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
- 감독
- 이형표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최무룡, 추봉, 임성포, 최무웅, 김창숙, 이경애, 이성호
© 코리아씨네마 똠얌꿍, 슌사쿠, 国, 國, 纳, 陆海铃, 宍倉紗弥, 髙橋, 﨑, 𠮷野, 辻, 齋藤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은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이자 “사회적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베스트셀러” [1] 『꼬방동네 사람들』(이동철, 198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개봉 당시 “갖가지 사연을 안고 모여 사는 판자촌 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감동으로 그려낸 작품”이라는 언론의 호평을 받았으나 [2] 실제로 이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존재했다. “제작 신고 때부터 우여곡절을 겪고 10개월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3] 라거나 ‘신고 접수 후 <꼬방동네 사람들>의 경우는 1백 21일 만에 수리 통보를 받아 제작에 나서게 됐다’ [4] 는 기사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80년대 초반 ‘사회적 아픔’을 다루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대 상황 및 검열 제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모든 제작사는 시나리오와 영화 필름을 검열받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렇다면 검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신고 과정에서 가장 지적을 많이 받는 부분이 정사 장면, 외설, 비속·저속한 대사 등으로 사회적으로 말썽이 일고 있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크게 브레이크에 걸리고 있다’ [5] 는 기사는 당시 이루어지던 검열 항목을 알려 준다. 특히 에로티시즘은 주요 검열 대상이었다. 그런데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사회적 아픔과 가난한 사람들을 재현하는 데 중심을 둔 ‘사회성’ 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에로티시즘 영화와는 결이 달랐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영화는 더욱 시련을 겪어야 했다. ‘사회성 짙은 영화’에 대해 시대는 매우 민감했고 영화는 결국 수정되어야 했다. 이는 시대가 승인하고 요청한 영화, 그리고 대중의 삶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이 작품이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격동의 시대, 대중 영화가 직면한 시련 이 영화의 제작 시기는 1980년대 초반 사회적 격동의 시기와 겹친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 시대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 초기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한 것이나 문화 분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고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였다. 1984년 5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영화와 영화산업 또한 이런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6] 이러한 상황에서 <꼬방동네 사람들>이 ‘사회 현실’을 다룬다는 게 문화 검열 주체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특히 원작인 이동철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은 “청계천변으로 흐르는 썩은 오물, 똥물, 악취 나는 시궁창을 코앞에 둔 채 즐비하게 늘어선 판자촌 동네” [7] 를 배경으로 성매매 여성과 소매치기, 구두닦이 등의 온갖 도시 하층민들이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산업화 시기 도시 하층민이 그 존재 자체로 불안과 오염의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정주하는 변두리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서 배제된 불안정, 궁핍, 무질서, 비도덕, 비윤리적인 타락한 성벽처럼 묘사되었다는 점 [8] 을 감안할 때,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재현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전두환 정권 수립 초기 사회 안정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 코리아씨네마 이러한 점은 영화의 검열서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원작 소설 속 ‘검은 장갑’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검은 장갑’ 명숙을 주인공으로 삼아 주요 인물들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 산하 공연윤리위원회는 “전체적으로 서민 생활을 절망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도박 등 사회악을 합리화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서 양속과 사회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민층 묘사에 있어 가급적 훈훈한 인정미를 부각시키고 착한 의지로 살아가는 모습에 역점을 둠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구체적으로는 “비속한 대사가 많고 가정(사회) 윤리 저해 장면, 소매치기 장면, 도박 장면, 사기 장면” 등이 문제가 되었다. [9] 결국 시나리오는 대폭 개작되었다. 이후 신고한 시나리오는 “공서 양속과 사회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삭제”했다. 대신 “비록 고난과 역경의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결코 불의에 타협치 않고 밝은 내일을 향해 참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그들의 착한 의지와 인정이 넘치는 삶의 현장을 영상으로 옮김으로써 원작 소설이 주는 어두운 이미지를 밝게 승화시켜 사회 계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10] <꼬방동네 사람들> 심의서류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중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공연윤리위원회는 “전체적으로 서민 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가정 윤리(순결성)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라고 판단, 또다시 제작사에 개작을 요구했다. 문제 장면으로 제시된 “가정윤리(순결성) 저해 장면, 청소년의 건전한 생활 태도 함양 저해 장면, 사회 비리 고발 장면이 전체 장면 126씬 중 29%인 36씬”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11] 대대적인 개작을 요청한 것이다. 결국 제작사는 “시나리오를 전체적으로 재검토, 대폭 순화하여 계도적인 작품으로 개작”해야 했다. 이로써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서민 생활의 부정적인 장면 묘사를 절제하고 가정 윤리를 저해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는 한편” 몇 가지 문제 장면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제작을 허가받기에 이른다. [12] 요컨대 시나리오 개작 과정은, 비교적 소설 원작에 충실했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계몽’과 ‘사회 정화’라는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계몽의 내용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1980년대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삶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의 시나리오 개작과 영화 제작 과정에서 변화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빈민촌을 배경으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이 대거 축소되는 대신 검은 장갑 명숙( 김보연 )과 그녀의 전남편이자 아들 준일( 이재진 )의 아버지인 주석( 안성기 ), 그리고 현 남편이자 살인자인 태섭( 김희라 )이 주축이 된 가족 이야기가 극의 중심을 차지한다. ‘배감독이 당초 원작이 지닌 강한 사회성과 패기의 메시지를 그대로 영화화하려 했으나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네 차례나 개작 지시를 받아 다소 감상적으로 굴절된 느낌’ [13] 이라고 평가한 것도 가족 이야기가 애정 관계와 얽히면서 영화 속에 두드러지게 재현된 점과 관련된다. 둘째,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는 검은 장갑 명숙이 홀로 주석의 아이와 빈민촌에 남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영화에서 검은 장갑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주석이다. 영화는 주석이 과거 소매치기였던 삶을 청산하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도록 한다. 가령, 영화에서 ‘가족 사진’을 고이 간직한 채 명숙과 준일 주변을 맴돌고 “남자한테 가정이란 자기 몸보다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며 명숙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거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꼬방동네를 떠나는 명숙과 준일을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에 태우는 주석의 모습 등은 소설과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없는 새로운 장면들이다. 이로써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당대 정권이 승인하고 요청했던 서민 가족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 코리아씨네마 실제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에서 남성은 가족을 이끄는 권위의 상징이자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산업 역군이었다. 주석은 그러한 현실 가부장의 문화적 판본이었다. 특히 아버지 없이 방황하는 준일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이유는 주석의 윤리적 책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가부장으로서 주석에게는 준일을 훈육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태섭이 살인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자수하기 위해 떠나는 것도 주석 가족의 삶이 사회적 안정과 질서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영화는 1980년대 사회 안정과 근대화를 겨냥하는 계몽적인 가족 영화로서 대중과 만나게 된다. 한편, 당시 이루어진 문화 검열 과정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영화 속 빈민촌과 아파트의 풍경이다. 사실상 공간이 영화 속에서 가족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도시의 변두리 빈민촌은 더 이상 밀려날 데가 없는 도시 서민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요한 장소였다.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도 서민들이 살아가는 변두리 빈민촌의 풍경은,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의 모습과 대비되어 주변화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시각화했다. 나아가 ‘이러한 대비적 장면은 그 자체로서 이미 도시 공간의 구조와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냈다.’ [14] 그런데 당시 아파트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주석을 중심으로 새롭게 꾸려질 가족에게 멀리 보이는 아파트는 어쩌면 그들이 당도할 미래의 안락한 가족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아파트’와 ‘빈민촌’의 선명한 대비는 양가적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발문’에서 이 작품을 두고 작가 이동철이 스스로 판자촌에서 살아오는 동안 겪고 본 자기 동네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엮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15] 당대 삶의 현장성을 획득했던 소설은 출판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화는 달랐다. 배창호 감독의 야심에 찬 데뷔작은 사회 안정에 도움이 안 되는 문화 생산물로 여겨졌다. 영화는 집단 대중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체였던 만큼 다른 문화예술에 비해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당대 문화 계몽은 현실의 모순이나 불합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일반 대중이 공감할 만한 서민 가족의 삶을 통해 근대화의 욕망을 환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영화 속 메시지는 근대화의 긴 터널을 통과하던 대중의 욕망과도 공명하는 데가 있었다. 따라서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은 1980년대 근대화를 위해 문화적 에너지를 공급했던 영화의 역할과 대중 욕망의 양상, 그리고 문화 제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코리아씨네마 *** [1] “사회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베스트셀러 현암사가 이 시대의 양심에 호소하는 세 권의의 장편소설!”, 《경향신문》, 1981. 9. 28. [2] “새로운 메시지 담은 3편의 영화”, 《동아일보》, 1982. 7. 23. [3] “<꼬방동네 사람들> 제작 완료 기구한 운명 헤치는 여인 그려”, 《경향신문》, 1982. 7. 15. [4] “제작자협 당국 영진공 불황 타개 간담회 ‘영화 제작 행정 규제 융통성을...’”, 《경향신문》, 1982. 5. 3. [5] 위의 글. [6] 김동호 외, 『한국영화 정책사』, 나나출판, 2005, 258~259쪽. [7] 이동철, 『꼬방동네 사람들』, 현암사, 1981, 7쪽. [8]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 2011, 107쪽. [9]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0]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1]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2]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심의 서류 참조. [13] “새로운 메시지 담은 3편의 영화”, 《동아일보》, 1982. 7. 23. [14] 정태수, 「1980년대 한국 영화에서의 생산의 공간(1980-1987)」,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 공간Ⅰ(1980-1987)』, 박이정, 2018, 28쪽. [15] 이동철, 앞의 책, 372쪽. 한영현(세명대학교 교수, 영화연구자) l 한국영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전후 영화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이사, 《현대영화연구》 편집위원, 영상문화지평연구소 편집위원장 등 역임.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2022), 「생명⋅기술⋅공간의 삼중주: 봉준호 감독 <미키17>(2025)을 중심으로」 등 집필.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공간』(2018) 등 공동 집필.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근·현대 한국사회를 관통한 균열과 진통의 시간을 영화에 남은 흔적으로 기억합니다. 장길수 감독의 < 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1)는 안정효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이후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 “국내 백상예술제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제15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여 언례 역을 맡았던 이혜숙 배우가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한 장길수 감독이 각본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1] 장길수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 동기로 한국과 미국 문화의 갈등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그려 보려 애썼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2] 이에 따르면 영화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 충돌과 갈등 문제를 유엔군 병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은 후 ‘양공주’로 전락해 가는 순박한 시골 여인의 삶을 통해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순박한 시골 여인이 양공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즉 ‘한국전쟁’과 ‘유엔군 참전’이라는 조건은 이 영화를 문화와 역사라는 두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국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 ‘양공주’라는 타자의 출현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작가 안정효는 작품에 형상화된 언례(이혜숙)가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던 평범한 자신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수없이 희생되었던 여성 중에서 발견된 존재이자 이름이었다. “언례 씨를 처음 만난 것은 51년 여름, 지금은 부천이라고 이름(조)차 바뀌어버린 소사읍 심곡리에서였습니다. (중략) 내가 언례씨를 발견한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다는 유엔군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도망을 다니던 내 어머니와 (다)른 많은 여자들 한가운데서였습니다. [3] ” (괄호 표기 필자)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아픈 부분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다양한 희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외국군 주둔과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은 여성으로 하여금 몸을 팔아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게끔 강요”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부녀자들이 생활난으로 일반 ‘양공주’나 매춘 행위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준다. [4] 이러한 당대 상황과 위의 인용문 내용을 겹쳐 읽어 보면 언례는 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들을 호명하는 대표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통에 남편도 없이 홀로 자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먹고 살기 위해 양공주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은, 그녀들의 목소리로 직접 증언되어야 했으나 지난 몇십 년 동안 사회적 배척과 배제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전쟁미망인, 이산가족 여성, 불구가 된 남편, 그리고 ‘양공주’라고 불린 기지촌 여성들은 1950년대 결여된 가부장성을 홀로 지탱하며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까지 견뎌야 했던 불안한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었다” [5] 라는 지적은 1950년대 전후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언례와 양공주의 삶은, 잊힌 채 침묵 당해 왔던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귀환하는 궤적을 보여 주는 사례이자, 한국전쟁과 문화 식민의 공간이 어떻게 한국의 영토와 신체, 그리고 문화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면서 현재에 이르도록 했는지에 대한 기원을 되짚어 보는 문화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를 잘 말해 주듯 소설과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출현한 양공주가 어떻게 전쟁을 통해 생산되고 문화적 타자로 호명되어 갔는가에 관심을 둔다. 양공주의 탄생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침식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비극으로 조명하는 방식은 허버트 미트갱(Herbert Mitgang)이 미국에서 출판한 안정효의 소설을 두고 “반미 소설이 아닌 반전 소설”이라고 평가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6] 전쟁은 물질적 파괴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신적 파괴 또한 초래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깊은 비판과 성찰을 유도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양공주로 호명되는 언례의 변화 과정은, 이를 둘러싼 전쟁과 휴머니즘의 문제를 부각하면서 ‘반전 소설’이자 ‘반전 영화’로서의 새로운 지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특히 장길수 감독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형성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극중 언례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양공주의 삶을 통해 만나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그늘 개봉 당시 이 작품은 “한국 속의 아메리카니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성 영화”로 소개됐다. [7] ‘아메리카니즘’이라는 문화적 현상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 주둔이 본격화되면서 1950년대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영화는 양공주와 ‘양키 문화’를 시각적 흥밋거리로 재현하기보다는 한국전쟁과 함께 나타난 아메리카니즘을 전쟁과 휴머니즘, 그리고 문화 침범이라는 무게 있는 주제와 함께 드러낸다. 금산리에서 평범한 시골 촌부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언례의 삶이 급격하게 훼손되는 데는 유엔군의 참전과 전쟁에 휘말린 금산리 사람들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 언례가 유엔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그녀는 황훈장( 전무송 )의 말을 통해 드러나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마땅한’ 더러운 존재가 된다. 그녀를 배척하는 금산리 사람들의 태도 이면에는 순결한 신체와 영토가 훼손당한 데 대한 문화적 충격과 유교적인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언례의 집과 신체는 전쟁으로 초래된 영토적 파괴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언례가 양공주로 변화하는 과정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급변 속에 끼어있는 존재, 즉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사이’와 ‘경계’의 존재가 놓인 문화적 곤경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이는 그녀가 경계 공간에 놓여 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은 전통 공간과 ‘양키 공간’으로 구분된다. 언례는 이 두 영역을 오감으로써 전쟁 전-전쟁 후, 전통-근대, 순수-오염, 선-악, 유교 문화-양키 문화 사이에 놓인 상징적 존재로 변모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에서의 언례 (사진: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문화 침범의 경계에 놓여 있는 언례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아들 만식과 황훈장, 그리고 찬돌 등의 남성적 시선이 영화 곳곳에서 규율 권력으로 출현하지만 언례와 용녀( 김보연 ), 순덕( 방은희 )은 삶에 대한 발언권을 가진 존재들로 생동감을 지닌다. 게다가 이는 양공주들을 문화 침범의 ‘쓰레기들’로 분류하려는 폭력적인 권력자들의 비윤리적 태도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문화적 저항이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고 쓰레기 더미를 차지하기 위해 패싸움을 벌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러 차례 재현되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초래한 아메리카니즘’이 한국인의 삶에 가져온 문화적 오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들이다. 이로써 양공주의 삶과 한국인의 삶은 문화적 ‘오염’이라는 측면에서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양공주의 삶을 비판할 만한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을 경유하면서 ‘전쟁’과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의 주제로 접근한다. 미군의 주둔과 함께 시작된 ‘양공주의 삶’과 ‘쓰레기를 줍는 삶’은 한국전쟁이라는 급격한 변화 속에 내몰린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마주한 시대의 현실이자 곤경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들을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과 갈등하는 언례와 용녀, 순덕의 목소리와 저항이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울려 퍼질 때 이는 전쟁과 휴머니즘을 둘러싼 확장된 문화적 보편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길을 열게 된다. 마을 사람들과 대립하는 용녀와 순덕, 쓰레기를 줍던 마을 아이들의 패싸움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러한 영화 재현 양상은 사실 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상옥 감독의 영화 < 지옥화 >(1958)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양공주 쏘냐( 최은희 )는 육체적인 매력과 화려한 미제 사치품으로 무장한 채 남성들을 유혹하거나 미 군수품을 밀수하는 데 협력하는 ‘돈’과 ‘욕망’의 화신으로 이미지화된다. 영화 속에서 기지촌 양공주로 재현되는 줄리( 강선희 )에게 그나마 전쟁 전 순수했던 과거 이야기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순결한 동식( 조해원 )과의 결합을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할 만큼 주변적이고 작위적이다. 이는 영화 <지옥화>가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당대 문화 이데올로기를 영화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양공주를 동원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따라서 영화 속 양공주의 삶은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 와서야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현실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권위주의와 가부장제의 단단한 문화적 결합이 독재정권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그동안 침묵했던 타자들의 출현을 알리면서 해방의 길을 모색하던 때 당도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거친 파도 속에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타자들의 삶을 증언하는 대표적 작품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레이스 M. 조는 책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2008)에서 ‘양공주는 단지 죽거나 감상적으로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생산적이고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유령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8] 실제로 양공주로 오랫동안 침묵 당한 삶을 산 어머니를 둔 그녀에게 양공주는 잊힌 과거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주체적 존재들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양공주에게 다시 목소리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그레이스 M. 조의 연구와 저서들은 이를 위한 후속 세대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잊힌 자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증언’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고 있다. 그리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야말로, 이러한 문화적 실천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 [1] “방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몬트리올 영화제 2부문 수상”, 《동아일보》, 1991. 9. 3. [2] “인터뷰 몬트리올 영화제 각본상 수상 영예 장길수 감독 ‘방화 문제의식 세계 수준’”, 《경향신문》, 1991. 9. 4. [3]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언례에게/안정효 전쟁과 폭력의 희생양이었던 한국 여인 모습 알리려 했소”, 《동아일보》, 1996. 4. 30.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전쟁과 사회 구조의 변화』, 1999, 41쪽. [5] 김학재 외,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 창비, 2016, 71쪽. [6] “Books of The Times; Korean’s Novel Is Anti-War But Anti-American”, The New York Times , 1990. 2. 21. [7] “<개벽>, <은마는...>, <산산이부서진...>, 세계 영화 시장 ‘노크’”, 《조선일보》, 1991. 2. 22. [8] Grace M. Cho,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2008, p. 18. 한영현(세명대학교 교수, 영화연구자) l 한국영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전후 영화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이사, 《현대영화연구》 편집위원, 영상문화지평연구소 편집위원장 등 역임.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2022), 「생명⋅기술⋅공간의 삼중주: 봉준호 감독 <미키17>(2025)을 중심으로」 등 집필.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공간』(2018) 등 공동 집필.
지난 6월 21일, 로빈 하디의 < 위커맨 >는 개봉 50주년을 기념하는 4K 복원판이 영국에서 첫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다. 이후 미국 전역을 비롯한 각 국가 개봉에 이어 10월에는 현존하는 본편 3개 버전과 방대한 서플먼트 그리고 폴 지오바니와 밴드 마그넷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포함한 5 디스크 DVD 박스세트가 출시되었다. 동시에 <위커맨: 공식 스토리>라는 신간도 함께 출판되면서, <위커맨>은 올해 복원된 고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히트작이 되었다. 이미 개봉 40주년을 기념한 디지털 복원판이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상영되었던 전력을 떠올려보면, 새로운 4K 복원판에 대한 식지 않는 관심은 진정한 컬트 고전으로서 <위커맨>이 가진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셈이다. 요란스러운 상찬과 제사에 불구하고, 컬트의 지위를 가진 대부분의 걸작들이 그러하듯 <위커맨>은 시작부터 개봉까지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던 고난의 영화였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말 그대로 복원과 부활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위커맨>은 < 발자국 >(Sleuth, 1972)로 유명한 작가 안소니 샤퍼가 제작사 ‘브리티시 라이언’의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제작자 피터 스넬 그리고 해머의 드라큘라 재생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와 1967년 출간된 데이빗 피너의 소설 ‘의식(Ritual)’의 영화판권을 공동으로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개발에 난항을 겪던 프로젝트는 당시만 해도 ‘듣보'였던 로빈 하디가 의기투합하면서 주말동안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순식간에 하우이 경사를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전개되었다. 완성된 시나리오에 만족한 스넬은 ‘저예산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비로소 <위커맨>은 1972년 가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촬영은 약 7주 가량 25개 스코틀랜드 지역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로케이션 중에서 진짜 섬은 한곳도 없었다. 로빈 하디는 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이곳 저곳에서 찍은 장면들을 패치워크하듯 이어붙이는 작업이 오히려 흥미로웠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으나, 가을의 스코틀랜드에서 5월 초여름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는 미션과 더불어 로케이션 중간중간 출몰하는 근대와 문명의 흔적을 피하는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산 부족과 고된 촬영, 추위와 이어지는 과음으로 하우이 역의 에드워드 우드워드는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윌로우 역의 브릿 에클랜드는 촬영 내내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이후 완성된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클랜드는 2023년 5월 <위커맨> 50주년 특별행사에 참석하여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0분이 넘는 길이로 영화는 완성되었지만 <위커맨>의 개봉은 요원했다. 20세기 초중엽 에드가 월리스, 알렉산더 코다, 캐롤 리드 등 영국영화의 대표주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던 상황이었는데, <위커맨>이 완성된 시점의 사장인 마이클 딜리는 완성본을 싫어한 나머지 영화의 개봉을 거부했다. 제작자 스넬은 딜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칸 영화제에 완성본을 들고 가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동시에 호텔 로비에 거대한 위커맨을 세워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때 <위커맨>을 본 영화 관계자 중에는 로저 코먼도 있었는데, 드라이브 인 상영에 좋겠다고 판단한 코먼은 편집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브리티시 라이언은 영화를 87분으로 대폭 가위질해서 먼저 개봉하여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니콜라스 로에그의 < 쳐다 보지 마라 >(Don’t Look Now, 1973)와 동시상영하는 조건으로 영화의 개봉을 허가했다. 크리스토퍼 리는 안면이 있는 모든 평론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좌석을 빼두는 등 공을 들이기도 했다. 20세기 브리티시 호러의 대표작인 두 편의 영화가 동시상영이라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는 비극인지 아니면 두 편을 동시에 본다는 엄청난 기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관객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처참한 박스오피스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어떻게든 제작비를 환수하려고 애썼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로저 코먼을 비롯, 미국 배급을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미국 배급권은 워너 브러더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워너는 개봉 전 테스트 상영을 했지만, 버라이어티를 비롯 지면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상영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위커맨>은 순식간에 시네필 그리고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볼 수 없는 걸작'이 되면서 컬트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할리웃으로 와 각본작업을 하던 로빈 하디는 <위커맨>의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워너 브러더스는 이미 미국 배급권을 단돈 2만불에 아브락사스라는 소규모 회사에 넘겨버린 상태였고, 하디는 아브락사스를 설득해서 난도질당한 <위커맨>의 부활 작업의 허가를 얻었다. 하디는 바로 피터 스넬, 앤드류 샤퍼 그리고 크리스토퍼 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위커맨 4인방'은 가위질 이전의 롱 버전 프린트 사냥에 나섰다. 개봉버전과 로저 코먼에게 견본으로 보냈던 오리지널 프린트를 찾아낸 하디는 결국 1977년 가을 미국에서 첫번째 디렉터스 컷이라고 할 수 있는(현재는 ‘미들 버전’이라 불리는 버전으로 4K 복원 상영본인 ‘파이널 컷’의 원형이 된 판본이다) 92분 버전의 <위커맨>이 상영되었고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위커맨>은 숏 버전과 미들 버전이 번갈아가며 TV와 홈비디오 시장을 통해 배급되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은 2001년 영화의 세계배급권을 갖게 된 스튜디오카날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완성된 100분이 넘는 오리지널 프린트는 찾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프린트와 텔레시네 버전들을 조합한 99분 버전의 ‘디렉터스 컷’이 DVD로 출시되었다. 스튜디오카날은 <위커맨>의 복원을 위해 프린트 사냥을 멈추지 않았는데, 하버드대 필름보관소에서 92분 버전의 필름 4K 버전을 입수하면서 제대로 된 디지털 복원의 신호탄을 쐈다. 로빈 하디는 페이스북에 올린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영화의 디지털 버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는데, 복원 과정에서 하디는 섬머아일로 가기 전 경찰서 등 하우이의 일상 장면을 포함, 디렉터스 컷에 삽입되었던 장면들을 제외한 92분 버전의 복원에 동의하고 이 버전은 2013년 크리스토퍼 리가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던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 버전이 올해 4K 복원판 상영으로 이어진 이른바 ‘파이널 컷'으로, 국내에서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을 처음 만났다. 영생을 믿는다며 부활을 울부짓었던 하우이의 희생 덕분이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불굴의 4인방의 <위커맨>은 부활에 성공하여 영생을 얻은 셈이다.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영화의 부활 서사때문에라도 <위커맨>은 수많은 관련서와 팬매거진을 거느린 컬트 고전이자 아리 에스터 등 현대의 감독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된 걸작이지만, 역경을 딛고도 부활할 수 있었던 영화의 저력은 전무후무한 전복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 간 글로벌 호러의 지배적인 서브장르로 급부상한 포크 호러 열풍과 더불어, <위커맨>은 < 심판 >(Witchfinder General, 1968), < 사탄의 피부 >(The Blood on Satan’s Claw, 1971)과 포크 호러 장르의 ‘불경한 삼위일체'라는 명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중 <위커맨>은 근대 서구 문명의 이성과 기독교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과 완전한 전복을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과 궤를 달리한다. 엄격한 교리와 도덕률 그리고 사법제도의 규칙으로 무장한 채 아버지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근대적 남성주체 하우이는 로완 모리슨의 실종을 추적하는 탐정으로서도, 순결한 총각으로서도, 무엇보다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섭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없는 자연의 동학을 긍정하는 섬머아일에서 섹스와 남근, 수확과 재생산은 하우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질서를 구성한다. 그 안에서 당혹과 충격 그리고 어이없음과 무력함을 넘나들며 심리적 폐소상태에 놓인 하우이의 클로즈업과 영화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메이데이의 현기증나는 의식은, 종교적 이성과 원시적 이단이라고 재단된 양립할 수 없는 두 질서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너스레를 떠는 로빈 하디의 코멘트에 충분히 고개가 끄덕이면서도 왠지 영화의 강열도를 축소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