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스펜서 - 세러모니
- 감독
- Paul Lynch, Andrew Wild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Avery Brooks, Robert Urich
2021년 10월 15일 정연씨에게, 정연씨, 한국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얼마 전 물으셨지요. 평소 그랬듯 무슨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한편으로는 설명하기 싫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싫은 까닭을 설명하려면 밝힐 일이 너무 많아 말로는 도저히 정리할 수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글로 대답을 드리려 하지만, 이것도 매우 어중간한 대답으로 그칠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싫음과 그 여파가 한국 영화와 제 사이를 가로막고 있고, 이 주제의 중대성이 제 기억과 이해력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1) 그렇습니다, 정연씨. 제가 지금 정연씨에게 쓰고 있는 건 편지입니다. 공교롭게도 정연씨에게 처음 편지를 쓴 날이 2015년 10월 15일이더군요. 기억하시나요? 정확히 7년 만에 다시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7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이 변해 그전과 지금을 같은 세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지만 솔직히 말하면 변하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연씨는 그동안 아기를 낳고 일산으로 이사 갔으며 네 권의 책을 내고 한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백스물두번의 토크 사회를 봤으며 담배를 끊고 살이 쪘지만 여전히 브릿팝을 듣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LP판으로 브릿팝을 듣는다는 사실이겠지요. 정연씨가 휴대용 턴테이블을 문보영 시인에게 선물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정연씨는 그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받은 걸까요. 문보영씨의 인상적인 에세이 <일기 시대>에는 MBTI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영씨의 성격 유형은 INFP로 ‘열정적인 중재자’였는데 어느 날 INFJ ‘선의의 옹호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정연씨는 INTP ‘논리적인 사색가’이지요. 두 유형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때문에 잘 맞다고 합니다. 특히 비즈니스 파트너로 찰떡궁합이라는군요(참고로 저는 MBTI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오만해서일까요, 너무 겁쟁이라서일까요. 어쩌면 이 둘은 같은 거 아닐까요). 아무튼, 정연씨는 턴테이블이 아까우니 LP를 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시험 삼아 LP를 샀다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수십년 간 들어온 브릿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제프 베조스는 정연씨가 주문한 New Order의 네 장의 LP판 중 두 장을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상태로 배송했지요. 그럼에도 당신의 못말리는 구매욕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자비스 코커와 칠리 곤잘레스의 “ROOM29”를 주문했으니까요. “ROOM29”는 선셋대로의 전설적인 호텔 샤또 마몽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앨범이라고 하더군요. 자비스 코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레코드는 영화가 인간 존재에 끼친 영향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그 지점에 완전 푹 빠져 있어요. 2) 자비스와 칠리가 2017년에 런던 바비컨 센터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정연씨, 상우씨와 바비컨 센터를 걷던 2019년의 어느 가을 날이 생각납니다. 두 사람은 점심 대신 칠리 페퍼 아이스크림을 먹었지요. “ROO29”에도 이런 제목의 곡이 있네요. “Ice Cream as Main Course.”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 모든 것이 예견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말이지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겠습니다. 좋아하는 음악: 브릿팝(25년째) 좋아하는 뮤지션: 뉴오더(25년째) 기록 시스템: 미니컴포넌트 -> CD플레이어 -> 아이팟 -> 스포티파이 -> 턴테이블 본질은 그대론데 실존만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턴테이블로까지 브릿팝을 듣는 정연씨가 조금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영화를 향유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하는 시즌제 드라마가 저에게는 루이 푀이야드 같은 감독의 연속영화(serial film)를 연상시키기도 하니까요. 참고로 정종화 연구원은 연속영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편 극영화가 정착되기 이전인 191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제작되고 유행했다. 주로 활극적인 내용을 2권(롤) 1편으로 구성하고 그 편의 마지막에 위기일발의 장면(cliffhanger)을 넣어, 최종편이 끝나는 12, 13주부터 24, 25주 동안 관객들이 매주 영화관을 다니도록 만드는 형태다.” 3) 어쩐지 욕하면서도 < 오징어게임 > 다음화를 클릭하는 제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다르겠지만요. 하지만 정말 다를까요? 뭐가, 얼마나?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은 1년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일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 시스템의 동적평형 때문이지요. 일본의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스템의 내구성과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스템 자체를 흐름에 맡기는 것이다. 변화란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요. 질서는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 4) 여기 질서/파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았던 2015년 10월, 저는 고다르가 남가주 대학에서 토론 중 한 말을 인용하며 편지의 끝을 맺었습니다. 2015년 10월 31일이 보낸 편지였지요. 그리고 7년이 지난 2021년 10월 30일, 정연씨와 저는 강릉영화제에서 “한국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사람들”을 주제로 토크를 할 예정이지요. 정연씨가 보내온 대본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더군요. 지돈: 그러나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지 않나요? 정연: 그런 점을 바꾸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다른 영화들을 보러 올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 에세이-필름을 보러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뀌어야한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그것은 단지 영화를 만드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돈: 관객을 바꾸려고 한다는 말이에요?! 정연: (관객을 바라보며) 세계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5) 저는 정연씨의 이 대본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과거에 우리가 나눈 원고-편지에 대한 단순한 패러디인지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저희에게는 몇 가지 논쟁점이 더 있지요. 정연씨는 최근 홍상수의 영화에 빠졌고 21세기 한국영화는 홍상수다 , 라고 주장하는 꿈을 종종 꾸기도 합니다. 저로 말할 거 같으면,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홍상수(또는 김기덕)이며 그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집니다. 제가 한국 영화로 진입한 첫번째 입구였던 봉준호와 박찬욱이 지금까지 든든한 이정표가 되었다면 아마 저는 길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를 보며 길을 찾을 수 있는 시대의 사람이 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떤 별은 너무 환하게 불타 쳐다 볼 수 없을 정도고 어떤 별은 블랙홀에 흡수됐으며 어떤 별은 낙하해서 코앞을 스쳐지나기도 합니다. 길을 알려주기는커녕 우리의 행성을 박살내려는 양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홍상수고 그러므로 저와 정연씨가 10월 말에 강릉에 가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강릉이 어떤 장소인지 기억하시나요? < 강원도의 힘 >이 20세기 영화라는 이유로 우리의 에세이 필름에서 제외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시길.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도 강릉이 나오니까요. 저는 정연씨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스트리밍 사이트에 있는 모든 홍상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송선미 분이 김민희 분에게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을 설명하네요. “꼭 읽을 책을 사. 그래서 그 책을 깊이 만나. 정말 싸우듯이 그렇게 만나야 돼, 책하고.” 알겠죠, 정연씨? 꼭 읽을 책을 사세요. 샀던 책은 그만 사시구요. 2021년 10월 24일 정연씨에게 어제 정연씨와 리들리 스콧의 신작 < 라스트 듀얼 > GV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쓸쓸하기만 했습니다. 가을이라서 그런 걸까요? 지나치게 일찍 찾아온 추위 때문에 온몸이 떨려서 그런 걸까요? 저는 오늘 검색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좋은 작품에 비해 GV는 좀 아쉽더군요. 오른쪽에 계신 작가님이 이야기를 벌여놓으면 왼쪽에 계신 평론가님이 수습하고 정리하는 진행이 다소 매끄럽지 않아 그렇지 전 꽤 유익하고 좋았습니다!! - 네영카 및 익스트림 무비 자유게시판에서 발췌 보시다시피 정연씨가 또 한번 저를 구원했습니다. 정연씨가 아니었다면 GV는 수렁에 빠졌을 게 분명합니다. 저희가 처음했던 GV 기억하시나요? 빔 벤더스의 영화 < 에브리띵 윌 비 파인 >이었죠. 저희의 GV는 어느 네티즌에 의해 “올해 최악의 GV”로 선정되었습니다. 이후 더 이상의 GV 섭외는 없었죠(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영화 관계자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운좋게 GV 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정연씨는 과거의 오욕을 극복하고 이동진-되기를 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감미로운 목소리, 아담 드라이버의 잘생김 연기와 리들리 스콧의 의사-페미니즘에 대한 시의적절한 논평… 거리두기로 인해 구 아이맥스 관이었던 용산 CGV 4관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접한 정연씨의 모습은 새로운 평론가의 탄생을 보는 듯했다고, 어느 관객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또 한번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습니다. 2015년 10월을 가로질렀던 저희의 편지에 리들리 스콧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오늘과 같은 날인 10월 24일, 제가 정연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말입니다. 저는 < 마션 >을 보고 난 뒤 이렇게 씁니다. <마션>을 보니 리들리 스콧은 하수라는 저의 심증이 확증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는 쓸개 빠진 곰처럼 굴더군요. 꼬리를 흔드는 곰이란! 과거란 대체 무엇인가요. 정연씨. GV에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제 마음 속에 울리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은 언제나 지금도 일어납니다. 그 일치가 너무 놀라워서 손에 쥔 상상 속의 펜을 바닥에 떨어뜨릴 지경입니다. 아무래도 편지 따위를 쓰지 말았어야 했나 봅니다. 자기 자신한테서 벗어나질 못하니 말입니다. 사실 저는 편지를 혐오합니다. 과거의 편지에서도 내내 투덜대더군요. 편지는 21세기 최대의 가식이다, 편지를 쓰느니 돼지를 잡겠다…(이건 앨프레드 테니슨의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 편지가 위대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령작가 리 이스라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녀는 1967년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를 다룬 에스콰이어지 기사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시니컬한 브룩클린 출신 유대계 레즈비언이었던 리 이스라엘은 이후 탈룰라 뱅크헤드와 도로시 킬갈렌 같은 여성들의 전기를 쓰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그러나 운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녀가 작업한 화장품 업계의 대부 에스티 로더의 책이 처참한 평가를 받게 되거든요. 그녀는 이후 긴 슬럼프와 가난, 정신적인 궁핍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 리 이스라엘을 구한 건 편지였습니다. 1990년대 까지만해도 유명인들의 편지는 비싼 값에 거래되는 고서적 같은 물품이었습니다. 뉴욕의 서점들은 낡은 서랍에서 나온 편지를 구매하고 수집가들에게 되팔았지요. 리 이스라엘은 편지를 위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빛바랜 종이와 오래된 타자기를 사용해 작가나 코미디언, 배우의 문체를 흉내낸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끝에 어설프게 위조한 서명만 하면 작업 끝! 아무도 그녀의 위조 편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죠. “도로시 파커는 역시 너무 유머러스해! 그녀의 성격이 편지에 묻어나네요.” 그러나 결국 리 이스라엘의 사기 행각은 FBI에게 적발됩니다. 리 이스라엘은 죽는 날까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을 썼고 그 이야기는 영화화가 되었지요. 자서전과 영화 모두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울립니다. 편지는 내 최고 걸작이고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리 이스라엘의 편지 쓰기를 로지 브라이도티의 “변신: 되기”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리 이스라엘이 도로시 파커나 헤밍웨이, 노엘 카워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편지가 되었지요. 이른바 편지-되기. 그리고 그녀의 편지는 수신자에게 배달되지 않습니다. 편지 속의 수신자는 처음부터 위조된, 가짜 수신자일 뿐이지요. 진짜 수신자는 익명의 군중이며 이 편지는 시작부터 오배의 가능성 위에서 쓰였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썼지요. “’유령’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든 시니피앙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확률적 오배가능성, 오배될 가능성(약속)과 오배되었을지 모르는 가능성의 조합에 다름아니다.” 6) 리 이스라엘이 고스트라이터였다는 사실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제가 한국영화와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에세이 필름과도 관련이 없구요. 그러나 저는 여기서 아주 간명한 하나의 방법을 배웁니다. 우리가 한국 영화의 얼굴과 언어와 불화하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면, “나”를 대체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로지 브라이도티를 인용할 차례입니다. 되기들은 외부의 다른 타자들과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주체를 그 자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비통일적 실재로서의 유목 주체는 자기 추진적인 동시에 이질적으로 정의되거나 외부를 향한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로, 다시 말해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고전적인 이원론의 ‘타자들’ 방향으로 움직인다. 즉, 그 과정에서 이 타자들을 대체하고 재영토화하지만 항상 일시적인 기준으로만 그렇게 한다. 7) 김홍준의 < 나의 한국 영화 >를 보라고 했던 제 말을 기억하시나요? 임재철 평론가는 폴 발레리가 “비평이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인식한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우리의 에세이 필름은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와 자기 자신 너머로, 포스트-미Post-Me, 포스트-(내)얼굴… 임재철 평론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오르네요. “금정연은 영화 감독을 해야돼. 근데 마스크를 써. 얼굴을 가려. 너무 착해보이잖아.” 부디 무사히 강릉에서 뵙길 바라며. *** 1) <작가의 편지>(마이클 버드, 올랜도 버드, 황종민 옮길, 예술문화, 2021) 2) "How a mythical Hollywood hotel inspired Jarvis Cocker's and Chilly Gonzales' project about the magic of cinema", <Loud and Quiet> 3) " 연속영화와 연쇄극, 극영화의 등장 ", 정종화, KMDb 4) <생물과 무생물 사이>(후쿠오카 신이치,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2008) 5) <고다르 X 고다르>(데이비드 스테릿 엮음, 박시찬 옮김, 이모션북스, 2010) 6) <존재론적 우편적>(아즈마 히로키,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5) 7)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 위대한 맥 세네트는 자신이 개발한 엎치락뒤치락 코미디를 더 밀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새로운 추적 장면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대중은 드라마를 원했다. 영화저널에서는 ‘스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은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키스톤 활극코미디는 새로운 등장인물(Character)이 필요했다. 맥 세네트는 키스톤 회사의 감독이자 여배우이며,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로듀서이던 메이벨 노만드와 함께 온 사방을 뒤졌다. 그러던 중에 뉴욕 42번가 아메리칸 뮤직홀에 영국에서 순회공연을 온 런던 카노 극단의 <영국 뮤직홀에서의 하룻밤>을 함께 보았다. 무대에 선 24세 청년의 코믹한 연기가 인상 깊었다. 키스톤 회사의 영화감독 애덤 캐슬도 이 배우에게 주목했다. 키스톤 회사는 1913년 9월 25일 이 배우와 주급(週給) 150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그 청년이 찰스 스펜서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사람들이 애칭으로 ‘찰리’ 채플린이라고 부른 이 위대한 예술가가 연극과 작별하고 영화로 온 순간이다. 채플린은 카노 극단과 작별하고 런던을 떠나 LA로 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채플린은 영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모든 걸 처음부터 배워야만 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 채플린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첫 상영되는 날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채플린은 (훗날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러 가지 재능이 있었는데 그중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학습능력은 마치 “하늘에서 내린 것만 같은” 천재였다고 한다. 채플린이 영화를 찍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맥 세네트는 채플린이 24세의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서 콧수염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콧수염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코밑수염이 아니라 수염 끝이 위로 올라가는 카이젤 수염이었다. 채플린의 첫 번째 영화는 <생계비 벌기 Making a Living>(1914)다. 감독은 헨리 레어만. 상영시간은 13분. 채플린은 이 영화를 “끔찍하다”고 말할 만큼 싫어했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그냥 키스톤 영화사의 평범한 악당 중 한 명처럼 보일 뿐이다. 채플린은 무언가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방랑자(the rramp)' 찰리 채플린> <1916년의 찰리채플린> 채플린이 촬영한 순서로는 세 번째 영화지만 두 번째 영화 <매벨의 이상한 모험 Mabel’s Strange Predicament>(1914)보다 먼저 개봉한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1914)에서 처음으로 작은 모자와 지팡이, 마치 빌려 입은 것만 같은 통이 넓은 바지, 행색에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조끼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 복장은 웃겨 보였지만 동시에 이상한 비애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대중은 이 인물을 ‘떠돌이 방랑자(the tramp)’로 받아들였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인물, 어수룩해서 여기서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인물, 무슨 일에도 끼어들지 못할 게 분명한 인물, 결국에는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가 여기서 떠나는 인물, 그렇게 언제까지나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물, 미국 대중은 이 새로운 인물에게 너무 쉽게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노동자 대부분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플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는 자동차 경주가 벌어지는 내내 이걸 촬영하려는 카메라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면서 매번 촬영을 방해하는 방랑자의 에피소드다. 그가 꼭 나쁜 의도로 촬영 팀을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피해주려다가 촬영을 망치게 만들기조차 한다. 6분 19초의 상영시간인 이 영화는 채플린의 ‘이후’ 영화에 대한 ‘위대한’ 예고편처럼 보인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채플린은 카메라 앞에 자기 얼굴을 잔뜩 들이밀고는 얼굴을 찡그려 보인다. 마치 카메라라는 신기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다가가서 본다. 채플린은 그렇게 호기심을 안고 위대한 영화를 차례로 만들었다.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는 1914년 2월 7일에 개봉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보다 위대한 등장인물은 없을 것이다. 단언할 수 있다.
정작 해방이 됐으나 영화계는 휴면상태였다. 옛 조선영화사 자리에 영화건설본부라는 문패를 달고 만든 25분 분량의 <해방뉴스>(촬영 김학성, 편집 박기채)가 공개된 게 고작이었다( 중앙신문, 「일요특집, 찬란한 예원(藝苑) 풍경」, 1945.11.1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우리의 영화가 생산된 것( 최용달 「해방뉴스 평」, 예술통신, 1945.10.25. )이 기꺼울 정도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로이드의 구두방>(해롤드 로이드 주연)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소년의 거리>(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와 같은 외국영화가 볼거리였다. 이런 시대에 1946년 최초의 항일 광복영화가 나왔다.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그것이다. 이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두 달 간격으로 나온 기록영화 <안중근 사기(史記)>(이구영), <제주도 풍토기>(이용민)와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에 이은 네 번째 한국영화계의 결실이다. 미군정 치하였다. 불과 1년 전 일본제국 의 특공대 지원을 촉구하는 <사랑과 맹서>(1945)와 같은 어용영화를 만든 최 감독이 광복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의 한 장면 묻힐 뻔했던 ‘자유만세’의 단역 <자유만세>에는 한동안 한국영화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폭약을 운반한 죄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지하 조직책 최한승(전창근)에 의해 구출되는 중절모의 사나이, 바로 박동지 역의 김승호가 그 사람이다. 1 보잘 것 없는 이 단역배우가 뒷날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2] <자유만세>에 출연한 김승호. 영화로는 데뷔작이다 아무튼 김승호는 이듬해 <자유만세>의 주인공 전창근에 의해 16밀리 농촌계몽영화 <해방된 내 고향>(1947)과 밀수의 근절을 촉구하는 경찰청 지원의 <밤의 태양>(1948, 박기채)에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사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김승호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영화, 연극인들과 함께 명동성당에 갇혔다. 해방 후 월북했던 배우 심영이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북으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의정부 근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4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환도할 무렵 그는 대전에 머물며 자신이 창단한 극단 ‘배협’의 공연을 계속했다. <망향>(1952, 대전시공관), <허무한 사랑>, <그들의 가는 길>(1953, 시공관), <유관순>(1954, 대전극장) 등이 이때의 레퍼토리이다( 도완석, 「대전·충청 연예인실록, 전쟁참화 속에서 ‘배협’ 무대 이어져」 중도일보, 2016.4.30. ). <허무한 사랑>에서는 연출을 담당했다. 그가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김기영의 감독 데뷔작 <양산도>(김기영, 1955)부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 허백년, 「양산도가 제기한 문제점」, 조선일보, 1955.11.6. )라는 등의 혹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1년 뒤 출연한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이 작품성과 함께 그가 주연한 맹진사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풍토색이 강한 민속극으로서도 일류의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머요 풍자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국산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신영화, 풍토색 강한 민속극」, 한국일보, 1957.2.14.) 는 작품평에 이어 “더욱이 맹진사(김승호)의 숙달된 연기는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주었다”( 「신영화, 한국적 아이로니, 시집가는 날」 조선일보, 1957.2.15. )는 과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봉래 역시 “연기 면에 있어서는 김승호의 역연이 압권이었다. 자기 역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였고 등장인물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호흡이 잘 어울렸다” (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67.2.19 )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3]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으로 출연한 김승호 조선조 때 맹진사댁과 김판서 댁의 혼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반사회의 위선과 구습, 결혼제도의 모순을 희극적 아이러니로 빚어낸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개명)은 결국 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을 받음으로써 국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로 기록된다. 김승호는 이런 후광에 힘입어 1957년 한 해 동안 <오해마세요>(권영순)를 비롯한 <봉이 김선달>(한홍열), <아리랑>(김소동), <풍운의 궁전>(정창화) 등 15편, 58년엔 <돈>(김소동), <초설>(김기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생명>(이강천), <인생차압>(유현목), <마도의 향불>(신경균) 등 20편에 출연하고, 59년엔 <곰>(조긍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육체의 길>(조긍하) <불멸의 성좌>(유진식) 등으로 비로소 30편선(34편)을 돌파하여 ‘김승호 시대’를 예고한다. 1960년에는 <피 묻은 대결>(김묵), <로맨스 빠빠>(신상옥), <흙>(권영순), <박서방>(강대진), <저 언덕을 넘어서>(박성복) 등 25편으로 전년도에 비해 10여 편이 줄긴 했으나 61년부터 <주마등>(이만희), <마부>(강대진). <삼등과장>(이봉래). <노다지>(정창화), <어부들>(강대진),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등 32편에 이어 62년 <월급쟁이>(이봉래), <전쟁과 노인>(임권택), <감나무골의 공서방>(김응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등 다시 34편을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사진 4] <돈>(김소동, 1958)에 출연한 김승호.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다 사기 당하는 순박한 농민 역을 맡았다 63년에는 <굴비>(김수용), <로맨스그레이>(신상옥), <아버지 결혼하세요>(김용덕), <혈맥>(김수용) 등 23편(총 제작 편수 148편)에 출연했는데, 이 결과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인기 스타로 떠오른 신인 신성일이 이 해에 출연한 21편보다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46세에 이른 중년이었다. 64년에는 <월급봉투>(김수용), <비련의 왕비 달기>(최인현, 약풍),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등 33편, 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나봉한), <마포 사는 황부자>(이봉래), <배비장>(신상옥) 등 35편, 66년 <하루살이 인생>(권혁진), <아빠의 청춘>(정승문), <대폭군>(1966, 임원식) 등 26편, 67년 <만선>(김수용), <역마>(김강윤), <돌무지>(정창화) 등 17편, 68년 <장군의 수염>(이성구), <풍운>(권영순), <영원한 모정>(김기덕) 등 9편, 69년 <허공에 진 청춘>(정원), <사화산>(고영남), <마법선>(이창근) 등 2편, 1971년 <족보>(고영남) 1편 등 이렇게 김승호는 23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통해 모두 3백14편을 남겼다. 김승호표 서민영화의 형성과 넉살 후시 녹음시대였지만 그는 거의 성우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피적인 몸의 표현만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음성연기까지 갖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사극에서는 서민연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전창근),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의 고종황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권영순)의 진시황제는 물론 <대폭군>(1966)의 묘장왕,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의 대원군, 그 밖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평양기생 계월향>(1962, 이태환)의 배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5] <대폭군>에 출연한 김승호 김승호 연기의 또 다른 면모는 넉살과 딴청으로 비벼낸 해학과 풍자이다. 무남독녀를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다 오히려 제가 만든 덫에 걸리고 마는 <시집가는 날>(1956)의 맹 진사, 돈 에 눈이 멀어 횡령, 공문서 위조 따위의 불법 행위를 벌이다가 법망에 걸리자 위장 자살극을 벌이는 <인생차압>(1958)의 모리배 이중생, 새 부임지에 와서도 엽색행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비장>(1958)의 제주 목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특히 <인생차압>은 금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타산적인 탐욕의 허상을 시니컬하게 표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의 연기 본령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꿰뚫어 보고 엮어내는 데에 있다. 사채 꾼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재산을 날리는 <돈>(1958)의 농사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곰>(1959)의 무식한 목수, 우직하고 성실하나 가족에게 유독 권위적인 <박서방>(1960)의 연탄아궁이 수리공, 두 남매를 키워 아들을 고등고시에 합격시킨 <마부>(1961)의 홀아비, 밀수배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감나무골의 공서방>(1962)의 고리대금업자, 복덕방 간판을 내걸었으나 찾는 사람이 없는 <혈맥>(1963)의 복덕방 영감, 리어카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인 한강 다리 밑의 <지게꾼>(1963), 아내와 함께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가는 <굴비>(1963)의 시골 노인, 고된 일을 하며 아들을 성공시킨 <하루살이 인생>(1966)의 하역부, 두 명의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어부 일을 버리지 못한 <만선>(1967)의 곰치, 옛정을 찾아 시골장터를 찾는 <역마(驛馬)>(1967)의 체 장수 노인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비록 <로맨스 빠빠>(보험회사의 직원)나 <삼등과장>(운수회사 출장소장)의 경우처럼 그럴 듯하게 보인 도시의 샐러리맨도 불황으로 실직하거나 상관의 눈치나 보는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관상 한복과 양복의 차이가 있을 분 이런 배역들이 김승호표 서민영화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사진 6]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로 출연한 <로맨스 빠빠>의 김승호 [사진 7] 시대에 뒤떨어진 마부의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맏아들 역할의 신영균 그의 출연작 중에는 영화사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외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골 은행 간부의 인생유전기 <육체의 길>(1959)을 비롯한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박서방>, <로맨스 빠빠>, <마부>, <삼등과장>, <굴비>, <로맨스그레이>, <혈맥> 등 흑백영화와 노련한 형사 역을 맡아 사진작가(신성일)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나간 유일한 색채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은 바로 김승호 연기의 베스트10에 해당된다. [사진 8] <장군의 수염>에서 노련한 형사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김성옥 듬직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 특유의 발성과 연기력으로 서민적 애환을 만들어낸 연기파 김승호는 오손 웰스다운 중후함과 찰리 채플린적 풍자의 양면성을 보여 주었다 (김종원, 「서민적 체취와 정서 녹여낸 늦둥이 국민배우: 김승호의 생애와 연기」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김승호 회고전’ 책자) . 그의 영화 활동은 광복의 격동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60년대에 피크를 이루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서민의 삶과 정서로 녹여내려 했다. 당면한 현실을 이해타산으로 넘기려 하기 보다는 운명으로 수용하고 굽힌 자세로 헤쳐 나가려 했다. 때로는 <육체의 길>의 경우처럼 과장된 연기로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인생차압>의 이중생이나 <로맨스그레이>의 저명교수처럼 임기응변과 넉살로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김승호 연기에는 해학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1.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 157쪽)에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이, 또 다른 그의 저서 『평전 한국영화인 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265쪽) 김승호 편에는 <밤의 태양>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