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한나
- 감독
- 이우정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이채은, 유형근
단편영화 < 송한나 >를 얼마 전에야 보았다.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았다. 내용은 이렇다. 송한나는 가난한 연인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 옥탑방을 빌려주고 정작 자기는 다른 건물 옥상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 그런 송한나를 따라다니는 남자애는 송한나가 걱정되어 밤새 텐트 앞에서 왈츠를 춘다. 송한나는 얼마 전 어떤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향기만으로도 그를 알아챌 수 있지만 마주치면 부끄럽다. 송한나는 그의 사물함에 엉뚱한 사진들을 몰래 넣어놓곤 하지만, 그 애가 다른 애와 자기 방을 빌리려 하자 절망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송한나의 사랑이 첫사랑인지 아니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사랑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송한나는 서로 함께 좋아하는 사랑은 아직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게 된 그 애의 향기에 무척 설레고 그 애와 마주치는 눈길이 부끄럽고 그 애가 다른 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깊이 절망한다. 송한나의 곁에는 송한나를 걱정하고, 송한나를 절망하게 한 자를 소심하게 응징하고 송한나를 위해 몸을 숙여 발판이 되어 주는 애가 있다. 그는 송한나가 나오는 많은 장면에 함께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인물도 송한나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송한나가 바라보는 사랑과 송한나를 향한 사랑. 송한나가 좋아하는 애와 송한나를 좋아하는 애.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영화 < 송한나 >에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송한나 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송한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인인지 청소년인지 모호하게 묘사된 송한나의 서툰 사랑들. 서툰 사랑이 끝나면 아마도 이것이 이대로 잊혀져버리는 건 아닌지, 조금은 떨리는 모양이다. 영화 마지막 “송.한.나” 삼행시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 송한나 >는 < 개를 키워 봐서 알아요 >(2009)와 < 애드벌룬 >(2011) 등을 연출한 이우정 감독의 2008년 작품인데, 그 이전까지 여러 독립영화에 스태프로 함께하고 몇몇 영화에는 출연하기도 했던 ‘이우정’이라는 사람을 재능있는 ‘감독’으로 인식시킨 어쩌면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우정 감독은 윤성호 감독의 여러 작품들을 비롯해 < 나를 떠나지 말아요 >(2006, 신이수) , < 경주여행 >(2010, 김지현 ) 등의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가 함께 기획한 “감독과 배우 사이: 독립영화 감독-배우 열전”에서 <송한나>와 <경주여행>이 상영될 예정이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기획전은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인디플러스에서, 11월 1일부터 4일까지는 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이채은 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 중 비속어와 욕설을 가장 예쁘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이런 것들을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곧장 말해 아주 싫어하지만), 이채은이 그런 대사를 읊는 동안은 몇 초 동안이나마 방심하게 된다. 이채은의 욕설에는 묘한 정갈함이 있다. 이게 욕설이나 상황과 어울리는 건지, 아니면 작정하고 어긋나 있는 건지 나는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를 건성으로 지나치는 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채은 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 중 ‘싸가지 없는 여자’를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이다.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이채은이 < 거짓말 >에서 연기했던 싸가지 최연희가 2009년 한국 영화 최고 캐릭터 중 하나이며 이채은의 연기 역시 그 해 최고였다고 말한다. 이채은의 싸가지 연기에는 티꺼운 대사 몇 개를 어색하게 틱틱 뱉다가 여자주인공에게 따귀 한 번 맞고 훌렁 넘어가는 연속극 까칠 재벌남들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입체성이 있다. 다차원적이고 다채롭고 변화무쌍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신경을 긁고 찌르고 베는 싸가지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일상생활에서 싸가지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거짓말>의 결혼식 장면을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거다. <거짓말>은 우리 싸가지들을 위한 처절한 고백이자 변호이다. 그리고 이채은은 우리들의 여신이다. 이채은 의 이미지를 싸가지로만 제한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러기엔 이 배우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아마 이것은 단편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인디 배우의 이점이리라. <거짓말>의 대척점에는 < 송한나 >와 같은 귀여운 영화가 있다. <송한나>를 먼저 본 관객이라면 한나와 같이 샤방샤방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거짓말>의 연희를 이해하며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도 못할 거다. 내 추측엔 연희가 자연인 이채은에 더 가깝고, 한나는 고도로 정제된 내숭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송한나의 진실성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송한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채은은 우리나라 최고의 안경미인이다. 어떻게 안경 하나로 미모가 그렇게 확 상승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중간에는 다양한 성격의 수많은 영화들과 캐릭터들이 있다. 그 정확한 중간 지점에는 < 비노, 달리다 >의 남희가 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과외제자의 페이스에 훌러덩 넘어가버리는 그 어리버리함의 표현은 절묘하다. 남희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 속에 사는 한나나, 세상의 모든 것과 싸우며 살아가는 연희와는 조금도 닿지 않는 인물이다. 그 주변에는 보다 정상적인 인물들도 있다. < 내 깡패 같은 애인 >에서 호들갑 떠는 박중훈을 대사 한 마디로 눌러버리는 간호사를 기억하시는지? 회상 장면에서 젊은 송씨로 나와 옛날 시골 아낙네의 처절한 생활 비극을 보여주었던 < 그대를 사랑합니다 >는 또 어떻고. 들 수 있는 예는 끝이 없다. 김예리와는 달리, 이채은 에게는 아직 장편 주연작이 없다. 그 때문에 나는 우리 사이트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 김예리 씨가 무심코 정보를 흘렸던, 이채은, 김예리, 김꽃비 주연의 인디 영화판 < 여배우들 > 영화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길래, 이 원고를 쓰는 동안 트위터로 김꽃비 씨에게 물어보니 감독은 떠났고 계획은 잠시 중단된 상태란다. 아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길 빈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기획내용과 캐스팅만으로도 하악하악하게 되는 영화니 말이다. / 글: 듀나 (영화평론가)
고등학교 1학년 효정( 이민지 )의 아침은 부산하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같은 반,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단짝 지연( 장의영 )은 효정네 현관에 미리 와 기다린다. 별 거 없는 대화를 하며 등하교를 함께 하고 이미 들떠있는 쉬는 시간 교내 화장실 익명의 배설물만 봐도 자지러지는 사이, 지연은 효정을 쳐다보느라 문득 골똘해지고 효정은 괜히 빙긋거리며 그 시선을 미끄러뜨린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뭔가 도돌이표 같지 않아, 아까 그 자리야?” “한 바퀴 돌았으니까 그 자리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선문답이 고픈 친구를 보며 짐짓 웃어버리는 효정. “그런 건 엄마가 대학 가고 나서 고민하는 거래” 마냥 도돌이표가 찍혀 있을 것 같던 일상은 문득 마디가 끊어진 악보가 되고, 누구는 풍문으로 누구는 풍문도 아닌 무엇으로 (이미 바람이 빠진 채 옥상에 널려 있는 애드벌룬 속으로) 사라지며 우리는 속에 구멍 하나쯤 있는 어른이 된다. 또래들이 다르덴 형제를 레퍼런스 삼아 누군가의 뒷통수를 핸드헬드로 따르며 그 결핍을 되려 과잉으로 드러내거나 (이제는 상투), 또는 준수한 고화질의 무빙으로 장르 연출자로서의 자신을 전시할 때 (짐작이 가는 웰메이드), 이 단편의 연출과 촬영은 요새 안 쓰는 베타캠을 굳이 대여해 특정 시기의 스탠다드 - 90년대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 중고등학교 영상제작반의 의욕적인 과업 사이 어딘가 - 를 일부러 서툴게 재현한다. 바지런 떠는 엄마 캐릭터, 굳이 편집의 연속성을 맞추려다 더 땐땐해지는 대사 교환, 플롯의 위기를 위해 등장하곤 하는 소위 불량한 친구들 등등 익숙한 요소들을 불러오되 딱히 주제를 위해 봉사시키지 않기. 가령 기어코 애먼 방향으로 달려가는 애완견. 물론 이 또한 ‘다름’을 전시하기 위한 영악한 기획일 수 있겠다. 다만 우리의 모호한 시절을 진지하게 다루는 척 하며 결국 고만고만한 화해로 착지시키던 청소년 드라마의 외피를 일부러 차용, 스스로 고유한 무언가가 되는 전략. 좀 비약하자면 < 고양이를 부탁해 >를 타란티노 식으로 만들기랄까. 장선우 감독이 < 나쁜 영화 >를 만들며 지레 선언하기 바빴던 ‘무위자연’의 미학은 이렇게 십몇년이 지나, 혁신적인 기성마저 결국은 대상화했던 그 세대가 직접, 어깨 힘 빼고 재연하며 완성되는 건가 보다. ps. 김지현 감독의 단편 등에서 종종 배우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하는 이우정 감독은 자신의 작품 시놉을 싱겁게 쓰기로 유명하다 (사실 그런 걸로 유명하긴 힘드니까 이건 그냥 일종의 관용어법이다). 단편 < 송한나 >의 연출의도를 통해 ‘내 얘기를 들어본다면 모두 내 편이 되어줄 거야’라 읊던 감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다음의 적막함을 고민하게 된 듯 하다. ‘내 얘기를 들어도 내 마음은 모를 거야,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참 묘한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