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크
- 감독
- 웨인 왕, 폴 오스터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스톡카드 채닝,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하비 케이틀, 헤럴드 페리노, 애슐리 쥬드, 포레스트 휘태커, 윌리엄 허트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스티브 최(Steve Choe)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 이론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기초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영미권 출신 작가뿐만 아니라 박찬욱 , 이창동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감독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논문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그리고 논문 “The Paradoxical Universal of Korean Cinema(2022)”, “Park Chan-wook beyond Globalization(2022)”, “Sympathy for the K-Drama(2024)” 등을 집필했다. ※ 본 강의는 영어(순차통역)로 진행되었으며, 원 제목은 "Korean Cinema and English-Language Film Studies"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 미국과 유럽의 영화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반갑다. 나는 영화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필했고, 그중 한 권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다. 오늘은, 대학원을 시작으로 영화학계에서 내가 학술적으로 전개해 온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국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연구는 바로 이 책, Sovereign Violence (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로부터 8~10년 전부터 이미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2007년에 박찬욱 감독에 관해 쓴 에세이가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국영화에 대해 영어로 작성된 연구 결과물이나 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 또는 감독이 중요한지,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론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한국영화의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독일영화라는 나의 연구 분야를 토대로, 한국영화 연구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학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위에 언급한 책은 1960년대에 출생한 감독들의 작품이,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 제기된 윤리적·도덕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흔히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1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의 시간 동안 발표되었고 비평적 접근 역시 가능한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관련 감독들은 1996년 즈음 처음 개막한 국내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들에서 출품한 작품을 바탕으로, 일부 고전영화가 과거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나 도덕성을 교육했던 방식 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장르의 일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 감정적 공감 ’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구조로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복수를 다루는 작품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관객이 어떻게 영웅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고 악인에게 이입하지 않게 되는지, 과거의 상업영화가 이러한 공감 구조를 어떻게 직조하는지를 포착해 비판한다. 멜로드라마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시절, 내가 훈련받은 학술적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지도교수님들 중 한 분이셨던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 교수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영화계의 맥락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재정의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예를 들어,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편견이 투영된 인물에게 관객이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 등을 연구하셨다.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맞게 맥락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국의 도덕성과 정의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적’ 가치나 도덕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측면에서는 진보 세력이 보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또는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한국고전영화 와 할리우드영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국내 영화인들이 작품 연출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린다 윌리엄스 교수님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요소라고 말씀하신) 기존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 이입 방식과 연관 지었다. 마치 사진이 찍힌 것처럼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엿보이는 사고(Thinking)의 방식 이 궁금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미국에서 지냈기에, 일생 동안 미국식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미학 이론에도 관심이 있어 니체, 프로이트, 앙리 베르그송, 푸코 등으로부터 비롯된 논의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영화와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첫 주에는 <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더그라스 서크, 1955)이라는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작품에 대해, 그다음 주에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에 대해 배웠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파스빈더와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의 형태로 리메이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영화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되 그 바깥의 무언가를 달성해 낼 수도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영화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고자 채택해 온 방법론 역시 이때 깨달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1955) (사진: "All That Heaven Allows", IMDb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사진: "Angst essen Seele auf", IMDb ) 현재 미국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아도르노가 전개한 문화산업론에 여전히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대중을 조작하고 감상성을 내세운 상업영화는 기피하고, 비판적 시선을 담지한 내셔널 시네마와 같이 섬세한 예술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나 역시 아도르노의 이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어 자체가 ‘재생산’ 또는 ‘대중문화’ 같은 개념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문화가 어떻게 상업적이게 되는지 ,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되는지 (소위 ‘나빠지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부 재학 중 관련 주제로 아도르노와 베토벤에 관해 논문을 썼다(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곡한 곡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면서도 시장의 자본주의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연극이나 문학과는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논의되곤 했다. 특히 영화가 처음 등장한 1895년부터 유럽의 예술영화가 주목받은 1920년대 사이에 이러한 논의는 두드러졌다. 영화만의 차별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 생동감 있는 움직임 ’이다. 비인간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 골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19)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항상 ‘ 죽음 ’의 개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영화인들의 작업에는 죽음이나 무생물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고, 오히려 이들 자체가 영화의 특징인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고, 말씀드린 알레고리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짚어내며 연구를 진행했다. (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우) < 노스페라투 >(1922)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집필한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에 관한 책 한 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작년에 작고했으며 < 프렌치 커넥션 >(1971), < 엑소시스트 >(1973), < 소서러 >(1977) 등의 작품들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올드 할리우드’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이 해제됨에 따라 예술영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영화, ‘ 뉴할리우드 ’를 개척한 감독들 중 하나이다. 이런 뉴할리우드의 경향은 내셔널 시네마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투자금 유치, 검열 완화 등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나 재현 방식을 반영한 영화가 탄생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했다. 영화 영문 연구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 이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학에 관한 주요 쟁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학의 특성과 소재가 변화하는 양상을 다뤄볼 수 있다. 영화학 연구의 영역은 점차 미디어 분야로 확장되며 학문 자체가 ‘ 매체학 ’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영화연구는 매체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접근과 더불어 미디어가 사회 기반시설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주변세계(umwelt)에 더욱 주목함에 따라, 이제 영화학계에서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 즉 네트워크, 클라우드, 플랫폼 등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특정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작성된 계획안, 공연에서 스모크 머신을 사용한 방식, 미술 전시에 쓰인 공간 등 개별 작품이나 작가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한 요소들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데, 이를 통해 국내 매체의 기반시설을 영어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학에서의 한국영화 연구가 대개 ‘ 한국학 ’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학계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을 포함한 동아시아학, 즉 미디어학이 아닌 특정 문화권 관련 언어문명학부에서 연구된다. (북미와 남미, 유럽 지역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역시 이러한 학문 분과의 특성에 맞게,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 (팬문화 연구 등)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법이 도입되는 사례가 드물어 아쉽다. 나는 SNS를 통해 팬들이 생성한 해시태그 개수를 측정하기보다, 보다 인문학적인 관점 에서 국내 미디어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본 강연을 진행하신 다른 연구자분들께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심의 방법론을 지향해 영화를 연구하고 계신 데 경외를 표한다. 사실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지만, 해외 학계의 제도적·언어적 장벽, 경제적 지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매번 동아시아학 관련 분과에 소속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인간, 윤리, 도덕,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기반 등에 관한 커다란 질문 에 답해야 한다. 나 역시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라는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로서, 최근에 투고된 국내 영화배우 문예봉 에 관한 글과 같이, 한국 출신 인물이나 한국에 관한 기타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매체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더욱 받아보고 싶다.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한국드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정서적 막간 위의 내용을 마무리하며, 이제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관한 나의 최근 관심사로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연구자 이민주는 한 논문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며 발생한 초국가적 미디어 및 관광 현상으로서의 한류를 설명한다. *주1 그는 기술이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 감정 ’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도르노는 감정은 가치 없고 상업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는데, 그의 관점대로라면 보는 이의 감정을 상업적인 의도로 북돋는 콘텐츠가 가득한 최근의 뉴스와 미디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수많은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이 갖가지 감정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발생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드라마’는 감정과 미디어의 관계 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한국드라마가 감상자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데 특화되었다는 점에는 많이들 공감하지만, 이 감정이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관련하여 내가 소개하고 싶은 개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 ’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거나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말한다. 인물들이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안겨 준 다른 인물을 회상하는 등의 장면에 주로 사용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감상적 의미가 부여된 소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음악은 감상자가 리듬에 맞춰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한다. 여기서만큼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이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1920년대의 독일영화들처럼,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장면(단 한 장면일지라도)을 통해 모든 의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국드라마 특유의 기법은, 감상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강박적일 정도로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물의 여왕> 중 (사진: tvN ) 예를 들어,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백현우( 김수현 )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홍해인( 김지원 )에게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서적 막간이 자주 사용되곤 했다. 홍해인이 본래 백현우가 사랑한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인물이며, 그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백현우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흐르는 음악과 슬로우 모션의 반복 등을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정서적 막간은 이렇게 인물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더라도 사실 연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계기로 관객이 그의 진심에 이입하게 만든다.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 대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 밀착해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박사 과정 중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떠올렸던 질문, 즉 미학적 측면에서 특정 작품의 관객은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드라마에 대한 연구 전반의 다양성과 깊이가 향상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정지현, 2022) 속 정서적 막간 역시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팬들이 한국적 감성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백이진( 남주혁 )은 화면이 분할된 경계를 넘어 나희도( 김태리 )의 손을 잡고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고, 등대를 향해 뛰어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진이 과거에 남긴 음성메시지를 희도가 반복적으로 듣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는 공중전화기를 매개체로 설정한 이 장면은 더더욱, 팬데믹 기간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던 이들의 시공간을 이어준 미디어 기술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장면의 시간적 배경 역시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으로 설정함으로써, OTT 플랫폼을 이용하는 수많은 해외 감상자들이 한국인들만이 느낄 수 있던 감정과 애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는 물리적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그리고 나희도는 음성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기 위해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계속 누르고, 그가 눈물짓는 모습 역시 소프트 포커스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은 사실 한국인들의 감정을 아카이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기 위해 이용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매체의 생태학과 연관된 측면 역시 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극장상영 문화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스트리밍’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의 중요성 한국영화의 영문 연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강연을 마치고 싶다. 젊은 학생이나 연구자들이라면,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물론 기존에 발표된 논의를 많이 살펴보고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유의미한 질문들이 빠져있을 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방법,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 정의에 대한 이해,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같이 아직 충분히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에 집중해보자. 한국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에 한해서는 특히 ‘감정’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영역인 만큼, 한국인들이라서 더욱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적인 학술 프로젝트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영화나 미디어와 관련해 주로 연구하고 계신 윤리, 도덕성, 감정 등은 상당히 초국가적인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근접한 개념 을 활용해 이를 연구하신다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을 듯한데, 관련하여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동시에,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초국가적 콘텐츠가 되면서 다른 국가의 콘텐츠 창작에 발휘하는 영향력 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답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국가성을 띤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연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주제를 연구할 때 주로 참고하는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1980)로, 바르트는 여기서 사진에 항상 죽음과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논의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촬영된 어머니의 사진을 다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필을 이어간 시점에서 해당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사진이나 영상의 이면에는 ‘ 인식 ’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영화를 연구했으면 한다. 이미지에 대한 빠른 소비는 오해와 오독, 정치적 편향을 낳기 쉽다. 어떠한 인식을 전제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바르트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를 드러낼 수 없는 사진만을 주제로 위 논의를 이어갔기에,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품고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콘텐츠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국가 또는 남성주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연구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사실 최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초국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창작자들이 한국 콘텐츠를 얼마나, 또 어떻게 모방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감정’의 발생을 강조하는 한국드라마나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러티브에 잠재된 감정 전달 능력을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해당 연구 주제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 미디어 ’와 관련된다고 이해해할 수 있다. (질문2)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인지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작품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해외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지역을 북미 로 한정한다면, 북미 내에서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어떤 방식과 비전 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학술지를 편집하다보면,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로 한 원고가 최근 상당히 많이 투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들은 대부분 인도나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고, 영어권 필자들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 이유가 근래 한국영화의 중요도가 낮아져서, 혹은 K-팝이나 한국드라마를 분석하는 방법론이 여전히 모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연구자들이 과거에 학계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이제 구시대적인 방법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연구 방법론 을 찾고, 최근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인 동시대 한국영화 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발표된 상업영화들은 아쉽게도 ‘상업영화’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영문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시작하여 텍스트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3)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서 올드 미디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비디오테이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한국드라마와 K-팝(뮤직비디오)의 미학적 정체성 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더불어, 시간의 정치성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독일과 미국, 한국의 영화를 다루심으로써 초국가적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발생한 시대에 근대적 및 전근대적 요소를 비롯한 이질적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개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한데, 세 국가의 시간성을 어떻게 병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지 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데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 정서적 막간에서만큼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과 이미지가 관계를 맺음 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공간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자체로 초국가적이면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요소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연구에 임할 때 내 자신을 ‘지식인’으로 설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급해주신 블로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비껴간(untimely) 세계 에서 지식인 으로서 활동하며 세 국가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보다 동시대 학생들이 주목하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 연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독일 분과의 유일한 한국인’ 또는 ‘영화학과에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학생’과 같은 신분이었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국가나 문화권의 이론을 참고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감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사실 아직 ‘외부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의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현재 본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연구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과거에 연구를 시작한 시점의 나 역시, 미국에 위치한 한국계 지식인으로서 내가 가졌던 관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 해석해주신 점이 정말 흥미롭다. (질문4) 현재 비교문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중, ‘한국드라마’를 소재로 설정한 이들은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연구를 위한 적당한 방법론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영화처럼 분절된 텍스트가 아니기에 드라마 특유의 연속성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상업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비평적으로만 독해해서 단순히 문화산업의 산출물 중 일부로만 취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라도 한국드라마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래서 어쩌면, 드라마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연구 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굳이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주체는 외부인 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답변) 나 역시 수업 중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한국드라마의 어떠한 부분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출신 국가는 물론 성별이나 연령이 다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특정 작품이나 장면을 인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으로서, 외부인이 특정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참여 관찰법 (Participant observation)에서와 같은 태도를 갖춰 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인 연구자들의 드라마 감상 후기에 대해 직접 문의하고 대화 함으로써, 그들이 한국드라마에서 새롭게 짚어낸 지점을 발견해보자. *** 주1. Min Joo Lee, “Touring the land of romance: transnational Korean television drama consumption from online desires to offline intimacy”, Journal of Tourism and Cultural Change , vol. 18., No. 1., 2020, pp. 67~80.
한국영상자료원에서 3년째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와 그 중 한 작품에 관해 쓰는 ‘사사로운 영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고민을 좀 했다. 지난 한 1년 간 웨인 왕 감독의 < 커밍 홈 어게인 Coming Home Again >이라는 영화에 어쩌다 익세큐티브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괜히 자기 영화 홍보하는 것 같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당연히 올해 나에게 이보다 더 사사로운 영화는 없다. 솔직히 ‘홍보라고 해 봤자’라는 생각도 든다. <커밍 홈 어게인>은 9월 토론토 국제 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 한 후로 각처의 영화제 초청과 언론의 호평을 받고는 있지만, 각처의 수입사와 배급사에서는 지금까지 고사하는 상황이니 뭐…… 그래, 그냥 주제에 맞게 ‘사사롭게’ 쓰자. 지금 다른 영화 얘기할 머리 상태도 안 된다는 것도 인정하자. 거의 1년 간 내가 사는 서울과 감독님이 계시는 샌프란시스코의 시차 17시간을 두고 일하다 보니 심각한 수면 부족으로 (면역성은 물론이요) 뇌세포도 많이 상한 것 같다. 한창 후반작업 중일 때는 거의 잠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아마 관타나모 같은 데서 나 보고 테러리스트라고 고백을 하라고 부추겼더라면 당연히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해 없이 8시간만 쭉 자게 해주세요” 하면서 테러리스트를 자처했을 법한 정신적 누더기 상태가 됐다. (문제는 내 본업이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부국장이자 한국 통신원이라는 것 – 그러잖아도 낮에는 아시아 일을, 저녁에는 런던 본사와 소통을, 아주 늦은 밤에는 새벽 잠이 없는 감독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깨셔서 하루 일을 시작하는 식이었다. 급한 불 끄고 해놓을 수 있는 연락은 일단 다 취해놓고 서울 시간 새벽 5~6시쯤 지쳐서 ‘그만!’ 하고 외치고 서너 시간 자던가 말던가 하고 다시 일과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얘기해볼까 한다. 웨인 왕 감독을 만난 건 작년 이맘때 ‘사사로운 영화’ 원고를 쓸 때 즈음, 도쿄 필름엑스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같이 하면서였다. 아마 심사위원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로 허심탄회하게 영화와 커리어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을 깊이 공유하고 논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감독님이 연출하신 예술영화도 좋고 할리웃 대중영화들도 다 뭔가 결이 다른 데가 있어 좋아요”하는 정도의 말쯤은 했었겠지만, 영화제 카타로그에 내 약력이 나온 걸 보고 한때 LJ 필름이 CJ 엔터테인먼트와 합병했을 때 글로벌 프로젝트팀 프로듀서였다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추가 질문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사를 같이 하다가 밥도 같이 먹고 리셉션도 같이 가고 하면서 그냥 저냥 얘기하다 “왜 프로듀싱을 계속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때 기획개발에 일조는 해도 과연 이 영화들이 나를 꼭 필요로 하느냐, 필요로 한다 쳐도 내가 몇 년 동안 그 영화에 110%를 바쳐도 보람이 느껴질까 하는 두 가지 질문을 하다가 ‘스크린 인터내셔널’ 한국 통신원 자리가 열려서 원래 하고 싶기도 했던 기자 일을 택했다”고 했다. 그게 2005년이었는데, 그 사이 출판업계 상황이 한창 안 좋아진 것도 당연하지만, 나란 인간에게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분도 감지하셨을 것 같다. 요즘 영화인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웨인 왕 감독의 < 스모크 Smoke >’(1995)는 제 인생의 영화예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할리웃 최초로 아시아계 미국인 주인공을 두고 대중적 인기를 얻은 < 조이 럭 클럽 Joy Luck Club >(1993)이나 제니퍼 로페즈와 레이프 파인즈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 러브 인 맨하탄 Maid in Manhattan >(2002)으로 웨인 왕 감독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 영화들 다 좋아한다. (특히 <러브 인 맨하탄>은 비슷한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로맨틱 코미디로 따지자면 더 유명한 < 노팅 힐 Notting Hill >(1999) 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낫다 생각한다. 이 쟁점을 갖고 가볍게 한판 붙을 자신은 있다. 잠 좀 자고 뇌세포가 회복되고 나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왕 감독 영화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천년의 기도 A Thousand Years of Good Prayers>와 그 작품과 짝으로 만들어진 <네브라스카의 공주 Princess of Nebraska>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리이윈의 원작을 영화화 한 작품 두 편인데, 2007년 하와이 국제 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으로 나란히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걸 감독께 말씀 드렸었다. 그래서 그러셨나? 한국계 미국인 이창래 작가의 자전적인 글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있다고 귀띔해주셨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 The Surrendered>나 <영원한 이방인 Native Speaker>, <가족 Aloft>, <척하는 삶 A Gesture Life>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아니고, 저명한 <더 뉴요커 The New Yorker> 잡지에 실렸던 단편 에세이 같은 것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그때 동경 오기 전에 며칠 만에 찍고 가편집본을 만들고 있는데 한 번 보겠냐고 하셔서 당연히 영광이라 했다. 영화제가 끝나고 얼마 후, “나에게 아주 개인적인 영화”라는 간단히 말씀 한 줄 적고 스크리너 링크가 든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색보정이나 사운드 등등 후반작업은 하나도 안된 가편집본이었지만 너무 좋았다. 위암을 앓는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월 스트리트의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샌프란시스코 고향집으로 돌아온 아들 ‘창래’의 이야기였다. 창래는 자라면서 엄마가 늘 - 특히 미대륙을 횡단해 있는 엑서터 기숙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 해주던 갈비며 전, 잡채 등의 한국 전통 요리를 죽어가는 엄마에게 배우면서 마지막 섣달 그믐날 가족 식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위암 말기의 엄마는 씹어서 삼켜도 바로 토해낼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아들은 자기가 차린 음식을 엄마가 먹어주길 바라는 것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창래 역에는 <트와이라잇 Twilight>에 개구장이 십대로 나왔던 저스틴 전 (Justin Chon)이 다 자라서 나왔고, 엄마 역에는 주로 연극계에서 활동 하고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등의 테레비젼 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했던 재키 정 (Jackie Chung)이 절제된 명품 연기를 했다. <커밍 홈 어게인>은 죽어가는 부모를 간호 하면서 희생하기도 하고, 음식을 배우면서 소통을 하기도 하는, 그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동안 쌓여있었던 가족 간의 갈등도 회상으로 나오고,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아직은 젊은 엄마를 잃을 것을 당면한 자녀의 자기중심적인 잔인함도 깃들여 있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거나 이타적으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심사위원을 함께 하면서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간단히 “잘 봤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자세한 피드백을 솔직히 드려야 예의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고백했다. 위의 얘기를 하면서 친척 중에 항상 명절 때 손수 모든 요리를 하시고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던 한 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옆에서 봤던 가족들의 모습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당면한 본인이 어떨 지에 대한 생각보다 자기가 곧 직면할 상실감을 감당 못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 모습들, 당시엔 납득할 수 없어 긴 세월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는 걸 말씀드렸다. 그리고 영화 속 한국계 미국인들의 모습도 좋았다고 말씀드렸다. 한국인인데 한국에서 나서 살기만 한 한국인과는 좀 다른 행동과 반응을 하는 것을 영화에서 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어렸을 때 미국에서 한 8년 자라면서 봤었던 이들이 스크린에 살아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예를 들어, 가정 방문한 교회 아줌마들의 성경찬송과 H-라인 스커트와 브로치 – 너무 전형적으로 익숙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는 익숙한 기독교적 위안에 전형적으로 착한 한국인 아들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 창래의 반응이 신선하고 좋았다. 캐스팅도 대사도 연기도 너무 훌륭해서 아빠로 나오는 존 리 (John Lie)가 처음 나와서 “창래야” 하는 순간부터 이 인물이 누군지 파악이 될 정도였다. 아마도 나름 미국 사회에서 많은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권위가 있으나 집에서는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한국 남자 어른. 이런 심각한 감정적인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국 남자 어른. 한때 이문세 노래 하나로 불륜이 걸렸음에도 계속 학자적인 ‘썰’을 푸는 한국 남자 어른. (코미디가 아님에도 이 영화에서 제일 코믹한 인물이기도 하다.) 누나로 나오는 크리스티나 줄라이 김 (Christina July Kim)도 화면에 나오는 순간부터 완벽한 인물 재현을 한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꾸리다가 비행기 타고 날라와 엄마의 치료를 끊겠다는 결심을 반대하며 항상 자기 보다 총애를 받던 남동생에게 편들어 달라고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딸. 곧 비행기 타고 가부장제의 나라에 돌아가서 또 진급을 투쟁하듯이 찾아나서야 하는 한국계 미국인 여자. 딱 아는 사람 같았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났더니 감독님과 <커밍 홈 어게인>의 국제 영화제와 시장에서의 난점과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됐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와 또 공감하지 못할 사람도 많을 것이라는 점도 공유했다. 절제된 표면 밑에 깊은 감정들이 흐른다는 점이 강점이지만, 절제성 때문에 폭넓은 대중성을 갖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도 얘기 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실제 프로듀서 도날드 영의 돌아가신 할머니 댁이었던) 한 아파트 안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이 작품을 ‘체임버 피스’라고 좋게 말할 수 있으나 ‘스펙타클’하지 않다고 흠 잡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얘기 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수입사에서 얘기 한 것처럼, ‘겉모습은 한국인인데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이런 데서 기대하는 한국적 멜로나 신파가 아니어서 마케팅하기 애매하다’는 평도 예상 했으나, 어쨌든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가 있는데 스크린에 다양한 한국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좋았다는 것도 얘기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에 대한 신뢰와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램을 공유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감독님은 익세큐티브 프로듀서 크레딧을 받고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본 촬영이 끝난 작품에 뒤늦게 합류하면서 그런 크레딧 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아직 기자 일을 포기할 수 없으니 ‘어쏘시어트 프로듀서’나 ‘공동 프로듀서’ 또는 ‘컨설턴트’ 같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만한 크레딧을 차라리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렇게 합의하고 전화 끊은 후 이메일 몇 번 더 주고 받으면서 샌프란시스코 팀은 추가 씬 촬영과 후시녹음 등을 한 후 새로운 편집본을 보내왔다. 이번엔 간단히 "언짢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익세큐티브 프로듀서 크레딧에 네 이름을 넣었다”는 한 줄이 들어간 이메일에 스크리너 링크가 왔다. 솔직히 좀 곤란한 건 사실이었으나 웨인 왕 감독 같은 거장이 분명 다른 프로듀서들과 논의 끝에 결정해서 크레딧에 넣었을 것을 알면서 거기에다 대고 뭐라 말하겠는가? "영광입니다. 크레딧에 부합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엮인 거다. 그 후로 후반 작업에 의견을 내는 일 외에 크게는 이문세 ‘옛사랑’ 노래 판권을 구하는 일, 국제 세일즈사를 구하는 일, 영화제 출품을 돕는 일 등을 맡게 됐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에다간 편집장에게 양해를 받았다. 리뷰를 쓰고 에디팅 하는 동료들은 기사가 완성 되고 나서야 내가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됐다. 솔직히 리뷰에 대한 걱정은 안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이 동료는 작품이 마음에 안 들면 가죽을 벗겨 회를 치는데’ 하는 노파심이 살짝 든 건 사실이다. 나중에 영화를 너무 잘 봐주고 좋은 평 써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네가 관여한 작품인지 몰랐다’며 진정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커밍 홈 어게인>은 9월 토론토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할 때 여러 호평을 받았고 심지어 평론가 중의 한 명이 기자 시사 나오면서 트위터에 ‘눈물을 양동이로 들고 나오느라 동료 기자들에게 사과해야만 했다’는 식의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남자들이 엄청 울었다는 반응이 기억난다. 상영 전에 왕 감독이 “내가 할리웃 영화 만들 때 스튜디오 관계자들이 편집의 속도를 점점 급하게 가자고 다그쳤었다. 잠시라도 관객이 숨을 들이쉬거나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을 주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도 숨쉬는데 어려움을 신체적으로 겪게 됐다. 의사한테 가보니 요가를 해보라고, 숨쉬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 때 관객이 숨을 쉴 수 있고, 각자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만들었다”고 했다. 등장 인물들뿐 아니라, 그들의 환경, 소품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호흡하고 생각할 겨를을 많이 주는 영화다. 아시아 프리미어는 10월 부산 국제 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하게 됐다. 그런데 마지막 후반작업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으시고 토론토에서 두 번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하시고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한 끝에 집에 돌아가신 왕 감독은 발병해 결국 부산에 못 오셨다. 솔직히 프로모션 측면에서 말하자면 재앙 같았다. 부산 영화제 24년 역사에 갈라 상영 때 감독이 안 나타난 일은 우리 영화가 처음이었다. 항상 젊게 사시는 왕 감독이 1949년생이라는 걸 이때 상기했다. 그래도 명품 연기를 한 재키 정이 임신중임에도 보석 같이 나타나서 부산 상영 때 ‘가족 영화인데 남편과 아들과 곧 태어날 아들과 함께 부모의 나라인 한국에 와서 상영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하면서 관객들을 사로 잡기도 했다. 남편은 <커밍 홈 어게인>의 중요한 조연으로도 나온 루이 오자와 장치엔 (Louis Ozawa Changchien)이다. 곧 아마존 프라임에 나올 <헌터스 Hunters>’이라는 아카데미상 후보자였던 조던 필 (Jordan Peele)이 제작하고 알 파치노 (Al Pacino)가 나오기도 하는 나치 추적 시리즈에서 볼 수 있게 될 배우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히 그렇고 나름 프로덕션과 영화제 입장에서도 큰 일이었기에 뱃속 아기가 몇 주 빨리 나오면서 부산에 계획보다 오래 머물게 됐다는 점을 안 쓸 수 없다. ‘부산 국제 영화제 1호 베이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부산에서의 많은 일은 프로듀서 스쿨에서 배운 적이 없는, 간단히 줄여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하겠다.) 그리고 유럽 프리미어는 11월 말, 에스토니아의 탈린 블랙 나이츠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했다. 여기 다녀오느라 이 원고가 좀 늦어진 점이 없지 않아 있다. 혼자 가서 영화를 소개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등등 일정을 마치고 (버스로 4시간 반, 비행기로 50분 가량 떨어진) 같은 발트해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는 친구 집에 가 있는데 “만세! 빨리 탈린으로 돌아와”라며 우리 영화 리챠드 웡 (Richard Wong) 촬영감독이 최고 촬영감독상을 타게 됐다는 소식을 이메일로 받았다. 빨리 미국에 있는 리챠드한테 비디오 인사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얼른 탈린으로 돌아와 대리 수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영화 속 촬영은 현재 시점의 장면들은 다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와이드 샷으로 찍었고, 회상 장면은 다 조금씩 흔들리는 핸드 헬드로 가까이 다가가 찍었다. 색깔도 회상 장면들은 조금 더 따뜻하게 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첫 테이크였던 것도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탈린 블랙 나이츠 영화제 경쟁부문은 <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3) 마이크 뉴웰 (Mike Newell)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심사평에 “우아한 미니멀리즘으로 스토리의 긴장과 드라마를 이미지로 표현하고, 물리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좁은 공간을 통해 프레이밍하여 인물들의 절망을 신중한 눈으로 옮기고, 영화 촬영 예술이 어때야 하는지 대담한 비전을 전달하는 능력”을 높이 사 시상한다고 했다. 스펙타클한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영화 촬영 예술이 어때야 하는지 대담한 비전을 전달한다”고들 한다. 시장성이 어떻던 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수 있을 영화라 생각한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