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
- 감독
- 시드니 루멧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로드 스타이거, 제랄딘 피츠제럴드
“물속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여요” 사랑에 관한 가장 시적인 찬가 < 라탈랑트 >(장 비고, 1934)에서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조롱하며 비웃는다.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라탈랑트>의 바로 이 장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수를 하는 남편에게 물속에서 눈을 떠보라고 말하는 아내, 그런 아내를 놀리는 남편의 장면이 이어질 때 화면 안으로 또 다른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라탈랑트>를 연출하던 29살의 청년 장 비고였다. 장 비고의 유일한 딸이었던 루스 비고는 < 라탈랑트 >의 현장 촬영분을 바라보며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애잔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장면들에 대해 그녀는 애절한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장 비고 감독 프랑스의 여성 감독 레일라 페로 레비의 다큐멘터리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우리에게 시적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장 비고와 그의 딸 루스 비고에 관한 영화이다. 1905년에 태어난 장 비고는 1934년, 고작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기존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매혹과 실험으로 다양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그 시기, 장 비고는 보리스 카우프만이라는 예술적 동지(지가 베르토프의 동생. 장 비고 영화 전체를 촬영했으며,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오토 프레밍거 등과 작업했다. 시드니 루멧의 < 12명의 성난 사람들 >, 엘리아 카잔의 < 워터 프론트 >의 촬영 감독이다)를 만나 영화를 시작했다. 그의 영화들에는 국가와 체제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저항, 세상을 시적인 서정과 추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예술가의 영감, 그리고 이십 대 청년의 맹목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매혹이 담겨 있었다. 니스라는 휴양도시에 관한 계급적이고 실험주의적 몽타주라 할 수 있는 < 니스에 관하여 >, 물에 대한 장 비고 특유의 매혹을 잘 드러내는 <수영왕 타리스>, 린제이 앤더슨과 고다르, 트뤼포의 오마주를 이끌어냈던 학생 반란에 관한 영화 < 품행 제로 >,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계급적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에 관한 찬가 < 라탈랑트 >까지. 장 비고의 영화적 필모그라피는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했다. '루스, 아빠, 엄마'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바로 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장 비고를 아버지로 둔 루스 비고의 기억과 고백에 관한 영화이며 내밀한 가족사에 대한 진술이다. 루스 비고는 아버지를 세 살 때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약했던 엄마 역시 사망한다(장 비고와 그의 아내는 결핵에 시달렸고, 이들은 각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던 요양원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어 외조부의 손에 맡겨지지만 그 역시 금방 사망한다. 루스 비고는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 등을 떠돌며 성장해야 했다. 부모를 잃을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으며,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거의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루스 비고는 아버지가 남긴 영화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이후 영화평론가로 성장했으며, 여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였다. ‘장 비고 상’ 수상위원회의 책임자이기도 한 그녀는 아버지로서의 장 비고와 영화사의 거장으로서의 장 비고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주요 장면들과 루스 비고가 살고 있는 집 내부의 여러 사적인 공간과 흔적들을 정교하게 연결하고 교차 편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루스의 집안은 흡사 수집가의 거대한 자료실처럼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인으로 80여 년을 살면서 쌓아온 삶의 흔적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장 비고에 관한 자료와 유품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루스 비고는 쌓아두었던 물건 중 가장 중요하게 간직했던 박스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레일라 페로 레비의 카메라와 그녀의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그 박스를 공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장 비고의 친필 시나리오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들, 여러 서한들, 비고의 영화에 실제로 쓰였던 영화적 소품들, 그리고 장 비고의 아버지였던 알머레이다에 관한 기록들. 알머레이다 비고는 프랑스의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유명한 아나키스트였으나 삼십 대 초반에 검거되어 바로 다음 날, 수감된 감옥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어린 장 비고에게 정치적, 경제적 트라우마로 남았고, 훗날 청년 장 비고의 영화적 세계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장 비고의 삶은 고스란히 루스 비고에게도 이어졌다. 이 영화 속에서 루스 비고의 아들은 처음으로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어머니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내밀한 상처들을 직접 듣게 된다. 루스 비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프로그래머로 수십 년을 일 하면서도, 그녀는 장 비고에 대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루스가 어떠한 성장기를 거쳤는지, 그녀에게 장 비고에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남겨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박스를 공개한 후, 루스는 아들과 함께 장 비고의 영화들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영화감독 장 비고의 유산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루스 비고가 아버지의 흔적들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과정에 가까우며,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절한 순간이기도 하다. 루스는 장 비고의 영화 장면들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들을 발견해낸다. <라탈랑트>의 카페 신에 손님으로 앉아있는 어머니의 얼굴, 혹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사실, 또 단역으로 등장하는 피에로가 다름 아닌 장 비고임을 그녀는 알아채고 아들에게 알려준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 혹은 다른 캐릭터들에 의해 얼굴이 거의 가려진 존재가 어머니임을 그녀는 알아본다. 아들이 루스에게 “어떻게 알았나요? 누군가 말해 줬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응답한다. “내가 딸이니까 알 수 있지”. 그리고 이어지는 루스 비고의 탄식,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그녀는 장 비고의 영화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 품행제로 > 이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공적인 역사가 되어버린 영화사의 거장 장 비고와 그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딸 루스 비고의 사적인 애정과 기억에 관한 기록이다. 절묘하게 편집된 장 비고의 영화 속 장면들과 루스 비고의 현재의 모습들.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루스와 그녀의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긴 역사와 상처, 그리고 남겨진 유산들에 대해 이 작품은 매우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 묘사하고, 오마주를 바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어지는 <품행제로>의 기숙사 반란신. 여전히 유효한 장 비고의 시대정신과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매혹과 열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ps.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후(2017년 2월), 루스 비고가 사망한다. 루스의 집안을 정리하던 아들은 비단 루스가 그에게 공개한 상자만이 아니라 집안 곳곳에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 자료들은 현재 시네마테크 혹은 다른 영화자료실 등으로 어떻게 기증할 것인지를 논의되고 있다.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