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영낭자전
- 감독
- 김동현
데뷔와 함께 세 편에 출연 황정순은 해방 전 불과 열다섯 나이에 <그대와 나>(허영, 1941)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향이나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불려나온 반짝 출연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 봄 우리나라 최초의 16밀리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부터였다.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세를 떠나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의 반생기이다. 그의 뒷얘기는 1.4후퇴 때 미공군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1957)로 이어지지만, 황정순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황온순(주증녀)이 아닌 그의 친구로 나왔다. 이런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준 것은 장황연 감독의 <청춘행로>(1949)였다. 시댁의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견뎌내 끝내 행복을 얻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주선태(시아버지 역)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성일기>에 나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다음에는 최인규 감독의 흑산도 올 로케이션 영화 <파시(波市)>(1949)가 기다렸다. 어촌의 사내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 작부 김홍도 역이었다. 후배 작부(최지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도 돈에 팔려 다른 파시로 옮겨 가야 하는 조연급, <청춘행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사진] <청춘행로>의 한 장면 생필름을 구하기 어려워 제작비가 뛰어 오르고 여름부터 퍼진 뇌염 때문에 극장 문까지 닫히던 시기였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변사이자 배우, 해방 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원작자이기도 한 김조성(金肇聲, 예명 춘광)도 이해 6월에 뇌염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황정순은 나라의 재난 속에서도 세 편이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역의 멍에 하지만 불의에 닥친 6.25전란으로 그녀의 활동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을 비롯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사랑>(이강천, 1957), <김삿갓>(이만흥, 1957),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인생차압>(유현목, 1958), <청춘극장>(홍성기, 1959) <육체의 길>(조긍하, 1959), <대원군과 민비>(유진식, 1959) 등 20여편이 그 산물이다. 이 시기에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최우수여우상을 받았다. 영화계에 들어와 처음 받은 상이었다. 잇따라 <인생차압>의 이중생(김승호) 부인 우씨 역으로 제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황정순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인생차압>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최남현, 우편이 유계선 <귀거래(歸去來)>(이용민)와 <박서방>(강대진)으로 시작된 1960년대는 그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평선>(정창화, 1960), <주마등>(이만희,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2), <한 많은 미아리고개>(엄심호, 1962), <한석봉>(이만희, 1963), <굴비>(김수용, 1963), <외아들>(정진우, 1963), <혈맥>(김수용, 1963), <성난 능금>(김묵, 1963), <잉여인간>(유현목, 196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4), <삭발의 모정>(강대진,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김기덕,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친정어머니>(김기덕, 1966), <팔도강산>(배석인, 1967), <산불>(김수용, 1967), <대원군>(신상옥, 1968), <화산댁>(장일호, 1968), <저 언덕을 넘어서>(강찬우, 1968), <부인행차>(문여송, 1969) 등 120여편이라는 양이나 질적으로 그러하다. 황정순은 이미 서른세 살 때부터 머리에 흰 칠을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보다 한 살 위인 박암의 장모 역(<인생차압>)이 그 시작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그녀의 노역 행진은 특히 <마부>, <굴비>, <혈맥>, <갯마을>, <육체의 고백>, <산불> 등에서 빛을 내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진] <외아들>에 출연한 황정순, 왼편 아역 배우는 박종화(사진제공: 김종원) <마부>의 경우는 식모(수원댁)에서 마부(김승호)의 재취로, <굴비>에서는 분가한 자식들의 냉대에도 보듬어 안는 농사꾼의 아내로, <외아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촌 어머니로, <혈맥>에서는 과년한 딸을 술집에 보내려 ‘신고산타령’을 가르치는 노점의 주모로, <갯마을>에서는 재가한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과부 시어머니로, <잉여인간>에서는 무직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마른 동태에 바람을 불어넣는 억척스런 아내로, <육체의 고백>에서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나이트클럽의 마담으로, <산불>에서는 마을에 숨어든 공비(신영균)와 통정하는 바람난 과부(도금봉)의 어머니로, <삭발의 모정>에서는 휴가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가난한 군인 어머니로, <화산댁>에서는 처가살이하는 아들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사업 빚을 갚아주는 농촌 어머니로 각기 나타난다. [사진] <굴비>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이빈화, 우편이 김승호(사진제공: 김종원) 초기에는 <촌색씨>, <자식복 돈복>(윤대룡, 1959), <모상>(박상호, 1960) 등의 경우처럼 연극 연기가 몸에 밴 오버액션의 경향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혈맥>, <잉여인간> 등 일련의 문예영화에 출연하면서 한층 여과된 디테일 연기로 다듬어졌다. 일찍이 황정순을 <월급봉투>, <산불> 등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나게 한 김수용 감독의 말처럼 ‘연기인에게 젊은 역과 노역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젊은 날 무대의 여왕이 은막의 노파로 전향’ (『주부생활』, 1969년 9월호 부록, 「영화와 스타 스토리」) 한 것은 의도와는 다른 운명이었을 것이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