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
- 감독
- 알란 A. 골드슈타인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브라이언 보스워드, 레아 핀센트, 데이빗 폭스, 다니엘 캐쉬, 에릭 피터슨, 스티번 마컬, 패트릭 갤리건, 자넷 랜드, 척 샤마타, 레아 아클러, 빌 코프랜드, 필립 자레트, 론 사로시악, 제프리 아코마, 에릭 머피, 알란 A. 골드슈타인, 카일 슈미드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뻥튀기 제조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한다. “과자 만드는” 자동기계는 계속해서 뻥튀기를 내뿜고, 인물들은 날아오는 뻥튀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지어 수북이 쌓인 뻥튀기 위에 누워 관계에 몰두한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이 기괴한 장면은 김기영 감독의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전반부에 나온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일명 ‘뻥튀기 섹스신’은 작품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했다.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며 영화사의 이런저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를테면 훗날 누벨바그로 통칭된 무리 중에서도 자크 리베트의 비평적 안목이 특히 탁월해서 다 함께 신작을 보고 나면 다들 리베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든가 하는 별거 아닌 일화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니면 클로드 샤브롤이었던가?)을 줍기 좋아했던 시절에, 어디선가 ‘뻥튀기 섹스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미친 영화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본 건 KMDb VOD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 이 작품은 4K로 복원되어 블루레이가 출시되었고, 지금은 국내 OTT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지면의 제목인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이 내 오랜 고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친 영화를 찾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화글을 쓰다 보니 원고 작성, 관객과의 대화 진행, 심사 참여, 영화제 프로그래머 재직 등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필요에 따라 예전 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일의 특성상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 단편영화를 보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공모를 열고 예심을 진행하는 영화제나 기획 프로그램 등의 선정의 변을 살펴보면 출품작이 매년 최다를 갱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하는데도 다양한 선정의 변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읽힐 때가 있다. 영화가 점점 더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모난 구석이 없고 만듦새도 안정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결과물을 지향한다. 비단 심사 과정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거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 극장 개봉의 문턱을 넘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균형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내외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물론 쉽게 간과해도 좋을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틈에서 때로는 작게 읊조리게 된다.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 근래 제작되는 영화들의 경향을 짚으며 비판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단편영화를 장편영화의 축소판처럼 생각한다든지, 개인의 내면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서사에 안전하게 겹쳐두며 미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든지, 상상된 소시민적 이미지에 기대며 다양한 갈등과 여러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든지. 단편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안타까움은 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는 왜 미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대신,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좋을 것 같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사실 미친 영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쳤다!”라는 감탄사는 소위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서도 쓸 수 있다. 변태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거나 철학적 질문을 깊이 탐구했거나 대사를 잘 썼을 때도 이 감탄사를 마구 남발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취향을 건드리는 모든 요소에 우리는 미쳤다며 나름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치다”라는 말은 보통의 것과 다른, 상식에서 벗어난, 일상을 뒤집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단어로, 동사이면서 상태를 설명하는데 주로 쓰인다. 그렇다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미 일반적인 수준에서 굳어진 영화의 관습을 탈피하는 (비)자발적인 선택에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될까? 글쎄, 아직 충분하지도, 재밌지도 않다. ‘미친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꽤 모순적이다. 구체적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 개인적인 욕망은 나름대로 그 용례를 정교화하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주요한 길을 제시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2022)나, 최근 타계한 국내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처럼 사회, 문화적 함의 속에서 ‘광기’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광기 역시 우리 시대의 굳어진 수식어나 레토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다 세밀한 탐색 없이 광기라는 단어만 쥐고 모험하는 건 이제 무척이나 (안전하기 때문에 더)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한편, ‘미친 영화’를 찾고 싶은 마음은 내게 지극히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한 감상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름의 해답은 미친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찾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때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비평적 시선 중 하나는 ‘정치적인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정치라는 것을 (정치인, 정당, 선거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이자 태도로 사고하면서, ‘영화’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싼 각종 갈등과 조건을 응시하는, 작품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고 말했다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일화와 더불어, 내게 이러한 말과 시선들은 ‘분명히 있지만 딱딱한 것은 아닌’ 어떤 기준, 항상 개별 작품들과의 밀접한 교통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중요했다. 정치적인 것이나 브레히트적인 것, 그리고 ‘미친 것’과 그 효과는 언제나 같은 형식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광인의 출현이나 해괴한 장면의 등장만으로 그것이 (내가 찾는) 미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일단은 이 질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던 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괴인처럼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 중에서도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영걸( 김정철 )은 웬 여자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계속해서 죽음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의 앞에, 의지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책장수가 나타나 해골이 되어서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한편, 2000년 전 신라 공명왕 시대에 동굴에 들어가 백골이 된 여성이 환생해 간을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여성이 ‘뻥튀기 섹스신’의 주인공이다.) 뼈를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이 박사( 남궁원 )의 조수가 된 영걸은 이 박사의 딸 경미( 김자옥 )와 기묘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이 박사에게 배달되는 의문의 해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된다.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이다. 신라 시대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여성은 갑자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목이 잘린 영걸이 책장수의 전언처럼 눈을 떠 “의지!”를 외치며,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나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중심에 죽음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분명 독특했지만 동시에 처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남자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가 결국에는 죽지 않았으니 “귀찮지만 더 살아줘야겠다”라고 읊조리는 영화라니. 사실 주인공의 죽음이란 한 편의 영화에 드리운 종결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가장 직설적인 사건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대개 영화 역시 끝나야 한다. 혹은 한 편의 영화는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어쩌면 영화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미루고 지연하다가 결국 끝을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을 조건으로 삼는 예술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그 지연의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꽉 짜인 서사를 통해서,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는 사건들의 도입을 통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저 뒤로 밀려난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그 모든 것이 영걸의 망상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 석연치 않은 순환 구조야말로 내게는 모종의 ‘미친 것’이 작동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고, 미치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어떤 무기력의 영화 만들기. 혹시 영화의 ‘미친 것’을 찾는다는 건 일종의 상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미친 영화’의 특정한 외양이나 형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앓고 있습니까? 아마도 비평이란 그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손시내(영화평론가) l 영화웹진 《 REVERSE 》에 글을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한다.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 Safety Last!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때로는 영화보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 그 장면의 스틸 사진이 더 유명한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순진무구한 젊은 청년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시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마 (스필버그가 제작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 빽 투 더 퓨쳐 >(1985)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방금 떠 올린 그 영화, 마이클 J. 폭스가 매달려 있는 그 장면은 오마주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도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3D 영화 < 휴고 >(2011)를 연출하면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성룡도 < 프로젝트 A >(1984)에서 시계에 매달렸다. 더 많은 예를 열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데미의 영화 이론서 표지에도 등장한다. 나도 스틸 사진을 먼저 보았다. 영화사에서 빌딩 시계에 처음 매달린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이다. 위대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름. ‘방랑자’ 채플린, ‘스톤 페이스(Stone face)’ 버스터 키튼과 함께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이끈 세 명 중의 한 명. 둥근 프레임의 뿔테 안경을 쓰고 (이 스타일의 안경은 이제 로이드 안경테라고도 불린다) 둥글고 납작한 보터 모자를 쓴 해롤드 로이드는 가난한 ‘모던 보이’. 그 소년이 시계에 매달린 영화는 Safety Last (1923)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금방 이해되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Safety Last”는 공사장에 붙어있는 “Safety First(안전 우선)”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 마무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수정하겠다. 역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채플린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들지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신의 도움을 받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빠져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벗어난다. 해롤드 로이드는 반대이다. 버스터 키튼이 스피드의 대가라면 해롤드 로이드는 위험한 상황에 온갖 장애물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실수를 연발하면서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그 실수의 시간을 최대로 연장한 영화가 <안전 마무리>이다. <안전 마무리> 중 / 사진: “ Safety Last! ”, IMDb 이번에는 LA가 무대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지참금을 구해야 하는 (영화 속의 이름도 마찬가지인) 해롤드는 백화점에 취직한다. 그런데 함께 지내는 빌에게는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같은 재능이 있다. 백화점 지배인은 손님을 건물에 끌어모으기 위해 1,000달러를 내걸고 빌은 12층 빌딩에 1층부터 등반하겠다고 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해롤드가 1층을 올라가게 된다. 일이 생긴 빌은 다음 층에 옷을 갈아입고 자기가 오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층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 바꿔치기는 그다음 층으로 미뤄지고 그러면서 가여운 해롤드는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게다가 그 자리에 여자친구도 도착한다. 층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이제 내려갈 수도 없는 해롤드는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클라이맥스는 빌딩에 달린 시계에 매달릴 때 벌어진다. <안전 마무리>는 해롤드가 12층 빌딩을 19분 50초 동안 등반하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는 영화이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이 등반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좀 이상한 비교이기는 하지만 이 씬은 < 전함 포템킨 >(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의 거의 두 배이다. 물론 마지막은 여자친구와 키스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이다. 사진: “Safety Last!( 1 , 2 )”, IMDb 해롤드 로이드가 이 장면의 영감을 받은 것은 192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다음 영화 회의를 위해서 영화사로 향하던 길에 LA 7번가 브록맨 빌딩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자기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건물을 타고 매달려 한 층씩 등산하듯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옥상까지 올라갔고, 마치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옥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환호에 응답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회의 시간을 놓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깐 본다고 생각했는데 등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롤드 로이드는 보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이 등반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일 이 건물 등반을 영화로 찍으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촬영이 초보 단계였던 1923년에 이 장면은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안전 마무리>가 첫 상영을 마쳤을 때 극장 안은 비명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해롤드 로이드가 ‘진짜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걸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특수촬영은 이미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퀀스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처음 1층에서 올라가는 장면은 해롤드 로이드가 건물을 타고 오른다. 그런 다음 3층 높이의 세트를 지었다. 이 장면이 세트 촬영이고 거리의 풍경을 이중노출로 합성했다는 것은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를 보지 말고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 장면을 그 위치에 찍었다면 정말 위험한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보다 촬영감독이었을 것이다. 시계에 매달린 장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세트를 건물 옥상에 지었다. 그래서 옥상에 세워진 세트에 달아놓은 시계에 해롤드 로이드가 매달렸다. 건물을 타고 오른 후, 시계에 매달리는 해롤드 로이드 / 사진: “Safety Last!( 1 , 2 , 3 , 4 )”, IMDb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에 관한 콘티이다. 게다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해롤드 로이드에게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튼 매달리고 올라가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1919년 촬영 도중 소품 사고로 해롤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은 세 손가락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 마무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촬영과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다시 볼 때마다 이 시퀀스가 위치와 각도, 편집 타이밍, 구도, 동작, 진행 사이로 끼어드는 장애물들의 리듬, 이 모든 것이 마치 정교한 마법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손가락 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매달려 있는 장면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해비 페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해비 페리는 1919년부터 해롤드 로이드의 위험한 장면 대역을 연기했다. 더 정확하게는 위험한 장면에서 해비 페리는 해롤드 로이드의 상대 쇼트(reverse shot)를 연기했으며.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혹은 위험한 순간에 멀리서 해롤드 로이드 대신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해롤드 로이드의 모험을 믿었다. 해비 페리는 자신이 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롤드 로이드가 세상을 떠나는 1971년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으로 경력이 60년에 달하는 해비 페리는 험프리 보가트, 피터 로레의 할리우드 영화들, 심지어 키가 1미터 52센티였기 때문에 매리 픽포드의 대역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리 픽포드가 달리는 말에 능숙하게 올라탈 수 있는지 비밀이 풀렸을 것이다. 물론 비밀이 풀릴 때도 있지만 할리우드는 스턴트맨들의 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해비 페리 (사진: “ Harvey Parry ”, IMDb / © 1980 Steve Banks_ mptvimages )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히어>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무엇인가? 여기서는 저 위대한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1950년대 조지 시피아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인) 정의를 일단 따르기로 하자.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의 예술이 아니라 그려진 움직임의 예술이다. 각 프레임 사이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는 각각의 프레임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들 사이의 속임수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예술이다.” 즉 우리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운동성을 (기록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기 위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작업이 요구되는 미적 결과물 일체를 맥라렌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기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짚는 이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니 오늘날이라서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화와 영화의 조합어가 특정 매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 걸까? 아무래도 ‘만화’는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이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으로써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 작용의 주 형식이 프레임과 숏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번역된 명칭만으로 너무 많은 걸 해석하려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테다. 하나 만화영화라는 명칭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닌데, 만화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카툰(Cartoon)은 미국에서 만화영화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전문 TV 방영사인 카툰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시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 그 태동기인 1910년대에 (< 리틀 네모 >의) 윈저 맥케이나 (< 고양이 펠릭스 >의) 오토 메스머 같은 위대한 만화가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셀-)애니메이션과 카툰은 창작에 있어서든 산업에 있어서든 깊이 뒤섞이고 혼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학자 찰스 솔로몬이 『마법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역사(Enchanted Drawings: The History of Animation)』에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그려진 카툰의 동의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자. 하지만 당연하게도, 21세기의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갈래를 ‘만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먼 맥라렌의 추상 애니메이션, 이리 트른카의 퍼핏 애니메이션, 그리고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카메론, 1991)와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이후 컴퓨터 그래픽스의 영화적 활용을 순전히 만화와의 상관만으로 논할 수 있을까? 혹은 스탠 브래키지, 존 휘트니, 바술카 부부 등의 작업들처럼 분명 애니메이션의 성립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나온 3D 애니메이션과 달리) 애니메이션사 서술에서 주로 누락되고 실험영화사나 영상미술사에만 등장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이렇듯 오늘날 광대해진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의 특권성이란 어딘가 불충분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학자 톰 거닝이 「순간을 애니메이션화하기: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은밀한 대칭성(Animating the Instant: The Secret Symmetry between Animation and Photography)」을 비롯한 여러 연구에서 말했듯, 실사 영화의 역사와 전통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단지 애니메이션이 좁은 의미에서 영화사의 일부인 것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을뿐더러 순전히 기술의 계보로만 따지면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앞서서 우리네 세계에 출몰했다. 더군다나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적 실사 영화는 실사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디지털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부분적/비가시적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학자 수잰 부캔은 이를 ‘편재하는 애니메이션(pervasive anim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디지털 이후 영화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일종이 되었다’라는, 미디어학자 션 커빗과 레프 마노비치의 따로 또 같은 주장은 그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화(사 서술)에 있어 렌즈 기반의 사진적 이미지가 지닌 특권성은 애니메이션을 주변화하거나 보조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은폐된 기원이자 기둥으로서 애니메이션. (상) 원작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2014) 중 / (하) 실사 영화 <히어> 중 (사진: " Here, 2014 ", Richard McGuire)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 히어 >(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그저 작품의 실패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저메키스에게는 ‘애니메이션다움’을 부상시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식으론 알고 있는 ‘편재하는 애니메이션’의 비가시적인 사실을 과도하리만큼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번잡하게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이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메키스는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인간적 지각(의 기준)과 닮기보다는 퍽 애니메이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밀어 붙여본 것이다. 이는 반만화적인 구상과 비영화적인 구성을 지탱하고 구축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술이란 사실과도 겹치며, 우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끌고 간다.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대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선. 그것의 감동은 애니메이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인 혼융이 양자의 전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근사하게 제시한다는 데에서 온다. 다시 한 번, 이 무모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함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이 이중구속 속에서 제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은 은총에 가깝다.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라임 앤 리즌 2호: 오컬트』(공저, 202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