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대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남석훈, 이상사, 김운하, 독고성, 구봉서, 황해남, 트위스트 김, 장동휘, 정민, 이예민, 성소민, 김승, 윤일주, 추봉, 임해림, 김왕국, 박승진, 조석근, 최준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한 해 동안 보았던 영화들을 정리한 리스트를 뒤적여 본다. 이 리스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있다. 때론 내 머리를 움직였고, 때론 내 마음을 움직였고, 때론 다신 거들떠보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했고, 때론 중간에 영화 보기를 포기했던, 한 해 동안 나를 거쳐 간 모든 영화들이 그곳에 있다. 그중에서 올해 나를 흔들어 놓은, 그래서 몸에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24편의 영화를 추려냈다. 그리고 이 리스트는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이므로 지극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총 13편의 영화를 추려냈다. 먼저 한국영화 4편.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는 흥미롭기 짝이 없는 동어의 변주가 여전히 전진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 위로공단 >은 영화의 구조와 내러티브를 쌓아가는 방식에 있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하나의 사례였으며, < 한여름의 판타지아 >는 매년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학(원)의 졸업 작품들이 한국의 중요한 독립 극영화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해진 현실 속에서, 지도교수의 멘토링과 자본의 시스템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리고 올해 본 단편영화 중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 클린 미 >는 이미지의 커팅과 편집, 리듬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적어도 내러티브 중심의 학교 단편영화들이 대부분인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재능의 발견이었다. 해외 다큐멘터리 3편. < 액트 오브 킬링 >이 폭력의 전시를 통한 극단적 자극,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해 냈는가와 다큐멘터리의 윤리를 고민하게 했다면, < 침묵의 시선 >이 포착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미세한 표정은 머리의 방해 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 시티즌포 >는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생 일대의 대상을 앞에 두고 감독이 취한 태도, 소재가 가진 정보와 개인의 정조를 함께 담아내는 방식이 흥미로웠으며, 캐브랑리 박물관이 제작한 민족지 영화 제작 프로젝트 <세계의 노정> 시리즈 중 한 편인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 북녘의 빛 >은 영화 미학과 민족지 영화의 경계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 수작이었다. 그리고 3편의 해외 극영화.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나가고 있는 아시아의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라브 디아즈의 < 노르테, 역사가 끝나는 곳 >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걸작이었다. 그리고 신인의 굴레를 벗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유럽의 젊은 감독 중 요하킴 트리에, 조아킴 라포스와 함께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루벤 외스트룬트의 < 포스 마쥬어: 화이트 배케이션 >은 감독에 대한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으며,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 종이달 >을 보고 나서는 최근 몇 년간 비어있던 주목할 만한 일본 감독 리스트에 마츠나가 다이시와 함께 요시다 다이하치라는 이름을 적어두었다. 이렇게 10편을 다 채운 나의 사사로운 리스트의 마지막에 특별하게 추가한 영화는 바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기타큐슈 삼부작 - < 헬프리스 >(1996), < 유레카 >(2000), < 새드 배케이션 >(2007) - 이다. 전북독립영화협회가 기획한 ‘아시아 영화 특별전’을 통해 이 세 편의 영화를 다시 만난 것은 올해 많은 영화들을 만나며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이 삼부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기타큐슈 삼부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 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쓰비시가 미국의 상징이었던 록펠러 센터를 사들이고,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던 일본 버블 경제의 절정기였던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 신성불가침의 살아있는 신이었고 패전과 동시에 인간 선언을 하고 전쟁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후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있던 천황의 죽음은 일본 사회 전체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고,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일본 국민들은 정신적 공동空洞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일본 젊은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전쟁을 일으켰던 아버지 세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 경제는 거짓말처럼 거품이 꺼졌고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 시대에 돌입했다. 기업들은 경영 규모를 축소했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허우적대던 일본은 1995년, 일본 사회 전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2개의 사건을 연달아 경험한다. 1995년 1월 17일에는 무려 6,300여 명의 사망자와 2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발생시킨 ‘고베대지진’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약 2달 후인 3월 20일에는 ‘옴진리교 가스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동경의 관청 밀집지역인 가스미가세키 역의 5개 전동차 안에 옴진리교 신도들이 살포한 사린 가스는 5,500여 명의 시민을 입원시켰고, 1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0년대 일본 젊은이들은 천황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공동화空洞化 현상과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 속에서 전쟁의 상흔과 빚만 남긴 아버지 세대에 분노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끔찍한 테러사건을 경험한 후에는 평온하고 안전해야 할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무력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헬프리스>(1996) 1996년에 공개된 아오야마 신지의 데뷔작이자 기타큐슈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 헬프리스 >는 이런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야스오(미츠이시 겐)는 자신을 감옥에 보내고 죽어버린 보스를 만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켄지(아사노 타다노부)는 그럭저럭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보며 살다가 아버지의 자살 후 갑작스레 살인을 저지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야스오의 연쇄 살인과 아버지의 자살을 전해 들은 켄지의 폭주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채 죽어버린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헬프리스>는 전후 세대가 일본 사회에 남긴 상흔 속에서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분노로 파멸해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이며 천황의 죽음으로 인해 분명해진 아버지 세대에 대한 당시 일본 젊은 세대의 무의식을 탐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유레카>(2000) 그로부터 4년 후인 2000년에 완성된 < 유레카 >는 옴진리교 가스 테러사건이 일본 사회에 남긴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룬다. 가스 테러사건은 평화로운 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버스 총기 인질사건으로 대체되었다. 이 영화는 버스 총기 인질사건의 세 명의 생존자(버스 운전기사 사와이와 나오키, 코즈에 남매)들이 서로 의지하며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내가 살아난 것이 잘못인가?”라고 내뱉는 사와이의 대사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3시간 27분에 달하는 길고 고통스러운 이 여정은 부조리한 일본 사회의 증거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삶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긴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말을 잃었던 코즈에가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한 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사와이가 “집에 가자”고 외치면, 우리는 “트라우마 이후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는 단순한 생존이나 고통의 해소가 아니라 삶에 최대한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것” 1)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드 배케이션>(2007) < 헬프리스 > 이후 10년 만에 완성된 기타큐수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 새드 배케이션 >은 <헬프리스>와 < 유레카 >의 후일담이며 전후 일본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무의식을 정리하고 그 모든 트라우마를 보듬어 안으려고 시도한 영화다. <헬프리스>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켄지와 <유케카>의 버스 테러사건에서 살아남은 여동생 코즈에가, 이미 <유레카>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혈연관계가 없는 수평적 대안 공동체’에 해당하는 마미야 운송회사에 도착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친부-친자 관계를 극복하는 양부-양자 관계와 친모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던 양자가 양부의 친자를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혈연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버지 세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한편, 대안적 공동체인 마미야 운송회사와 수평적 유사가족을 돌보는 켄지의 친모 치요코를 통해 일본 사회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희망 속에서 이 삼부작을 마무리한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켄지나 코즈에 또는 치요코가 아니라 세 편의 영화에 하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단 한 명의 인물인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이다. < 헬프리스 >에서는 자신을 괴롭힌 동창들을 살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켄지의 친구이자 야스오와 켄지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였고, < 유레카 >에서는 버스 총기 인질사건으로 버려진 남매를 찾아온 유일한 혈육이자 사와이와 남매의 버스 여행에 동참했던 유일한 이방인이었으며, < 새드 배케이션 >에서는 코즈에 수색대에 합류하여 결국 코즈에와 재회하면서 모든 상황을 객관적인 자리에서 바라본 유일한 관찰자였던 아키히코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서 세 영화의 모든 사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는 정확히 관객의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아키히코의 시선과 10년에 걸친 그의 성장과 변화는 <헬프리스>로 시작하여 <유레카>를 거쳐 <새드 배케이션>에 도착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오야마 감독의 변화와 맞닿아 있으며, <새드 배케이션>이 제시한 희망의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각각의 완결성을 가진 세 편의 장편 영화인 동시에 세 편이 하나의 주제로 엮여있는 거대한 옴니버스 영화이기도 한 기타큐슈 삼부작은 아오야마 감독이 10년에 걸쳐 일본의 근현대사의 이면에 깔린 일본 사회의 무의식과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탐구하여 이를 영화에 담아내려고 했던 야심 찬 도전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시도가 과연 성공적이었는가는 < 새드 배케이션 >이 내포하고 있는 다층적인 메시지와 <새드 배케이션>이 제시한 해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우리 안의 낯선 타자이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워버렸지만 결국엔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짓는 타자의 흔적들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진정으로 타자와 분리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2) 라는 말을 영화로 실천한 아오야마 신지의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반드시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이 세 편의 영화가 한국의 관객과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1) 「트라우마 이후의 삶」 (맹정현 저, 책담) 中 2) 「트라우마 이후의 삶」 (맹정현 저, 책담) 출판사 리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