 이를테면 ATM이나 PX의 위치가 찍혀 있는 지도는 <긴 복도>의 주인공인 탐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현실의 공간에는 미군이 철수하고 남은 폐허 상태의 건물만이 남아있지만, 온라인 상의 지도에는 여전히 기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로지 탐정이 온라인 지도를 들여다볼 때에만 존재하는 기지는 그 자체로 탐정 앞에 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지도라는 매체를 통해 유사-현전(pseudo-presence)할 뿐이다. 우리는 온라인 상의 정보들이 우리의 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그것은 매체를 통해 현전할 뿐인 정보, 텍스트, 이미지들이다. 즉 멀리 있는 대상이 실제로 가까이에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체를 통해 그렇게 느낄 뿐이다. <긴 복도>의 탐정은 유사-현전한 미군기지의 좌표를 통해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을 추적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대신 그가 찾아낸 것은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의 좌표로써만 현전하는 세계 곳곳의 미군기지들, 미군기지 내의 ATM이나 PX, 은행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의 흔적뿐이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실제 세계 위에 세워진 은폐된 공간을 온라인으로 탐험하는 작업이었다면, <긴 복도>는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추적하는 탐정물이다. 두 가지 작업은 얼핏 각자의 방식으로 미군기지라는 대상을 탐색하는 것만 같지만, 그와 동시에 오로지 온라인이라는 가상적 공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곳을 가시화하려는 작업이다. 때문에 ‘탐정물’의 형식을 차용하는 <긴 복도> 또한, 현재에 비가시화된 과거인 철수한 미군기지를 되짚어보는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홍민키와 정여름의 작업들은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그곳을 경유한 사유를 풀어낸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의 인스타그램 타임라인, <들랑날랑 혼삿길>의 화상회의 프로그램,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모바일 게임, <긴 복도>의 온라인 지도는, 얼핏 실재하는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온라인 공간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홍민키의 두 작업은 그것이 현실과 얽혀 주고받는 영향을, 정여름의 두 작업은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현실의 여러 가지 지표들을 탐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이 지금 등장한다는 것은 ‘메타버스’를 비롯한 여러 담론이 작품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생의 대부분에서 온라인을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활동 영역으로 여겨온 이들이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1)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역, 한울아카데미, 2018, p.76 2) 이도훈 평론가는 이러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을 각각 "현장-기반의 다큐멘터리"와 "현장-전유의 다큐멘터리"라 명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도훈, "현장을 전유하는 다큐멘터리: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현장과 결합하는 방식", 「현대영화연구」,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44호, 2021, p.125~150. 을 참고하라. 3)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상길, 이윤영(역), 아카넷, 2017, p.97. 4) 심혜련, "매체적 현전 시대에서의 공간과 지각의 문제에 관하여", 「계간 시청각 4호」, 서울: 시청각랩, 2019, p.24.
1980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적인 개성은, 각자의 대사와 (완성형의) 자기 플롯이 있는 인물들이 무려 열다섯 명에 달한다는 것이고, 모두 뚜렷하게 구별이 가면서 그 필요를 인정할 만큼 생생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세 청년을 중심으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좌절과 상실을 주로 주목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여러 다양한 개성의 이웃들 또한 보기만큼 가볍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방향이 잘 설정되어 있고, 그 인물들이 틀림없는 순간과 장소에 정확하게 등장했다가 퇴장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성취인 것이다. 관심이 가고 주목이 되는 수많은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 쏟아놓은 뒤, 교통정리를 잘 해가면서 각자가 내려야 할 도착지로 능숙하게 데리고 가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의 것이라 해도 매번 놀랍고 감탄스럽다. 세 청년들의 쓰라린 정착 초기 모습을 발랄하게 스케치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철가방을 든 젊은 얼굴의 안성기 가 등장한다. 덕배라는 이름의 어리숙한 이 중국집 배달부는 이후 유지인 이 연기하는 상류층 여성인 명희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로맨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플롯은 덕배로 하여금 결국 권투선수가 되어 이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를 내뱉게 하도록 작동한다. 그러니까 다들 엇비슷한 러닝타임을 가져가고 있는 터라, 딱히 누구의 이야기라 정리하기에 애매한 이들 청년의 플롯 중에서도, 굳이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캐릭터를 꼽자면, 당시 가장 인지도 있는 배우( 안성기 )가 연기한 이 ‘덕배’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즉, 사나운 개가 핥고 있는 빈 그릇을 가져가지 못해 쩔쩔 매다 주인에게 비웃음이나 당하던 중국집 배달부의 앞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이고,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권투선수의 뒷모습이 엔딩이라면, 이 영화가 결국 ‘덕배’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종착점이었고, 그 마지막 보이스-오버가 이 영화를 정리해내는 한 줄 테마였다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덕배’야말로 수많은 인물들의 플롯이 씨줄날줄로 엮이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배가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고 영화 밖으로 퇴장하게 되기까지, 그를 조력했던 다른 두 청년의 플롯을 하나씩 짚어보자. 이영호 가 연기한 이발소 직원 ‘춘식’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미스 유( 김보연 )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단골손님이자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는다. 미스 유는 춘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춘식과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꿈을 부끄럽게 고백하는 송전탑 아래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사무치게 아름다운 씬이 될 자격이 있다. 결국 이들의 플롯은 춘식이 김회장을 살인미수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는데, 버림받은 아이처럼 자주 울컥하던 춘식의 영화 속 마지막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죽을 듯 울부짖는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온통 공사판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이나 높은 언덕에서 자주 만나 속마음을 주고받던 이 두 사람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심장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과 마침내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성찬 이 연기한 ‘길남’은 여관에서 일하며 근처 미용실 직원 진옥과 연애하는 청년이다. 그의 꿈은 언젠가 평등하게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호텔을 여는 것이며, 아예 어리숙하거나 자주 울컥하는 다른 두 친구와는 달리, 길남은 세속적이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고 매사에 웃고 다니며 가끔 실없다. 그의 플롯은, 자신이 결혼상대로 생각해 맡겨둔 돈을 진옥이 들고 도망치자 망연자실하고 결국 군대에 끌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끌려간다’는 표현은, 영장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결국 다 끝나버렸다는 듯 오열하며 말하는 장면이 숨기고 있는 감정에서 짐작가능하다. 춘식은 감옥에 갔고, 길남은 입대했으며 덕배는 권투선수가 되었다. 아니, 춘식이 감옥에 갔고, 길남이 군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덕배가 권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들이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거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웃들도 있었기에 더욱 더 그는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영화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 안의 인물들도 모두 퇴장한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2018년의 지금, 그들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현재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무엇보다, 아직까지 서로 만나는 친구사이일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볼 때마다 그런 궁금증들을 남기는 영화로 매년 나이 들어간다.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김천/성주’ 영화 < 소성리 >가 상영되는 극장의 불이 꺼지면,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해 가장 먼저 스크린에 맺히는 상이 바로 위의 문구다. 5초 동안 유지되는 그 화면을 보고 있으면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하나의 마침표를 찍은 감흥보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행동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책임감’이란 말속에 숨어 있는 찐득한 피로감을 떨치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미디어를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카메라를 다루는 건 기본이고 제작한 콘텐츠를 인터넷으로 방송하는 건 옵션, 생방송으로 자신의 현재를 손쉽게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각 지역에 미디어 센터와 영상위원회가 생겨 마음만 먹으면 미디어를 활용해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장을 지키는 미디어 활동가와 영화감독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미디어로 행동하라!’(이하 미행)는 더 많은 시민들이 현장과 결합할 수 있도록 제작 경험을 나누고, 현장의 목소리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지 고민하며, 그러면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모이게 되었다. 2014년 10월 9일, 삼척의 작은 마을에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미행팀은 투표 방해를 감시하고, 삼척 주민들의 속마음을 듣고, 주민투표의 의미를 담기 위해 삼척으로 향했다. 다음 해 6월 11일은 밀양 765kV송전탑을 건설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행정대집행을 강행한 지 1년이 지난날이었다. 미행팀은 지옥 같았던 행정대집행을 기억하기 위해 괴물 같이 솟아 있는 송전탑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할매들의 주름을 담고 송전탑을 뽑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면서 도리어 큰 힘을 얻고 돌아왔다. 미행이 세 번째로 ‘in’한 곳은 충북 지역이었다. 충북에는 노조파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유성기업’을 비롯해 ‘보쉬전장’, ‘콘티넨탈오토모티브일렉트로닉스’, ‘청주시노인전문병원’, ‘PLA’ 등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이어진 회사의 탄압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올해, 2017년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적으로 배치된 사드를 온몸으로 막으며 평화의 본질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성주와 김천으로 향했다. 미행 미행은 4박 5일 동안 동거동락하며 활동한다.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모여 현장의 상황을 주민과 활동가에게 듣고, 자신이 관심 있는 미디어를 선택한다. 영상이나 소리(음악 및 라디오), 잡지 중 하나의 미디어를 선택한 사람들은 각자 주제를 정한 후 함께 나눈다. 서먹하지만 의지 충만하고 웃음 가득한 하루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낮 동안 촬영과 녹음을 진행하고, 밤에는 작업실에 돌아와 모니터를 하며 녹취를 푼다. 다음 날도 같은 일정이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의 입가에서 점점 웃음기가 빠지고, 한숨이 늘어난다는 것뿐. 날이 갈수록 잠자리가 마련된 숙소는 무용지물이 된다. 촬영과 녹음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 몇몇은 작업실에 남아 편집을 시작하고 몇몇은 보충 녹음 및 촬영을 하러 현장으로 향한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어떤 분노와 짜증이 뿜어져 나오는 건, 부디 나의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 발표회 전날 밤 작업실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 마지막 내부 시사회를 한숨으로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가 커지고, 잠을 못 이긴 이들이 작업실 구석을 메운다. 겨우 잠을 이겨낸 이들은 다음날 발표회에서 발표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서로를 부축해가며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3년, 네 번에 걸친 현장의 이야기가 영상 19편, 라디오 9편, 음악 9곡, 잡지 2권에 담겨있다. 어쩌면 미행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큰 원동력 중 하나는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모셔놓고 결과물을 나누는 발표회 때 느끼는 충만함 때문일 것이다. 한 미디어 활동가는 발표회가 끝나고 내게 다가와 속된 말로 “현장 뽕을 맞는다는 게 이런 거군요~”라고 속삭이며 눈물을 훔쳤다. 나 역시 발표회 때마다 ‘이런 순간을 위해서 영화 만들고 활동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쁨을 만끽한다. 현장에서 하는 발표회는 주민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고, 낯설고 어색했던 이곳이 나의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삼척에선 주민투표의 결과를 기다리며, 밀양에서는 송전탑을 뒤로하고 잔치를 벌이며, 청주에서는 작은 극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성주에서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마을회관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미행의 결과물을 나눴다. 발표회는 미디어가 연결해주는 연대의 힘을 서로서로 주고받는 빛나는 순간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성주와 김천에서 5일간의 미행을 마치고 내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올해 초 미행을 기획할 단계부터 미행을 마무리하고 나면 그 힘을 연장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중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미행의 강점이자 약점은 느슨한 네트워크 형식의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을 배급 유통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형태이다. 그래서 매해 평가 회의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했던 한계가 지적되었다. 마침 이전에 미행이 찾았던 지역의 이야기는 다른 콘텐츠로 대신할 수 있었지만, 성주의 경우 지금 당장 해야 할 이야기들이 충분히 외연화 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에 완결성이 있는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심 영화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의 미행을 실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3개월간의 짧은 제작 기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힘겹고 버거웠던 제작기는 이 지면에서 삼간다. 아무튼 영화 <소성리>는 완성되었고 다행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소성리>를 고리로 한 미행의 출발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불법적 사드 배치에 대한 사과와 무용지물인 사드 철회를 요구’하는 연명을 받아 255인의 영화인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화제 기간 중 1인 시위를 통해 시민들에게 ‘사드 가고 평화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극장에서는 매회 상영이 끝날 때마다 관객과 함께 피켓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소성리 주민들 역시 영화제를 찾아 ‘사드 뽑고 평화 심자’는 퍼포먼스를 레드카펫에서 우아하게 펼쳤다. 앞으로 영화 < 소성리 >를 매개로 극장 안팎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올해 미행을 준비하는 동안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지난 9월 7일 소성리에 전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드가 배치되었고, 그 참혹한 현장을 지켜본 조영삼 씨가 사드 철회의 마중물이 되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언론 보도는 거의 없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국가 폭력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크게 닿지 않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국가 폭력에 저항하고, 우리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고, 결과적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할 수 있게끔 역할을 해내고 있는 현장이 있는 한 미행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미행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미행의 역할을 잘 알고 있지만 인력과 예산의 부족으로 다음을 이야기는 게 쉽지 않다. 지난 3년 동안 몇몇 활동가들이 힘겨운 여건을 딛고 미행을 이끌어왔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등에 업고 개인이 희생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우리들은 미디어로 행동하는 가치를 함께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와 음악으로, 영상과 팟캐스트로, 수많은 미디어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우리 함께 미디어로 행동하자! *미디어로 행동하라! https://www.facebook.com/mihaeng/?ref=bookmarks *영화인 성명서 http://ozifilm.tistory.com/333 *소성리 주민들 부산에서 평화를 심다 https://vimeo.com/239768367 *소성리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RktoH8Jc1HA (소성리 뮤직비디오는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성주/김천’의 결과물인 영화 < 소성리 >와 음반 <새 민중음악 선곡집 - 소성리의 노래들>의 콜라보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