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개장식> 피겨 꿈나무들의 갈라공연
- 제작년도
- 2010
앞서 소개한 <THE OA> <키딩>이 집에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장에서 꼭 보고 싶어서 준비한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는 <사운드 오브 메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극장에서 즐기고픈 욕망에 흽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듣고 싶은’ 본능을 채우고 싶어진다.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고 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시작과 끝에서 나는 소리다. 고막까지 울리는 쇳소리와 정적. 먼저 우리의 주인공 루벤을 만나보자. 헤비메탈 그룹 블랙하몬의 드러머 루벤은 자신의 연인이자 보컬 루이즈와 공연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예전엔 약물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약을 끊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제 그에겐 열정을 쏟아낼 드럼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에서 시작한다. 음악으로 약물 중독을 이겨낸 주인공의 화끈한 공연.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행복한 주인공 루벤은 갑자기,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청력을 상실한다. 간혹 영화는 ‘개연성’이란 항목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고는 대부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다. 청력을 잃은 루벤은 자신이 듣지도 못하는 드럼을 쳐보지만 무의미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더는 드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청력을 상실한 루벤에게 의사는 말한다. “잃은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후, 18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150분 동안, 소리를 되찾기 위한 루벤의 사투가 이어진다. 현재, 이 영화는 아마존 프라임, 구글 무비,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글을 통해, 극장 상영 추진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미치도록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루벤이 청력을 잃은 이유로 영화 대부분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이 영화를 굳이 듣기 위해서 극장 상영을 원한다고? 초반에 쨍하게 울리는 드럼 소리가 전부인데?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영화로 쌓아올린 영화사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알다시피 1927년 10월, 소리가 들리는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개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막으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영화가 이젠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내는 소리를 담게 됐다. 그때만 해도 일부 영화인들은 소리(Sound)가 생긴 영화가, 결국엔 영화를 망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현대 영화에서 소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이미지보다 소리로 그 영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 샤이닝 > 메인 타이틀곡을 들으면 구불진 길을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한 가족이 떠오르고 < E.T .> Flying 테마곡을 들으면 자전거에 외계인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꼬마가 생각난다. 더 강조하지 않아도 소리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일부러 소리를 줄인다. 그것을 우린 무음 또는 정적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또 어떤 영화들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리에는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걸 영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게 퍼지는 드럼의 쇳소리로 시작한 영화가, 10분 즈음 고장 난 헤드폰을 낀 것처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루벤은 귀를 두드려보지만 들리는 건 삐--- 소리뿐이다. 나 역시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를 손바닥으로 때려보기도 했는데, 실은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함. 그 고요함이 만드는 공포. 루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 루벤은 아는 사람 소개로 ‘청각 장애 공동체’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루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드는 곳. 루벤은 연인 루이즈와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하며 머물게 됐지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하는 건 루벤의 표정과 행동에 더해지는, ’정적’이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 다른 하나는 루벤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한마디로, 첫 번째 정적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두 번째 정적’을 어떻게라도 들으려고 하는 루벤의 사투가 만들어낸 정적이다. 그래서일까? 루벤이 청각 장애 공동체에 적응할수록 영화는 첫 번째 정적이 아닌 두 번째 정적을 들려준다. 하지만, 두 번째 정적은 다르게 말해서 루벤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루벤은 들리지도 않는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영화에선 다시 첫 번째 정적이 들려온다. 그 말은 루벤이 그곳을 떠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아챈다.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Sound)는 루벤 그 자체라고. 자연스럽게 영화명이 ‘사운드 오브 메탈’인 비밀도 풀리게 된다. 메탈 음악처럼 단단한 루벤이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나는 내면의 울림을 소리를 담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고 직역하면 영화명은 ‘루벤의 소리’가 된다. 하지만, 아직 소개하지 않은 루벤의 진짜 소리가 남았다. 내가 극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 공동체에서 나온 뒤, 영화는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메탈 음악처럼 질주한다. 로벤은 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임플란트를 심고, 연인 루이즈를 찾아간다. 약 끊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듯, 소리를 되찾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불완전하다. 의사 말에 따르면, 그건 진짜 듣는 게 아니라 기계를 통해 뇌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루벤, 그에게 남은 건 뒤통수와 귀에 어설프게 걸쳐진 기계뿐이다. 이제 루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 루벤은 어느 ‘정적’도 선택하지 못한다. 두 번째 정적인 일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플란트를 심어 기계음까지 섞인 첫 번째 정적도 듣고 싶지 않다. 루벤은 짜증 섞인 감정을 담아 귀에서 기계를 뽑아 버린다. 갑자기 이어지는 무음에 가까운 정적. 그런데? 앞서 경험한 공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로 들리진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그때부터 영화가 들려준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우 특별한 소리다. 들을 수 없는데 더 잘 들리는 소리. 이게 착각이라도 좋다. 분명 루벤과 우린 뭔가를 듣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 실망한 루벤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다. 그의 눈앞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아이가 보인다. 그가 듣는 정적은 기계음으로 표현되는 괴이한 소리다. 사실상 소음에 가까운 정적. 그때! 기계를 벗자 사실상 무음 상태가 된다. 완전한 정적. 그 공허함 속에서 루벤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들었다. 한 아이가 보드 위에 올라가자 다른 아이가 치는 박수소리를, 하늘에 뜬 해를 가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벤의 표정도 뭔가를 들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걸까.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개연성 없는 설명인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를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루벤 주변을 채운 정적을, 그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소리였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당신도, 영화의 시작을 알린 거친 메탈 음악처럼 끝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정적의 울림도 들었으면 좋겠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줬기 때문일까, <사운드 오브 메탈>은 93회 아카데미에서 음향편집상과 음향효과상이 합쳐진 최초의 음향상을 수상했다. 나는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을 들을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마 금방 첫눈이 내릴 것이다. 눈 내린 풍경에서 가장 웃긴 순간은 넘어진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누군가 미끄러져 자빠질 때일 것이다. 그게 꼭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을 볼 때 거의 기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물론 그런 다음에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거리를 지키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감춘 채 시선을 돌리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우리가 자빠지는 모습을 보고 공식적으로 웃을 수 있는 장소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이다. 지금도 이 개그는 웃음을 자아낸다. 브라운관에서 너도 나도 자빠질 때 그걸 바라보던 언론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자빠지는 것 말고 없다는 비난과 함께 지성이 없는 희극이라는 비판을 던졌다. 이 개그는 가장 단순하지만 매번 보는 쪽을 웃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자빠지는 개그가 시작된 곳은 아마도 보드빌 연극무대였을 것이다. 이 무대에서 활동하던 많은 배우들이 각자의 퍼포먼스를 갖고 카메라 앞으로 왔다. 보드빌 무대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빠졌다. 왜냐하면 그 퍼포먼스가 가장 쉽고 가장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말했지만 이 퍼포먼스는 부상당할 위험이 항상 있었으며 게다가 상대방과의 앙상블이 중요했기 때문에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은 그의 경력 초기부터 자빠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1916년은 채플린에게 중요한 한 해가 되었다. 당시에는 매주 월급의 형식으로 지불하는 주급(週給)방식으로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다. 채플린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더 많은 주급을 받으면서 매년 연간 제작 편수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1915년에 연간 16편의 영화 연출(과 주연으)로 계약을 맺었던 것을 1916년에는 12편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시간적 여유는 채플린을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채플린은 좀 더 시나리오에 공을 들일 수 있었고, 자신의 개그 퍼포먼스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으며,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점점 그의 영화가 눈에 보이게 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채플린의 영화들은 점차 서사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고 드라마투르기를 작동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씬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는 과정을 통해 씬 안에서 활동하는 동선과 드라마, 감정선, 퍼포먼스의 디테일, 그것들이 펼쳐지는 장소의 미장센,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거리를 정식화시켜 나아갔다. 채플린이 말한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클로즈업과 롱 쇼트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액션과 상황의 원근법을 창조해냈다. 원근법은 가까운 것(近)과 먼 것(遠)이 한자리에 있을 때만 구별되는 것이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그 둘 사이의 왕복운동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씬이 희극이자 비극이라는 천재적인 발명을 해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루게 될 것이다. 이 해에 만든 영화 중에서 마지막으로 개봉한 <롤러 스케이트장(The Rink)>은 상영 시간 24분의 소동극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찰리는 손님 주문을 받으면서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도 실수를 거듭하지만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면 보란 듯이 솜씨를 뽐낸다. 이때 찰리는 레스토랑에 온 진상 손님 스토우트씨를 여기서 다시 만나자 골탕을 먹인다. 게다가 여기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이 찰리를 롤러 스케이트장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스토우트씨와 마주친다. 일대 난동이 벌어지고 찰리는 유유히 빠져나와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달리는 자동차의 뒤에 매달려 뒤를 쫓아오는 신사들로부터 멀어진다. 두 번의 시퀀스에서 찰리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찰리는 롤러스케이트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미끄러짐과 불안정한 균형을 이용해서 우아한 동선을 먼저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무례한 악당을 사정없이 쓰러트린다. 이때 악당은 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번 제풀에 미끄러지고 자빠진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들어서는 순간 일반적인 균형의 법칙은 사라지고 갑자기 새로운 중력 법칙이 작동하는 것만 같은 세상이 될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찰리는 이제까지 보잘것없이 모두에게 구박받던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여기서 세상의 법칙에 대한 주인의 자리에 간다. 이때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는 세상의 법칙에 대한 전복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개그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부자들을 마음껏 웃어주는 위대한 퍼포먼스가 된다. 물론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찰리를 잡기 위해 스케이트장 안으로 몰려든다. 하지만 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 사이를 공기처럼 빠져나간다. 점점 더 스케이트장은 카오스에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율동의 동선으로 가득 찬다. 모두의 동선이 실타래처럼 뒤엉키는데도 찰리만은 우아한 동작으로 그들 사이를 그렇게 빠져나간다.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 퍼포먼스의 스펙터클을 정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스펙터클이 품고 있는 웃음의 정치학을 발명해낸 것이다. 아마도 그때 이 스펙터클을 모스크바에서 레프 쿨레쇼프와 그의 제자들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 더. 아마도 그때 베를린에서 발터 벤야민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사 앞에서 나는 반문하고 싶다. 누가 이 스펙터클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는가.
“우리가 왜 이 판자 쪼가리에 미치는지 알아요?” “fuck shit!”을 입에 달고 살아 그것이 별명이 되어버린 한 소년(영화 안에서 그의 별명은 ‘존나네’라고 번역되어 나온다.)이 스케이트보드를 응시하며 말한다. 공터에는 그와 같은 소년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고, 노숙자로 보이는 이들이 무료하게 햇볕을 쬐며 그 광경에 어우러진다. 나른한 오후의 장면이지만, 이곳은 법원 앞, 그러니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일이 금지된 제도와 규율의 장소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평화는 이내 깨진다. 소년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더러는 달아나는 데 성공하고 더러는 붙잡힌다. 신기한 건 이 대목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이다. 강제적이고 다급한 도주의 순간이 어쩐지 유희의 리듬으로 충만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들에게는 경찰에게 쫓기는 한바탕의 소동도 스릴 넘치는 놀이와 다름없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화가 이 순간을 그렇게 찍었다. 영화는 내화면의 소란스러운 노이즈를 외화면의 경쾌한 음악으로 침묵시키고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 충돌들을 부드러운 운동으로 다시 표면화한다. < 미드 90 >(조나 힐, 2018)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들과 자주 마주한다. 이를테면 ‘땡볕’이라 불리는 스티비(서니 설직)가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낙담한 장면에서 그가 줄곧 동경해온 레이(나 켈 스미스)는 자신과 친구들의 만만치 않은 가정사를 언급하며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둘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양쪽으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 중앙의 경계선 위를 스케이트보드에 올라선 두 소년이 화면 후경으로부터 전경 쪽으로 유영하듯 점차 가까워지다가 곧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감행하는 위태로운 행동이지만, 차들의 소음 대신 음악의 활기로 채워진 장면 안에서 두 소년의 움직임은 공간의 한계를 자체적인 리듬으로 유연하게 돌파한다. 그들이 도심의 텅 빈 공원에서 오직 스케이트보드 하나와 자신의 육체만으로 곳곳을 오르내리며 묘기를 부릴 때, 그것이 쇠락한 공간을 독창적으로 다시 감각하며 그곳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케이트보드 위에 오른 소년들의 운동은 물론이고 <미드 90>이 그 순간을 ‘영화적으로’ 가공하는 방식은 섬세하게 아름답다. 도시의 보잘 것 없는 풍경들과 그곳에서 근근이 버티는 청춘들의 빈곤한 시간이 이 매끈한 움직임들로 인해 잠시나마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며 빛날 기회를 갖게 된다. 물론 이 순간이 자아낸 감상이 실은 환상에 빚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이 장면들은 현실의 시간을 중지시키고 풍경의 얼룩과 충돌을 미학화한 결과물일 것이다. 대다수의 하위문화가 결국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저 체제 안에서의 또 다른 소비양식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스케이트보드의 운동성으로 유려하게 구축한 장면들은 적어도 ‘존나네’와 같은 청춘들이 “판자 쪼가리”에 거는 마음의 풍경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소년들이 법원 앞 공터에서 만난 어느 노숙자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거리에서 탈출하려고 노력 중이야. 이 거리가 나를 먹어버리기 전에.” 그는 거리로 내몰린 자신이 거리의 죽은 사물이 되어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없이 붙박인 채, 그곳의 가난과 폭력과 체념에 ‘먹히는’ 상태를 염려하고 있다. 그는 거리를 사는 주체가 아니라 그 거리에 잡아먹히는 대상이 될 위험을 감지한다. 그와 같은 맨몸의 노숙자들에게 이 거리는 오직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러나 적어도 스케이트보드를 가진 소년들에게 이곳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절실한 문화와 취향의 공간이다.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육체가 (아마도 그 거리를 설비한 자들보다 더) 거리의 구조와 생리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이해한다. 그들에게 그 거리는 가정, 학교, 사회 등과 같은 ‘중심’ 혹은 ‘내부’의 균열을 고스란히 외면화한 바깥이지만, 그들의 열악한 현실을 상기하는 동시에 그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육체의 활력을 키우는 유동적이고 모험적인 바깥이기도 하다. 레이는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인 스티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처럼 세게 부딪치는 놈은 처음 봐. 그럴 필요 없어.” 형 이언(루카스 헤지스)이 일상적으로 가하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온 이 작은 소년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종종 일삼는 방식으로 현실을 견뎌왔다. 그러나 레이의 말대로 거리의 스케이트보드와 함께라면, 소년은 더 이상 갑갑한 집 안에서 세게 자학하지 않고도 삶을 버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상처 입은 소년들은 총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매일 거리로 나온다. 이 영화는 주인공 스티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소년들의 암울한 집으로 카메라를 들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이 바깥의 폭력에 잠식되지 않고도 바깥의 리듬을 자기 식대로 체화해가는 순간들에서 분노나 좌절과는 다른 감정적 교류를 응시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위험한 농담을 나누고 서로 치고받으며 치기어린 사고를 내고, 결국 죽음 문턱에까지 접근해도, 어찌되었든 이들이 이룬 공동체의 풍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안도를 안긴다. 자동차 사고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스티비가 입원한 병원 휴게실 의자에서 상처 난 얼굴로 널브러져 잠이 든 소년들의 모습이 그 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영화에서 퇴장하는 스티비의 형 이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맥락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영화 속에서 상스러운 말과 행동들을 일삼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그 어떤 소년들보다도 음산한 기운을 퍼뜨리며 스티비의 장면을 찢고 들어온다. 요컨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언은 좁고 긴 복도에서 스티비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우리는 이언이 스티비를 무시하고 이용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스티비가 몰래 훔쳐보는 이언의 방에는 최신 음악 씨디들과 옷, 모자 등 당대의 유행품들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안이 그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집에서 혼자만의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스케이트보드와 하나가 된 소년들의 육체와 확연히 달라 보인다. 그것은 거리와 호흡하며 끊임없이 놀이를 고안하는 생기로운 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해 단련하고 공격을 준비하는 것만 같은, 우월감에 도취된, 실은 불안을 은폐하는 몸이다. 우리는 이안의 폭력성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기인한다고 짐작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한 그 이상의 관심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동생을 그토록 때리던 이안이 ‘존나네’ 무리들과 맞닥뜨린 장면에서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때인데, 이안과 관련된 일련의 장면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미국사회가 낳은 특정 유형의 인물을 상기시킨다. 섣부른 일반화가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는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소외시켜 폭력을 내면화하며 결국 왜곡된 방식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마는 이들의 기운을 잠재한다. 더욱이 그가 빌 클린턴의 얼굴 캐리커처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혼자 밥을 먹거나 한밤 중 자고 있는 스티비를 급습해서 구타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난데없는 풍경의 기괴함과 끔찍함은 그저 무의미한 장난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렵다. 이런 설정을 당대 정치사회에 대한 영화의 코멘트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키워가고 있는 망상의 그림자를 예감할 수밖에 없다. 극우주의, 백인우월주의 등과 같은 혐오의 단어가 이 장면을 무섭게 스쳐간다. 영화의 후반, 이안이 온 몸에 깁스를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스티비를 말없이 지켜보다 음료수 두 개 중 하나를 나눠주는 장면이 있다. 둘에게 주어진 짧은 휴전의 순간인지, 사과와 용서의 순간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면은 별다른 대화나 감정의 해소 없이 금세 끝나버리고 이안이 사라진 자리는 어느새 거리의 친구들로 꽉 채워진다. 다정한 친구들의 왁자지껄함으로 가득한 장면은 이안의 부재를 개의치 않는다. 그들이 함께 보낸 날들이 비디오로 상영되는 동안, 이안은 그 화면 속 거리의 추억에도, 화면 밖 병실의 친구들 틈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두드러진 인물이지만, 그 존재감이 가장 미약한 자다. <미드 90>은 그 시절, 거리의 유희와 청춘의 리듬을 탐색했던 사고뭉치 소년들의 유일무이한 시간과 함께, 그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어느 소년의 스산한 시간 또한 기억에 남겨 두려한다. 찬란하고 아련하지만 암울하고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