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밍 풀
- 감독
- 알렉산드라 헤트메로바
- 제작년도
- 2010
짧은 여행의 기록 1-1: 파주행 성공한 사람 곁에는 성공한 사람이나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실패한 사람 곁에는 실패한 사람이나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외톨이 곁에는 외톨이만 모인다. 구분하자면 나는 외톨이에 가깝다, 라는 말로 오한기는 [바게트 소년병]을 시작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지만. 나는 지금 파주를 향하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피치포크 선정 90년대 최고의 노래 250곡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늘 그런 것처럼 내가 가야하는 장소가 파주가 아니라 블레인 카운티라는 가벼운 착각 속에서… (좌: T맵, 우: [GTA5] 맵) 하지만 그곳에는 샌디 해안이 없고, 칠리아드 산이 없다. 보기만 해도 팔이 아픈 것 같은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폭주족들이 모여 사는 트레일러촌도, 깊은 산 속의 컬트 본부도, 마약을 제조하는 버려진 수퍼마켓나 최신형 기관 단총을 등에 매고 자전거를 타는 시골 힙스터들도, 모래 바람 부는 누런 황야도, 회전초도, 야생 늑대도 없다(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마지막 세 개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개쯤 더 있을 수도 있고…). 지금 나는 수상할 정도로 서로 닮은 남자들이 운영하는 집단 농장을 불태우러 가고 있지 않다. 오한기를 만나러 간다. 그러니까 외톨이가 외톨이에게, 그런데 이제 자동소총 대신 바게트빵을 곁들인… 1-2: 메타포 외톨이와 외톨이가 모이면 그들은 여전히 외톨이일까요 외톨이가 아닐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외톨이야+외톨이야=Daridaridara du? 내가 묻자 오한기가 말했다. 정연씨, 좋아보이시네요. 우리는 출판단지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인쇄에 쓰이는 기계들이 전시된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날이 어둑해지도록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실이 아닌 문장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아직도 오한기의 소설을 영화화 하지 않은 세상의 무능에 대해서… 문득 그런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오한기가 말했다. 영화 < 파주 >에서 서우가 이선균한테 이렇게 묻잖아요.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그러자 이선균은 얼빠진 표정으로 담배를 한모금 피우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 처음엔 멋져 보여서 한 거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 라고요. 나는 물었다. 도대체 그런 대사는 어떻게 외우고 있는 거예요? 언제 봤는데요? 그런 나를 오한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안 봤는데요. 정연씨, 그건 그냥 메타포에요. (상: 서우, 하: 이선균) 1-3: 총 맞은 것처럼 아직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문학동네 편집자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천변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헤르만하우스 옆길로 들어섰다. 심학산 입구쪽으로 올라가는데, 식당이며 커피숍들이 보였다. 어쩐지 엠티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이게 오늘의 첫 끼니라는 사실이 떠오르며 미친 듯이 배가 고파졌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당장 먹을 걸 준다면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딴딴딴 따단 따단, 딴딴딴 따단 따단, 리듬에 맞춰서, 배고픈 사람의 춤을, 밤이 깊도록. 춤을 추지 않아도 음식은 나왔고 날은 저물었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고 카페에 갔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였다.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렇게 사라져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원고를 쓰느라 꼬박 밤을 샜다. 이제 인스타 라이브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일은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모레는 광주에도 가야 하는데.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촬영을 시작하면 늘 긴장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담당자의 시작 신호를 못 알아듣고 몇 분 동안 멀뚱하게 카메라와 아이패드 화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좌: 오한기와 금정연, 우: 장 뤽 고다르) 작가로서 본인의 10년을 되돌아본다면, 어떠세요? 출판사 분들이 쿠팡에서 주문했다는 고소한 빵 냄새가 나는 모형 바게트를 앞에 두고 내가 물었다. 저는 작가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건 진짜 어려운 질문 같은데, 질문을 들으면서 딱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제가 회사에 다닐 땐데, [의인법]을 냈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 [의인법]에 대한 이야기가 문예지에 실렸다, 문예지를 보내주겠다, 그래서 저는 어? 문예지를 보내줄 정도면 되게 좋은 이야기가 실렸겠구나. 그래서 기다렸죠. 마침내 와서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진짜 제 소설에 대한 완전한 악평. 두 분이 대담을 하셨는데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제 기억에는 되게 안 좋은 말들, 비판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총 맞은 기분? 그 기억이 자꾸 났어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그게 제 작가인생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슬펐다. 라이브가 끝났다. 밤의 자유로를 달려 오한기를 합정에 내려준 다음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바게트 소년병]을 펼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한기는 이렇게 썼다. 희망을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비공식적으로는 전 세계 백 등 안에 든다고 확신한다. 착각일까. 언제나처럼, 아마도 그렇겠지? 데뷔할 때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을 썼던 게 기억난다. 수상 소감 속에서 나는 볼링장에서 일하는 포르노 작가였고, 시상식장에서 한 원로 작가에게 수상 소감이 허구여서는 안 된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왜 안 될까. 글쎄. 도무지 모르겠네. 2-1: 뉴욕에 간 사나이 오늘의 일정. 일산 집에서 은평 작업실에 간다, 다시 일산으로 돌아와 나윤이와 장모님을 태우고 안산에 간다, 안산에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학로로 간다, 대학로에서 일산으로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로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윤이 데리고 소아과 다녀와서 작업실로 운전해서 가는데 정지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이 그날이라 이것저것 이야기도 할겸 미안하고 고마워서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됐고 뉴욕은 어떻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지돈이 대답했다. 여러분이 없는 뉴욕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여기 사람들은 진짜 말이 안 통한다고, 물론 그건 거의 전적으로 제 잘못이겠지만 너무 안 통해… 근데 지돈씨 지금 뒤로 들리는 이게 뉴욕의 소음인가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정지돈이 대답했다. 그렇죠, 들리나요? 뉴욕의 소리가. 근데 지금 길거리는 아니고 카페에 있는데 여기가 무슨 카페냐면 밥 딜런이 단골인 완전 유서 깊은 카페로 여기에 또 누가 단골인줄 알아요? (이하 생략)(이하 생략)(이하 생략)… 나는 지금까지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런저런 영화를 통해 보았고, 음악을 통해 들었으며, 책을 통해 읽었다. 그래서 종종(실은 자주) 뉴욕이 어릴 때 떠나온 옛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우탱 클랜의 [Enter the Wu-Tang(36 Chambers)] 앨범을 들으며 살인적인 주거비용 때문에 직주근접을 이루지 못하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뉴욕의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뉴저지 사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but <I’m not there>) 2-2: In Between Dyas 안산에 도착하니 3시 15분이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낮인데도 차가 제법 막혔다. 대학로까지는 딱 두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아슬아슬했다. 77번 버스 타고 초지역에 갔다. 4호선을 타고 지상구간을 지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시들, 이미지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음악도 듣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문득 [나의 해방일기] 구씨 생각이 났다.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건강은 좀 어떤지, 염미정이랑은 잘 만나고 있는지… 언젠가 정지돈은 여행이 좋지만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여행까지 싫어질 때가 많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아침부터 적지 않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지만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나는 그게 전혀 싫지 않다. 정확히 그 반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진실은 이렇다. 나는 그냥 자동차에 앉은 채로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행복한 순간 은 오직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뿐이다.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만 행복하고, 도착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된다. 어디에 도착하든지 상관없이, 도착하는 순간 나는 불행하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장소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오직 떠나 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한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이라도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고 [GTA4]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냥 택시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리버티시티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리버티 시티에서 택시 타기) 2-3: 치질에 대해서 (ㄱ) <스위밍 풀>에서 샬럿 램플링이 했던 말 기억해요? 편집장이 20년 전에 자기를 세뇌시켰던 말이라면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상은 치질 같은 거라고, 모든 작가들이 언젠가는 받게 된다고요. 지돈씨, 네 번째 치질을 축하합니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였잖아요. 지돈씨는 출판사 부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저는 다른 친구와 같이 도서전을 구경하고 있었죠. 그 친구는 지돈씨랑 아는 사이였고요. 아, 네,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지돈씨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 새낀 또 뭐야? 같은 눈빛이었는데. 그날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요. 제가 지돈씨를 두 번째로 본 건 문지 신인상 시상식 자리였습니다. 예의 친구가 지돈씨에게 초대를 받았다며 저를 불렀는데, 시상식장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인사는 하지 못했어요. 그때 저는 화정동에 있던 영화 창작공간 시나리오작가존에 입주해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자리를 빼야 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가방 가득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지돈씨가 상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시상식이 끝나기 전에 친구와 둘이 그곳을 빠져나왔죠. 그날 지돈씨가 수상 소감을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멋진 재킷을 입고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죠. 준비해온 소감이 있어서 그걸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멋진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물론 지돈씨는 본인의 목소리는 원래 떨린다고 말하겠지만요), 아주 긴 수상 소감을. 저는 지금 지돈씨가 제게 선물한 재킷을 입고 있습니다. 안주머니에는 지돈씨가 쓴 수상 소감도 들어 있고요. A4 6장이면 짧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오늘은 지돈씨의 대리 수상을 하는 자리인만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지돈의 시상식을 최대한 재현하는 것이 오늘 저의 목표입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굳이 잘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벌써 다음 역이 혜화네요.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곧 다시 연락할게요. 안녕! (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베른하르트가 했던 말 기억해요? 시상식이란, 상이 주는 돈만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역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이런 시청과 강당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다. 상이란 한 사람에게 똥물을 뿌리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내 머리 위에 똥물을 뿌리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상금이 지불되니까. 지돈씨, 오늘 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위트 앤 시니컬 2층이었어요. 그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죠. 심지어 상금도 없이… 지돈씨,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죠? 맹세컨대 시상식이 이런 건줄 알았다면 저는 아무리 지돈씨의 부탁이라도 결코 대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더 보기] (좌:정지돈, 우: 신해욱) (다음 회에 계속)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생각해야 할 수많은 올해의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즈의 데뷔작 < 사울의 아들 >이다. 개인적으로 더 강렬한 감흥을 받았던 허우샤오시엔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아름다운 영화, < 자객 섭은낭 >과 < 찬란함의 무덤 >을 제쳐두고 이 작품을 소개하려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의 관람 기회가 요원할 것 같았다(고 적었으나 이 글을 쓴 이후 <사울의 아들>이 내년 2월경 개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둘째. 홀로코스트라는 위험한 소재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든 이 영화의 용감함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셋째. 아직은 낯선 라즐로 네메즈라는 이 신인감독의 이름을 더 많은 한국 관객들이 기억했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사사로운 이유를 들자면, <사울의 아들>은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무언가 새로운 것이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내게 처음으로 줬던 작품이었다. 영화제 초반부 상영작이긴 했지만,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사울의 아들>로부터 받았던 방식의 충격과 감흥을 선사하는 작품은 보기 드물었다. < 사울의 아들 >은 1944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손더코만도로 일하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울의 이틀을 조명한다. ‘손더코만도’라는 낯선 용어에 고개를 갸웃할 틈도 없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사울이 이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어떤 일을 해오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한무리의 유대인들이 알몸으로 샤워실에 들어간다. 사실 그들이 샤워실인 줄 알았던 그곳은 가스가 뿜어져나오는 살육의 공간이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들려온다. 모든 것이 끝나면 사울의 업무가 시작된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수감자들이 벗어놓은 코트에서 귀중품을 챙기고, 알몸의 시체들을 가스실 밖으로 끌어낸다. 온갖 분비물로 더럽혀진 가스실 바닥을 닦는 것 역시 사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손더코만도들이 가스실을 비워내면 또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들어간다. 학살은 그렇게 도돌이표처럼 계속되고, 유대인 포로이지만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 의해 고용된 잡역부(손더코만도)인 사울은 기계적으로 죽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반복한다. 그에게 죽음은 일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초점 없는 일상을 살아가던 사울에게 뚜렷한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수용소에서 한 남자아이의 시체를 보고 나서부터다. 사울은 그 소년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소년에게 유대인으로서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한다. 사울은 아이의 시체를 화장터로부터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수용소 안에서 아이의 장례를 치러줄 랍비를 백방으로 찾아다닌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던 손더코만도 일행을 돕는다. 사울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극영화를 통틀어 가장 당혹스러운 주인공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죽은 자의 육신을 합당한 방식으로 거두기 위해 종종 동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그의 행동은 홀로코스트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윤리의 질문 저 너머에 있다. 사울에게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가 반드시 해내야겠다고 결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것이다. 그 임무가 이치에 맞지 않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처럼 느껴지더라도, 인간성이라곤 절멸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울의 행동은 가장 인간적인 제스처로 다가온다.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도 여타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 사울의 아들 >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수많은 살인과 잔혹 행위들의 참상을 재현하고 기록하는 건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곳에 무엇이 있게 될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울의 아들>의 접근방식이다. 라슬로 네메즈가 이 영화를 위해 4:3의 화면비를 취한 건 바로 그러한 선택에 따른 게 아닌가 싶다. 107분의 러닝타임 동안 사울의 얼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사울의 아들>은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을 최대한 협소하게 보여준다.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의 가스실 학살장면이나 포로들을 구덩이에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하는 야밤의 비극적인 사건은 오직 사울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만 관객들에게 보여질 뿐이다.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거나 흐릿하게 처리된 이미지들의 공백을 메우는 건 사운드다. 단언컨대 < 사울의 아들 >은 올해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사운드를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기억될 것 같다. 철컹거리며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가스실에 갇힌 이들의 소름 끼치는 비명, 감독관들의 호령 소리, 폴란드어, 독일어, 유대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정체불명의 화음은 관객이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사운드 디자이너 타마스 자니가 만들어낸 <사울의 아들>의 음향은 날카롭고 명확하기보다 강렬한 울림과 긴 여운을 지니고 있는데, 이처럼 풍성하게 연출된 사운드가 제한적이고 압축된 시각적 이미지와 맞물려 효과적인 대구를 이룬다는 건 이 영화가 이뤄낸 기술적 성취를 짐작하게 한다. 장편영화 데뷔작 < 사울의 아들 >로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라슬로 네메즈는 벨라 타르의 2007년 작 < 런던에서 온 사나이 >의 연출부를 맡았던 경험이 있다. 유려한 페이스의 롱테이크 이외에도 그가 스승에게 물려받았다고 짐작되는 유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대담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것들을 용감하게 표현하는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싶고 느끼고 싶다”는 스승의 말대로, 라슬로 네메즈는 여전히 누구라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를 소환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금기의 질문들을 용감하게 돌파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의 아들>은 기억되어야 할 영화고, 지지하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 사울의 아들 >과 더불어 선정한 영화들에 대한 소감도 이 지면을 빌려 간략하게 전한다. 허우샤오시엔의 < 자객 섭은낭 >은 과연 글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 영화의 미학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색감과 앵글, 리듬과 호흡. 허우샤오시엔의 그 모든 선택과 감각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 영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찬란함의 무덤 >은 올해 본 가장 인상적인 설치물이 등장하는 작품이자 아피찻퐁의 최근작 중 가장 감상적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 스파이 브릿지 >는 <사울의 아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이유로 좋았는데, 예민한 소재를 누구나 납득 가능한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화로 만들어낸 스필버그의 연출력을 기억하고 싶었다. < 캐롤 >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배우 때문이다.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늠하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두 여자의 심리 묘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영화다. < 산하고인 >은 시간과 사람에 대한 지아장커의 애상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 폭스캐처 >는 스티븐 카렐의 괴물 같은 연기와 베넷 밀러의 차분한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는 알프스 산맥처럼 정교하고 미스터리하게 흘러가는 내러티브의 묘미, 그리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예상외로 꽤 매력적인 조합이었던 세 여배우-크리스틴 스튜어트, 줄리엣 비노쉬, 클로이 모레츠-의 앙상블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정했다. <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필립 가렐의 신작인데, 대사의 날카로움은 여전하고 흑백화면은 여전히 파리 특유의 정서(지금은 다른 이유에서 좀 더 특별해졌다)를 머금고 있다. 마지막으로 루카 구아다니노의 < 비거 스플래쉬 >는 정말로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선정한 작품이다. 이 리스트를 선정하기 위해 고심하는 순간, 풀장으로 첨벙 소리를 내며 뛰어들던 <비거 스플래쉬>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프랑소와 오종의 < 스위밍 풀 >과 같은 원작을 공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인의 육신보다 입수 장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몸과 물이 맞닿는 순간의 마찰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비거 스플래쉬’를 몹시도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