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 초년생
- 감독
- 최인현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하춘화, 남진, 박기택, 전숙, 이대엽, 김순복, 박암, 장훈, 지방열, 최일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여 멈춰라 비디오를 끄고 싶다 라는. 그렇다면 어째서 이 영화가 떡하니 이 칼럼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단 하나. 이재웅 감독의 1974년 작품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이라면 이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라는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렇다. 먼저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품 < 청춘쌍곡선 >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작곡가 박시춘 의 멋진 기타연주에 김시스터즈가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동네 이웃으로 출연한 김희갑 은 당시의 유행가 몇 곡을 부른다. 여주인공 정옥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노래는 대사를 대신하거나 상황을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본격적인 뮤지컬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한형모 감독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 < 엘리지의 여왕 >에서 당시 인기가수들의 공연장면을 영화의 중간 중간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뮤지컬이 아닌 뮤직영화를 만든다. 이러한 뮤직영화는 노래가 내러티브에 유기적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종종 흐름을 끊으면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60년대 오디오나 TV의 보급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대중가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역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시대가 요청했던 장르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흐름은 70년대를 건너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 차츰 편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렇듯 가수가 직접 나와 노래를 부르는 방식의 뮤직영화는 70년대에는 인기가수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극중 인물을 연기하면서 좀 더 사실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한다. 즉, 남진 , 나훈아 , 하춘화 , 패티김 등 일반 성인대중에게 친숙한 가수들이 < 가수왕 >, < 속 이별 >, < 숙녀 초년생 >등의 영화에서 직업이 가수인 극중 인물로 등장하여 공연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핍진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다른 청년문화가 움트면서 새롭게 등장한 포크송이나 록을 불렀던 가수들인 김세환 , 장미화 , 신중현 등은 < 청춘대학 >. < 맹물로 가는 자동차 >, < 미인 >등에 등장하여 대학생이나 돈 없는 청춘들로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며, 좌충우돌 하는 영화가 다른 한 경향을 이룬다. 이후 80년대에도 조용필 , 전영록 , 송골매, 백영규 등 젊은이의 우상으로 불렸던 가수들은 영화에서 직업가수로 등장해 자신의 히트곡을 불렀다. 어쨌든 이 영화들은 모두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노래들이 극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은 뮤지컬이라기보다는 뮤직영화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장르가 존재했다. 심지어 가장 미국적인 장르라는 서부극마저 만주웨스턴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화에 실패했던 장르가 뮤지컬일 것이다. 노래와 춤이 대사를 대신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측면이 뮤지컬 장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유독 이 장르만이 한국화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혹시 한국인이 유난히 뮤지컬에만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논리는 < 사운드 오브 뮤직 >이나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흥행성공이 말해주듯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는 제작상의 어떤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뮤지컬에 도전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완성도를 떠나 그 자체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 녹음기사 출신인 이재웅 감독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는 이미 임권택 감독의 68년 작품 < 몽녀 >에서 4본 입체녹음을 시도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 춘향전 >에서는 6본 입체녹음을 시도하며 한국영화 기술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자체의 퀄리티 보다는 이재웅 녹음기사의 사운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스토리를 녹여내는 작업에는 너무 무관심하다. 당시 인기폭발이었던 올리비아 핫세의 < 로미오와 쥬리엣 >풍의 비극적 스토리를 살짝 가져오고,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안무 스타일을 대충 흉내 내서 중구난방의 댄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도 중반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스토리는 < 썸머타임 킬러 >를 연상시키는 오토바이 액션을 잠시 보여주는 듯 싶더니, 갑자기 이 모든 소동이 알고 봤더니 꿈이었습니다, 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렇다. 녹음기사의 사운드에 대한 욕망은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탄생시켰지만 지나치게 낮은 완성도는 한국에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뿌리내리게 하지 못한 아쉬움을 동반하고 말았다. 이재웅 감독은 70년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남진 과 리리 시스터즈의 김성아 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한국최초의 뮤지컬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과 그동안 축적해왔던 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도전정신은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면서도 젊은 감성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일단 주인공인 남진과 김성아의 창법이 당시 젊은이들의 노래였던 포크 감성이 없어 마치 트로트를 듣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게다가 사랑의 감정을 분출하는 장면에서의 군무는 또 어떤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와 춤추는 엑스트라들의 동작이 지나치게 어설퍼 몰입을 방해한다. 결국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영화의 기본이라 할 스토리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면서 실패작이 되었고 잊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제작진의 의욕만은 충분히 느껴지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그 의욕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 없이 녹음기사의 욕심으로 끝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에서 장르는 멜로가 신파가 되고, 웨스턴이 만주웨스턴이 되듯 나름대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뮤지컬만은 트로트 뮤지컬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후에도 뮤지컬 장르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뮤지컬은 한국영화계의 변방에 있다. 하지만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가 제대로 된 뮤지컬이었다면 이후의 양상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리리 남진 박상규 감독 이재웅 각본 김경일 촬영 팽정문 1974년 86분 칼라 판매원 삼화비디오프로덕숀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267
우리영화의 사극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던 <카메라의 황소>. 고 최인현 감독은 90년 11월11일 타계했다. 영화계의 커다란 대들보 하나를 놓친 셈이 됐다. 인생 무상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불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 단단한 체격에 늘 머플러를 둘러 메고 싱긋 웃음을 먹으면서 충무로를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초부터 75년 이 회사 메이커 허가가 취소 될 때까지 영화 인생 모두를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일관한 그는 궁중의 복잡 미묘한 예의 범절은 물론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를 영화계에서는 신상옥을 주축으로 좌최인현 우 이형표 라고 불렀을 정도. 최감독은 이때 이같은 모든 사극에 관한 것을 노트에 빼곡히 정리, 지니고 다녔는데 아마 지금은 후배이자 콤비였던 이은수 감독이 갖고 있을 것이다 임금 면전에서 물러 날 때는 뒤 돌아서지 않고 마주 한 채 뒷걸음으로 나가야하며 수행할때는 절대로 그림자를 피해 3보 뒤에서 따르되 지위에 따라 좌우로 갈라 서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찾아낸 고증이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으나 요즘 가끔씩 제작되는 사극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엉터리가 자주 튀어 나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1962년 < 눈물어린 발자국 >으로 데뷔한 최감독이 활짝 꽃피운 것은 64년 본격적인 홍콩 합작으로 만든 < 달비 >. 중국 발음으로 <달기>라고 개봉한 이영화는 대히트, 대만 홍콩에서도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당시 약1천만원 (현재 약1백억 추산)으로 신필름이 제작하고 홍콩이 배급을 맡았으며 일본 촬영기사를 데려다 만들었다. 주연은 신영균 과 당시 홍콩의 세계적 스타였던 린 다이 ,그리고 최은희 김승호 가 공연했다. 달기라하면 중국에서 가장 미녀였던 왕비 4명 중 하나로 진나라 때 인물. 반정에서 구사 일생한 왕자가 성장한 후 왕좌 복귀에 성공하지만 사랑하던 공주는 끝내 불에 산화한다는 얘기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곽 세트 등을 지어 불 태움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최감독은 < 태조 이성계 >(1965) < 태조 왕건 >(1970) < 이조상노비사 >(1974) < 홍길동 >(1976) < 집념 >(1976) < 관세음보살 >(1978) < 세종대왕 >(1978) < 소명 >(1984)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평생 만들어 낸 영화64편 중 사극만 30여 편이나 된다. 이같은 사실은 학계나 평단에서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전 KBS TV 드라마 < 용의 눈물 >로 공전의 히트를 한 모태이며 < 태조 왕건 >역시 같은 상황이다. 두 작품 모두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 했다는 것은 당시가 그 들의 전성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TV에서 이성계를 연기했던 유동근 이나 왕건 역의 최수종 이 모두 신영균 의 남성미로 그려졌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아끼고 싶어하는 작품으로 < 李箱의 날개 >(1968)와 < 집념 >을 꼽곤 했다. 마지막 작품은 타계하기 6개월전 끝내고 9월달에 개봉한 < 친구야 친구야 >.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영화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집념>을 꼽는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원작자이자 각본도 썼던 이은성 씨가 '다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제작하게 됐었다. 당시 최 감독은 허 준의 초상화까지 입수하여 사실적 묘사에 애를 썼으며 주인공을 맡았던 이순재 에게 이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게 추억담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76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감독은 당시 '사람이 뜻을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소신을 성취하는 인물상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현장 이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내색치 않았으며 평소 넉넉한 품새로 일관, 생활이 어려워 고양군으로 이사를 한 말년에도 낡은 차이지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돌변, 한치의 착오도 용납치 않았다. 특히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몹신(군중 장면)에 일가견을 가져 동료 감독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현장에 달려 가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80년이던가. 동남아 취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일 게다. 느닷없이 최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서는 TV만화 <캔디 캔디>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인기인데 만화가를 만나서 영화화 권을 얻어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지 무기가 있다면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 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 거절하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작가 찾기에 나섰다. 물어물어 작가와 통화를 하니 여자가 아닌가.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이지만 판권은 출판사와 만화 영화사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결국 레스토랑 저녁 식사 대접에 근사한 외국인 전용 스탠드바에까지 가며 설득 끝에 다음날 판권을 얻어냈지만 자신을 꼭 촬영 현장에 초청해달라는 부탁이 첨부됐다. 귀국해서 보니 웬걸. 최감독과 스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는 우리 영화사상 드물게 흥행이 안되던 시기. 이를 어린이영화로 뚫어 보자는 기획이었으나 첫날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뿐 파리를 날렸다. 겨우 본전 조금 넘겨 막을 내렸는데 이때 주연을 한 배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된 최선아이다. 물론 일본 작가에겐 전화로나마 사정해서 빌 수밖에. 그런데 그 작가가 오히려 위로를 하는게 아닌가. 일본에서 이미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는 친구처럼 되었는데 90년 이후 신문사 간부가 된 이후로는 일본에 들러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도 슬하에 자식을 둔 할머니가 됐으리라.. 최감독은 1928년 10월 24일 생이니 생존했으면 75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집안이 부호였다. 진주 농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영화계에 입문한 ,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모두 고인이 된 소설가 이병주씨, 테너 섹스폰의 달인이었던 이봉조 씨와 동문이기도 하다. 사극 전문이니 그럴 법 할 것이라고 들 생각하겠지만 작가 신봉승 씨와의 우정은 너무 각별하다. 영화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된 < 친구야 친구야 >도 신봉승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출감한 운동권 학생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의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원 등을 다룬 이 영화는 범작 수준이었다지만 60이 넘은 세대로 고통의 세월을 산 젊은이들 얘기를 다루면서 시대를 읽고 싶어했을 것이다. 전영록 이 주연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이리 뛰고 저리뛰고 했으리라. 술만 들어가면 '진주라 천리길'을 굵직한 목소리로 불러 제키던 최인현 . 한때는 흥행 성공으로 서울 삼청동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장안에서 몇대 되지도 않던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호기도 잇따른 제작 실패로 가정의 파국까지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재기하려고 몸부림 쳤는지 모르겠다. 최감독의 타계가 안타까운 것은 그 동안 영화계의 의례로 상사 때마다 치러져 왔던 영화인장이나 영협 감독위원회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문 없이 가족장으로 묻힌 것 일게다. '허 허'하는 호걸풍의 웃음에 말술을 마다 않던 황소 같은 대인 최인현 감독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김량삼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28. 10.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50. 6 경남 진주 농과대학 졸업 1950. 9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정훈공작대장 근무 1951. 4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 근무 1990. 11. 16 향연 62세로 타계 <주요 경력> 1956. 10. 영화계 입문( 김소동 감독 극영화 < 아리랑 > 조감독) 1968. 4. < 삼현육각 >(전남일보 주최 백상영화제 수상작) 1968. 10. 최인현 프로덕션 설립 1970. 4. < 삼호 탈출 > 제10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작품 대상 수상 1986. 8. 공연윤리위원회 전문 심사위원 1989. 10. 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작품 연보> 1962 피어린 발자국 1963 쌍검무 1964 비련의 왕후 달기 / 사자성 1965 태조 이성계 / 정조성 / 한많은 대동강 1966 오복문 / 너와나 / 양반전 1967 천도화 / 총각원님 / 나그네 임금 / 풍운 삼국지 / 칠부 열녀 / 상감마마 미워요 / 두 나그네 1968 언니의 일기 / 백야 / 자주댕기 / 삼현육각 / 오월생 / 로맨스 마마 / 암굴왕 / 방랑대군 / 이상의 날개 / 순덕이 / 내 생애 단 한번만 1969 인의 여검객 / 부각하 / 동경의 왼손잡이 / 젊은이의 태양 / 춘원 이광수 / 만고강산 1970 일요일밤과 월요일 아침 / 굿바이 동경 / 엑스포 70 동경작전 / 삼호탈출 / 황금70 홍콩작전 / 동경의 무정가 / 태조 왕건 / 한없이 기다려도 / 극동의 무법자 1971 미워도 정 때문에 / 기러기 남매 / 암흑가의 공포 / 타이페이 3만리 / 고향을 묻지마라 1972 인간 낙제생 / 명동잔혹사(2화) / 어머님 용서하세요 /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3 열궁녀 / 출발 1974 숙녀 초년생 / 이조상노비사 1975 소림사의 결투 1976 홍길동 / 집념 197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8 관세음보살 / 세종대왕 / 안개 속의 여인 1979 영원한 유산 1981 캔디-캔디 1982 고통의 멍애를 벗으려고/ 젊음의 광장 1983 후송열차 / 사랑하는 전우야 1984 소명 / 자동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 1985 쌍용 사람들 1987 마지막 선물 1988 우리 하나 되어 1990 친구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