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감
- 감독
- 안창호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윤설, 윤정로
작년 한 해는 뭐 하는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19 판데믹 때문에 영화업계는 불안과 침체가 주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이래저래 만난 한국 영화들이 2020년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월 말, 2월 초 참가했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윤단비 감독의 < 남매의 여름밤 >이 밝은 미래 부문 상을 탄 것, 같은 곳에서 다른 한국 영화들의 활약과 함께 작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이 흑백 버전 월드 프리미어와 마스터클래스를 엄청난 열기 속에 마친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 곧이어 2월 초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전례 없이 비영어권 영화로 <기생충>이 최고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상을 휩쓴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였다. 세계인이 감탄한 가운데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LA 현지 시각 2월 9일) 끝나고 이틀인가 사흘 후, 연상호 감독과 < 반도 > 단독 인터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는 투자배급사의 밀폐된 유리 상자 같은 회의실 안에서는 마크스를 벗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진 일상에 오늘도 Zoom 화상 인터뷰가 잡혀있다.) 어쨌든 한국 안팎으로 2016년작 < 부산행 >이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에 이어 그 후속작인 <반도> 역시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후 여름 성수기 텐트폴 개봉의 수순을 밟을 것에 국제적인 기대가 이미 모아졌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2020년은 정말 신나는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11월 말, 12월 초 시점에서는 이게 다 올해 얘기 맞나 팩트 체크를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세상의 먼 과거 얘기가 돼버린 것 같다.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라는 말이나 ‘판데믹이 영화업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얘기가 빠지는 기사는 거의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극장 관객 수는 폭락했고 영화사들은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OTT로 직행했고, 칸 영화제도 취소한다 만다 한참 끌다가 결국 6월에서야 선정작 발표만 하고 물리적 영화제 자체는 취소하는 형태가 됐고, 앞으로 영화 제작과 상영은 잘해나갈 수 있을까 계속 불안하고 우울한 2020년이 돼버렸다. (그래도 일찍부터 세계 여름 동시기 개봉을 준비했던 <반도>는 그나마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잘 취한 한국 외 아시아 몇 개국 중심으로 개봉을 과감히 실행하면서 얼어 있었던 극장가를 어느 정도 녹여주었다. 칸 영화제는 열리지 않았지만 공식 선정작 목록에 오른 <반도>는 그것과 별 상관 없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례적인 흥행기록을 또 세웠고, 국제 영화업계는 그 행보에 주목했다.) 그리고 수개월 간 개막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부산 국제영화제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거리두기 및 방역 조치를 강화한 상태의 축소된 행사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는 영화제에 선정된 떠오르는 한국 영화 신인들 몇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고, 덕분에 신선한 장편 데뷔작들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 중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이란희 감독의 < 휴가 >가 기억에 가장 남는 영화 중의 한 편이다. 보통 취재를 위한 스크리너 링크를 받으면 당장 관람하지 못한다. 다른 일이 좀 없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가서 링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경우, 보내준 이에게 연락하기 곤란한 타이밍이다. 그래서 이메일로 받으면 “잘 받았습니다” 답신을 하기 전에 먼저 스크리너를 잠깐씩 틀어본다. 앞부분 크레딧과 첫 장면 몇 초가 잘 나오나 보고, 무작위로 중간쯤 계속 문제없이 나오나 한두 군데 정도를 틀어본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2-5초씩만 틀어본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맨 끝은 피한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번 부산 영화제 기대작으로 받은 스크리너들은 거의 다 불과 그 몇 초 안에 ‘아, 이 영화 좋을 것 같다’ 싶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 보고 났더니 실제로 이 불안하고 침체된 시기에 영화에 대한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맞았다. 신기해서 주로 취재 기자로 일하는 나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평론가 친구들에게 SNS상으로 물었다. 어떻게 몇 초 안에 영화가 좋다는 게 티가 나지? 무슨 연출력의 힘이나 미쟝센의 요소들이 결합하면 총 5초 내에 느낌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쟁쟁한 영화제 프로그래머들도 제대로 답을 못 해준 건지 안 해준 건지 그저 좋은 영화를 봤다니 기뻐해 주고, 기껏 해 봤자 ‘많이 보다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정도였다.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3초 동안 나오는데 ‘뭐 하나 동행해 보고 싶다’,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배경과 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2초 동안 보는데 ‘저 안에서 호흡해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무슨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그런 느낌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휴가>도 분명히 그런 영화 중 하나다. <휴가>는 중년의 해고 노동자 재복이 동료들과 함께 1,882일째 농성하는 날 해고 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 일단 장기 농성을 하던 차가운 노상의 텐트를 떠나 며칠간 재충전의 시간, 남들처럼 ‘휴가’를 가자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엉망이 된 집에 들어간 재복은 밀린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는데 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정을 비웠던 아빠가 반갑지 않다. 농성장에서 식사 담당인 재복은 집에서도 따뜻한 밥을 차리지만 애들은 외면하고 늘 먹었던 듯한 라면을 알아서 해 먹는다. 고3인 큰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합격한 대학에 낼 예치금이 필요하고, 작은딸은 롱 패딩 코트를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재복은 얼마 없는 휴가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친구가 관리자로 있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에 단편 영화 < 파마 >, < 천막 > 등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외 다수 영화제에서 기대주로 떠올랐던 이란희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감독은 2012년 실제로 어떤 기타 공장 해고 노동자 밴드 공연을 보고 그 멤버들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생각으로 취재하다가 결국 단편 영화를 몇 편 찍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장기 농성자들 중에 12년간 투쟁한 사람이 농성장을 중간에 떠났다가 몇 번이나 돌아온 것을 보면서 궁금해하다가 어떤 일을 하다가 왜 돌아왔는지 이해하려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이렇듯 재복도 가깝게는 함께 지낸 공장 동료들과 멀게는 더 큰 노조 조직들과의 연대 의식과 책임감으로 농성에 성실히 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재복은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 억울한 일, 어려운 일을 당한다 생각하면 없는 처지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우려 한다. 말주변이 없는 듯하면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소신을 갖고 말할 때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면서도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봉하 배우는 성실한 곰 같으면서도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재복을 연기하는데 가슴을 천천히 미어지게 한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것 같다. 덤덤하게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섬세한 순간순간과 사건들이 모여서 조용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게 있다. 스포일러를 쓰지 않고 이란희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칭찬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쨌든 시나리오를 받쳐준 노신웅 촬영감독과 한동훈 동시녹음 기사와 이연정 편집자의 역할도 꼽을 만할 것 같다. 분명 처음에 2~5초씩 스크리너를 돌렸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한 그 모습들이나 소리들도 감독의 연출 아래 그들의 공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큰딸 현희를 연기한 김정연 배우, 작은딸 현빈을 연기한 이승주 배우, 그리고 작업장의 젊은 동료 준영을 연기한 김아석 배우를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영화의 자라나는 연기자 풀이 메마르지 않음에 희망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영화는 10회차, 2월 18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촬영했다고 한다. (‘코로나19는 저희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한국이 난리 났었다’는 감독의 기억이 있다.) 주로 인천에서 촬영했는데, 한 회차는 서울 강남역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려다가 해고돼 복직을 위해 355일 동안 고공농성한 김용희씨가 아직 철탑 위에 있을 때의 농성장인데, 그 로케이션이 영화 속에 제대로 활용된다. 감독은 '노동 이슈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고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나도 평생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것 같다. 허투루 살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도리를 지키며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을 보살피려는 재복도 그런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양극화로 ‘좋은 인성까지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세습되고 있는 생각이 들더라’ 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만, 어쨌든 제도가 바뀌든 안 바뀌든 살아야 하니까 그럼 우리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뭘 가지고 여유가 있어서 나오는 에티켓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와중에도 이 일은 하는 내가 사람이니까 잘하려고 하는 고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재복은 누가 보든 말든 착실하게 정성껏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농성하느라 묵혔던 기술과 경력을 살려 가구 만드는 아르바이트에 임할 때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들처럼 휴가 때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픈 등에 파스를 붙여가면서 노동하는 것인데도 나름 품위가 있어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충 감이 왔겠지만 <휴가>는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가 아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다. 인천영상위원회, 한국영상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전주영화제작소 등 여러 단체의 기획개발, 제작, 후반 작업 등 각 단계별 지원뿐만 아니라, 밥을 날라다 주고 장소를 빌려준 지역 주민들의 성원 등 여로모로 지원이 들어간 작품이다. 영화업계 역시 양극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휴가>와 같은 독립영화들도 품위 있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족한 글을 몇 자 적어봤다. 가장 인간적인 작은 단위의 관찰과 동조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문제와 함께 좀 더 넓은 폭의 사회 문제도 곱씹어 볼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지원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지역이나 국가의 단체로서든, 개인 극장 입장권을 예매하는 관람객으로서든, 밥을 날라다 주는 이웃으로서든 말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영화계, 특히 극장 관람 문화가 빠르게 위축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다양한 문화생태계 구성원을 연결하는 영화제의 고민은 깊어져간다. 대부분의 영화관 상영이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고 ‘관객과의 대화’와 같은 부대행사는 길고 짧은 인터뷰 영상콘텐츠로 전환되었다. 나는 상반기 영화제에서 생산된 “온라인 GV”를 보면서, 영화제 참여자를 향한 감사함과 별개로, 그것에 대한 기획과 설계가 얼마나 오랜 시간 안일했는지 다시금 느꼈다. 매개에 대한 고민이 누락된 배치 위에서 성사된 관객과 대화하지 않는 ‘관객과의 대화’들이다. ‘질문하기’에 대한 논쟁도 합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제는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관객은 기꺼이 그 자리에 참여한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관습적인 어떤 것의 질긴 생명력을 질문할 때 그 대답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과의 대화’가 계속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가급적 긍정적인 방향으로 답변하고 싶다. 여전히 영화를 두고 궁금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계속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모든 관객과의 대화에서 제기되는 질문이야말로 어떻게든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가?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 작품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인가? 이렇게 몹시 진부한 질문들을 다시 읽어본다. 이 질문은 대화의 시작점인 동시에 도착점이며, 모든 사람이 물어볼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2017년 봄과 여름 사이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재중동포 영화감독 이홍매 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그곳에는 < 명태 >(2017)가 있었다. 가상의 재중동포 김수가 한국 정착을 시작하는 시기의 짧은 구간을 재구성한 영화다. 한편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 마이 리틀 텔레비전 >(2019)은 김씨 성을 가진 또 다른 주인공이 한 재중동포 가정을 방문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나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홍매 감독은 <명태>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도저히 비평을 시작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민은 아래와 같다. <명태> 하나는 재현의 정치학 관점에서 <명태>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레이어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명태>의 김수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김명학은 이홍매 감독과 성별이 다르다. 여성 영화감독은 여성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연출자 본인과 디아스포라적인 정체성을 공유하는 인물을 구성하는 과정 안에서 꼼꼼한 자기 반영을 의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반영성을 바탕으로 한 해석을 성립시키지 않도록 서사를 만든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김수와 김명학 모두 영화배우 강길우 가 맡았다는 것 또한 보다 섬세한 응시를 요구한다. <명태>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제작순서에 맞추어 하나의 타임라인에 놓아서 보면 배우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두 작품은 강한 연결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령 <명태>의 마지막 장면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첫 번째 장면은 조형적으로 흡사하다. 하지만 두 이미지 속에서 유일하게 같은 얼굴을 가진 김수와 김명학은 사실상 모든 지점에서 충돌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홍매 감독은 어디에 있는가. 인식할 수 없는 작품 속 어딘가에서 스크린 너머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가 항상 나를 비평의 시작점으로 돌려보내는 또 다른 이유는 스스로 비평의 자격을 점검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완결시킨 디아스포라 재현체제 안으로 <명태>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포섭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것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또 다른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있지는 않나. 나는 두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인가. 번역의 선행조건으로서 충분한 성찰과 자기비판의 시간을 가졌는가. 나는 이 글이 하나의 포부로 읽혔으면 한다. 작은 두드림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2020년 겨울은 한국영화사에 공포의 계절로 기억될 듯하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한국영화계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곳은 극장이다. 2월 마지막주 주말 관객은 전국 70만명 이하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더니, 2월24일부터는 일일 관객이 7만명대로 내려앉으며 사상 최저 관객 기록을 날마다 새로 쓰고 있다 2, 3월 개봉을 예정했던 영화들은 황급히 일정을 변경하고 있다. < 사냥의 시간 >, < 기생충: 흑백판 >, < 결백 >, < 이장 >, < 밥정 >, < 후쿠오카 > 등의 영화들이 개봉을 연기하고 계획했던 행사를 취소했으며, 3월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었던 영화들도 개봉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긴급 회의를 통해 배급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한편 한국영상자료원과 같은 공공 기관부터 아트하우스 모모, KT & G 상상마당 시네마와 같은 예술영화관까지 멀티플렉스 이외의 주요 영화 상영 시설들은 임시 휴관을 결정했다. 영화 주간지의 상황은 어떻냐고? 얼마 전에는 표지 촬영과 취재를 모두 마친 영화의 개봉이 마감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연기되는 바람에 ‘표지 펑크’라는 초유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식적인 외부 스케줄을 취소하는 인터뷰이들이 늘어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집안을 변동하는 애환을 겪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듣게 되는 영화사들의 상황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그동안 위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한국영화산업을 위협했지만, 체감상 최근 10년을 통틀어 이보다 더 엄혹하게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나 싶다. 코로나19 이후, 충무로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거라 짐작한다. <베테랑> 혹자는 물을 것이다. 지난 2015년 한국을 강타했던 메르스 사태 당시 한국영화계가 처한 국면과 지금의 상황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고.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급성 호흡기 질병인 메르스가 확산되던 5년 전 5월에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줄어들고 영화 쇼케이스, 제작보고회 등의 취소 및 개봉 연기가 이뤄졌었다. 하지만 감염병 위기 경보가 ‘주의’ 수준이었던 메르스 사태 당시의 극장가는 한달 이내로 관객수를 회복했고, 같은 해 여름 시장에서는 < 암살 >( 최동훈 , 2015)과 < 베테랑 >( 류승완 , 2014)이라는 두 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경보 단계가 최고 수위인 ‘심각’으로 격상되었으며, 확진자가 천명을 넘어 날마다 급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5년 전처럼 신속한 산업의 회복을 낙관하기 어렵다. 문제는 한국 영화산업의 전체 매출에서 극장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6%(영화진흥위원회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자료 기준)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 극장이 흔들리면 영화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1,2월 대한민국을 강타한 코로나19는 설 연휴 이후에도 박스오피스에서 흥행을 이어갔어야 할 설 개봉작들의 기세를 꺾었고, 위험을 감수하고 2월 개봉을 택한 한국영화 기대작들을 초토화시켰으며, 수많은 영화의 개봉을 다른 달로 미루게 함으로써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이후 개봉 예정작의 배급 스케줄을 꼬이게 만들었다. 이처럼 다수의 한국영화가 극장에서 기대치를 훨씬 밑도는 흥행 성적을 받았거나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된다면, 향후 제작에 들어갈 한국영화가 마주하게 될 투자 환경은 더욱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었을 경우 2021년 선보일 한국영화 라인업의 제작편수에 큰 변화가 예상되는 이유다. <암살> 디지털 온라인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중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다는 점도 향후 영화산업 지형도의 큰 변수가 될 수 있을 듯하다. 2019년 인터넷 VOD 시장 매출은 총 930억원으로, 이는 전년 대비 27.7%가 증가한 수치이며 OTT 서비스의 매출은 1년 새 32.7%가 증가했다.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고 관람하는 문화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온라인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을 강제로 돌려세우는 전염병의 확산은 쉽게 바뀌지 않는 관객들의 관람 패턴에 영향을 미칠 일종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으로서의 관람 경험을 유예하길 권유받고 온라인 플랫폼의 편리한 접근성을 누리는 데 익숙해진다면,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에도 관객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오프라인 극장을 찾을 것인가? 코로나19가 국내 관객들의 영화 관람 패턴에 궁극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사뭇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전국을 강타한 전염병이 한국영화산업 고유의 어떤 특성을 영원히 훼손할 만큼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행운과 연대와 결연한 의지가 두루 필요한 시기를, 지금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