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캅
- 감독
- 스티브 카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케빈 제임스, 케어 오도넬, 제이마 메이스
쿠팡플레이가 야심차게 제작한 < 안나 >(이주영, 2022)는 공개되자마자 호평을 받았다. 빠른 호흡의 서사 전개, 단독 주연으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수지의 강렬한 연기, 계급성을 드러내는 미술과 의상은 구독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갑작스럽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상실한 사람들의 시점을 밀도 있게 그려낸 데뷔작 < 싱글라이더 >(2017)의 이주영 감독을 연출로 선택한 것이 적중한 듯 했다. 그러나 공개된 지 얼마 안 돼 감독을 비롯한 주요 창작자들이 <안나> 6부작(러닝타임 304분)의 크레디트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빼달라는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감독은 쿠팡플레이가 최종 편집권을 약탈해 갔다고 주장했다. 쿠팡플레이는 감독의 8부작 판본(러닝타임 429분)에 불만이 있었고 100분에 가까운 분량을 감독의 동의 없이 편집해 공개했다. 이주영 감독은 <씨네21>(배동미, 2022.8.11)에서 “(쿠팡 플레이는) 뭐든 돈으로 사면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인터뷰했다. 2021년 서비스를 시작한 쿠팡플레이는 국내 OTT 중에서도 후발주자이다. 모회사인 쿠팡과 쿠팡플레이의 관계는 아마존과 아마존 프라임이 갖는 사업전략과 유사하다. 영화 스튜디오나 비디오 유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른 플랫폼과 차이가 있다. 쿠팡은 아마존처럼 온갖 소비재를 판매하는 인터넷 유통 플랫폼이고, 콘텐츠 구독권과 쇼핑 회원멤버십을 결합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충분치 않고 주로 스포츠 중계와 예능 콘텐츠에 집중하던 쿠팡플레이는 <안나> 같은 서사와 영상미학 모두에 있어 완성도 있는 화제작을 제공해 기존 OTT의 영상문법에 익숙한 구독자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 같다. 그러나 쿠팡플레이는 자신들이 투자하고 배급하기 때문에 창작의 최종 권한을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는 돈과 사회적 지위가 서로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 동시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안나>의 메시지에 완전히 반하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영상창작물을 포함해 성격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상품’으로서 경계 없이 유통되고 판매되는 시대에 창작권을 질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영상연출의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결국 협상이 이뤄지고 <안나> 감독판이 함께 공개되었다. 그리고 구독자들은 <안나>의 두 가지 판본, 쿠팡플레이의 6부작과 감독의 8부작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안나>는 정밀아 소설가의 <친밀한 이방인>(2017)을 각색한 작품이기에 비교할 대상, 즉 콘텐츠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언론은 추가된 2부작이 만든 차이를 논평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은 두 버전이 “대동소이”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한경> 김지원, 2022.8.14). 서사의 줄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어차피 이유미를 연기한 배수지의 스타성에 기댄 시리즈이기 때문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쿠팡 플레이의 6부작이 빠른 전개로 몰입을 높여준 반면, 감독의 8부작은 장황한 인물 배경 및 심리 묘사로 늘어진다는 논평도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서로 다른 두 판본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논란들은 OTT 플랫폼에서의 관람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고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시리즈는 한 번에 몰아보기를 유도하거나 구독유지를 독려하기 위해 첫 화에서 자극적이고 속도감 있고 선명하게 캐릭터와 서사를 설명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하면, 복잡하고 모호한 심리 묘사나 정보성 서사와 상관없이 뉘앙스를 만들어 주는 장면들은 특히 시리즈 초반에서는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안나>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도 비슷한 곳에서 발생한다. 유미의 선택과 욕망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면들, 그리고 출신대학, 사회적 지위, 경제적 자산 등에 따라 나눠진 계층사회와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적 묘사들이 많이 삭제되었다. 초반 에피소드에 배치되어 있던 유미의 열망과 파국을 암시하는 ‘라 에스메랄다’의 발레 무대, 고등학생 시절 어린 유미의 감정을 이용하고 배신한 남교사의 비겁한 행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시작했던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 자신의 거짓말로 모든 것을 잃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고시원 총무의 성추행)과 차별(현주 가족의 무시)의 장면 등이 삭제되었다. 유미의 ‘허영’은 어떤가? 분명 유미는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어 남다르다. 피아노, 발레, 그림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유미는 부모의 경제력을 볼 때 지나친 욕심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어떤 아이의 꿈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되는 반면, 다른 아이의 꿈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허영이 되는가. 욕망과 허영 사이의 선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특히 허영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최대 악행으로 그려진 역사를 고려해볼 때 더욱 그 선은 분명치 않다. 감독판과 달리 쿠팡플레이 6부작에서는 이 모호한 경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남교사와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쿠팡플레이 6부작만 보면 유미는 교사와 연애한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에 가득 찬 아이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감독판에서는 유미의 감정이 어설프긴 하지만 진심이었을 수 있고 오히려 그 진심을 남교사가 이용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남교사는 유미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서사를 구성한다. 상호적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어설픈 사랑의 감정은 여자아이의 간교한 유혹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유미는 과잉처벌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첫 시작에서 유미는 타인의 거짓말로 뿌리 뽑히고 낙인찍힌다. 삭제된 장면 중 갤러리에서 일하던 유미가 인격적 모멸을 느끼고 갤러리 창밖에 내리는 눈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사적 정보와는 상관없다. 계급적 취향을 전시하는 하얗고 깔끔한 갤러리 실내,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도 휴가를 받지 못하는 유미의 현실, 갤러리 오너인 현주(정은채) 가족이 남긴 와인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동료 직원들에게 느끼는 혐오감, 큰 유리창 밖으로 아름답게 떨어지는 눈은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장면은 대사 한 줄 없이 현주의 여권과 증빙서류를 훔쳐 도망치려는 유미의 결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부당함과 기만에도 묵묵히 일해 온 유미는 자신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으르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현주 가족의 공격에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 텅 비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유미는 더 이상 자신을 알 수 없게 되며 자기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힘과 의지가 사라진다. 이 장면은 시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관람자들이 유미의 복잡한 심정과 존재의 상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결정적 장면이다. 또한 영상연출을 하는 감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증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쿠팡플레이 판본에서 정작 감독과 원작이 의도한 질문은 사라진다. 사실 유미뿐 아니라 대다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현주, 정치인 남편, 선배 교수와 학장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인생이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체계 내에서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속물적이고 악랄한 속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도 피해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는다. 반면 감독판에서 묘사된 유미는 대학 불합격이라는 한번의 ‘실패’를 겪은 후 계속 눈치를 봐야 하는 삶을 산다. 그에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 오히려 안나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유미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성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미가 안나로 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사기를 칠 때 정말로 노력하고 좋은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유미가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유학을 잘 보내고 대학원에서 좋은 강의를 했다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위, 명문대, 명품 의상이다. 어쩌면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사회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학력과 입고 있는 옷, 머릿결 같은 외양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작인 <친밀한 이방인>의 정한아 작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드라마는 원작보다 유미의 회복능력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유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속죄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결말에서 유미는 자신의 거짓말로 죽음에 이른 현주의 아이를 거둔다. 추운 캐나다 어딘가에서 유미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그래도 살아남으며 그제야 자신을 되찾는다. 6부작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창작권을 되찾아 온 이주영 감독과 제잔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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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 기생충 >(2019)은 작가의 기질과 세계관, 스타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대다수의 표현 요소들, 카메라와 조명, 세트, 미술, 음악 등이 탁월하게 조정된 영화이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에서부터 꾸준하게 발전되어 온 봉준호의 내러티브 기술 테크닉이다. 봉준호의 서사는 언제나 실종, 살인의 모티프를 타고 움직이는데,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서사의 국면들을 지속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신만의 시각 양식을 개발하였다. 이 양식을 ‘가속기술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속기술법이라 함은, 내러티브 정보의 효율적 제공과 장면 전환의 가속화를 위해 가장 적은 수의 쇼트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리듬으로 한 장면이 이동해야 할 목표 지점에 매끄럽게 도달하도록 하는 시각화 전략이다. <기생충>에서 봉준호의 가속기술법은 음악가 정재일이 작곡한 테마 음악 ‘믿음의 벨트’가 깔리는 기나긴 장면들의 연쇄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박 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기정(박소담)에게 집안의 운전기사를 추천받는다.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연결, 이게 베스트인 것 같아요. 일종의 뭐랄까... 믿음의 벨트?”라는 연교의 말을 신호탄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를 이동하는 사물들처럼 유기적으로 배열된 쇼트들의 연속 진행으로 구성된 시퀀스가 이어진다. 물경 8분 동안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봉준호 식(式) 가속기술법의 강력한 효과를 입증한다. 음악과 나레이션이 병합된 사운드는 다양한 행위들의 계열이 이어지는 시퀀스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바로크풍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작곡된 스코어 ‘믿음의 벨트’는 극중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박 사장(이선균)의 집사 문광(이정은)을 내쫓기 위해 치밀한 협동 작전을 실행하는 시퀀스를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의 백미로 만든다. 이 큰 사기를 계획하는 가족들에 관한 플래시백은 시퀀스 전체에 걸쳐 산재되어 있으며 한 번에 모두 완료되지 않는다. 마치 강도 계획의 모의를 촬영하는 영화 스태프들처럼 기택의 가족은 그들이 짠 플롯을 시나리오화하고 재연한다. 이 시퀀스에서 내러티브, 시각 이미지들과 대위법적으로 얽혀가는 음악의 효과는 기택 일가의 작전이 진행되는 경로와 정교하게 조응하면서 하나의 사건 단위를 도입하고 완결한다. 하나의 질감을 드러내는 스코어가 바탕을 제공하고, 이야기와 연기, 상황은 분리된 채로 연결되어 있는 열차 칸들처럼 유기적인 사슬로 묶여 있다. 이전 쇼트들이 이후에 올 것에 반향을 일으키고 하나의 요소는 다른 요소에 작용하여 흡사 오케스트라처럼 진행된다. ‘믿음의 벨트’ 시퀀스의 목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가속기술법의 의의) 박사장의 집에 침투하는 기택의 가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건의 효율적인 기술은 이야기의 경제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이미지의 속도와 리듬은 매우 중요하다. 카메라 움직임의 템포, 방향은 치밀하게 계산되었고, 프레임의 속도를 조절하는 슬로우모션, 화면 밖 나레이션과 극중 대사의 티키타카, 시퀀스의 주요 국면들에 화면 요소들의 적절한 배치를 통한 완결 구조 등이 독립적인 시퀀스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다채로운 스타일 장치들의 몽타주를 통해 봉준호는 기택의 가족이 문광을 내쫓기 위해 그녀에게 결핵 환자의 누명을 씌우는 기나긴 계획과 그 실행과정을 기술한다. 시퀀스의 구성은 기택이 박 사장의 운전기사가 되기 위해 고급 외제차 작동법을 학습하고, 테스트 주행으로 안정적인 운전 솜씨를 어필하는 신으로 시작하여 기정과 기우의 나레이션이 교차하며 이 집에서 문광의 역할과 됨됨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신, 문광의 복숭아 알레르기 내력에 대한 해설, 문광에게 결핵환자 혐의를 씌우기 위한 계획과 그 실행을 교차하여 최종적으로 작전의 종착점에 도달하는 신으로 전개되어 간다. 기우(최우식)의 과외 수업을 문광이 감시하는 장면에서 기택이 쓰레기통에서 피가 묻은 휴지를 들어 올리는 지점까지 장대하게 진행되는 이 시퀀스에서 모든 쇼트는 유기성을 가지고 연결되며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다. 강도 계획 모의처럼 행위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들의 배열은 연속성의 원칙 하에서 진행되고, 편집은 무의미한 커팅이 아니라 쇼트들 간의 일정한 흐름을 가진 논리적 전환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믿음의 벨트 시퀀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첫 번째 요소는 전체를 관통하는 카메라의 무빙이다. 서두에서 연교가 늘어놓는 설명대로 ‘연결연결’되는 신들 간의 이동은 카메라 무빙의 연쇄로 보증된다. 기택이 운전기사 면접을 위해 박 사장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신에서 우에서 좌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수평 움직임으로 시작한 시각화 방식은 박 사장의 집에서 기정과 문광의 이동을 따라 좌에서 우,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카메라 무빙으로 연결되고,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계획 하에 기정과 기우의 액션을 보여주는 전, 후의 카메라 움직임으로 이어진 뒤, 백화점에서 쇼핑 카트를 끄는 기택과 연교의 움직임에 동기화된 카메라의 수평 이동을 거쳐 문광이 버린 휴지를 확인하려는 기택의 액션을 따라가는 수평 이동으로 종료된다. 여기서 카메라 무빙은 시공간의 차이를 두고 발생하는 액션들을 하나의 테마와 목표로 꿰어내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공정으로 만든다. 이 시퀀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두 번째 요소는 교차편집을 통한 공간을 초월한 연속성의 창조이다. 분리된 두 시공간의 교차편집을 제공하는 것은 반 지하방에서 이루어지는 기택과 기우의 역할극과 마트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기택과 연교가 나누는 대화이다. 교차편집 국면은 두 시공간에서 티키타카를 이루는 대화로 연결된다. 기택의 “제가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라는 눙치는 대사와 연교의 “요즘도 결핵환자가 있어요?”, 다시 기택의 “집에 다솜이 같은 어린애도 있는데...”와 같은 대화가 반 지하방과 자동차 안에서 교차를 이루며 반복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틀에서 시퀀스의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은 컬러이다. 컬러의 통일성은 초입부, 기우와 박 사장의 맏딸 다혜(정지소)의 과외 수업에서 간식으로 등장하는 피자 위에 뿌려지는 핫 소스와 이 시퀀스의 대단원에서 기택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휴지를 들어 올릴 때 그 위에 발라진 피로 위장된 핫 소스의 시각적 조응으로 이루어진다. 붉은색 컬러의 조응으로 세팅된 가속의 리듬은 거대한 계획의 단계별 진행을 연속적으로 이어줌으로써 강화된다. 핫 소스에서 비롯된 컬러 모티프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거대한 학살극이 벌어질 때 흩뿌려지는 피로 이어진다. <기생충>의 ‘믿음의 벨트’ 시퀀스는 가난한 가족에서 부유한 가족으로의 이동, 분리되어 있던 그들의 병합을 단단한 시청각 이미지의 벨트로 묶는다. 이처럼 봉준호 식 가속기술의 전략은 집중과 통일성을 가지고 내러티브 기술(記述)의 효과와 스타일의 합일을 창조하는 탁월한 전략을 보여준다. 상술한 <기생충> 외에도,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시골 형사 박두만(송강호)의 애인 설영(전미선)이 지체장애인 백광호(박노식)의 별명 ‘덮쳐라 백광호’에 대해 설명하고, 두만이 그를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여 지하 취조실로 데려오는 일련의 쇼트 연결, < 마더 >(2006)에서 살인사건 희생자 문아정의 됨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네 아낙들, 소년들의 증언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인 ‘미인박명 문아정’ 시퀀스 등이 가속기술법의 또 다른 사례에 해당한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서보형 감독의 < 탈날 탈 >은 한 남자가 겪는 지각의 오류, 시스템의 오류, 그리고 존재의 오류를 통해서 기이함과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킨다.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어느 아파트에 혼자 사는 한 남자가 야심한 밤중에 겪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다룬다. 남자는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지만, 그가 현관문 바깥을 내다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텔레비전이 켜지고, 텔레비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뜨면서 현관문 도어락의 조작음이 들린다. 기이한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가 도어락의 조작음을 듣고 현관문을 열면 잘못 배송된 소포가 놓여 있고, 그 소포를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면 소포를 받아야 할 이웃집 주민이 나타나고, 당황한 남자가 황급히 자기 집을 찾은 다음 현관문을 두드리면 묘령의 여자가 나타난다. 이 일련의 상황이 남자의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건 남자의 집에 귀신이 들려 벌어지는 일이건 간에 이 작품 속 세계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각의 오류는 이 작품을 지탱하는 첫 번째 법칙이다. 우선 이 작품의 타이틀 시퀀스에 주목하자. 검정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서서히 등장하는 동안 외화면을 통해 단절적인 전자음이 들린다. 여기서 관객은 영화 제목 이외에는 아무런 시각적인 정보도 얻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정체를 감지할 수 있는 청각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검정 화면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지만, 외화면의 사운드는 무언가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시물이 지시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영화 속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도어락의 조작음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또한 같은 논리가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만약 관객인 우리가 이 작품에서 기이한 감각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시물의 불일치 또는 부재의 현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관객은 이 영화 속 주인공 남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이상한 시선 한 가지를 획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남자의 시선과 무관한 듯이 자유롭게 아파트 내부를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통상적으로 극영화에서 샷-리버스 샷을 통해 관객이 특정 인물의 시선에 동기화될 수 있게 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일부 장면은 주인공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상태로 아파트 내부의 변화된 상황을 담는다. 만약 이 예외적인 장면이 주인공 남자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이 작품 속에는 관객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영화 속 현실로 틈입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이지 않으나 그 존재만큼은 분명하게 감지되는 어떤 유령적인 대상들은 시스템의 오류를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탈날 탈>에서 일상 속 대상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위치, 리모컨, 도어락의 기능을 통해서 암시된다. 전등과 스위치, 텔레비전과 리모컨, 현관문과 도어락은 각각 하나의 사물과 그것의 작동을 제어하는 장치 간의 연결을 통해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사물을 제어하는 장치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그 제어 장치들이 다른 사물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전등의 스위치가 텔레비전과 연결되고, 텔레비전 리모컨이 핸드폰과 연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배치가 어그러지면서 나타나는 시스템의 오류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품 속에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제어 장치들이 본래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리모컨은 저기 다른 곳에서 생산된 영상을 여기 이곳으로 전송하기 위한 창을 여는 역할을 하며, 도어락은 외부인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만약 이러한 제어 장치들이 오류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대신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맞닥뜨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어떤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와 다른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가 서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세계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켰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홈쇼핑 광고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느 휴양지의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그 홈쇼핑 광고는 주인공 남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시선으로 새어 들어오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가 그 상품을 결제한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 장면은 주목 경제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 시청각적인 정보에 노출되어 상품을 구매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들이 자신이 원치 않는 시스템에 포섭된 가운데 자율적인 감각과 의지를 모두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각의 오류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시스템의 오류에 대한 묘사를 거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존재의 오류를 통해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작품의 으스스한 감각은 그것을 느끼는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 후반부에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전자의 질문이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남자에게 잘못 배송된 택배 상자, 남자가 사는 집과 택배 상자의 주인이 사는 집의 위치가 바뀌는 상황, 남자의 집에서 나타나는 묘령의 여인 모두 남자가 속해 있는 현실의 시공간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서사적 장치들을 통해서 이 영화는 주인공 남자가 흡사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가 물샐틈없이 견고하고 안전하다고 믿었겠지만, 이미 그의 세계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낯선 존재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관객인 우리는 이 모든 기이하고 으스스한 상황이 주인공 남자의 악몽이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계속해서 유예되는 그 독특한 시공간적 구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령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서 인간은 잠을 잘 권리 그리고 꿈을 꿀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기이함과 으스스함은 마크 피셔의 책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구픽, 2019)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