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이퍼
- 감독
- 임초현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황효명, 진관희, 임현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정점은 2019년이었다. 2019년 한국 영화 및 해외영화 제작/수입 편수는 총 2,207편, 이 중 1,740편이 개봉했고, 다시 이 중에서 647편이 실제 극장에 걸렸다. 대략 하루에 5편의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공개되고 매일 1.8편의 영화가 실제로 극장에서 개봉한 셈이다. 여기에 프리미어 상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국고 지원 7대 국제영화제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상영한 영화는 장편, 단편 합쳐 총 1,432편. 이외의 상당수의 작은 영화제들과 다양한 상영회들도 프리미어 영화나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하곤 하니 이런 식으로 공개된 새로운 영화까지 다 합하면 이미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넷플릭스, 와챠 등의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오리지널 영화들과 독점 공개작까지 더하면 우리는 이미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는 영화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 2월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영화산업과 극장, 극장과 관객이 만나는 길목을 틀어막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걸 꺼리고, 관객이 없으니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개봉 영화가 없어서 관객이 극장을 찾질 않은 악순환은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대부분 축소 또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면서 상영작 수도, 참여 관객 수도 확연히 줄었다. 산업 구석구석에 이익을 분배하며 순환하던 영화산업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겨울과 함께 3번째 대유행이 시작되자 산업은 거의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IT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전통의 극장산업과 경쟁하던 OTT 플랫폼만은 이 와중에도 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순환이 멈추고 산업과 극장이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그동안 별로 상상해본 적 없었던 극장의 죽음에 대해, 극장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영화산업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명백히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산업의 위기다. 그러나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지난 10년간 영화산업은 일정한 틀에 맞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고, 극장은 모든 영화를 똑같이 대한 적이 없었다. 독립예술영화는 스스로 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화계 전반에 걸친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이후 코로나19로 초토화되어버린 극장을 지킨 태반의 영화는 산업과 자본이 만든 상업 영화들이 아니라 극장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립예술영화들이었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산업의 위기는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산업이 자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오른 질문.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다큐멘터리 전문 계간 웹진 <DOCKING>의 2020년 겨울호에는 지난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를 기억하는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씨의 글이 실렸다. (http://www.dockingmagazine.com/contents/21/177/) 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1970년 글라우버 로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클로스 얀초, 사이먼 하르톡이 로마에서 만나 정치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하르톡은 로셀리니가 '영화는 죽었다'는 말에 동의하는지를 물었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업이 사라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글라우버 로샤의 대답: “내 생각에 위험한 것은 바로 산업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유일한 예술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시나 소설을 인쇄하기 위해 편집자가 필요하더라도, 반면에, 각본은 출판될 수 없기 때문에,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화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970년 혈기 넘치던 최고의 청년 감독들이 통찰한 영화와 영화산업 사이의 모순은 20년 하고도 30년을 더 기다렸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19는 지금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의 결정적 요인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상업 영화 만이 살아남지 않겠냐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후 지난 125년간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왔다. 그 위기는 대부분 신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창작자들은 매번 실패를 반복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의 이 위기 역시 누군가에겐 절망의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것이다. 산업의 지형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영악한 지금의 산업이 쉽게 폐허가 될 리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영화든 예외 없이 산업일 뿐 아니라 창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는 폐허 속에 묻히겠지만, 어떤 영화는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지켜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일 년 내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골라낸 영화들을 담았다. < 공포분자 >(1986),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 라이트 하우스 >(2019), < 바쿠라우 >(2019), < 분화구의 두 사람 >(2019), < 애틀란틱스 >(2019), < 언컷 젬스 >(2019), < 트랜짓 >(2018), < 퍼스트 카우 >(2019), < 휴가 >(2020).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들의 리스트이며, 산업의 징후 같은 영화이거나 산업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이거나 산업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력을 이어갈 영화의 이름들이다. 리스트를 만들다가 다른 분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진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첫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분화구의 두 사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끈적이게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자유로웠고, 기묘하게 공허했으며, 기묘하게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가 공동으로 연출한 브라질 영화 <바쿠라우 Bacurau>다. 이 기묘한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건 클레버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전작 < 네이버링 사운즈 >(2012)와 < 아쿠아리우스 >(2016) 때문이었다. 사실 <바쿠라우>는 클레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줄리아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영화적 동료로서의 두 감독의 관계(줄리아노는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담했다)와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바쿠라우>는 실질적으론 클레버 감독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피칠갑을 한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봤던 몇몇 중요한 장르 영화에서 발견한 징후와도 같은 특징-가장 파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라우>는 <기생충>이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레 미제라블>과 함께 공동으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브라질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칸영화제 기간 꽤 화제가 되었고,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결국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작년과 올해 훨씬 더 화제를 되었을 영화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 <바쿠라우>는 각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바쿠라우>를 연출한 클레버 멘돈사 필루는 최근 10년간 등장한 남미 출신의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 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위쪽에 놓을 수 있는 몇 개의 이름 중 하나다. 남미 출신 감독으로는 2016년 이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68년생. 올해로 53세다. 20대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하며 영화평론가와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의 오프닝에서 볼 수 있는 CinemaScopio는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지만 평론가 시절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던 2012년, 첫 장편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 <아쿠아리우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직행했다.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수상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2016년 전 세계 거의 모든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 영화계와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 세 번째 장편영화 <바쿠라우>를 완성했고, 다시 한번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가상의 지명이자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향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공동체를 이끌던 고령의 흑인 여성 리더 카르멜리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식이 끝나자 마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역 정치인의 무능으로 진작에 수도가 끊긴 바쿠라우에 물을 나르던 물탱크 트럭이 총격을 받고, 통신 장애가 발생하고, 인터넷 지도에서 바쿠라우가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낯선 외지인들과 함께 원반 형태의 드론이 목격된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정치인의 사주를 받고 중무장한 미스터리한 백인 일당이 저지른 일이다. 이들은 마치 사파리에 가서 돈을 주고 사냥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냥의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살펴본 이들은 별 죄책감 없이 게임을 즐기듯 바쿠라우를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려 한다. 위기를 감지한 바쿠라우 주민들은 도망자인 트랜스젠더 룽가를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온 잔인한 이방인들을 처단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바쿠라우’는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17세기 브라질, 농장에서 도주한 노예(시마론 Cimarron)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 Quilombo’를 연상시킨다. 낄롱부를 건설한 시마론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를 결속시켰다.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를 돕거나 농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2천 개가 넘는 낄롱부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바쿠라우’는 ‘리믹스된 낄롱부 remixed quilombo’라고 할 수 있다. ‘바쿠라우’가 낄롱부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공간이라는 건 주민들이 밤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며 브라질의 전통 무예인 카포에이라를 추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인, 원주민, 흑인, 트랜스젠더 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이 의식을 통해 저항의 역사를 공유하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바쿠라우’는 가난하지만 존엄한 공동체, 저항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클레버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워드>(2010)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 카펜터의 인더스트리얼 뮤직 ‘Night’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에서 백인 일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공포 영화의 거장에 대한 이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쿠라우>는 마치 민족지 영화처럼 가상의 역사적 공동체가 놓인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1/3지점부터 장르 영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중반에 접어들면서 SF, 스릴러, 호러, 웨스턴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배경(선인장, 말, 총, 인종차별적 악당) 속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과 힘을 유지하며 정부의 무능과 부패, 식민주의의 모순 같은 정치적 주제까지 그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점점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폭력은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위협받을 때 권력과 힘에 저항하여 공동체를 지켜내는 필수 도구로 묘사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장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고, 평론가 출신의 클레버 감독은 이런 장르의 관습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유사한 장르 영화나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그러나 <바쿠라우>는 물론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장르 영화지만 오히려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여 완성한 강력한 정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9년 브라질의 남동부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지사는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장 요원과 스나이퍼들을 시내 빈민가에 은밀하게 배치하여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경찰이 더 많은 범죄자를 사살해야 한다면서 범죄자들을 재판 회부보다는 약식 처형(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숫자는 2019년 한해에만 하루 평균 5명, 총 1,81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쿠라우>가 담으려고 하는 건 동시대 브라질의 이러한 현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로 설정하여 ‘영화 속 현실이 곧 다가올 실제 현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가 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지역 정치인 토니 주니어와 그의 사주를 받은 잔인한 백인 그룹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극으로 영화를 끝낸 다음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검은 화면 위로 3줄로 된 자막이 뜨는데,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이 영화는 800개 이상의 일자리와 함께 국가와 문화, 산업의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창출했습니다.” 과거 국책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낯선 문구는 건조하고 단정하게 씌여있지만 칸영화제가 개최되기 약 4개월 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한 연설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자 풍자이며 냉소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쿠라우>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식의 정치영화는 아니다. 클레버와 줄리아노의 방식은 훨씬 정교하고 유희적이며 영화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창조해낸다. 특히 클레버 감독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고 압축된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능하다. 장편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는 감독의 고향인 헤시피의 한 중산층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동네 건물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 주앙을 중심에 두고 동네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 업체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마을의 미세한 변화를 담는다. 이 영화에서 쇠창살과 철제 대문, 감시 카메라와 사설 경비원 같은 현대적 안전장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적 모더니티는 이웃의 접근을 차단하고 중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동네는 피로 물든 식민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공간, 피로 물든 폭포 속에 선 지주의 후예인 주앙의 모습, 그리고 역사적 피해자의 후손과 지주와의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담아내고 싶었던 정치적 의미를 극적으로 창조해낸다. <아쿠아리우스>의 핵심 공간인 주인공의 오래된 빌라도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 클라라는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집을 자본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싸운다. 문화와 역사의 아이콘인 클라라의 고집과 싸움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영화는 유려하게 과거와 현재, 클라라의 집과 외부를 오가며 이 모든 걸 담아낸다. 클레버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공간의 실제 과거 사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적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헤시피의 옛 지명 페르남부쿠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연달아 보여주는 시퀀스로 시작하고, <아쿠아리우스>는 오버헤드숏으로 찍힌 해변 도시 헤시피의 과거의 모습 - 보아비아젱 해변의 모습과 오래된 차들로 가득한 길게 뻗은 거리, 거대한 고층 건물이 슬럼가를 대체하는 부감 쇼트의 흑백사진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쿠라우>에서는 마을의 작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과거 사진들과 리더 카르멜리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특히 <바쿠라우>는 공간의 지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남미, 브라질, 바쿠라우로 하강하며 좁혀들어오는 오프닝숏은 로컬리티가 고스란히 담긴 공동체를 세계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에서 시작되어 <아쿠아리우스>를 경유한 다음 <바쿠라우>로 수렴된 클레버 멘돈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의 세계는 시간이 축적된 영화적 공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함께 역사를 소환한 다음, 강력한 저항을 촉구한다. 이 세계는 영화적 전통과 관습, 현실의 로컬리티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기존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세계는 1970년 브라질의 선배 감독 글라우버 로샤가 가졌던 영화산업의 모순과 산업 논리가 가진 위험성, 이를 극복해야 하는 영화제작자의 숙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영화산업과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저항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떤 답변도 알아서 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장르 영화의 전통 속에서 저항과 투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담아낸 <바쿠라우>는 다시 한번,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 폭스트롯Foxtrot >(사무엘 마오즈, 2017)을 보자마자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 재빨리 추가했다. 이스라엘 감독 사무엘 마오즈의 두번째 장편영화인 이 작품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으로, 2018년 만날 수 있었던 가장 독창적이고 유려하며 감각적인 작품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 다시 볼 기회가 요원한 것 같아 아쉽지만, <폭스트롯>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웹상에 공개된 2분가량의 예고편( 유튜브 바로보기 )을 보길 권한다. 파트너 대신 총을 얼싸안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군인이나, 무장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한 마리의 낙타가 유유자적 통과하는 장면만 보아도 이 영화가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다층적인 맥락을 짐작할 수는 있을 듯하다. <폭스트롯>에서 일상과 폭력과 유머는 장면마다 뒤엉켜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종종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난감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은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슬픔과 무력감으로 전환된다. 이스라엘 사회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유려한 내러티브와 독창적인 비주얼을 통해 구현하던 <폭스트롯>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운명과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비극의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의 스케일을 확장한다.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경유해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러나 출발지에서 무엇을 상상했든 목적지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영화. <폭스트롯>은 그런 연유로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세 갈래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폭스트롯>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많은 부분을 빈칸으로 비워두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그 빈칸을 채워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건의 전말과 인물의 속마음이 공개되는 세 번째 파트에 가서야 관객은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텐션을 잃지 않는 연출자의 솜씨가 대단하다. <폭스트롯>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텔 아비브에 사는 부르주아 부부, 미카엘과 다프나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날 갑자기 비극이 그들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부부는 크게 상심하지만,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장례 절차는 그들에게 아들을 애도할 최소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부부의 집을 찾아온 군인들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미카엘과 다프나의 아들 요나단이 근무하는 이스라엘 북부의 국경을 배경으로 한다. 인적 없는 국경에서 요나단과 동료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따금 초소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이다. 전시 중의 국경이라기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는 요나단의 초소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총격 사고로 지옥이 된다. 세번째 파트에 해당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미카엘과 다프나 부부가 등장한다. 서먹해져 버린 그들의 관계는 영화의 초반부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서글프다. 사무엘 마오즈는 외상을 입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건 아마도 전쟁의 후유증을 크게 앓았던 그의 과거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오즈는 1982년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여느 청년들처럼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였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살아온 뒤로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모티브로 한 영화 < 레바논Lebanon >(2009)(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을 만들었다. 대부분 장면을 밀폐된 탱크 안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오직 포수(사무엘 마오즈 자신이 포수였다고 한다)의 스코프를 통해 탱크 밖 세계를 조명하며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라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관객이 세계를 보는 도구인 스코프는 <레바논>에서 한 치 앞 운명을 알지 못하는 군인들이 느꼈을 노이로제와 공포감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전작에 비해 내러티브와 공간의 폭이 확장된 두 번째 장편영화, <폭스트롯>에서도 역시 사무엘 마오즈는 챕터(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심리 상태에 조응하는 시각적 표현 기법을 명민한 감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챕터가 묘사하는 아버지 미카엘의 세계는 현기증을 유발할 정도로 단정하고 억압되어 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며 자학할지언정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목놓아 울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부모 세대를 둔 덕분이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미카엘의 부모 세대는 자녀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이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법을 가르쳤다. 아들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미카엘과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관객은 세대 간의 불발되는 소통과 그로부터 작동되었을 미카엘의 방어기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카엘과 달리 요나단의 세계는 지나치게 환상적인 필치로 묘사된다. 파스텔톤의 하늘과 황량한 벌판에 울려 퍼지는 낭만적인 재즈 넘버, 물 위에 비치는 군인들의 댄스 장면은 요나단의 세계를 전시 중의 국경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장소처럼 묘사하고 있다. 요나단과 세 명의 젊은 군인들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껴안고 춤을 추는 그들은 스스로를 온라인 사격 게임 속 스나이퍼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총을 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상처를 받을 일도 없는. 그러나 분명한 경고의 신호조차 감지하지 못한 그들은 환상에 젖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폭스트롯’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래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특성을 가진 춤의 이름이다. 사무엘 마오즈는 결말에 해당하는 영화의 세,번째 챕터를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던 아버지와 아들이 실은 같은 춤을 다른 방식으로 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건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죄의식이다. 마오즈는 극 중 요나단이 만화로 그린 미카엘과 요나단 자신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함으로써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이스라엘인들의 트라우마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운명의 작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운명에 부딪혀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폭스트롯>의 세 번째 챕터는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회가 직면한 전쟁과 그로 인한 희생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폭스트롯>처럼 잔인함을 전시하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다층적인 맥락과 독창적인 시각으로 비극의 연대기를 탐구하는 작품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폭스트롯>은 지난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실수로 아랍 청년들을 죽인 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극 중 장면 때문인데,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인 미리 레제브가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군대를 부정하며 젊은 세대를 선동하고 있다"며 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전쟁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며 ’점령의 미학’을 선보이는 영화라고 비난했다. 어찌 되었건 이 영화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끓게 만든 것 같다. 과거의 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스라엘 영화다. < 쇼아Shoah >(1985)의 감독 클로드 란즈만이 세상을 떠난 2018년, <폭스트롯>을 만난 건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우연이었다.
살부(殺父),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는 < 지구를 지켜라 >(2003)로 한국영화사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등장한 장준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지구를 지켜라>는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와 마니아 관객층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는데, 하나는 이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준환 감독이 그 후 10년 동안 장편영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이 그야말로 “또라이 미친 영화” 1) 를 기획하다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가 <화이>였다. 이 영화는 당해 비수기였던 10월 초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하여 23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2) 평단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채 애매하게 남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영화에 속한다. 그 이유는 주인공인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적(賊)의 간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살부가 재현되는 일은 있었으나, 관객이 호감을 가지고 공감하는 주인공이 그것을 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 화이(여진구)는 친부뿐 아니라 양부들, 그리고 개발독재의 수괴까지 모든 아비를 죽인다. 요컨대 <화이>는 아비를 정조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화이> 이전 한국영화사에서는 아버지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들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다. 근대 식민지가 되며 전근대에 속한 아버지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후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은 아버지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인의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하든, 독립운동에 투신하든 결과적으로 가족에게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제와 환유적 관계를 이루는 전근대 유교체계나 근대 민족의 주권이 붕괴되고 훼손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조선영화에서 아버지는 병자로 재현되곤 했다. 해방 이후에 잠시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출현하기는 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현실적 의미는 다시 무색해졌다. 전후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비를 부정하는 유럽의 젊은이들과 공감했다. 그러나 농경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적 가부장의 전통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사회에서 아비에게 반항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전후 영화에서 아버지는 부재한 것으로 처리되는 정도였다. 전후 재건이 본격화되고 민주적인 자유와 평등보다는 당장의 가난을 구원해 줄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지면서 한국영화에 다시 아버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무능하고 무책임하지만 근대 엘리트가 된 자식의 ‘효심’에 의해 소환되었다. 자식 세대는 전근대적 가치[孝]로 아버지를 존중하며 근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가부장을 꿈꾸었다. 이로써 아비 세대에 대해 식민지화와 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제대로 질문도 해보지 못한 채 봉합되었다. 이후 재건의 리더십이 다른 가부장을 허용하지 않는 폭력으로 전개되자 청년 세대는 폭력적 가부장에 의해 살해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가학-피학’의 경험은 합리화되고 피학이 가학으로 전승되는 질긴 고리가 형성되었다. <군번 없는 용사> 한국영화에서 그 고리를 끊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갖는 ‘살부(殺父)’가 재현된 것은 이만희의 < 군번 없는 용사 >(1966)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방군 유격대 대장을 장남(신영균)으로, 인민군 장교를 차남(신성일)으로 둔 아버지(최인현)는 장남 편에 서다가 차남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때 차남은 반공주의가 권장하던 일반적 인민군의 표상, 즉 단순한 패륜과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며 깊은 고뇌를 보여주어 반공주의의 이분법 도식뿐 아니라 부자관계의 재현 면에서도 작지 않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하고 개봉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하는 반공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설적이게도 반공영화이기에 극단적인 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3) <군번 없는 용사>가 나온 지 47년 만에 나온 영화 <화이>는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소년과 범죄자 양부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살부를 구현한다. 주인공 화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유괴했던 ‘낮도깨비’라는 범죄 집단에 의해 길러진 아이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친부모에게는 치명적인 고통을 안긴 이들이 양육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화이는 ‘화(火)’에서 쉽게 연상되는 불의 이미지 때문에 강렬한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이름은 반전의 의미 또한 내포한다. 그의 이름은 소년이 어린 시절 유괴되어 숨겨진 장소가 화이목 아래였다는 데에서 유래했는데, 사전적 의미로 화이(和易)란 ‘온화하며 까다롭지 아니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화이는 본성 면에서는 바로 그런 아이, 사철나무처럼 변함없이 푸를 것 같은 아이다. 그러나 그가 유괴되고 적의 손에 양육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화이에게는 분노와 복수로 타오를 불씨가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불씨는 어떻게 타오를 것인가? 이 영화는 이러한 질문을 관객과 공유하며 전개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은 파격적인 정면 돌파다. 화이에게는 6명의 아비가 있다. 생부(이경영)와 5명의 양부가 그들이다. 5명의 양부는 낮도깨비 조직의 5명의 범죄자들, 리더 석태(김윤석), 브레인 진성(장현성), 스나이퍼 범수(박해준), 사이코패스 기술자 동범(김성균), 말더듬이 드라이버 기태(조진웅)이다. 화이는 제도 교육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온갖 범죄 기술을 전수 받으며 성장한다. 그럼에도 화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여린 소년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괴물을 보곤 하며 미칠 듯한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는데, 석태는 오히려 그런 화이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물을 대면하라며 학대한다. 이는 화이를 자신과 같이 만들고자 하는 석태의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착을 괴물이 되어 버리면 괴물이 두렵지 않다는 경험적 ‘교육’ 논리로 합리화한다. 이는 ‘하면 된다!’ 식의 개발독재기 극기 교육을 상기시킨다. 석태는 진성이 화이를 유학 보내려고 하자 화이로 하여금 생부를 살해하게 하여 원죄의 굴레에 밀어 넣는다. 매우 극단적인 전개이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부모가 자식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몰아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심청전>(1925/1937/1956/1985)의 심봉사, <무정>(1939/1962)의 박진사(영채의 부친)는 자신의 안위나 신념을 위해 딸을 팔거나, 파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면 <사도세자>(1956), <사도>(2015)의 영조나, <연산군>(1961/1987))의 성종은 어떠한가? 또는 <황야의 독수리>(임권택, 1969)나 <서편제>(임권택, 1991)에 나오는 아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모두 자식을 죽음이나 광기로 떠밀었다. 그럼에도 아비의 폭력은 ‘자식이 아비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정당화되곤 했다. 이러한 정당화에는 아버지가 그르다 해도 자식이 아비를 거스르는 것은 패륜이라는 묵은 합의가 저류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버지 대신 자식이 속죄양이 되었고, 이로써 텍스트는 아슬아슬하게 봉합되곤 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화이>는 다르게 대응한다. 바로 아버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들을 죽이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화이는 생부(生父)를 시작으로 진성, 범수, 동범, 기태, 석태의 순으로 죽인다. 그런데 화이가 생부를 죽이는 일이 석태의 음모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화이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게 되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벽장에 숨어있는 엄마(서영화)를 석태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석태가 임형택(이경영)이 생부임을 말하지 않은 채 그를 쏘라고 명령했을 때 생부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너 혹시?”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화이는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나중에 경찰관들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추정하는 것은 화이의 위기 심리―눈앞에 선 이가 자신의 현(現)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인물임을 감지하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려 했음―를 말해준다. 그러기에 화이가 가장 친부에 가까웠던 아버지, 자신에게 음악과 교양을 가르치고 유학까지 보내려 했던 진성을 생부 다음으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전개이다. 모범적인 목사였고 유괴당한 화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던 생부를 살해하는 순간 화이가 디뎌야 할 기반과 지켜야 할 경계는 모두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이를 향한 다른 아비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화이와 반목시키는 측면에서도 이는 효과적이었다. 사격과 각종 범죄기술을 가르친 기능적 아버지인 범수와 동범은 진성이 화이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안 순간 화이가 자신들을 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화이를 잡는 데 매진할 수밖에 없다.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관습에 충실하게 두 아비는 화이가 불러들인 그들의 적에 의해 처치된다. 그리고 화이가 마주하는 아비는 기태다. 그는 가장 감정적이고 즉자적으로 화이를 사랑하는 아비이다. 유괴된 화이를 제일 먼저 안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가 본능적 온정에 움직이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런 면에서 그는 관습적인 모성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화이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화이도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화이가 올라간 고층 철조물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기태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에서 이 영화의 태도가 드러난다. 화이의 손을 잡고 허공에 매달리게 된 기태는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화이를 살리고자 스스로 화이의 손을 놓는다. 이때 카메라는 기태의 시선으로 추락하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여 철근이 솟아난 콘크리트 바닥에 그가 떨어져 온몸이 뚫리는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케 한다. 그리고 석태의 시선으로 그의 참혹한 죽음을 확인 사살하듯 목도케 한다. 이는 감각적 충격에 대한 영화적 탐닉이기도 한데, 그것이 가장 온정적인 아비 죽음을 보여주는 데 발동되었다는 것은 찌른 칼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이 영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화이가 기태를 죽이는 것을 본 석태는 화이의 생모를 찾아가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화이만 있으면 된다며, 화이에게 이젠 다 끝났으니 힘들었던 일은 자신이 다 정리해 주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석태의 왜곡된 열망과 집착이 결국 아비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했음이 드러난다. 그는 총을 든 화이에게 묻는다. “자 누굴 쏠 거야? 아빠야? 괴물이야?” 그러자 화이는 ‘괴물 아버지’ 석태를 쏜다.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화이가 ‘괴물을 쏜 아이’나 ‘괴물이 된 아이’는 될 수 있어도 ‘괴물을 삼킨 아이’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삼킨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입에 넣어서 목구멍으로 넘김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괴물에 대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이 괴물에 대한 주체의 복속이라면, 괴물을 삼키는 것은 주체에 괴물을 복속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화이는 신도시(명품 청화 골든시티)의 준공식에서 “싸악 밀고 도시를 새로 만든” 개발독재자 전회장(문성근)을 사살함으로써 ‘괴물을 삼킨 아이’임을 입증한다. 화이는 자신의 피학을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가학으로 전수하여 아버지와 같아지는 형태가 아니라 가학을 가해자에게 돌려줌으로써 ‘피학-가학’의 전승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2006년 < 괴물 >에서 2009년 < 마더 >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작업이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모성을 문제 삼고 있다면,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아버지의 신화를 깨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짝패를 이룬다. 그런데 봉준호 영화가 제기하는 모성의 문제가 현재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장준환이 내놓은 아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영화적 재현은 급진적이었다. 살부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문 상태에서 간악한 적이나 광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눈 맑은 소년에 의해 리얼리티가 확보된 가운데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2000년대 한국의 주류영화시장에서 이보다 더 급진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1) 《씨네21》 1136호, 2017년 12.26, 61면. 2)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통계정보 (http://www.kobis.or.kr/kobis/business/main/main.do) 참조. 3) <군번 없는 용사>에 대해서는 박유희, 「살부의 윤리와 핍진성의 기율: <군번 없는 용사를 통해 본 이만희의 영화세계」, 『영상문화』 19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15.12, 10-2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