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꿈 : 프레데릭 쇼팽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아서 B. 루빈스타인
일반적으로 영화의 내레이션은 “대사가 아니나 직접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해설하는 말” 1) 로 정의된다. 영화 속 캐릭터와 별개의 해설자가 등장해 사건을 해설한다거나, 대사로 전달하기 어색한 정보 혹은 인물의 속마음을 1인칭 보이스오버로 전달하는 등의 방식으로 활용되곤 한다.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은 주로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화면에 더해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하거나, 감독 자신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거나. 배리어 프리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에게 영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소리로 화면을 보여주는 것'" 2) 이다. 이는 화면에서 보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거나, 1인칭으로 화자의 속마음을 발화하는 내레이션과 구별된다. 무엇보다 화면해설에는 객관성이 요구된다. 프랑스 화면해설방송헌장은 다음과 같이 객관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내용을 명확히 전달해야하며, 화면해설자가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설명 내용을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3) < 피아노 프리즘 >(2021)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는 모든 한국어 사용자를 위해 화면해설과 음향자막이 추가된 배리어 프리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꽤나 독특한 효과를 가져온다. 배리어 프리 버전이 동시에 제작되어 일반 버전의 영화와 동시 개봉했던 이승준 감독의 < 달팽이의 별 >(2010)과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리어 프리 버전은 사후적으로 제작된다. 한 차례 완성된 영화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별도로 제작되는 방식이다. 경우에 따라 영화의 감독이 직접 음성 화면해설의 연출을 맡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직접 자신의 작품에 음성해설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에선 화면 속 인물을 이름이나 외모, 직책으로 묘사한다. 가령 < 기억의 전쟁 >(2018)의 초반부 시민법정 장면에서 “법복을 입은 세 명의 판사”라 해설한다거나, < 학교 가는 길 >(2021)에서 카메라를 든 감독을 제작진이라 명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오재형 감독의 음성해설은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자신을 그대로 노출한다. 다른 작품이었다면 “오재형”, “주인공”, “감독” 등으로 지칭되었을 화면 속 오재형 감독은 “나”로 지칭된다. 감독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의 화면해설은 "잡다한 물건들이 많은 방, 잠옷 차림의 저는 가운데에 서서 허리 스트레칭을 합니다."라며 자신을 “저”로 지칭하고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이러한 이는 익숙한 사적 다큐멘터리 혹은 1인칭 다큐멘터리의 기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 프리즘> 속 화면해설 내레이션은 ‘내레이션’보단 ‘화면해설’의 기능이 최우선 목적이다. 다만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이며 내레이터인 오재형 감독의 화면해설은 첫 문단에서 제시된 객관성의 기준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위배한다. “나”라는 지칭이 등장하는 순간 이것은 화면해설과 내레이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피아노 프리즘>이라는 영화의 내용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이 영화는 회화에서 영화, 피아노 등으로 이어지는 오재형 감독 자신의 예술적 궤적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감독 자신에 관한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재형 감독의 거의 모든 단편영화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쇼팽 이미지 에튀드>(2008), < 강정 오이군 >(2015), < 덩어리 >(2016), < 블라인드 필름 >(2016), < 봄날 >(2018), < 화가의 숲 >(2019), < 보이지 않는 도시들 >(2021) 등 오재형 감독이 여러 영화제와 전시에서 선보여온 작품들이 <피아노 프리즘> 곳곳에 등장한다. 오재형 감독의 작업은 2020년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진행된 개인전 <피아노 프리즘: 보이지 않는 도시들>로, 그리고 개인전과 공연을 준비하는 자신에 관한 기록인 영화 <피아노 프리즘>으로 한데 모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댄스 필름,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등이 뒤섞여 있는 이 작품들을 하나로 묶긴 어려워 보인다. 영화들의 다양한 형식은 회화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피아노로 이동하는 오재형의 다종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피아노 프리즘>은 그러한 자신의 과거 작업들을 포괄하는 피아노 공연을 선보이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번복가능성을 내포한 화가 은퇴식을 꾸리고, 70살 노인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치겠다 다짐하며, 공황장애의 기억을 고백하고, 강정·밀양·용산·광화문 등에서 벌어진 투쟁과 집회에 연대한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주제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피아노 프리즘>은 오재형이라는 개인에 관한, 다양한 장르를 횡단하고 혼합하는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란 진술은 <피아노 프리즘>이 한 예술가의 자아도취라거나, 자기 홍보를 위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적 다큐멘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1인칭의 시선으로 전개”함과 동시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를 향해 “예술적 발언”을 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피아노 프리즘>은 근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 놓인다. 동시에, “공적으로 발화되는 ‘예술적 발언’인 자신의 영화를 어떻게 발화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질문을 던지고 하나의 답변을 제출하고 있다. 다시 배리어 프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감독 본인이 직접 내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사적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과 구별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라는 지칭을 통해 여타 영화들의 내레이션 개념과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 사이의 구분을 흐려 놓는다.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나”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적 확장이다. 반대로 자막해설은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해설한다. 음성해설이 오로지 청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자막해설은 오로지 시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배리어 프리 영화는 가시적이지 않은 시각 이미지의 전달과 가청적이지 않은 청각 이미지의 전달이라는 양측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여야 한다. 오재형 감독은 그 과제를 자처하여 수행한다. <피아노 프리즘>은 감독 자신의 예술적 발화를 모든 이에게 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오재형”이라는, “나”라고 지칭되는 자신을 가능한 모든 이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자신의 예술적 작업은 물론 그 작업을 생산해낸 과정과 예술의 주체인 자신 자체를 전달하는 행위다. 때문에 <피아노 프리즘>을 감독 자신이 사회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것과 맞부딪히며 경험해온 것을 예술적으로 전달해온 작업의 집합이라고 할 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리어 프리라는 형식은 “나”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예술형식에 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 1) 『영화미학용어사전』(프랭크 E. 비버, 1995), 『영화용어사전』(김혜리 외 3인, 1999), 『영화사전』(김광철, 장병원, 2004) 등의 정의를 참고하였다. 2)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상제작론』, 김정희, 산지니, 2018, 87p. 3) 앞의 책, 103p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발견’이라는 단어의 뜻에 충실한 영화로 손모아, 안정연 감독의 데뷔작 < 가만한 >(2020)을 말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는 상태에 있다’라는 ‘가만하다’는 이 영화를 설명하는 오롯한 형용사이자 영화의 주인공 준서( 박수연 )의 상태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태도의 말이기도 하다. 준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예고를 졸업하고 음악대학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준서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태다. 손가락은 굳어 쉬이 움직이지 않고, 그 가만한 손을 내려다보는 준서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다. 마음에 웅숭그린 발화되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적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일이 잦은 준서다. 굳어버린 건 손가락이기보다는 준서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는 준서가 한동안 떠나 있던 음악대학을 다시 찾아 그곳 학생이 아니라 임시 행정 조교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만한>에서 우리는 준서의 존재보다도 더 크게 바흐와 쇼팽을 비롯한 클래식 피아노 선율의 존재감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은 준서를 떠나지 않는다. 준서가 학교에서 피아노과 학생들을 보조하며 그들의 연주회를 준비할 때든, 강박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는 편입생 수미(이화원)를 지켜볼 때든, 어째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하는 엄마( 오민애 )의 공간에 있을 때든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공기처럼 화면을 채우고, 흘러들어오고, 스며든다. 때론 먼 곳에서 누군가의 연주인지로 모를 음악이, 때론 지근거리에서 준서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준서와 그녀의 공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감싸 안는다. <가만한>에서 음악은 서사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도 아니다. 이곳의 음악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서였고, 지금의 준서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준서를 예견하는 준서의 세계 그 자체다. 다시 쓰면, 음악이 준서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준서가 음악을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는다. <가만한>은 준서의 굳은 마음의 상태가 해빙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을 따른다. 이때의 해빙이란 결코 어떤 결론이나 해결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그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음악 안에서 살며 음악을 계속해가기 위한 분투, 다르게 음악을 사랑하려는 준서의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미묘한 점진을 구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일관되고 그 자세 역시 의연하다. 우리는 <가만한>에서 준서의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의 등과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액션에 따른 준서의 감정의 리액션 쇼트를, 스펙터클한 얼굴의 세계가 아닌 준서의 가만한 등의 액션과 리액션을 더 유심히 봐야 하고 그곳에서부터 감응은 시작된다. 뒷모습이 보이는 조용하고 은은한 떨림과 부동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가를 영화는 설득해내고 싶어 하고 또 설득해낸다. 반대로 몇 안 되는 순간이지만 카메라가 오직 준서의 얼굴만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응시할 때가 있다. 카메라 너머에는 준서가 더는 가닿을 수 없는 음악의 세계가 있거나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불화하는 세계가 있다. 준서의 세계 이쪽과 저쪽이 완벽히 분리되는 순간을 이토록 정확하게 목격하게끔 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의 파고를 경험할 것이다. 한편 영화는 이것만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한>의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 있지만 몇 차례 움직임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의 장면을 말하려 한다. 준서가 연습의 압박에 시달리다 손에 마비가 온 수미를 발견했을 때다. 카메라는 인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수미가 마비된 제 손을 주무르고 그 곁으로 준서가 다가가는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수미의 얼굴로는 이동하지 않기로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대신 <가만한>은 인물이 떠나고 난 공간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 한다. 구체적인 그 장소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남긴 진동과 여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있었던 곳에는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할 것이다. 그 소리와 빛은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할 만큼 애틋하다. 부동 속에서 감지되는 미약한 흐름과 정동이 빚어낸 감흥일 텐데 그것은 봐야만 하는 것과 볼 수 없지만 들리는 것 사이에서 음악이 계속되듯, 준서의 삶도 계속되리라는 귀한 긍정을 목격하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과격한 사건과 극적인 반전 혹은 자극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감동이 있음에 새삼 안도한다. 각본을 쓴 안정연의 사려 깊은 시선과 촬영을 맡은 손모아의 미더운 앵글이 가져다준 결과다.
오재형 감독은 주로 다른 예술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쇼팽이미지에튀드>(2008), <강정 오이군>(2015), < 덩어리 >(2016), < 블라인드 필름 >(2016), <봄날>(2018)과 같은 그의 영화는 때로는 애니메이션, 회화, 음악, 춤, 퍼포먼스 중 하나를 지향하지만, 때로는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뒤섞이는 상황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창작자로서의 오재형은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예술의 순수성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것과 뒤섞여 오염되는 결과를 낳더라도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순수하면서도 불순하다. 비교적 최근에 공개된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서로 이질적인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를 조합해 자아의 내면이 외부의 낯선 세계와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오재형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떠난 북유럽 패키지여행에 기초한 것이다. 영화는 두서없이 모스크바,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 등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실제 오재형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어느 식당에서 닭도리탕이 만찬으로 나온 것에 착안했다고 한다. 오재형 감독에게는 이국적인 장소에서 익숙한 음식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잠시 등장하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닭도리탕이 나오는 그 식당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가운데 금발의 외국인이 어눌한 발음으로 부른 한국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의 닭도리탕과 대중가요는 그 자신의 뿌리를 잃고 모스크바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고정된 장소를 잃고 새로운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과도 같으며 영화는 바로 그 논리를 따라서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침투가 벌어진다.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시키는 이러한 연출 방식은 약 8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영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된다. 영화가 시작하면 모차르트의 <주를 찬양하라(Laudate Dominium)>는 곡이 흐르고, 갓 잠에서 깬 것 같은 목소리로 맥락 없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출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이러한 사운드 또는 텍스트들과 함께 여행 중에 찍은 영상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에서 단연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영상이다. 간혹 감독은 여행 중에 찍은 영상을 고풍스러운 느낌의 액자 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은 무성 영화 시절 화면 프레임 가장 자리에 화려한 장식을 입혀 놓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겉보기에 평범한 이미지들은 액자화된 프레임과의 그것의 장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예술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마치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둘러싼 화려한 액자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관광객 무리는 미술관을 방문해서 여러 작품을 관람한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그 관광객들이 본 작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오재형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그 그림의 정체에는 무심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사물들의 가치는 그것이 놓여 있는 장소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재형 감독은 이방인 혹은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낯선 세계의 사물들은 그것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그저 낯설고, 이국적이고, 신비롭고, 경이로울 뿐이라는 것을 꼬집는다. 감독 자신을 포함한 관광객들의 시선과 위치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모차르트의 곡이 자아내는 장중한 분위기는 북유럽의 관광 명소와 그곳을 집단적으로 점거하듯이 배회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몸짓과 계속적으로 충돌한다. 복장만 놓고 봤을 때 한국의 어느 동네 뒷산을 올라야 더 어울릴 것 같은 한국 관광객들은 명화가 놓여 있는 미술관, 값비싼 상품들이 놓여 있는 상점, 도시민들이 산보하는 거리와 강변을 문자 그대로 점유한다. 이들은 흡사 점령군이나 게릴라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바다와 대지를 건넜고, 버스를 타고 도시의 거리를 가로질렀고, 유람선을 타고 강물의 흐름을 거슬렀다. 그들은 낯선 세계에 틈입하는 침입자들이다. 한편,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관객들로 하여금 꿈의 요소들을 해석하는 정신분석학자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둔다. 이를 위해 마련된 장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오재형 감독의 목소리를 빌어 전달되고 있는 무의식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흡사 초현실주의의 자동기법을 차용한 것 같은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꿈속에서 본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파편화된 상태로 흩뿌려 놓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의미의 완전한 폐기보다는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험에 더 가깝다. 그 두서없는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꿈속에서 ‘나’는 천을 잡아당겨주는 사람이었고, 어느 날 자신의 고용주의 와이프와 함께 초대장을 받아 어느 연회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연예인들이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 차려진 뷔페가 있었다. 그러던 중 연회장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합창을 하고 있었고, 줄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중국 왕에게 샌드위치 먹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이야기는 낯선 장소에 서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묘사된 것이며 그 서술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전체를 관통하는 차원에서 상승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승의 궤적과 그것에 대한 감각은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푸티지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 실제 이 영상은 스페인 극단 라 푸라 델 바우스(La fura dels baus)의 공연 <휴먼 넷(Human Net)>을 찍은 것이다. 그 공연의 핵심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긴 줄로 몸을 묶고 다시 그 줄을 거대한 기구 장치에 연결한 다음 공중에서 곡예를 펼치는 데 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이 퍼포먼스는 음화로 처리되거나 화질이 저하된 상태로 오재형 감독의 작품 속에 기입되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지시하는 높은 곳과 꼭대기는 공중에서 곡예를 펼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천상의 세계에 다다르려는 열망을 암시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어둡고 무거운 지하 세계로부터 밝고 가벼운 천상의 세계로 수직 상승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그 상승의 이미지가 홀로 외로이 비상하는 것이 아닌 다 함께 비상하는 형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집단적인 꿈을 구체화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상승하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여전히 지상에 머물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 또한 포함한다는 의심이 든다. 다시 영화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자 보자. 오재형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가장 먼저 발화한 것은 “꿈에서 나는 천을 대신 잡아당겨주는 사람이었다”였다. 그리고 그가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연회장의 높은 곳에서 줄을 당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줄잡이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일군의 무리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들은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조력자이다. 그들은 타인들의 비상을 돕고, 그리하여 천국의 기운이 현세에 드리울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늘 영웅이나 주인공 곁에 조력자를 두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여러 예술 혹은 문학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조력자(조수)들에게서 메시아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조수는 사라지는 것의 형상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맺는 관계의 형상이다. 이 관계는 집단적 삶뿐만 아니라 개인적 삶에 있어서 매 순간 망각된 모든 것과 관련된다.” 아감벤의 지적처럼, 조력자는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다른 세계가 도래하는 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모스크바 닭도리탕>을 포함해 오재형 감독이 자신의 전작들에서 줄기차게 그려왔던 조력자들은 어두컴컴한 망각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가 도래하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어쩌면 그 조력자들이야 말로 오재형 감독이 꿈속에서 찾고자 하는 영웅의 형상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