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 감독
- 로버트 알트만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앤디 맥도웰, 브루스 데이비슨, 릴리 톰린, 톰 웨이츠, 팀 로빈스, 프란시스 맥도먼드, 매튜 모딘, 라일 로벳, 제니퍼 제이슨 리, 매들린 스토우, 프레드 워드, 앤 아처, 줄리안 무어, 크리스 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놀라운 데뷔작! 오랜 기간 영화기자로 일하면서 꿈꾸어왔던 나의 바람은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를 혼자서 찍는 감독도 없거니와 제작 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영화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단위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의 속성상 사전홍보를 필수로 여겼던 시절에는 감독의 역량은 물론 취향, 세계관까지 대충은 미리 알려졌으며 거기에 기대감이나 선입견을 보태면서 기다리는 식이었다. 돌이켜 보면 전혀 몰랐던 데뷔작과 감독의 존재는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의 배용균 과 < 악어 >의 김기덕 뿐이었던 것 같다. 전자는 한국영화라는 경계 밖에서 후자는 그 수면 아래에서 침입의 형태로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이유로 사전정보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데뷔작들은 서로가 조심스러워서 손해를 본 측면이 있다. 그저 기대 이상이거나 기대 이하라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분류되었을 뿐 진심을 다해 옹호하거나 냉정하게 비판했던 기억이 별로 없으므로. 송능한 의 데뷔작 < 넘버3 >(1997) 역시 공개 당시에는 적당한 미소 정도만으로 갈무리한 영화이다. 감독과의 오랜 친분이 오히려 객관적 평가를 유보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을 잘 안다고 여겼던 주관적 판단이 감독의 새로운 생각마저 익숙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하고 싶은 송능한 감독은 대차대조표 같은 두 편의 영화 <넘버3>와 < 세기말 >을 만들고 캐나다로 떠났다. 종종 한국에 돌아와 세 번째 영화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최근엔 감감무소식이다. <넘버3>가 고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그 단절의 시간이 이 영화를 새삼 환기시킨다. 또한 이후의 아류작들이 너무 많고 엇비슷한 캐릭터들이 양산되다 보니 어느덧 한 분야의 원조 자리쯤은 누려도 될 듯하다. ‘웃기는 쌈마이들의 생활백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 넘버3 >는 주제 없는 세부들의 확장과 변주, 캐릭터와 디테일의 중첩들로 인해 시놉을 간략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저 보는 사람에 따라 가장 웃기는 순서대로 쓰는 게 영화와 더 어울릴 것이다. 호스테스가 시를 쓴다는 핑계로 시인과 바람이 나는데, 그 시인의 이름 랭보는 람보로 오인된다. 조직도 없는 꼴통 킬러는 불사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지옥훈련을 시키는데, 그가 뱉는 모든 말들이 가히 어록 수준이다. 영화의 키를 쥔 중요한 인물들이 누락됐다고? 현실적으로 넘버1이 아닌 넘버2의 자리를 넘보는 넘버3 깡패 서태주( 한석규 )는 어디를 보아도 반듯하고 근면성실한데, 그의 이웃사촌인 현직검사 마동팔( 최민식 )은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 그들 곁에 배치된 한술 더 뜨는 삼류들이 결국은 룸싸롱에서 한바탕 난장을 뜨는 이야기. 삼류 양아치가 총출동하는 헐렁한 구조 같지만 버젓한 인물은 애당초 끼어들 틈이 없는 엄격한 폐쇄회로. 그럼으로써 영화가 노리는 것은 스크린 밖의 일류지상주의 세계를 지배하는 삼류의 인과율이다. 지금 보아도 웃기지만 < 넘버3 >가 진짜 웃겼던 것은 1997년의 한국영화라는 토대 위에서이다. 곧 도래할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산업화, 그로 인한 완강한 스타 시스템의 직전단계였다. 아직은 자본과 톱스타들이 덜 단단해서 신인감독의 자유와 시장의 논리 사이에서 종종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 덕에 단역들까지 화려한 면면으로 채울 수 있었던 이 영화는 그 당시 한 가락 하던 ‘얼굴들’을 비교할 수 있는 각축장이다. 캐릭터가 아니라 얼굴들이라 표현하는 것은 이 영화의 웃음이 유독 얼굴 속의 입과 말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는 만큼 알게 되리라.’ 또는 ‘당신이 아는 만큼 웃게 되리라.’ < 넘버 3 >가 세운 이정표 중 하나는 비로소 한국영화의 내러티브가 멀티한 윈도우 전략을 채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각종 대중문화 속에서 끌어온 인용의 유머를 퍼즐처럼 구사하는 송능한 감독은 더 이상 단일한 주제/구성으로 영화를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할리우드의 < 펄프 픽션 >이나 <숏 컷>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그것을 시대정신으로 간파했던 감독의 생각은 당시의 인터뷰, 그가 참조했던 자료들, 무엇보다 하나의 꼭지점을 향하지 않고 제각기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 군상들 속에 잘 녹아 있다. < 넘버3 > 이후에 대중문화에 대한 공격적인 풍자와 패로디를 구사하는 코미디 전략은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 단호하게 ‘언어의 전술’을 전면에 내세운 경우는 없다. <넘버3>의 파워는 전적으로 대사와 자막을 포함한 ‘말’에서 비롯된다. 농담과 욕설, 인용과 재인용, 그리고 부정과 반박의 논리로 채워진 말들은 영화의 피카레스크적 구성 속에서 사실상의 주인공 역을 떠맡는다. 단역에 불과한 조필 역의 송강호 가 고정된 롱 테이크 속에서 유감없는 개그를 펼치는 불사파 연설장면이 그토록 회자되는 것은 그것의 결정적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