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명숙, 그러나 당신은 승리자입니다!
- 제작년도
- 2010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 사회가 켠 가스등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당해왔다. ‘미친 여자’는 오로지 남성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미스터리였다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여성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자, 서로에게 가스등을 켜지 말자. - 애드리언 리치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다. 대개 그렇듯 아내‘만’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 중이다. 기지개를 켜며 남편이 다가와 묻는다. “내 여권 못 봤어? 12시 비행긴데, 큰일이네”. 이 경우, 아내의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 “(쿨하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격하게)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어젯밤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찾아놨지……)” 남편은 화를 냈다. “너는 찾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소리부터 지르냐.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억울한 아내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녀 불문,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간수해야 하고 더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여권 찾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가 아니라 “왜 이제야!”라고 안타까워한다. 결국, 모든 잘못 - 여권 안 챙김 + 그걸 아내에게 물음 - 은 남편이 했는데도, 아내는 ‘소리만 지르는’ 부부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명절을 앞두고 내 친구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말투에다 자기 분열적인 내용이다. 친구는 소위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번 연휴에 진급과 관련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댁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댁에 안 가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단다. 시집에서는 별말이 없다. 남편의 직업은 사회운동가이지만 수입은 없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자기 본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동시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미니까 시집과 남편 욕을 하다가, 사회를 비난하다가, 자책하다가 결국은 매번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로 문자를 마친다. 남성 생계 부양자라면, 명절에 ‘처가집’ 방문으로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위의 사례들은 성 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경미 감독의 < 비밀은 없다 >에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의 아내로 나오는 연홍(손예진 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정신을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미쓰 홍당무(Crush And Blush) >(2008년) 가 나왔을 때, 한국 영화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찬사가 쏟아졌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2015년)의 손예진 과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은 같은 캐릭터다. 미쓰 홍당무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극 중 손예진의 중학생 딸의 대사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다만, 연홍은 나름 든든한 남편을 둔 기혼여성으로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전업주부이고, ‘미쓰 홍당무’는 미혼에 새벽부터 영어학원에서 다니는, 세상사에 열심인 현직 교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 원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두 여성 모두 나이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주변을 돌보는 착한 여성들이다. 자기중심적이기도 한데,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정돈과 자기 단속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간혹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약간의 신경증과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 여성들의 신경증 정도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달라질지 모른다. 안면 홍조증인 여자가 신경질을 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코미디가 될 것이요, 중산층 가정의 미모의 불안한 여자가 남편을 의심하면 스릴러일 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미쓰 홍당무>는 ‘외모’를, <비밀은 없다>는 ‘모성’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비밀은 없다>가 작품성과 대중성에 비해 흥행이 안 된 이유 중에 제목을 꼽는 이들이 꽤 있었다. 제목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함을 넘어 진부했다. 아니, 틀렸다. 세상에는 비밀이 많다. 제목이 인상적이지 않아도 입소문이라도 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입이 ‘싼’ 사람에 의해 종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노! 그렇지 않다. ‘모르는 사실’과 ‘없는 사실’은 다르다. 모르는 사실은 없다. 모를 뿐이다.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 관계의 정점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팩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 액수가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비밀을 알아내고 사회를 습격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수극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홍 같은 캐릭터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매 순간 이 구호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믿었던 것과 알게 된 것 사이에서 약자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간극을 그린 고전으로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 부아예가 주연으로 나온 1944년 작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론과 접속해도 의미 만점의 텍스트다. 원작은 패트릭 해밀턴의 2인 대사의 희곡인데, 영화는 조지프 코튼과 안젤라 랜스버리를 등장시켜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인의 유산을 노리는 남편은 가스등을 조작하여 깜빡이게 하고, 아내는 자신이 본 가스등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가지만 결국 자기가 본 것을 믿는다. 가스등(Gaslight) 이 작품은 이후,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애드리언 리치를 필두로 수많은 메타포와 문학 작품, 논문을 낳았다.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장치, 인식 과정의 성별 정치학과 사회성,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등 수많은 쟁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빈 스턴은 이 영화를 소재로 쓴 책 「가스등 이펙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방황한다. 남자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한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는 조종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spot and survive the hidden manipulation)’이다. 그렇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4.3 사건, 호모포비아 억압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 餘波)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을 믿어야 한다. 특히 가시화되기 힘든 사건들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인식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안 믿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적 의미의 전통적인 방어기제, 부인(否認, denial)이다. 어떻게 선거에 출마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학교 교사랑 섹스를 하고, 교사는 그게 약점이 되어 자기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해된 현실. 믿어지겠는가. 더구나 이 모든 사건 자체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도 밖에 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계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엄마를 지켜주겠다는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자신이 본 것과 인식 사이의 분열, 자신의 인식을 타인에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분열, 말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마저도 추궁당하고 의심받을 때 ‘나는 제정신’이라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분열……. 이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말이 “정신을 차리자”이다. 이것은 방언이다. 사투리가 아니라 자기만이 알아듣는 주문(呪文)이다. 말로써 자신을 붙잡는 것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난민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사회가 이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의 일상은 공적 영역의 규범에서 제외된다. 페미니스트의 곤란 혹은 문제점도 이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고 도움을 ‘준’ 가정폭력, 성폭력, 성 산업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많이’ 썼다. 그런데 같은 여성주의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마치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자루에 손에 넣는 기분이다. ‘지나치게’ 진실에 집착하면 파문(破門)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이다. “안정되어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이란, ‘객관’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 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왜곡된다. 극 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럴 리가.”, “루머겠지.”, “미쳤구만.”……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두기봉 은 종종 폐소공포증자를 가장한 폐소광(閉所狂)처럼 보인다. < 익사일 >의 폐건물과 객잔, < 대사건 >의 낡은 아파트, 심지어 뮤지컬인 < 화려상반족-오피스 >의 거대한 초현실주의적 사무실에서도 인물들은 탈출을 위한 필사의 곡예를 벌인다. 닫힌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몸짓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 건 밖으로의 탈출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안에서의 곡예라는 운동이다. 탈출은 실패할 것이다. 인물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닫힌 공간을 윤무한다. 그들은 지금 마지막 춤을 추고 있다. < 삼인행 >의 공간은 병원이다. 사족처럼 보이는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카메라는 이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거대 스튜디오와도 같은 이 공간의 구조는 < 화려상반족-오피스 >의 사무실이 그러하듯 현실의 병원과 완전히 다르다. 수술실을 제외하곤 응급실, 진료실, 입원실, 접수처가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있다. 더구나 이곳은 메스의 1mm 오차에 생사가 갈리는 신경외과 병원이다. 수술 실패로 전신이 마비돼 죽기를 바라는 청년, 수술은 성공했지만 폭식증에 걸린 정신이상자 노인, 완치의 희망이 사라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혼수상태의 젊은 가장, 뇌수술을 앞둔 권위적인 중년 사내 등이 개폐를 반복하는 커튼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환자의 생명에 대한 염려와 자신의 경력에 대한 염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야심가 의사 통(조미)이 그들을 어두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누군가가 응급차에 실려 온다. 경찰의 총알이 뇌 속에 박혔으나 1mm의 오차로 몸도 정신도 멀쩡한, 그러나 곧 수술하지 않으면 총알의 독성이 뇌를 잠식해 죽음에 이를 살인자 청년이다. 멋진 외모와 천재적 두뇌와 악마적 미소를 함께 지닌 이 청년과 함께 총기 남용에 책임이 있는 굳은 표정의 형사(고천락)와 그 일행이 병원에 도착한다. 두 인물군의 도착이 이 차가운 신경증의 공간에 아수라와 같은 혼돈의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청년이 빨리 죽어야 경찰이 살 것이다. 수술을 거부하며 경찰들의 조바심을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비웃는 이 사악하고 비상한 청년은 또 다른 살육의 축제를 음모한다. 이제 그들의 동료 범죄자들이 방문해 이곳을 죽음의 공간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첫 10분 동안 이 모든 인물을 토해내는 걸 보고 나면, 서사의 기술로 이 난마의 인물들을 정돈한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두기봉 은 갖가지 삶의 단면들을 관찰하기 위해 이 공간에 여러 인물들을 소집한 게 아니다. 캐릭터 묘사 같은 건 여기에 없다. 이곳은 대의도 정념도 없는 오직 충동의 교전장이다. 먹으려는 자, 죽으려는 자, 살리려는 자, 살려는 자, 죽이려는 자들의 충동이 이곳을 수습 불가능한 혼돈으로 몰고 간다. 이 교전의 한 가운데, 미치광이 살인자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는 형사와 자신을 쏜 형사를 죽이려는 악마적 범죄자와의 시각적 교전이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여기서 끝없이 자리를 바꾼다. 형사가 범죄자가 보고 있다고 믿어졌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시각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끝없는 쟁투를 위해 이 기괴한 폐쇄공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두기봉 의 공간이다. 한 공간에 기둥들과 커튼들을 사이에 두고 네 사내가 대치했던 < 익사일 >의 폐건물 장면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한 몸을 겨우 숨길 수 있는 기둥, 공기의 흐름에 일렁이며 드러냄과 감춤을 무심히 반복하는 커튼이 생사를 가르는 신경증적 공간. 먼저 보는 자가 살 것이며, 먼저 보이는 자가 죽을 것이다. < 화려상반족-오피스 >의 공간에선 기둥은 가느다란 철심으로 교체되고 커튼은 사라졌다. 모두가 모두에게 보이는 이 공간에선 모두가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경쾌한 뮤지컬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 죽음의 기운이 떠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두기봉의 영화는 본다는 것의 가학성, 혹은 시선이라는 것의 살의(殺意)에 관한 영화다. 질식할듯한 긴 침묵의 시각적 교전 뒤에 마침내 죽음의 윤무가 펼쳐진다. 말 그대로 집단 무용과도 같은 10분간의 유혈 총격전. 시각적 교전의 최종승리자는 누구인가. 잘 숨어 먼저 본 자가 아니라, 모든 시선에 자신을 노출한 자이다. 객잔의 중앙 홀에 뛰어든 < 익사일 >의 네 사내, 그리고 원형의 거대 병실의 한가운데 진입한 < 삼인행 >의 미친 범죄자들이 그들이다. 시각적 교전을 멈추고 모든 시선이라는 집중포화에 자신의 몸을 맡긴 자들이야말로 이 마지막 춤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다. 이 세계에서 시선의 살의, 시선의 감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최종적 선택은 살의의 시선이 둘러싼 무대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두기봉 은 영웅을 의로운 사내에서 악마적 범죄자로 바꿔놓고도 여전히 이 죽음의 선택을 찬미하고 있다. <삼인행>은 사악하고도 아름다운 걸작이다.
지난여름 4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 군도: 민란의 시대 >( 윤종빈 ), < 명량 >( 김한민 ), < 해무 >( 심성보 ),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 이석훈 )가 그것이다. <명량>이 17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종 승자가 되었지만, 나머지 세 작품 역시 관객은 물론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2014년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다. <영화천국>이 이번 호에서 주목한 영화는 심성보 감독의 <해무>다. 2014년 산세바스찬 영화제에서 본의 아니게 4박 5일간 동거(?)한 뒤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심성보 감독과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이 말하는 <해무>를 만나보자. 연극 <해무>와 영화 < 해무 > 달시 파켓(이하 ‘달시’) 영화 < 해무 >는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먼저 연극을 영화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와 원작과 어떤 차별성을 갖고 시작했는지 묻고 싶다. 심성보 (이하 ‘심’) 처음 연극 <해무>의 영화화를 제안받았을 때 이미 연극은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연극을 직접 보진 못했고, 캠코더로 찍은 기록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보고 나니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더라.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범죄에 휘말리게 되고, 그 이야기가 형사나 피해자의 시선이 아닌 그들 자신의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더불어 메인 플롯을 사랑으로 끌고 나가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 해무 >를 만들기로 결심했는데, 연극을 영화화할 경우 등장인물 간에 갈등 관계가 조금 모호하게 보일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대로 옮길 경우 관객들이 원하는 내러티브의 2/3 지점에서 끝날 것 같다랄까. 나머지 1/3을 채우기 위해선 선원들의 갈등이 좀 더 분명해야했다. 그래서 원작에서 무척 강했던 선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조금 저하시키고, 개개인의 성격을 부각했다. (‘달시’ 반대로 원작 연극에서 꼭 살리고 싶었던 부분은 어떤 곳이었나?) 연극의 특성상 막이 전환될 때 암전되고 사운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막과 막 사이의 여백이 무척 영화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그 사이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었고 그 장면을 상상으로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들은 우연치 않게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컨대 밀항자가 넘어오는 장면도 연극에선 암전된 채 발소리와 비명 소리로 처리되었고, 마지막에 배가 침몰하는 장면도 연극에서는 “가자, 가자”라는 대사만 반복되고 실제로 침몰 자체를 보여주진 않았다. 그런 연극에서의 암전을 영화에 차용했다. 달시 이 영화가 데뷔작이지만, 이전에도 사랑에 대한 시나리오를 꽤 많이 써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감독의 취향으로 봤을 때 < 해무 >는 결이 다른 영화가 아닐까 한다. 물론 동식( 박유천 )과 홍매( 한예리 )의 러브 라인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범죄, 그로 인한 갈등 등 여러 가지 포인트가 있는 영화다. 심 동의한다. 물론 그 동안 작업했던 시나리오들은 분명 < 해무 >와 다르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에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아마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각본에 참여한 이력 때문에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범죄에 관해 잘 다룰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그리고 남녀에 관한 시나리오를 계속 써왔다는 것도 봉준호 감독이 잘 알고 있어서 동식과 홍매의 러브 라인도 잘 표현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남녀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마 많은 여자를 만나보질 못해서 그런 것 같다.(일동 웃음)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우디 앨런 감독의 전성기 작품을 보고부터다. 전성기 그의 작품 대부분이 남녀 이야기지 않나.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달시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어떤 주문을 했나. 심 봉준호 감독은 당시 < 설국열차 >(2013) 제작 때문에 체코에 있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단, 기획 단계에서 봉준호 감독은 < 해무 >의 큰 원칙을 조언해줬는데, ‘동식과 홍매의 사랑을 끝까지 순수한 감정으로 가져갔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실제로 캐릭터를 구축할 때 그 원칙을 새기고 시나리오를 썼다. 항구, 그리고 어선이라는 공간적 배경 달시 영화는 IMF외환위기 직후를 다루고, 여수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시간과 공간 설정에서 특별히 염두에 둔 점이 있나. 심 원작은 시간을 2000년대 초반으로 설정했다. 영화는 그보다 조금 빠른 1990년대 후반 IMF 시절로 바꿨는데, 조사 과정에서 IMF외환위기 당시 어선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은행 이자가 높았기 때문에 선주들은 어선을 처분하고 보상금을 받은 뒤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어선 운영으로 버는 수입보다 은행 이자수익이 더 좋았다더라. 그래서 당시 많은 선주가 배를 처분했다. 하지만 선주가 배를 폐선시키면 선장과 선원들은 순식간에 실직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 해무 >와 연결했다. 선장이 왜 밀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선장이 왜 그토록 배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배경이 된 공간은 여수의 조그만 항구인데 항구의 규모가 너무 크면 관객의 시선이 분산될 것 같아서 크지 않은 항구를 조사하던 중 여수 항구가 적절하다고 판단해 선택했다. 달시 < 해무 >의 이야기는 대부분 어선에서 전개된다. 더불어서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는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한정된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제한적 인물. 이 두 가지는 분명 이야기를 진행하고 표현하는 데 쉽지 않은 장치다. 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선 전진호라는 배 안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소화해야 하지만 사실 이 배는 세상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그 안의 제한적 인물들 역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군상의 축소판이다. 따라서 배우들에게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해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선장은 ‘배’, 동식은 ‘사랑’, 창욱은 ‘여자’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정리했는데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매우 잘 소화해줬다. < 해무 >를 이끄는 또 하나의 힘, 주조연 배우들 달시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해무 >는 소재가 독특하고, 구성이 탄탄해서 개봉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은 바있다. 여기에 더불어 영화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바로 배우들이었다. 김윤석 을 비롯해 문성근 , 이희준 , 김상호 등 이른바 연기파 배우들이 포진해 있고, 영화 출연은 처음이지만 드라마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유천 과 독립영화로 연기력을 탄탄히 다져온 한예리 가 나온다. 누구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웃음) 먼저 선장, 김윤석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염두에 둔 배우인가. 심 그렇다. 선장 철주 역은 김윤석 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화를 안 봤다면 < 해무 >의 김윤석이 이전에 맡았던 캐릭터와 유사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개봉 당시 관객들로부터 김윤석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인물들과 다르다는 반응을 많이 받았다. 물론 특정 장면에서 이 배우의 이전 작품들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김윤석을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기관실에서 기관장 완호( 문성근 )와 대립하는 신’을 쓸 때였다. 여기서 완호를 죽이고 선장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그 장면을 쓰는 순간 김윤석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달시 그 기관실 장면이 극 중에서 가장 에너지가 폭발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오랜 기간 서로 의지하며 살던 선장과 기관장의 갈등이 최고조가 되는 신인데,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그 장면에 서 관객의 몰입도가 가장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김윤석 과 문성근 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한다. 심 김윤석 과 문성근 의 연기 대결이기도 하다.(웃음)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가 있었다. 사실 문성근이 맡은 완호가 애초 생각했던 캐릭터와 가장 달라진 인물이다. 완호라는 인물을 구축할 때 문성근 선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애초의 시나리오에서 완호는 늙고 불쌍한, 그냥 짐만 되는 인물이었다. 문성근 선배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극 중 성격이 급격히 변하는 캐릭터의 중심을 잘 잡아준 점이다. < 해무 >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의 성격이 모두 변한다. 그중에 가장 확실히, 그리고 빨리 변하는 인물이 바로 완호다. 자칫하면 급작스레 이상 행동을 보이는 완호가 관객에게 이질감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완호가 어느 순간 정신줄을 놓아야 배의 상황이 보다 리얼하게 보일 것 같았다.(일동 웃음) 그리고 그 정상과 비정상을 넘나드는 선을 문성근 선배가 잘 잡아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신을 김윤석 과 문성근의 힘이라고 표현했는데, 동의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신은 큰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을 지켜보는 동식과 홍매가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에 대해 걱정했다. 달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웃음) < 해무 >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것이 동식과 홍매의 사랑이다. 박유천 과 한예리 에 대해 말해달라. 심 동식의 경우, 연극보다는 어리고 뱃일도 갓 시작한 막내 선원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20대 중.후반 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박유천 을 만났을 때 동식 역할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열의가 무척 많아 인상 깊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팬이나 이전 작품을 고려하지 않고 캐스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박유천은 가수 출신 연기자 중에서도 꽤 독특한 이미지다. 얼굴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다만 영화는 처음이고, 첫 주연작이라는 점, 그리고 경험 많은 배우들과 끊임없이 부딪쳐가며 연기해야 하는 것이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그 바쁜 박유천이 영화를 위해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둘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 성실함 때문에 신인상도 많이 탄 게 아닐까 한다. 뿌듯하다. 한예리 의 경우 이미 유사한 역할을 몇 번 했기 때문에(웃음) 나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배우였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예리의 중저음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한예리는 갑자기 스타가 된 게 아니고 독립영화부터 차근차근 밟아왔기에 여배우로서 다소 힘들 수 있는 수중촬영도 잘 견뎌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선과 악이 모호한 세상의 축소판, 전진호 달시 < 해무 >는 악인이 없는 영화다. 모든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는데, <해무>의 갈등은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는 점이 눈여겨 볼 만하다. 심지어 선주도 악인이라기보다 현실에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심 실제로 영화 개봉 후 관객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다.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건실하고 평범한 가족이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세입자를 들인다. 그런데 방세가 올라 전세 보증금을 크게 올리거나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공감은 되지만 세입자 입장에서 집주인은 잔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나. < 해무 >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어떤 관점에선 잔인하고 어떤 관점에선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달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연극에는 없던 동식이 등장하는 엔딩이 있다는 것이다. 심 그렇다. 광기에 휩싸인 선원들만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했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동식과 홍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닌지는 재단할 수 없고, 관객이 판단할 몫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업영화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집착한 동식이 살아남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엔딩이 판타지로만 치부될 것 같아 적당히 현실감을 섞었다. 달시 하와이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현지의 반응은 어땠나. 심 신인 감독이라 그런지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거나 예상하진 못했다. 하지만 외국 관객 역시 이야기를 따라가고 한국 관객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놀라웠다.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밀항은 큰 사회적 이슈라고 한다. 그 사회에선 밀항 사건이 1년마다 한번씩 크게 일어나고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보면 < 해무 >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원들의 선택에 대해서 한국관객보다 더 깊이 공감하더라. 달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심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변하라고 있는 것이다. 두 달 전 인터뷰했을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또 계획이 변했다.(일동 웃음) 현재는 일본 소설에 관심을 갖고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계획은 늘 변하지만 < 해무 >를 만들고 한 가지 확실한 계획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 ‘범죄’ ‘사랑’. 이것이 내 영화의 키워드가 된 것이다. 큰 틀에서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