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2
- 감독
- 로엘 르네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제이슨 피잘, 조지나 버밴
1995년 6월 29일, 서초경찰서 강력 4반 고병천 반장은 삼풍백화점 인근 지하 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만남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선가 ‘쉭’ 하는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난 곳에서는 백화점 건물이 무너져 그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백화점 건물이 무너졌을 때 회칼이 날아들어 행인의 목에 꽂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고병천은 당시를 전쟁이나 공상과학 영화의 비현실적인 장면에 빗대어 증언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고병천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조직 지존파를 검거하였다. 헬레어로 ‘야망’이라는 뜻의 ‘마스칸’이라는 조직 이름을 쓴 청년 갱단에게 마스칸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지존파’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고병천이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지존파 사건을 모두 목격하여 그 두 사건을 평행하게 엮어낸 인물인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 논픽션 다이어리 >(2013)에 인터뷰이로 출연한 고병천은 두 사건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피의자들의 목적은 지존파나 삼풍백화점 운영권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존파는 각자 10억을 벌겠다, 백화점 경영자는 1조를 벌겠다고 한 것이다. 한쪽은 형법상의 살인을 통해 생명을 박탈했지만, 한쪽은 업무상과실치상이라는 죄명으로 생명을 박탈했다. 목표도 같고 박탈한 내용도 같지만, 직접적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과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으로, 내용상 차이가 없다.” 지존파 청년들이 신속한 재판을 거쳐 이듬해 교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백화점 붕괴를 방조한 사람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고 책임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고병천이 느꼈던 부조리와 <논픽션 다이어리>의 관점은 부분적으로 상통한다. 고병천의 증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기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은행을 터는 사람과 은행을 만든 사람, 누가 더 큰 범죄자입니까?” <논픽션 다이어리>는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통치정책,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뒤안,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던 시기의 중대한 사회, 정치적 변화를 의제화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악마의 대리인’으로 불린 6명의 청년들이 저지른 범죄를 동정하지 않지만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다. 충신의 후손들은 어떻게 잔학한 학살자가 되었나? 지존파의 범죄는 사회적 불평등을 겨냥한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으로 간주되었고 경제 번영의 시도에 수반되는 자본주의의 영향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새로운 소비주의(갱단의 일원은 범행 대상으로 압구정, 오렌지족, 야타족을 언급하였다)와 부자에 대한 증오를 보인 지존파의 범죄는 계급적 동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잘못 조준된 과녁(그들이 살해한 희생자들 중 진짜 부자는 없었다)을 향하였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파생한 어두운 영향을 암시한다. 급성장한 민주주의 거버넌스의 계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논픽션 다이어리>는 사변적인 심문의 접근법을 취한다. 연출자 정윤석은 사회 변화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포괄적인 리서치, 아카이빙 자료의 수집, 자료와 인터뷰의 몽타주 등 내용과 스타일 모두에서 대담한 시도를 보여준다. 미디어가 지존파를 어떻게 악마화했는지에 대한 논평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존파 사건에 대한 재평가에 기여하기보다는 농촌 살인 집단의 트라우마를 광범위한 국가적 내러티브와 연결하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다. 법과 제도에 의한 살인, 개인, 범죄 집단에 의한 살인을 병치하여 심층적인 조사를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정윤석은 내레이션이 없는 개방형 서사를 설계한다. 뉴스릴과 시사토론 프로그램 영상, 형사와 교도관, 법률가, 관료, 종교인 등과의 인터뷰가 내레이션의 흐름을 형성한다. 서사의 주요 국면들마다 주요 쟁점들이 차례로 전환되면서 정점과 최저점, 침묵의 구두점들을 시적인 방식으로 연결된다. 견고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금기의 영역에 서식하는 프로세스, 법과 제도, 종교, 윤리적 기준들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논픽션 다이어리>의 유력한 스타일 전략은 시청각 몽타주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사건과 현상, 스토리, 진술, 논평을 잇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는 여러 방향으로 엮인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포토몽타주와 특정되지 않는 인물의 보이스오버, 화면분할 이미지는 이후에 올 충돌 몽타주의 전조를 보여준다. 중반부 한 장면에서 정윤석은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지하 매몰 현장을 무인 카메라로 찍은 뉴스 영상과 백화점 건물의 잔해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인 난지도의 흑백 사진을 나란히 배열한다. 그 위로는 철골과 시멘트가 어지럽게 널려진 참사 현장을 중계하는 뉴스 진행자의 음성이 깔린다. 음성과 이미지는 시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전자는 후자의 논평처럼 조응한다. 참사의 시간을 전후로 나누는 두 이미지는 생생한 현실의 기록이라는 차원 뿐 아니라 학살과 희생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접근방식에 대한 은유로 삽입되었다. 매몰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활동이 종료된 뒤 건물의 잔해는 쓰레기 매립지로 옮겨졌지만 유가족들 다수는 시신을 전달받지 못했고 일부 가족들이 뼈와 유해를 찾기 위해 직접 수색에 나서기도 했다. 학살과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진상규명, 후속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과거는 반복되었고, 현재도 반복된다. 이것은 한국전쟁과 광주민주화운동, 쿠테타의 기억과 포개지는 후반부 서사에 대한 예비적 조치이다. 가장 강력한 시청각 몽타주 신은 위에 서술한 고병천의 진술 뒤에 이어진다. 카메라는 어두운 시골길을 걷고 있다. 간이 조명이 비추는 몇 미터 전방 너머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여 있다. 길은 구불구불하다. 그 위로 여러 갈래의 목소리들이 병치된다. 강력범을 조속히 처단할 것을 종용하는 김영삼 전(前) 대통령의 주문을 보도하는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 범죄 현상의 안팎을 진단하는 익명의 목소리, 부자에 대한 증오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는 지존파 갱단의 목소리, 끔찍한 범죄자들을 저주하는 시민의 목소리 따위가 사운드 몽타주로 제시된다. 기원이 표시되지 않는 목소리들은 혼란스럽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재, 현재를 불투명하게 만든 과거를 함축한 시청각 몽타주이다. 순간 죽음과 살인을 모티프로 한 사회정치적 탐사는 학살의 아카이빙이라는 역사적 의제로 전환하게 된다. 언제나처럼 무고한 희생은 반복되며 학살자들은 그들의 책임에 대해 침묵한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1964~1985년 사이, 특히 6~7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을 한답시고,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은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Indigenous People)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Waimiri-Atroari) 사람들을 내쫓고 2천 명 이상 학살했다. 심지어 그들은 축제 중에 헬기에서 대량 투하되는 네이팜탄으로 죽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1950~60년대에 펼친 문자 해독 교육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역사적 순간에 문해 교육과 민중의 정치적 의식화 사이에 긴밀한 끈을 묶는”일이 문해 교육이라며, 이 운동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계속 문해 운동을 이어가던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교육 중에 작성한 글과 그림,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브로 간직했다. 아나 바스(Ana Vaz)는 1964년에서 1985년 사이의 아카이브 자료 3천여 점을 디지털 캡처하여, 선주민들이 부재하는 브라질의 현재 풍경과 포개어 프레임에 담는다. 아나 바스의 전작 <산을 자세히 응시하라, Olhe bem as montanhas>(2018)는 EXiS(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20년에 나온 신작 <왜?>는, 식민지에 도착한 선박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모종의 악기 소리, 땅 표면을 질질 끌다 못해 파헤치려 하고 하늘 언저리까지 샅샅이 훑는 듯한 노이즈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삽입곡의 제목은 <근원적인 밤, A Noite Original>(2004), 브라질 구체음악을 대표하는 길례르미 바스(Guilherme Vaz)가 작곡했다. 2018년 타계한 길례르미 바스는 아나 바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68년 리우데자네이루현대미술관에 실험예술 분과를 창설하고 1970년대 초반 독일 쾰른 피드백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길례르미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 요셉 보이스 등이 포진한 당대 유럽 전위예술의 식민성에 이론과 실천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여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지의 조로-팡간제(Zoró-Panganjej), 가비오-이콜렘(Gaviao-Ykolem), 아라라스(Araras) 등 여러 선주민 공동체와 시각 예술 작품과 음악을 공동 창작하고, 악기를 함께 만들었다. 또, 길례르미 바스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와 줄리오 브레사네(Julio Bressane) 등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 운동과 이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협업하여 그들이 연출한 영화 음악 여러 편을 작곡했다. <왜?>의 카메라는 식민 역사를 기념하는 모더니즘 조형물과 군사 독재 개발주의의 상징인 마천루가 즐비한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길례르미의 스코어와 함께 브라질의 도시와 숲, 강 기슭을 떠돈다. 카메라의 눈과 소리가 동행하는 여정 속에서, 선주민들을 학살한 군부의 개발 독재 시기와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 대상에서 선주민을 배제하고 열대우림 파괴를 밀어붙이는 현재가 함께 거하는 시공이 섬광처럼 계시된다. 이 ‘풍경’들은 길례르미의 음악,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그리고 쓴 도큐먼트, 그들이 주인공인 사진 이미지들과 마찰하며 지층 속에 머금고 있던 “어떤 세계의 비밀(즉, 그 대수롭지 않거나 영광스런 외양 뒤에서 그 법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을 폭로하는 간극과 충돌의 힘” (『이미지의 운명』,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을 융기한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얼핏 보아서는 ‘비(非)장소’나 ‘반(反)장소’로 불릴 법한 고속도로 주변의 모노크롬 풍경이 특정한 역사 경험을 품은 ‘장소’로 단박에 탈바꿈한다. 아나 바스의 첫 작품 <사크리스 풀소, Sacris Pulso> (2007)서부터 길례르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어떻게 일컬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하다 ‘즈려밟기’는 어떨까 싶었다. <사크리스 풀소>는 십 대 때 영화와 철학을 공부하러 호주로 이주했다 브라질로 돌아온 아나 바스가 수도 브라질리아 땅을 다시 밟고, 부모와 재회하는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세르지우 바지(Sérgio Bazi)와 줄레이카 포르투(Zuleica Porto)가 연출한 16mm필름 단편 <브라질리아리우스, Brasiliários>(1986) 일부를 인용하는데,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쓴 1962년과 1974년 브라질리아 방문기 서사, 길례르미의 사운드가 이 푸티지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겹쳐진다. 그리하여 구축되는 브라질리아의 과거와 현재는 유령도시의 그것과 닮아있고, 영화는 수도 브라질리아 자체가 SF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 바스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길례르미 카레라(Guillherme Carrera) 같은 평자들은 “SF 다큐멘터리”로 일컫기도 했다. Brasília amidst ruins: The sci-fi documentary of Adirley Queirós and Ana Vaz(2018)라는 글에서 카레라는, 바스가 브라질 역사와 사회의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SF”를 도구로 쓴다고 주장한다. 카레라가 바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인용한 Archaeologies of the Future(2005)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미래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우리 자신의 현재 경험을 낯설게 재구성하”는 장르가 SF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카레라는, 탈식민을 위한 토착문화운동이었던 브라질 트로피컬리즘에 정통한 연구자 로버트 스탬(Robert Stam)과 엘라 쇼햇(Ella Shohat)의 논의[Unthinking Eurocentrism: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1994)]에 기대 “식민지, 신식민, 탈식민 국가의 구조적 단점이, 식민화 과정과 불평등한 분열이 만드는 '소수자’ 서사를 되레 SF로 다룰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호세 리살(José Rizal)이 민족 공동체를 상상하며 쓴 필리핀의 첫 근대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라야 마틴(Raya Martin)이 인용하며, 현대 필리핀의 모순을 집약한 광산 지역에서 식민종주국 스페인으로 순간이동하는 커플을 다룬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2011)를 떠오르게도 하는 언설이다. 한편 아나 바스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모더니즘•트로피컬리즘 등의 백가쟁명 속에서 “새로운 영화(시네마 노부)”를 주창한 글라우버 로샤(Glauber Rocha)의 <지구의 나이, A Idade da Terra>(1980)에 경의를 표하는 단편 <돌의 나이, A Idade da Pedra>(2013)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데 <돌의 나이>에서 바스는 브라질의 영화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와 동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진보와 혁명을 꿈꾸던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1965)과 「꿈의 미학」(1971) 선언에서 펼친 "가난의 미학"이 실제로는 선험적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 고정된 성역할 및 인종 재현에 기댄 예술을 창조했다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바스는 차라리 ‘사물’이 시간과 공간을 대체하여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없는 SF를 ‘발명’할 수 있기에, “다른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계시”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고 서원한다. 이 작품은 아프로퓨처리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이주와 난민의 역사를 사변 서사(SF)로 재구축하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다공성 계곡>에 등장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돌의 나이> 속 ‘돌(pedra)’과 친연성이 크다.) 여러 평자들은, 아나 바스의 작품들이 실은 시네마노부 운동의 국가 및 젠더적 대표성보다는 북미의 애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나 수 프리드리히(Su Friedrich)의 작업, 즉 1970 년대 아방가르드 페미니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목적론적 서사를 부수려 시도하는” 영화들과 가깝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 마야 데렌(Maya Deren)이 실사 이미지와 사운드를 겹치면서 현실과 분리된 영화적 세계와 집단적 역사 감각을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분석한다. 2020년 사사로운 리스트에 아나 바스의 <왜?>와 더불어 꼽은 <방파제, Quebramar>(2019)를 연출한 크리스 리라(Cris Lyra)도 브라질 여성 감독이다.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후계자라 불리는 리라는 <방파제>에서 젊은 레즈비언들이 새해를 맞으러 떠나는 길을 동행한다.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과하며 성 정체성 논의와 그로 인한 개인적 체험, 브라질 사회의 긴장은 새로운 시공의 서사로 재구축된다. 또, <방파제>는 짧은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의 몸과 목소리로 브라질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진동시킨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비전형적 여성성을 탐구하는 리라의 차기작 <내 말을 들어줘, Ouça>는 팬데믹 시대 퀴어 여성들의 편지에 기반한 러브스토리라 한다. (<방파제>와 <왜?>는 모두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Mubi 한국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성영화의 선두주자인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이 제작 중인 신작 <초코바르, Chocobar>는 2009년에 살해된 선주민 활동가 하비에르 초코바르에 관한 비디오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수집해 재편집하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한데 아나 바스는, 비디오나 필름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종이에 선주민들이 그리고 쓴 드로잉 몇 점을 ‘풍경’ 이미지, 소리와 충돌시킨 몽타주만으로 큰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글과 그림은 자신을 학살하고 쫓아낸 국가의 총과 칼•전투기 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네이팜 때문에 폭사한 아마존의 물고기들, 열대우림을 베어내는 자본의 거대한 전기톱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낱낱이 증언한다. 현실 풍경과 겹쳐지되, 투시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선주민들의 드로잉이 재창출하는 땅의 그림(말 그대로의 ‘지도’)은, 작금의 ‘풍경’ 속에 잊힌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다시 일깨운다. 역사 기억을 저장하고 새로운 예술 표현을 찾는 ‘매체’로 “쇠락한 기술적 지지체”를 ‘재창안’할 수 있다는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논의와 만나는 최근 사례가 <왜?>라고 필자가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국 작품, 김민정 감독이 16mm 필름과 디지털을 ‘재집합’하여 제주 4.3을 다시 호명하는 <레드 필터가 철회됩니다>(2020)도 또 다른 “매체 재창안”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선주민들의 이차원 평면 글•그림과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한 실사 이미지를 결합하며 매체의 역사를 더불어 기억하는 아나 바스는, 디오라마나 파노라마같은 삼차원 측면 감각이 식민과 개발을 위한 지도와 조감도ㆍ설계도에서 연원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필리핀 출신 남성 감독 미코 레베레자(Miko Revereza)의 근작들은 사물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의 이동을 형상화하면서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현실 지도의 국경을 넘나들고, 마티 디옵(Mati Diop)이나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같은 디아스포라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서사와 사운드의 운용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원근법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반면, 대만 작가 수유신(Su Yu Hsin)의 <잠자는 물II, water sleep II Akaike river under Xizang Road>(2019), 국내에서 주목받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정여름 연출) 등 지도를 작성하는 원리인 수직원근법과 게임의 3차원적 가상ㆍ증강현실 기법, GPS를 이용한 이미지를 적극 수집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묘파하려는 시도들도 근간에 여럿 있었다. “왜?”로 번역되는 이 영화의 제목 “Apiyemiyekî?”는, 1960년 이후 선주민 문해 교육을 담당한 활동가 에기디오(Egydio)가 아카이브에 보존 중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남긴 단말마 같은 글귀(“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왜 죽였지? 왜?”)에서 따왔다. 에기디오 교수는 <왜?>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인터뷰이이다. 그가 아카이빙한 글과 그림들은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선주민 학살 진실 규명 소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에기디오와의 협업 과정을 운전 중에 감독과 전화통화로 확인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닦은 BR-174 고속도로 위로 흩어져 간다. 이 사변적 (논)픽션은 어떤 ‘풍경’ 속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증명하고야 만다. 영화의 카메라와 사운드 트랙이 브라질의 땅과 숲, 하늘과 물에 잠겨 있는 그들을 애타게 찾아 헤맬 때, 사진적 감각에 섞여드는 자연의 음향이 화룡점정할 때,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자취를 입은 아마존의 격랑이 이윽고 색을 얻을 때, 결코 잊힐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관객에게도 찾아온다. 영화 말미, 브리질리아로 귀환한 카메라는 분노가 내뿜는 바람에 실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카메라의 운동은, 우리가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맞서 저항할 미래의 동력이 되어줄 터다. 그래서 아나 바스의 <왜?>는 멕시코 선주민들의 역사와 운동을 ‘재집합’하는 ‘로스 인그라비도스 집단'(Colectivo Los ingrávidos)의 영화들과도 닮았다.
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가 죽을 자리 < 판키아코 >(2020)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배우로 활동하던 파나마 태생의 아나 엘레나 테헤라가 만든 첫 장편영화다. 그는 인터뷰에서 <판키아코>를 배우로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하듯이 찍었다고 밝혔다. 이 말은 단순히 직업적으로 익힌 기량이나 연기하면서 배운 것의 응용에 관한 문제나 연기 연출의 방법론만은 아니다. 배우에게 감정은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길어올려지고 표현되지만, 배우의 육체를 통과하면서 추상적인 감정의 상태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표정과 제스처와 인상으로 변형되지 않는가.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세발도(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의 여행이라는 이야기와 세밀하면서도 풍부한 이미지와 구나 얄라 부족의 실제 기록이 뒤섞인 형식의 근간을 ‘변형’에서 찾은 것 같다. 이 영화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실험영화라고 스스로를 규정했지만 그보다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라는 형식이 섞이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실제의 삶과 꿈의 조각이 부지불식간에 찾아들고, 육체의 여정과 영혼의 여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토착민과 이방인의 정체성 차이로 인해 변형되기를 거듭하는 픽션이라고 부르는 데 어울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이고 또 어찌 보면 에세이영화의 모습도 보이지만 이 영화는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는 픽션이다. 세발도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후 67세가 된 지금까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온 것 같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과 우수와 노스탤지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가 고양이 밥을 주고 갈매기에게 생선을 던져주고 복권을 긁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주크박스에서 음악을 고르는 모습을 보자면, 그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짙은 회한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현재의 삶과 과거의 기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고, 구나 얄라 부족민이라는 정체성과 백인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현재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며, 포르투갈어와 부족의 언어인 둘레가야語 사이에서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그가 낡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고향의 말을 들으며 비로소 유년 시절의 꿈을 꾸게 된다. 어둠 속에서 절구질하는 할머니의 얼굴, 골목을 달리는 아이(어린 세발도일 것이다)의 뒷모습, 아이의 환하고 천진한 웃음, 푸른 잎들이 떠 있는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고 풀잎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모습이 이어진다. 풀벌레 소리와 욕조 물에 떠 있는 초록색 이파리와 물을 관통하는 햇살은 즉자적이어서 너무 생생하고, 어느 날의 정경은 풍요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하지만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세발도가 술집에 앉아 맥주를 마실 때 웬 백인 남자가 다가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선원”의 내용을 읊어대고 사라진다. 어린 시절의 꿈(어쩌면 기억)과 고향에 갈 수 없는 자가 새롭게 만든 머릿속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세발도를 각성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사일라(구나 얄라 부족의 전설과 설화를 구술하고 전승하는 지도자로 부족민에게 조상의 말을 전달하고 해석한다)’이기도 한 페르난두 페르난데스가 세발도를 찾아와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고 말하고 떠나면 파나마에서 카누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판키아코>의 1부에 해당된다. 2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고향집과 교회를 둘러보고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 술을 올리고 공동체의 각종 제의(장례식, 탄생식, 혁명 기념일)에 참여해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나눠 마시고 마을을 행진하는 무리에 섞인 세발도를 보여준다. 감독은 영화 첫 장면에 자막으로 코기족의 창조설을 보여줬고, 이어 구나 얄라 부족에게 전해지는 ‘판키아코’ 설화를 보여준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고향을 떠난 세발도와 백인에게 태평양을 보여줌으로써 백인의 침략에 빌미를 준 판키아코가 비슷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바다라는 거대한 ‘물’과 고향 땅, 부족민의 생활과 언어, 구전되는 설화와 전설, 조상들의 방식 즉 그의 뿌리를 찾는 것이 세발도와 판키아코가 (두 바다 사이를 떠돌)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질 유일한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발도의 몸은 고향에 와 있으나 그의 영혼은 판키아코처럼 카리브해와 ’남쪽 바다‘(태평양) 사이를 떠돌고 있기에 “제 자리에 있지 않은 기억”을 찾아야 하며, “진정 머물고 싶은 곳”과 “눈 감고 싶은 곳”이 어딘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판키아코>는 세발도가 물로 몸을 씻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육신이 준비하고 실행하며, 원망과 저주를 통과해야만 새롭게 열릴, 영혼의 정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페르난데스는 “약초가 우러난 물로 목욕을 하면 혼이 씻기고 (병이) 깨끗이 낫게 되고 (영혼을 되찾을)여행을 채비”하게 된다며 그의 여정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한다. 이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다양하게 포착된다. 포르투갈의 항구로부터 시작해 파나마의 햇살에 표면이 산란되는 물과 욕조에 찰랑거리는 물살, 바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파도의 포말, 산의 푸른빛을 담아낸 웅덩이의 거울처럼 빛나는 표면, 잔잔한 강의 수면은 세발도의 발길이 닿은 곳이자 구나 얄라 부족의 터전이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강물에 비쳐보고 형제임을 알게 된 남자의 설화가 지시하는 것처럼 “영혼이 남아 있는” 수면은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되살리고, 아픈 몸과 영혼을 낫게 만들며 마침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되찾아준다. 이때 카메라는 표면에 머물면서 프레임 전체를 물의 부드러운 흐름이나 힘차게 요동치는 운동으로 꽉 채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세발도의 목욕은 첫 장면의 목욕과 판이하게 다른 형상이다. 포르투갈에서 세발도는 샤워기에 몸을 적시는 정도지만, 이 장면에서의 물은 그의 영혼을 되돌리기 위한 제의이기 때문에 다양한 크기의 숏으로 분절되고 초록색 약초가 물살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물은 욕조를 벗어나 바다로 향하듯 휩쓸려가는 물살을 만들며 흘러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은 마침내 죽을 자리를 찾은 세발도의 데스마스크와 같은 얼굴이다. 그의 육체적 호흡이 끊어짐으로써 그의 영혼은 회복되고,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영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판키아코>는 파나마의 지리적 환경과 그 땅에서 자생하는 식물과 동물, 풀벌레와 산의 모습과 소리들로 채워진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파나마의 바다는 물론이거니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사각거리는 소리, 깊은 산 속에서 자라나는 다양한 약초의 모양새, 약초를 채집하고 보관하는 장면, 마른 잎사귀를 불태우는 장면도 <판키아코>라는 영화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구나 얄라 부족 여인들의 화려한 전통의상과 주름진 얼굴들, 붉은색 머리 수건을 덮어쓴 채 울고 애도하는 모습, 어둠 속에서 모여들어 원형을 이루는 춤 동작, 독립된 영토권과 자치권을 획득한 1925년 혁명의 재현 장면 등은 감독이 인류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채집한 귀중한 기록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파마나의 토착민을 향한 감독의 관심은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부족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들의 몸짓과 감정을 토로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도 카메라가 절대로 토착민을 앞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지척에 있되 그들의 제의를 방해하거나 요란한 관심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세발도의 과거는 슈퍼8 카메라와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고 현재의 장면은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되어 기억과 과거와 영혼의 여정과 공동체의 제의를 각각 다른 질감과 색감, 화면비율로 포착하는 방식도 눈에 띈다. 과거는 흔들리고 유동적인 익명의 시선(조상의 영혼이거나 세발도의 영혼 같기도 하다.)이 바라보는 것 같고, 현재는 대개 고정된 프레이밍을 유지함으로써 감독의 시선을 부각시킨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이산으로 인한 부재와 고립, 잃어버린 정체성을 픽션의 형식에 담아내고 구나 얄라 부족의 제의와 풍습은 다큐멘터리의 태도로 접근한다. 세발도라는 개인의 여정은 판키아코의 이야기와 이어지고, 구나 얄라 공동체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태피스트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일화를 소개한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2017년에 인류학자이자 포르투갈 대학에서 ‘판키아코’ 전설과 연관된 연구를 하며 어시장 보조 일도 하고 있는 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를 만났다. 그가 파나마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감독은 이미 썼던 시나리오를 폐기하고 그가 영혼의 여정을 떠나는 내용으로 바꾸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난생 처음 ‘세발도’라는 자신을 연기하게 된 세발도와 그의 실제 삶이 반영된 이야기와 이방인인 감독이 구나 얄라 공동체에 8주간 머물며 카메라에 담아낸 바다와 물살과 햇살과 식물과 사람들의 얼굴은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서로에게 스며듦으로써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현장이되었다. <판키아코>는 생성과 변형의 기록이자 죽음과 탄생의 서사시이며 구나 얄라 사람들의 존엄성이 담긴 집단초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