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팬티스타킹
- 감독
- 야마우치 다이스케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카와카미 유우, 나카미츠 세이지
얼마 전 작고한 김수용 감독의 < 야행 >은 1974년 제작됐으나 사전검열과 영화법 4차 개정에 따른 제작사의 등록취소 문제로 1977년이 돼서야 개봉했다. <야행>은 김수용 감독의 전작 < 안개 >(1967)와 공통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김승옥 원작에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다. 두 영화는 급변하는 20세기 모던한 서울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주인공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구조를 갖고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서울에서 중산층 이상의 계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예정된 권태로운 삶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두 주인공의 방황은 자의식적인 내레이션, 플래시백, 꿈과 환상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권태로움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규범적인 중산층의 삶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었던 성적 환상의 실현이 된다. <안개>는 윤기준(신성일)이라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꿰찬 남자의 시점으로, <야행>은 은행에서 일하며 이제 막 신축한 강남 반포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주(윤정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두 영화 모두에서 도시와 농어촌인 고향의 대비, 도시에서의 경쟁적인 삶과 신분상승의 욕망, 중산층 정상성에의 압박,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은 국가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희미한 배경으로 처리된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도시화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쟁점들은 그 원인과 효과가 날카롭게 파헤쳐지기 보다는 개인의 방황을 정당화하는 동기 정도로 차용된다. <안개>와 <야행>은 공통점이 많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안개>에서 윤기준이 무진에서 잠깐 만나는 젊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포함해 아내, 옛 애인, 술집작부 등 여성 인물들은 그의 남성적 수치심, 혼란, 열패감, 권태로움을 반영하거나 보상하는 정형화된 약호들로 기능한다. 무진에서 서울로 가고 싶어했으나 금방 마음이 바뀐 하인숙을 이해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반면 <야행>의 현주(윤정희)의 방황하는 행동은 단순한 변덕이나 모순보다는 도시 신흥 중산층 여성의 내적 풍경으로 이해된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예술 영화를 표방했던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행>의 현주(윤정희)는 도시 생활의 최첨단에 있다. 그리고 그 최신의 세련됨은 자본주의의 숙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반포주공아파트에 산다. 영화는 도시화와 더불어 지루함과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고속버스 터미널, 서울의 빌딩을 오프닝의 설정 쇼트로 보여준다. 지방에 있는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은행에 취직하고 이제는 숙련된 직장인으로 일하는 현주처럼, 서울 역시 어느 정도의 도시화와 근대화가 숙성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설정 쇼트에 이어 영화는 은행의 일상 업무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제 인프라를 쌓고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서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이 중요해지고 지대수입을 통해 부를 증식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부의 증식은 계층 격차를 벌어지게 만든다.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강조라도 하듯 현금과 금고를 클로즈업 몽타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개입이든 경쟁에서의 도태든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동방상사의 사장이 오래된 부잣집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남자 주인공인 박대리(신성일)가 동방상사를 부도처리하는 장면이 바쁘고 역동적으로 교차편집 되는 와중에 안경을 쓴 현주는 돈다발을 응시한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남자들이 몰입해 일을 하는 동안 거리를 두고 약간은 지루하게 응시하는 현주의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는 여성인 현주의 관점에서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다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조금은 뒤늦게 밝힌다. 현주 역시 도시 자본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현주가 결혼을 통해 규범적인 중산층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다. 동료와 상사는 ‘노처녀’ 현주가 자기보다 어린 여직원이 결혼을 하는 것에 질투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 실제로 젊은 여직원들은 뒤에서 현주를 욕하고, 남직원들과 남자 상사들은 대놓고 그녀를 동정하며 비웃는다. 아무리 ‘안경만 벗으면 미인인’ 현주라도 나이가 들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 현주도 여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불만은 훨씬 더 모호하고 복잡하다. 신식 강남 아파트에서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는 박대리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현주 역시 그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결혼은 그저 그의 욕망을 찾기 위한 여정을 추진하는 기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주는 과거로 돌아간다. 휴가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현주의 회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베트남전에서 죽고 만다. 그녀의 아파트가 자신의 첫사랑이 묻혀 있는 현충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최신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 자본주의적 현대성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대가로 사들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국가가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결혼은 이제 중산층이라는 계층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현주의 욕망은 급작스럽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과시하는 김수용 감독답게 영화는 그 알레고리를 끊임없이 개인의 성적인 방황과 모던한 아파트의 스펙터클로 재치환 한다. 1974년 제작된 영화는 1973년 처음 공급된 당시 반포주공아파트의 실내 구조와 창밖 전망을 스펙터클화 한다. 영화 속 아파트는 은밀하게 섹스를 하는 에로틱하고 모던한 공간이자, 창밖으로 대단지 내 다른 아파트만 보이고 허허벌판인 황폐하고 삭막한 신도시 공간으로 묘사된다. 아파트 근처에는 베트남 전쟁 중 죽은 옛 연인이 묻혀있는 국립현충원이 있다. 현주는 현충원의 헌병 앞에서 스타킹을 올리며 유혹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이 장면은 강남개발과 베트남 참전이 모두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 영향 하에 있음을 은유하는 동시에, 신흥 중산층에 진입했지만 결혼 같은 규범은 원치 않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지난 50년간 강남 중상층 욕망의 상징이 되어온 반포주공아파트는 2023년 재건축 진행으로 사라졌지만, <야행>은 그 욕망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박대리는 뒤늦게 현주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그에게 현주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현주는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성적 방황의 여정을 시작한다.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통과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움은 성적 불만족으로 환원된다. 서울로 돌아온 현주는 은행이 내려다보이는 다방에 앉아 박대리와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그리고 박대리가 했던 대사를 돌려준다. 박대리는 “우린 안 해?”라고 묻고 현주는 “시시해, 결혼식 같은 건”라고 답한다. 낯선 남자와 총질하는 환상이 삽입되면서 이제 현주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은유화 한다. 남은 휴가를 보내던 현주는 도심의 육교 위에서 느닷없이 수갑이 채워져 여관방으로 끌려가 강제로 관계를 맺고, 이때 첫사랑과의 첫날밤 장면까지 교차되며 그녀의 환상은 극에 달한다. 이 장면은 여성 시점의 강간 판타지를 위험하게 보여준다. 아파트에 갇혀 사는 중산층 여성의 권태로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불만족을 성적환상으로 대치한 현주는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환상은 환상일 뿐 그녀의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하지만 박대리와 결혼하는 안일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주의 눈치를 보는 박대리에게 단호하게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보내고, 자신을 성희롱하는 남자고객을 뒤에서 욕하며 퇴근하는 현주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특히 나이에 따라 여성들의 가치를 매기는 가부장적 결혼제도로는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현충원을 지나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아파트 사이의 소실점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을 점프컷으로 보여준다. <야행>은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결혼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근대 도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열여덟 살 소년 한슬기는 남산순환로 통행 매표소 동전함을 털다 걸려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는다. 카메라는 비좁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듯 한슬기가 수감된 소년원의 내부를 관음적인 앵글로 비추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미술 없음, 정해진 음악 없음, 정해진 편집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이라는 자멸적 어조의 자막이 순서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인디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부르는 노래 ‘나쁜 영화’가 울려 퍼진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보컬 이윤정의 울부짖는 듯한 보이스가 “책상 위에 수많은 아주 좋은 영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식탁 밑엔 수많은/나쁜 영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좋은) 100편 (나쁜) 1편/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로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에서 무리를 지어 본드와 가스를 불고 갈피를 잃은 저들의 내면적 정황이 ‘환각 재현’이라는 제목의 키치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재생된다. 다음 쇼트에서 이어지는 한 장의 영정사진, 가스와 본드를 과다 흡입한 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지루해진 아이들이 춤을 춘다. 순간 나쁜 조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쁜 감독을 꼬시기로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나쁜 조감독이 찍은 단편영화의 러프컷인가? 시험에 든 나쁜 감독. 나쁜 조감독의 꾐에 넘어간 나쁜 감독은 생각나는 대로 사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 찍는 영화를 시작한다. 나쁜 배우들을 구하는 광고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그들이 쓴 짧은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찍는다. 상술(上述)한 < 나쁜 영화 >(1997)의 도입부는 서울의 10대 청소년들과 그들의 무모하고 환멸에 찬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서정적이고 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뤘던 장선우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나쁜 영화>는 길을 잃은 아이들처럼 거칠다. <제목이 없는 영원한 나쁜 영화>(Timeless, Bottomless Bad Movie)라고 하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나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구조화되지 않은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기성 영화의 기준과 규칙, 문법을 따를 생각이 없음을 선언한다.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감독 장선우는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놀랍다. 자학과 폭력, 섹스, 환각, 범죄의 만화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10대 아이들이 쓴 대본을 재연하면서, 때로는 술 취한 거리의 사람들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특정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삽입하는 예술적 만용으로, 일부는 35mm, 다른 일부는 16mm 내지는 슈퍼 8미리로 촬영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지우가 위해 다양한 출처의 이야기와 장르, 형식, 캐릭터를 비빈다. 영화의 1/4 지점에서 서사는 기성의 논리와 계율을 거부하는 10대들의 삶에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선택한 홈리스의 삶으로 건너간다.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한국의 경제적 투쟁이 버려진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장선우의 방식은 틀에 박힌 사회에 풍요에 저항하는 거리의 방랑자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의 앙상블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친 젊은이들, 안전하게 부유한 삶을 좇는 체제를 회의하는 홈리스들의 정신적 풍경을 기린다. 장선우는 새와 레드변, 감자, 이쁜이, 아이떡 따위의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는 10대 등장인물들이 지루함의 공백을 범죄, 학대, 장난, 폭력 및 섹스로 채우려고 하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연기하도록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대는 홈리스들의 일상과 10대들의 존재 양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들의 무모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것만이 저들의 공통점일까? 10대 청소년들과 홈리스들 사이의 접점을 상상하게 하면서 카메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와 느슨한 플롯에 의해 사전에 설계하지 않았던 의미가 발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원초적인 분노, 평온한 포기, 특정한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경고를 무시하고 사는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찬미하는 장선우의 예술적 자의식은 도전적이다. 형식적으로 <나쁜 영화>는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거리의 유목민들을 묘사하는 픽션 영화이다. 시네마베리테 양식으로 촬영되었지만 재연 에피소드와 현실, 구성된 이벤트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애쓴다. 계획과 우연을 병합한 사이비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카메라를 든 영화 스태프가 길바닥에 주저앉은 한 소년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자. 이제부터 카메라를 든 사람과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카메라는 스스로 참여적이 되는 동시에 촬영 대상의 개입을 촉발하는 촉매가 된다. 영화적 진실을 생산하는 순간처럼 의도된 그 장면에서 실제적인 세계에 속한 자연인은 허구적 스토리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실재하는 존재와 대상에게 부여되는 역할이 중첩되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영화적 실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은 상당한 정도의 혼란을 유발한다. 카오스는 캐릭터들의 재현 방식과 그들의 행동 뿐 아니라 운동의 방향에서도 발생한다.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화면서 속도를 덧붙이면서 골목길을 질주하거나 추적자들의 추궁을 피하기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섹스와 성적인 방종은 자유로운 행동 양식의 소여(所與)인 것처럼 변덕스러운 스타일로 전달되고 목표나 의도, 지향을 버린 말과 행위, 결과가 수반된다.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습격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유머, 냉소를 시전하는 특성은 어떤 한국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학적 혁신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실제 영상과 가공된 재연의 흐릿한 경계가 명확해지는 장면 중 하나는 송강호와 안내상, 기주봉, 이문식 등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홈리스 분장을 하고 실제 홈리스들과 섞여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거리의 전도자들 사이로 슬금슬금 이동하여 능청스럽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송강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을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몸소 실행한다. 기주봉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서울역의 홈리스가 되어 현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진짜 행려들과 3개월 간 합숙을 한 안내상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10대 아이들, 홈리스들과 달리 이 진짜를 연기하는 가짜들은 오랜 기간 훈련한 스킬을 발휘하여 능숙하게 현실에 자리를 잡는다. 감독과 스태프, 감독과 배우, 배우와 일반인, 진짜와 가짜, 선과 악,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따위의 기준들을 깔아뭉개는 장선우의 방임적 태도는 야심적이다. 현재 시점에서 회고해 보건대 <나쁜 영화>의 위상은 시네마베리테와 에세이 필름의 언저리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상들의 세계로 들어가 의도된 구성을 포기하고 그들에 의해 영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젊음의 기쁨과 발견의 시기를 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선우는 미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체의 영화적 형식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간다. 진실(과 진실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매체의 성질을 다시 설정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의하도록 하는 불온한 의도는 시네마의 역량을 시험한다. 도전적이지만 의도적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 이 이야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삶과 예술적 반항의 태도를 일치시킨 현대 한국영화의 시금석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영화 스태프로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20대에서 시작해 벌써 30대의 중반이니 영화와 함께 자라온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첫 영화를 했을 때는 너무도 신기한 사회에 들어와 있구나 생각하며 적응해나가기 바빴지만, 현재는 현장 녹음팀으로서 지금까지도 현장의 소리들과 싸우며 지내고 있다. 아마 영화를 그만둘 때까지는 계속 싸울 예정이다. 현장 녹음팀은 대략 3~4명으로 구성되어있다. 4명일 때는 현장 녹음감독 밑으로 붐 오퍼레이터-세컨드 붐 오퍼레이터-붐 어시스던트 순으로 구성이 된다. 3명 시스템이라면 세컨드 붐 오퍼레이터가 빠지는 경우이다. 그중 나의 직책은 붐 오퍼레이터다. 붐 오퍼레이터란 붐폴이라는 긴 장대에 달려있는 마이크를 컨트롤 하여 녹음감독이 원하는 대로 수음을 할 수 있는 기술자를 말한다. 그리고 그 붐 오퍼레이터는 녹음팀의 제1 조수를 담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붐맨이라고들 하지만 정확히는 붐 오퍼레이터가 맞는 표현이다. 요즘은 여성들도 많이 하고 있으니 예전처럼 ‘맨’이라는 표현은 바르지 않다. 여느 다른 팀과 비슷하게 제1 조수가 되려면 어쩔 수 없이 오랜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기술적인 부분은 이론으로 배워서는 쉽지가 않다.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운 친구들이 오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이런 부분 같다. 교육 과정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수많은 경우의 수가 영화에는 여기저기 존재한다. 카메라의 앵글과 조명의 그림자, 배우의 동선을 항상 신경 써야 하고, 대사를 숙지하면서 주변의 소리를 신경 써야 하며, 오퍼레이팅을 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해야 하는 등 그야말로 신경이 아주 많이 쓰이는 일투성이인데, 이들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은 결국 수많은 경우의 수를 경험해본 노하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예를 들어 카메라 앵글사이즈를 가늠해 알맞게 마이크를 배치해 놓았다고 해도, 더 좋은 수음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배우와 근접해지는 위치에 마이크를 둬야 한다. 그러려면 조명으로 생기는 마이크의 그림자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하고, 카메라 앵글을 잘 피해 가면서도 연기하는 배우 쪽 마이크가 더 정확한 위치에서 수음을 할 수 있게 항상 오퍼레이팅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도 같은 장면이 없는 영화현장에서는 그래서 더더욱 이론보다 경험이 중요해진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NG는 특히나 사운드에 의해 생기는 것이 많다. 언제 어디서 잡소리가 날지 알 수가 없기에 촬영 준비 중에 계속 체크해야 한다. 갑자기 비행기가 지나가거나, 동네의 개들이 짖어 대거나, 누구의 폰이 울리기도 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NG다. 평소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시계의 초침 소리나 냉장고, 환풍기 소리 또한 미리 체크하여 끄지 않으면 소리의 톤이 많이 달라져서 깔끔하지 못한 녹음이 된다. 그렇게 미리 체크를 했다 해도,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 특히나 여름은 미리 체크를 해두어도 어디선가 날아온 매미들로 사운드가 고르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럴 때는 위에서 말한 현장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매의 눈으로 매미를 찾아 쫓아낸 후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생각보다 예민한 녹음 상황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스태프와 배우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덥고 추워도 에어컨과 히터를 항상 꺼야 잡소리가 없기 때문에 나 또한 매우 덥고 또는 매우 춥지만 에어컨과 히터를 내 손으로 꺼야 한다. 자주 발생하는 또 다른 NG의 경우는 배우들이 정해진 동선과 대사대로 연기하지 않고 애드리브를 친다거나 했을 때이다. 오른쪽으로 돌면서 대사를 치기로 했는데, 다른 쪽으로 돌면서 대사를 친다든지 해버리면 마이크는 약속했던 동선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다. 애드리브로 수많은 명장면이 나왔다곤 하지만, 현장에서의 애드리브는 재미있으면서도 당황스러운 존재다. 그런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장르가 코미디이고, 기억에 남는 작품이 2012년 찍었던 < 사랑이 무서워 >란 작품이다. 임창정 배우와 김규리 배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정말 김수미 배우의 현란한 애드리브 덕분에 현장 사람들 모두 웃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어야 했다. 촬영 중에 터지는 나의 웃음 때문에 재미있는 컷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니 정말 매 순간 정신을 다잡으며 집중을 했어야 했다. 애드리브 말고도 < 베를린 >이나 <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 등과 같이 외국어 대사가 많은 작품들도 오퍼레이팅 하기가 쉽지 않다. 마이크는 배우가 대사를 할 때, 그 배우와 매우 가깝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 정도가 대화를 하는 씬이면 마이크는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가며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본을 외워야 하는데 그 대본의 대사가 외국어가 되어 버리니 실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실수가 없기 위해 외국어 대사라 할지라도 촬영 내내 대본을 계속 보며 외워야 한다. 해외 촬영 시에는 언어로 인한 어려움뿐 아니라, 주변 소리 통제도 쉽지가 않다. 일단 언어소통이 쉽지 않아 식당의 음악 소리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통제하려면 통역하는 사람을 불러 현지 제작부에게 설명을 해야 하니 빠른 진행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해외 촬영을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해외에선 사이렌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울린다는 것이다. 슛 중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NG이기 때문에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얼마 전 < 보안관 >을 촬영할 때는 그야말로 ‘바람과의 전쟁’이었다. 기장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라 늘 바닷가 근처에서 촬영을 하기 때문에 마이크에 바람 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윈드젬머라는 바람 소리를 부수는 역할을 하는 커버를 마이크에 씌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선배들의 경험에서 나온 나름 특수한 아이템을 하나 추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스타킹이다. 스타킹을 씌우면 바람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생각보다 많이 바람 소리를 잡아준다. 그러나 현장에서 쉽사리 사기도 어려워 현장의 여자 스태프들에게 변태라는 놀림을 받으며 스타킹 구걸(?)을 해야 하는 정말 뜻밖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 사극 또한 녹음이 어려운 장르 중에 하나이다. < 방자전 > 때 섭외된 많은 장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 민속촌 촬영 때에는 한옥 특유의 낮은 천장과 좁은 공간 때문에 녹음이 쉽지가 않았다. 마이크는 인물의 머리 위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낮은 천장 때문에 마이크의 높이가 낮아 화면에 마이크가 노출되는 NG도 많이 생겼다. 어느 정도 소리의 톤을 무시하고 인물 밑으로 마이크 위치를 설정해보기도 했지만 이 역시 좁은 공간 때문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또한 사극 특성상 촬영 장소가 유적지나 관광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멀리서 들려오는 도로 소음이 많은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버스나 대형트럭 등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NG가 나곤 했다. 그 시대엔 차량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소리를 담기가 무척 어려웠다. <방자전>을 촬영할 땐 배드씬이 많았는데, 그런 씬 들을 촬영할 때는 무척이나 긴장을 해야 한다. 현장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얻으려면 모든 스태프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인원만 현장에 남아 슛을 간다. 베드씬은 배우들도 후시 녹음을 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나에겐 부담이 많이 되는 촬영 중 하나이다. 이렇듯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소리를 담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실제 영화를 봤을 때 관객에게 배우의 숨소리까지 내 손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소리를 잡아내고 그 소리로 영화의 집중도를 더 높여 줄 수 있는 직업. 그것이 붐 오퍼레이터인 것이다. 물론 만들어지는 소리들도 있겠지만 좋은 소리를 녹음해야 결국 좋은 사운드 디자인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려고 노력한다.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내가 영화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 영화에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붐 오퍼레이터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