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동소년
- 감독
- 안윤성
- 제작년도
- 2017
1964~1985년 사이, 특히 6~7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을 한답시고,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은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Indigenous People)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Waimiri-Atroari) 사람들을 내쫓고 2천 명 이상 학살했다. 심지어 그들은 축제 중에 헬기에서 대량 투하되는 네이팜탄으로 죽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1950~60년대에 펼친 문자 해독 교육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역사적 순간에 문해 교육과 민중의 정치적 의식화 사이에 긴밀한 끈을 묶는”일이 문해 교육이라며, 이 운동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계속 문해 운동을 이어가던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교육 중에 작성한 글과 그림,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브로 간직했다. 아나 바스(Ana Vaz)는 1964년에서 1985년 사이의 아카이브 자료 3천여 점을 디지털 캡처하여, 선주민들이 부재하는 브라질의 현재 풍경과 포개어 프레임에 담는다. 아나 바스의 전작 <산을 자세히 응시하라, Olhe bem as montanhas>(2018)는 EXiS(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20년에 나온 신작 <왜?>는, 식민지에 도착한 선박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모종의 악기 소리, 땅 표면을 질질 끌다 못해 파헤치려 하고 하늘 언저리까지 샅샅이 훑는 듯한 노이즈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삽입곡의 제목은 <근원적인 밤, A Noite Original>(2004), 브라질 구체음악을 대표하는 길례르미 바스(Guilherme Vaz)가 작곡했다. 2018년 타계한 길례르미 바스는 아나 바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68년 리우데자네이루현대미술관에 실험예술 분과를 창설하고 1970년대 초반 독일 쾰른 피드백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길례르미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 요셉 보이스 등이 포진한 당대 유럽 전위예술의 식민성에 이론과 실천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여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지의 조로-팡간제(Zoró-Panganjej), 가비오-이콜렘(Gaviao-Ykolem), 아라라스(Araras) 등 여러 선주민 공동체와 시각 예술 작품과 음악을 공동 창작하고, 악기를 함께 만들었다. 또, 길례르미 바스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와 줄리오 브레사네(Julio Bressane) 등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 운동과 이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협업하여 그들이 연출한 영화 음악 여러 편을 작곡했다. <왜?>의 카메라는 식민 역사를 기념하는 모더니즘 조형물과 군사 독재 개발주의의 상징인 마천루가 즐비한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길례르미의 스코어와 함께 브라질의 도시와 숲, 강 기슭을 떠돈다. 카메라의 눈과 소리가 동행하는 여정 속에서, 선주민들을 학살한 군부의 개발 독재 시기와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 대상에서 선주민을 배제하고 열대우림 파괴를 밀어붙이는 현재가 함께 거하는 시공이 섬광처럼 계시된다. 이 ‘풍경’들은 길례르미의 음악,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그리고 쓴 도큐먼트, 그들이 주인공인 사진 이미지들과 마찰하며 지층 속에 머금고 있던 “어떤 세계의 비밀(즉, 그 대수롭지 않거나 영광스런 외양 뒤에서 그 법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을 폭로하는 간극과 충돌의 힘” (『이미지의 운명』,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을 융기한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얼핏 보아서는 ‘비(非)장소’나 ‘반(反)장소’로 불릴 법한 고속도로 주변의 모노크롬 풍경이 특정한 역사 경험을 품은 ‘장소’로 단박에 탈바꿈한다. 아나 바스의 첫 작품 <사크리스 풀소, Sacris Pulso> (2007)서부터 길례르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어떻게 일컬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하다 ‘즈려밟기’는 어떨까 싶었다. <사크리스 풀소>는 십 대 때 영화와 철학을 공부하러 호주로 이주했다 브라질로 돌아온 아나 바스가 수도 브라질리아 땅을 다시 밟고, 부모와 재회하는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세르지우 바지(Sérgio Bazi)와 줄레이카 포르투(Zuleica Porto)가 연출한 16mm필름 단편 <브라질리아리우스, Brasiliários>(1986) 일부를 인용하는데,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쓴 1962년과 1974년 브라질리아 방문기 서사, 길례르미의 사운드가 이 푸티지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겹쳐진다. 그리하여 구축되는 브라질리아의 과거와 현재는 유령도시의 그것과 닮아있고, 영화는 수도 브라질리아 자체가 SF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 바스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길례르미 카레라(Guillherme Carrera) 같은 평자들은 “SF 다큐멘터리”로 일컫기도 했다. Brasília amidst ruins: The sci-fi documentary of Adirley Queirós and Ana Vaz(2018)라는 글에서 카레라는, 바스가 브라질 역사와 사회의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SF”를 도구로 쓴다고 주장한다. 카레라가 바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인용한 Archaeologies of the Future(2005)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미래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우리 자신의 현재 경험을 낯설게 재구성하”는 장르가 SF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카레라는, 탈식민을 위한 토착문화운동이었던 브라질 트로피컬리즘에 정통한 연구자 로버트 스탬(Robert Stam)과 엘라 쇼햇(Ella Shohat)의 논의[Unthinking Eurocentrism: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1994)]에 기대 “식민지, 신식민, 탈식민 국가의 구조적 단점이, 식민화 과정과 불평등한 분열이 만드는 '소수자’ 서사를 되레 SF로 다룰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호세 리살(José Rizal)이 민족 공동체를 상상하며 쓴 필리핀의 첫 근대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라야 마틴(Raya Martin)이 인용하며, 현대 필리핀의 모순을 집약한 광산 지역에서 식민종주국 스페인으로 순간이동하는 커플을 다룬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2011)를 떠오르게도 하는 언설이다. 한편 아나 바스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모더니즘•트로피컬리즘 등의 백가쟁명 속에서 “새로운 영화(시네마 노부)”를 주창한 글라우버 로샤(Glauber Rocha)의 <지구의 나이, A Idade da Terra>(1980)에 경의를 표하는 단편 <돌의 나이, A Idade da Pedra>(2013)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데 <돌의 나이>에서 바스는 브라질의 영화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와 동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진보와 혁명을 꿈꾸던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1965)과 「꿈의 미학」(1971) 선언에서 펼친 "가난의 미학"이 실제로는 선험적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 고정된 성역할 및 인종 재현에 기댄 예술을 창조했다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바스는 차라리 ‘사물’이 시간과 공간을 대체하여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없는 SF를 ‘발명’할 수 있기에, “다른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계시”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고 서원한다. 이 작품은 아프로퓨처리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이주와 난민의 역사를 사변 서사(SF)로 재구축하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다공성 계곡>에 등장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돌의 나이> 속 ‘돌(pedra)’과 친연성이 크다.) 여러 평자들은, 아나 바스의 작품들이 실은 시네마노부 운동의 국가 및 젠더적 대표성보다는 북미의 애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나 수 프리드리히(Su Friedrich)의 작업, 즉 1970 년대 아방가르드 페미니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목적론적 서사를 부수려 시도하는” 영화들과 가깝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 마야 데렌(Maya Deren)이 실사 이미지와 사운드를 겹치면서 현실과 분리된 영화적 세계와 집단적 역사 감각을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분석한다. 2020년 사사로운 리스트에 아나 바스의 <왜?>와 더불어 꼽은 <방파제, Quebramar>(2019)를 연출한 크리스 리라(Cris Lyra)도 브라질 여성 감독이다.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후계자라 불리는 리라는 <방파제>에서 젊은 레즈비언들이 새해를 맞으러 떠나는 길을 동행한다.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과하며 성 정체성 논의와 그로 인한 개인적 체험, 브라질 사회의 긴장은 새로운 시공의 서사로 재구축된다. 또, <방파제>는 짧은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의 몸과 목소리로 브라질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진동시킨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비전형적 여성성을 탐구하는 리라의 차기작 <내 말을 들어줘, Ouça>는 팬데믹 시대 퀴어 여성들의 편지에 기반한 러브스토리라 한다. (<방파제>와 <왜?>는 모두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Mubi 한국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성영화의 선두주자인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이 제작 중인 신작 <초코바르, Chocobar>는 2009년에 살해된 선주민 활동가 하비에르 초코바르에 관한 비디오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수집해 재편집하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한데 아나 바스는, 비디오나 필름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종이에 선주민들이 그리고 쓴 드로잉 몇 점을 ‘풍경’ 이미지, 소리와 충돌시킨 몽타주만으로 큰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글과 그림은 자신을 학살하고 쫓아낸 국가의 총과 칼•전투기 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네이팜 때문에 폭사한 아마존의 물고기들, 열대우림을 베어내는 자본의 거대한 전기톱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낱낱이 증언한다. 현실 풍경과 겹쳐지되, 투시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선주민들의 드로잉이 재창출하는 땅의 그림(말 그대로의 ‘지도’)은, 작금의 ‘풍경’ 속에 잊힌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다시 일깨운다. 역사 기억을 저장하고 새로운 예술 표현을 찾는 ‘매체’로 “쇠락한 기술적 지지체”를 ‘재창안’할 수 있다는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논의와 만나는 최근 사례가 <왜?>라고 필자가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국 작품, 김민정 감독이 16mm 필름과 디지털을 ‘재집합’하여 제주 4.3을 다시 호명하는 <레드 필터가 철회됩니다>(2020)도 또 다른 “매체 재창안”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선주민들의 이차원 평면 글•그림과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한 실사 이미지를 결합하며 매체의 역사를 더불어 기억하는 아나 바스는, 디오라마나 파노라마같은 삼차원 측면 감각이 식민과 개발을 위한 지도와 조감도ㆍ설계도에서 연원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필리핀 출신 남성 감독 미코 레베레자(Miko Revereza)의 근작들은 사물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의 이동을 형상화하면서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현실 지도의 국경을 넘나들고, 마티 디옵(Mati Diop)이나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같은 디아스포라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서사와 사운드의 운용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원근법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반면, 대만 작가 수유신(Su Yu Hsin)의 <잠자는 물II, water sleep II Akaike river under Xizang Road>(2019), 국내에서 주목받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정여름 연출) 등 지도를 작성하는 원리인 수직원근법과 게임의 3차원적 가상ㆍ증강현실 기법, GPS를 이용한 이미지를 적극 수집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묘파하려는 시도들도 근간에 여럿 있었다. “왜?”로 번역되는 이 영화의 제목 “Apiyemiyekî?”는, 1960년 이후 선주민 문해 교육을 담당한 활동가 에기디오(Egydio)가 아카이브에 보존 중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남긴 단말마 같은 글귀(“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왜 죽였지? 왜?”)에서 따왔다. 에기디오 교수는 <왜?>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인터뷰이이다. 그가 아카이빙한 글과 그림들은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선주민 학살 진실 규명 소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에기디오와의 협업 과정을 운전 중에 감독과 전화통화로 확인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닦은 BR-174 고속도로 위로 흩어져 간다. 이 사변적 (논)픽션은 어떤 ‘풍경’ 속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증명하고야 만다. 영화의 카메라와 사운드 트랙이 브라질의 땅과 숲, 하늘과 물에 잠겨 있는 그들을 애타게 찾아 헤맬 때, 사진적 감각에 섞여드는 자연의 음향이 화룡점정할 때,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자취를 입은 아마존의 격랑이 이윽고 색을 얻을 때, 결코 잊힐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관객에게도 찾아온다. 영화 말미, 브리질리아로 귀환한 카메라는 분노가 내뿜는 바람에 실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카메라의 운동은, 우리가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맞서 저항할 미래의 동력이 되어줄 터다. 그래서 아나 바스의 <왜?>는 멕시코 선주민들의 역사와 운동을 ‘재집합’하는 ‘로스 인그라비도스 집단'(Colectivo Los ingrávidos)의 영화들과도 닮았다.
지난 회에는 ‘공포’라는 글자가 들어갔지만 별로 공포스럽지 않은 영화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납량특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만한 영화를 골랐다. 여러분에게 크나큰 공포를 전해줄 영화는 박윤교 감독의 < 망령의 곡 >이다. 우리나라 공포영화는 많은 수가 원한을 다룬 귀신 영화다. 이 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주로 여성들의 수난에 따른 억울함을 다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래식들, < 여곡성 >, < 월하의 공동묘지 >, < 살인마 > 등등에서 등장하는 ‘한을 품은 여자 귀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는 드라큘라, 강시, 늑대인간 같은 다른 나라의 괴물들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캐릭터였다. 이 귀신은 특히 ‘한’이라는 응축된 억울함을 주된 힘으로 사용하는데 이 한이 깊고 넓을수록 귀신의 파워는 한층 더 세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망령의 곡 > 역시 비슷한 설정의 귀신이 등장하는데 다른 귀신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점들이 눈에 띄어 재미있는 영화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호 김만호의 아들 김태화는 나이 서른을 먹은 5대 독자 노총각이다. 그의 부모님은 신붓감을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는 한편, 조부는 증손자를 보기 전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조급함을 더한다. 그러던 중, 태화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드나드는 절 승가사에서 고아로 자란 행자 점례를 발견하게 된다. 예쁘고 성격마저 참한 점례를 급하게 신부로 맞이하게 된 태화네 가족은 그녀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점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고 만다. 몸에서 난소종양이 발견되어 아이를 낳으면 점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태화의 가족들은 점례가 어떻게 되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버틴다. 이윽고 다가온 출산일. 그때까지 점례는 생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 남편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승가사 뒷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당부한다.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기어코 죽어버린 점례. 태화는 부하직원들을 시켜 승가사 뒷산에 아내를 묻어주길 당부한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잠깐 졸던 태화는 “아이, 추워... 아이 추워...” 라는 환청을 듣는다. 아내 점례의 목소리였다. “산모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평범한 귀신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게다가 초반부는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이 클리셰의 퍼레이드라 불러도 좋을 만큼 뻔하다. 요새야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표현들이지만 80년대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지루함을 참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만 지나면, 다른 귀신들은 보여주지 못한 무시무시한 복수에 여러분은 치를 떨 것이다. 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막 고어씬이 난무하거나 귀신이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 같다거나 하는 종류는 아니다. 다만, 이 점례 귀신이 보여주는 복수의 집요함이 장난이 아니다. 점례는 일단 겁을 준다. 환청과 환영을 통해 남편인 태화의 눈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을 ‘관이 무거워서 귀찮다’는 이유로 승가사의 뒷산이 아닌 다른 곳에 묻은 부하직원을 처단한다. 자신이 설정해놓은 폭파구역에 들어가 폭사 당하는 안 기사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의 손에 (실수로) 살해당하는 최 기사. 그리고 태화는 부하직원의 죽음들 앞에서 실성해버린다. 다음 타깃은 자신의 죽음을 묵과한 병원 원장이다. 그녀는 간호사에 빙의되어 원장을 위협한다. 원장은 메스를 들고 간호사를 죽이려 하고, 겁에 질린 간호사는 옥상까지 도망갔다가 원장과 함께 사이좋게 추락사하고 만다. 점례의 살생부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주변인들의 처단 이제 본격적인 김 씨 일가에 대한 복수가 행해져야 하는데, 영화는 갑자기 25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 뜬금없는 전개에 여러분은 당황할 것이다.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저 컷 하나 바뀐 걸로 사반세기가 흘러버린 것을 성의 없다거나 어이없다고 말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러지 말자. 놀라지 말자. 이것은 한을 품은 귀신의 집념을 보여주려는 연출인 것이다. 나 역시 좀 얼떨떨해서 이게 뭔가 하고 갸우뚱했는데, 아주 중요한 힌트를 주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상황을 풀어낸다. 점례가 사망 당시 낳은 아들 경수가 25살이 되어 이제 장가간다고 들떠있는 것이다. 경수는 아내 영숙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다. 이때, 집에는 때마침 손님이 한 사람 와 있다. 그는 점례를 키웠던 승가사의 주지 스님. 스님이 집으로 들어오자 내내 누워있던 경수의 조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25년간 실성해있던 태화는 정신을 차린다. 경수는 아내와 함께 태화에게 인사를 올리고 복덩이 손주며느리가 들어와 이제야 가문이 일어서겠다며 신이 난 할머니와 함께 경수 역시 흥이 오른다. 그러나 할아버지만이 인상이 좋지 않은데 그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수의 아내 영숙에게는, 점례가 빙의되어 있었다. 이들이 한 집에 모인 밤부터는 점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된다. 일단 그녀는 영숙의 몸에 빙의되어 시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칼을 들고 시아버지의 방에 찾아가는데, 그의 뒤에서 칼을 내려치는 찰나! 주지 스님이 나타나 점례를 타이른다. 하지만 점례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스님조차 공격을 하고, 결국 점례보다 더 귀신같은 스님(점례는 발로 뛰며 공격을 하는데 스님은 순간이동을 하신다.)의 퇴마에 의해 승천을 하고 만다. 이제 가족의 평화는 찾아왔을까? 복덩이가 들어온 줄 알았더니... 이 영화의 귀신이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로 복수하지 않고 주변인만 처단한 후 25년을 기다렸다는 것인데, 이유는 아마도 경수의 아내에 빙의되어 들어가 손주 며느리라는, 본인이 위치했던 같은 자리에서 복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손자 며느리 영숙과 할머니가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점례와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과 똑같이 찍었는데, “찬물에 손 담그지 말고 먹고 싶은 건 마음껏 먹고... 어서 손자를 보아야 한다.” 하는 대사마저 완전히 똑같다. 자신이 피해를 봤던 자리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25년을 참아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자리가 어쨌든 자기 아들의 아내(!)의 자리라는 것이 꽤나 파격적이다. 그녀가 복수에 성공했다면 아들 경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글쎄. 장담 못 할 일이다. 25년을 사이에 둔 똑같은 대사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원한에 사무친 여성 귀신들이 최후에는 복수에는 실패하지만 가해 당사자들의 뉘우침을 듣고 어쨌든 한을 풀고 승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점례는 주지 스님에 의해 ‘퇴치’된다는 점이다. 점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가족을 저주한다. 물론 시아버지 만호와 남편 태화는 자신의 비인간적 행태를 반성하고, 또 죗값을 치르기 위해 선행을 지속하며 살 것을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장면은 점례와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인과응보’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죽는 것은 주변 인물들과 시어머니뿐, 이 가족의 핵심권력인 남자들은 모두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어머니도 귀신이 되어 이 집 남자들을 벌하러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는 ‘한국 공포영화의 거장’이라 불렸던 박윤교 감독이 말년에 만든 작품이다. 그는 데뷔 초기부터 공포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 백골령의 마검 >으로 흥행감독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 옥녀의 한 >, < 며느리의 한 >, < 꼬마신랑의 한 > 으로 이어지는 ‘한(恨) 트릴로지’를 만들고 공포영화 전문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 망령의 곡 >은 핍박받는 며느리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끔찍한 상황에서 살해돼 귀신이 되고, 또 귀신이 되어서도 변변한 복수도 못 하고 ‘퇴마’ 당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흥행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6~70년대 흥행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윤교 감독이지만 80년대에 들어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재기를 노렸던 망령 시리즈의 2탄 < 망령의 웨딩드레스 >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좀 더 현대적인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지만 당시의 트렌드를 잘 따르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망령’ 이라는 이름이 구식으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전통적인척하면서 변태스러운 <망령의 곡>이 취향에는 더 잘 맞는 것 같다. 가끔 뻔할 것 같이 생각되는 영화에서 이런 의외의 설정들이 튀어나오는 재미가 결국 B급 영화를 끊지 못하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뜨거워지는 여름, 맥주 한 캔씩 들고 여자친구와 함께 <망령의 곡>을 보며 더위를 쫓는 건 어떨까. 여자친구가 “니네 어머니가 저러면 어떡할 거야?”라는 질문을 하면 어쩌냐고? 자.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지미옥 정세혁 박암 감독: 박윤교 각본: 유일수 개봉극장: 대한(서울) 관람인원: 77,819명(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